리라이프 플레이어 (927)
〈심연의 던전〉 공략이 성공하고 공략자들이 서울로 귀환한 날·
사람들은 그들의 귀환을 맞이하고 직접 공략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도봉역으로 몰려들었다·
그들 중에는 세계 최초로 달성한 업적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모여든 국내 언론사 외신 기자들도 있었다·
“아! 저기 온다! 온다 온다!”
“국민 여러분! 저기 보이십니까!? 우리의 자랑스러운 영웅들이 지금 도봉역으로 오고 있습니다! 선두에 서 있는 사람은 판도라 클랜 로드 노은하 플레이어군요!”
“공략자들이 귀환하고 있습니다! 공략대로부터 받은 정보에 따르면 사망자는 0명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흑색던전을 공략하는 국가가 나와도 사망자 0명이란 기록을 세운 국가는 우리나라밖에 없을 겁니다!”
공략자들을 발견한 사람들은 모두 격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으며 손을 흔들며 귀환을 환영했다·
언론 매체는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현장을 담으려고 했다·
그런 한편 그들 대다수의 관심사는 〈심연의 던전〉 공략에 크게 공헌한 판도라 클랜에 가 있었다·
“판도라 클랜에서도 마중을 나온 모양이군요· 〈신창〉에 〈티타니아〉 〈시간의 마녀〉 등등···· 내로라하는 플레이어들이 저기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정정하겠습니다! 〈시간의 마녀〉는 판도라 클랜이 아닌 마나관리기구 소속이라는 것을 알려 드립니다·”
“그런데 노은아 플레이어도 공략에 참가하지 않았었군요·”
“〈신창〉과 〈티타니아〉의 경우에는 제4기 십이좌이기도 하니 혹시 모를 경우에 대비해 전력으로 남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랬던가요? 〈신창〉은 확실하게 들은 기억이 있는데 〈티타니아〉도 그랬던 모양이군요·”
은하가 흑색던전에서 소원을 빌어 노은아가 존재를 되찾게 됨으로써 그동안 그녀가 사라져 있던 공백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메워졌다·
군데군데 의문점이 남기는 했으나 사람들은 세계 의지의 작용에 의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게다가 그들은 판도라 클랜원들이 상봉하는 것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판도라 클랜원들이 만났습니다! 정말 감동적인 만남이로군요·”
〈심연의 던전〉 공략의 주인공들·
사람들은 그들을 중심으로 하고서 이야기를 풀어 나갈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주목했는데····
“어서 와! 다들 정말 보고 싶었어! 어디 다친 데는····”
“보고 싶었어·”
“···창진아?”
해프닝이 일어나고 말았다·
공략대 속에 있던 한창진이 불쑥 인파를 헤치고 노은아에게 뛰어가 그녀를 덥석 끌어안은 것이다·
“보고 싶었어· 정말 보고 싶었어· 은아 네가 없는 삶은 이제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얘가···· 사람들 다 있는데 이렇게 질질 짜면 어떡하자는 거니?”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두 번 다시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한창진은 노은아가 당황할 정도로 과도하게 부둥켜안았다·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하지 못한 사람들은 경악을 금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와 결혼해 줘·”
“····”
“너 없이는 이제 못 살 것 같아· 앞으로는 계속 내 곁에 있어 줘·”“···!”
한창진이 프러포즈를 한 것이다·
사람들은 또다시 충격에 빠졌다·
넋이 나간 사람들도 있었다·
“아 안 돼····”
“노 노은아 플레이어가····”
〈티타니아〉 노은아·
그녀는 현세대를 대표하고 있는 플레이어 중 손꼽히는 미녀였으며 뭇 남성들에게 구애를 받고 있었다·
하백련이 국민 딸내미로 통한다면 그녀는 국민 누나로 통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프러포즈를 받으니·
“그럼 나한테 앞으로 잘해·”
“····”
“자 네가 직접 끼워 줘·”
더욱이 그 프러포즈를 받아들이니·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한국 한정으로 흑색던전 공략보다 두 사람의 프러포즈 소식이 더 크게 보도될 정도였다·
결국·
[포토] 남의 여자가 된 〈티타니아〉
[헤드라인] 노은아 미소 짓다
:
노은아와 한창진의 열애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지고 말았다·
두 사람의 결혼이 무를 수도 없이 기정사실이 되고 만 것이다·
[인터뷰] 노은하의 충격적인 고백 “흑색던전에서 빈 소원은 말할 수 없어요· 다만 저는 소중한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었어요·”
[사설] 사망자가 0명인 이유는?
[사설] 소원으로 사심을 품지 않은 노은하는 성인군자다· 노은하야말로 이 나라의 진정한 군주다·
:
안타깝게도·
은하와 관련된 이슈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외신 보도는 정반대였다·
은하의 소식은 전 세계로 퍼지면서 그 나라에서 신화의 싹을 틔웠다·
한편 은아의 결혼 발표는 이후로도 수많은 사람들을 통곡하게 했다·
은아의 팬클럽 카페에서는 슬픔이 끊이지 않았다·
―안 돼 은아 누나 ㅠㅠ···
―은아 평생 솔로 해!
―한창진 새퀴 이놈이 기어코···
―은아는 안 돼 안 된다 창진아! 우리 모쏠 은아 돌려줘 ㅠㅠㅠㅠ
└ 솔직히 저 얼굴로 모쏠이란 게 말이 되냐? 이건 기만이지·
└ 닥쳐라! 은아 모쏠 맞거든 –;
└ 회장님 쟤 팬 아닌 것 같은데 얼른 강퇴시켜 주세요
└ 근데 이젠 모쏠도 아니야 ㅠㅠ
―은아 님! 결혼 축하드려요!
―흑··· 은아 학생이었을 때 보러 캐유플이나 재탕해야지 ㅠㅠ
―풋풋하게 은하은하하게 할 때의 은아가 그립다
―그런데 님들 솔직히 노은아도 이제 나이가 있지 않나요? 노은아가 지금 나이가 몇인데···
└ 33이 많은 거냐? 플레이어는 나이가 중요하지 않단 거 몰라?
└ 저 얼굴이 어떻게 30대냐 쯧
└ 회장님 쟤도 강퇴시켜 주세요· 은아 누나 나이 언급 금지입니다·
―다들 왜 이렇게 슬퍼하는 거지? 한창진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사실 한창진이 더 아깝지 않나?
노은아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은하도 팬클럽 회원이었다·
그는 울컥한 나머지 반응을 살피다 댓글을 달았다·
└ 회장님 저놈도 강퇴요
그러나 그렇게 댓글을 단다 한들 노은아가 결혼한다는 사실은 결코 바뀌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한창진을 죽일까····”
은하는 한창진이 정말 싫었다·
이전 삶에서도 이번 삶에서도·
―은아 결혼하면 이제 이 카페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은아 대신에 은애 카페로 바꿀까요?
└ 은애 일반인이다· 건들지 마라·
* * *
〈심연의 던전〉 공략에서 한창진은 노은아를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해서 제 안위도 무릅쓰지 않았다·
그때 은하는 그녀를 몹시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사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는 예전부터 알고 있기는 했다·
그럼에도 그냥 마음에 들지 않고 어쩐지 성에 차지 않고 무엇보다 빼앗기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내 누나야 내 가족이라고·’
회귀 전의 은하는 잃기만 했다·
그렇기에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집착이 무척이나 강했다·
특히 어린 시절에 어찌하지도 못할 재앙에 휘말려 가족을 잃은 그에게 그로 인해 마음의 문을 닫은 그에게 가족과 자신의 마음에 발을 들여 준 사람에 대한 집착은 광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그런 그가 회귀라는 기적을 통해 가족을 되찾게 됐으니 그들에 대한 집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누나 노은아나 회귀 전에는 태어나지 못한 여동생 노은애에게 집착하던 이유는 그러한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었다·
‘다시는 못 잃어 절대·’
물론 은하도 자신의 그런 집착이 얼마나 비뚤어져 있는 건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잃는 것에 대한 공포가 옅어져서 많이 유해졌다·
노은아가 한창진에게 마음을 줘도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누나란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한창진이 그녀에게 프러포즈할 때 올 때가 오고 말았음을 직감하고서 인정하고 만 것이다·
‘한창진이라면 뭐···· 그나마 낫지·’
분위기에 휩쓸린 탓도 있었다·
노은아가 존재를 되찾았다는 것이 너무 기쁘기도 했고 프러포즈 받는 그녀의 얼굴이 행복하게 보였으며 국민들이 축하해 주었던 탓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기쁜 마음도 차츰 진정되고 생각해 보니·
‘그래도 아직 은아 누나 나이에는 결혼하기에 이른 거 아닌가?’
은하는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그는 뚱한 얼굴을 한 채로 말없이 청첩장을 노려보기만 했다·
그사이 한서현과 노은아는 정답게 대화를 나누었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갈지 정했어?”
“제주도로 가려고! 창진이랑 지금 4박 5일로 가기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 정도면 다 둘러볼 수 있겠지?”
“5일이면 나쁘지 않기는 한데···· 이왕 여행 가는 거 조금 더 길게 다녀오는 건 어때? 언니 일이라면 나나 하양이가 할 수 있으니까·”
“다들 일이 많은 걸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더군다나 나하고 창진이는 제4기 십이좌라서 장기간 자리를 비우면 안 되거든·”
“어쩌다 보니 둘이 십이좌가 돼서 그렇긴 하겠다· 그건 그렇고 이걸로 최초의 십이좌 부부가 되겠네·”
“음 혜림이 언니 부부가 있으니까 최초는 아니지 않을까?”
“〈염마〉 님은 십이좌를 은퇴한 후에 결혼한 거니 현역 십이좌 중에서는 언니가 최초인 셈이지· 흠···· 아니면 이렇게 하는 건 어때?”
“뭐가?”
“선녀님한테 이야기해서 이참에 제주도로 며칠 동안 파견을 나가서 활동하는 거지· 그러면서 겸사겸사 신혼여행을 다녀오는 거고·”
“응? 아 그거 괜찮네· 선녀님한테 한번 건의해 볼까····”
“선녀님께서 납득할 만한 명분은 내가 만들어 올릴게· 그러니 언니는 여행 일정이나 다시 짜 두도록 해·”
“서현아··· 정말 고마워·”
“라라라~·”
“시누이한테 점수 따서 좋네· 근데 너는 왜 아까부터 말이 없니?”
“그러게· 은하야?”
“라라라?”
한서현이 은하를 톡 건드린다·
노은아는 그를 올려다보며 불렀다·
그제야 청첩장에서 눈을 뗀 그는 못마땅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누나 나이에는 이르지 않아?”
“응?”
“창진이 형과 결혼하는 건 좋은데 조금 더 차분히 시간을 들여 만나서 창진이 형을 파악하고 그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
“결혼은 신중하게 결정해야만 해· 내 생각에 누나는 아직 젊으니까 결혼보다는 연애 쪽으로····”
“나 올해로 33인데?”
“29에 아내를 네 명이나 두고 아이를 세 명이나 둔 네가 말하기에는 양심에 찔린다고 생각하지 않니? 그리고 그런 식으로 말하면 은근히 우리랑 결혼한 걸 후회하는 듯한데 후회라도 하는 거니?”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노은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고 한서현이 시험하듯 비꼰다·
은하는 횡설수설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아무리 말을 덧붙인다 한들 논리는 빈약하고 근거는 부당하여 설득력이 부족했다·
결국 그는 본심을 꺼내야 했다·
“결혼 안 하면 안 돼?”
“····”
어디 가지 말라는 듯·
은하는 은아의 허리를 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떼를 쓰는 아이 같은 태도였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이내 그녀가 피식 웃어 보였다·
“그래? 그럼 누나 결혼하지 말고 죽을 때까지 너랑 같이 살까?”
“····”
“창진이 그냥 뻥 차 버릴까?”
“····”
마치 달래는 듯한 어조로·
그러면서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은하의 눈을 올려다보는 노은아·
그녀가 그의 뺨을 만지고 부드러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길에 가만히 몸을 맡겼다·
그러고는 내뱉었다·
“너무하네 비겁하게·”
어렸을 적의 자신이라면 모른다·
가진 것을 내놓고 싶지 않아 하던 자신의 울타리에 가두고 싶어 했던 자신이라면 필시 은아의 말에 곧장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자신의 행복을 그녀에게 강요하며 그녀의 행복은 신경 쓰지 않고·
하지만 이제 그는 자신과 타인의 행복은 별개란 것을 깨닫고 있었다·
진심으로 그녀의 행복을 바란다면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 줘야 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그래? 나는 은하 네가 창진이랑 결혼하지 말라 하면 안 할 건데?”
“거짓말·”
“아니야· 진짜인데? 정말이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리 없다·
노은아는 은하의 결정을 알았기에 그의 의견대로 따르겠다는 얼굴로 말한 것이다·
정말 그가 결혼하지 말라고 하면 그 말에 따를 것처럼·
그래서 비겁하다· 짓궂다·
‘진짜···· 우리 누나는 못 당하겠네·’
게다가 애교까지 떤다·
결국 은하는 그녀를 이기지 못하고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앞으로 누나 잘 살고 있나 창진이 형이 누나 괴롭히지는 않나 눈 부릅뜨고 지켜볼 거야·”
“그래! 창진이가 나 못살게 굴면 남동생인 네가 혼내 줘야 해·”
“···결혼 축하해 누나·”
“응 고마워·”
“라라라♪”
라라가 작은 손으로 은하의 머리를 위로하듯 토닥거린다·
은하는 은아를 꼭 끌어안았다·
* * *
“그러면 나는 다른 사람들한테도 전해 줘야 해서 가 볼게!”
“라라라~·”
노은아와 라라가 손을 흔들고서는 방 밖으로 나갔다·
온전히 은하의 두 무릎에 앉게 된 한서현은 그의 품속에 등을 기댔다·
“정말이지···· 누나는 왜 창진 형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섭섭하니? 은아 언니한테 너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게·”
“섭섭하더라도 누나를 위해서라도 축하해 줘야지 어쩌겠어· 그리고···· 누나의 우선순위가 바뀌게 됐듯이 내 우선순위도 바뀌었는걸·”
“네 우선순위가 어떻게 되는데?”
“너랑 하양이 유정이 연화 그리고 유성이 유란이 유린이·”
은하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고개를 젖히고 그의 눈을 마주한 한서현의 얼굴에서는 만족스럽다는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간만에 예쁜 소리 하는구나· 그럼 이제 은아 언니 바보는 졸업하고 아내들 바보나 하렴 애처가·”
“그럼 그럴까?”
두 사람은 서로 이마를 맞댄 채로 키득키득 웃음을 흘렸다·
이내 그녀로부터 고개를 든 은하는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제주도 여행이라···· 우리 여행 안 간 지 제법 됐지?”
“일이 워낙에 바빴으니 여행 갈 시간을 내지 못하기는 했지· 애들이 어리기까지 했으니까·”
은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최근에는 가족들끼리 여행을 다닐 여유가 되지 않았다·
한서현의 경우 유성이를 낳고서 먼 거리를 나간 적이 없었다·
정하양 이유정도 상황은 비슷했다·
류연화도 신혼여행을 다녀온 이후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연화랑 결혼한 후로 가족끼리 다 같이 여행을 떠난 적이 없었구나·’
그동안 서로 여유가 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다들 자신을 위해 묵묵히 감내해 준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은하는 내심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보답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서현아·”
“왜 그러니?”
“우리도 오랜만에 여행이나 갈까? 이제는 좀 여유롭기도 하니 기간도 여유롭게 잡고 다녀오자· 이번에는 애들도 데리고· 가족끼리 다 같이 다녀온 적은 없었잖아·”
“안 그래도 바람 좀 쐬고 싶었는데 여행 가자니까 좋네· 어디로?”
“제주도 어때?”
“제주도 나쁘지 않지· 여행 일정은 언제로 잡으면 좋을지 나중에 모여 상의를····”
“여행 일정 말인데·”
“가고 싶은 날짜라도 있니?”
“누나가 신혼여행 떠나는 일정에 맞추는 건 어떨까?”
“····”
마침 잘됐다·
한창진이 은아에게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도 확인해 볼 기회다·
은하는 입가를 끌어 올렸고 반면에 한서현은 한숨을 쉬었다·
“눈치 없이 언니 방해하지나 말렴· 신혼여행은 여자의 인생에 있어····”
“알아 방해할 생각 같은 건 없어· 우리는 우리끼리 즐겁게 다녀야지· 그러다 어쩌다 간혹 시간이 맞으면 같이 만나서 노는 거고·”
* * *
시간을 되돌려 19년 전·
선력 5년 노은아 14세·
중등아카데미에 입학한 노은아는 〈여제〉 신서영의 〈더 시드〉란 이유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야 했다·
눈에 띄는 외모와 명랑한 성격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던 그녀였지만 자신의 미래 가치를 판단하는 듯한 주목은 굉장히 낯설었다·
그렇기에····
“연화야! 다음 시간에 수업 있어? 없으면 나랑 카페 가자!”
“그래 가자·”
은아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류연화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입학시험을 치렀을 때부터 친해진 두 사람은 아카데미에 입학한 후로 곧잘 붙어 다녔다·
그날도 그랬다·
은아는 류연화의 팔에 팔짱을 끼고 근처에 있는 카페로 걷고 있었다·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끄아아아악!”
“응? 이게 무슨 소리지?”
“저쪽에서 들린 것 같아·”
별안간 누군가 고통에 차 내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못 들은 척할 수 없던 은아는 류연화와 함께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향했다·
건물 뒤편에 있는 숲속·
두 사람은 그곳에서 바닥에 쓰러진 학생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끄윽····”
“····”
그들 중심에 한 남학생이 있었다·
두 사람과 같은 학년임을 나타내는 넥타이를 목에 맨 남학생은 입가에 두건을 걸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콧잔등 위로 드러난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는 듯한 눈과 먹물처럼 새까만 머리칼로 얼굴을 파악해야 했다·
하지만 은아와 류연화는 그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한창진 이게 뭐 하는 짓이지?”
“····”
눈앞에 있는 남학생 한창진 또한 그들처럼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십이좌 〈어둠의 왕〉 백서진의 〈더 시드〉·
그동안 이렇다 할 만한 접점 없이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만 있었던 세 사람이 만나게 된 것이다·
다만 상황은 뜻하지 않았다·
정황상 한창진은 선배로 보임 직한 학생들을 때려눕히고 있던 듯했다·
류연화는 그에게 경계심을 세우며 은아를 보호하듯 앞으로 나섰다·
“시비라면 저놈들이 먼저 붙였다· 먼저 싸움을 건 것도 저놈들이고·”
“그렇다고 해도 정도가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니?”
상관하지 말라는 듯·
한창진이 차갑게 대꾸했다·
류연화는 물러서지 않고 받아쳤다·
바닥에 쓰러진 학생들의 몸 상태는 그녀의 말대로 좋지 않았다·
모두 기본적으로 팔다리가 하나씩 부러져 있었다·
어떤 학생은 팔이 뒤로 꺾였거나 발목이 돌아가 있기도 했다·
그녀의 눈에는 충분히 과한 처사라 보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누군가를 해치려 했으면 반대로 당할 각오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그렇게 해 줬을 뿐이야·”
“하지만 그게 상대를 고문하듯이 고통스럽게 만들어도 된다는 것은 아닐 텐데· 이미 무력화된 상대를 그 이상으로 괴롭히는 것은 정도를 지나치는 짓이야·”
“〈신창〉 님의 가르침인가 보지?”
“····”
“〈신창〉 님께서 말씀하실 법하네·”
“스승님을 모욕하는 거냐·”
“모욕하려는 의도는 없어· 하지만 내 스승님께선 상대를 대함에 있어 다른 방식으로 가르쳤을 뿐이지·”
“····”
“쓰러뜨려야 하는 적에게는 일말의 자비도 보여서는 아니 되고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잊을 수 없는 공포를 심어 주라고· 난 가르침 대로 따랐을 뿐이야·”
류연화와 한창진·
두 사람은 일정 거리를 남겨 둔 채 서로 눈싸움을 벌였다·
금방이라도 무기를 쥐고 충돌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괜찮아요? 아무래도 돌아간 뼈를 다시 맞춰야 할 것 같은데 좀 많이 아플 거예요· 그래도 참으세요!”
“으윽···!”
“····”
은아는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널브러진 학생들에게 응급 처치를 취하고 있었다·
류연화 한창진의 시선은 자연스레 그녀에게 향하고 긴장감이 흐르던 분위기는 소강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기세를 거두어들였다·
이내 그는 자리를 떠나려 했다·
바로 그때·
“기다려·”
“····”
은아가 돌연 그를 불렀다·
걸음을 멈춘 한창진은 뒤를 돌아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눈을 피하지 않고 말을 꺼냈다·
“너도 다친 것 같은데 이리로 와· 그 정도 상처면 내가 배운 마법으로 치료해 줄 수 있으니까·”
“····”
지금 뭐라고 한 거지?
한창진은 제 귀를 의심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말을 들은 그는 눈살을 찌푸리고 그녀의 말에 담긴 의도를 읽어 내려고 했다·
“〈여제〉 님께서 말씀하셨나 보지? 그렇게 해서 사람의 경계심을····”
“응? 서영 언니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마법을 쓰라고 알려 주기만 했는데?”
“····”
한창진은 거짓말을 간파하는 것에 소질이 있었다·
그는 그녀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었다·
그녀는 단지 아무런 의도도 없이 순수하게 호의를 베풀려는 것이다·
세상에 대가 없는 호의라니·
어둠 속에서 자란 그에게 그녀는 처음 접하는 인간상이었다·
그로서는 당혹스럽기만 했다·
“이리 와 어서·”
“···필요 없어·”
“아····”
어쩐지 불편하고 껄끄럽다·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낀 한창진은 이 감정이 자신을 좀먹기 전에 냉큼 자리를 벗어나기로 했다·
그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은아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아쉬워했다·
그때 류연화가 말을 걸었다·
“은아야·”
“응? 연화야 왜?”
“걔한테 상관하려 하지 마·”
“····”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은데···· 많이 위험한 애인 것 같아·”
류연화는 지금껏 한 번도 누군가를 평가하듯 말하려 하지 않았다·
은아는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그녀가 걱정하며 말하는 이유가 이해되기는 했다·
은아가 보았을 때도 그에게서는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 될 것만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위험한 사람인 것 같다·
어찌 보면 그녀의 평가는 적절했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은아로 하여금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어딘가 은하랑 닮았네····”
자신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듯 마음의 문을 닫고 사람을 피하려는 분위기가 자신의 남동생 노은하를 닮은 것 같았다·
지금이야 그런 면모가 덜해졌지만 어릴 적의 은하는 그러했다·
그렇기에·
“신경 쓰이네·”
어쩐지 내버려 둘 수 없다·
어릴 적의 은하를 보는 것 같아서·
그리하여 이 만남 이후로·
노은아의 한창진 갱생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창진아! 우리랑 점심 같이 먹자!”
“내가 왜 너희랑····”
“은아가 먹자니까 먹어·”
은아는 한창진과 친해지기 위해서 얼굴에 철판을 깔고 접근했다·
처음에는 그녀를 피해 다니던 그는 차츰 그녀를 익숙하게 여기게 됐다·
덩달아 견원지간처럼 으르렁거리던 류연화와 한창진도 친해졌다·
“창진아! 내가 싸우지 말랬지!?”
“···또 너냐·”
“너는 정말 불량하구나·”
한편 한창진에게는 적이 많았다·
선배들에게 그의 태도가 건방지고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며 시비가 걸리고는 했다·
그때마다 은아는 귀신같이 나타나 한창진을 말렸다·
“창진아! 우리 문화제 구경 가자! 밤에는 불꽃놀이도 볼 거야! 참고로 불참은 안 돼! 강제 참석이야!”
“···그래 알았어·”
“응? 지금 뭐라고 했어?”
“네가 웬일이니·”
결국 한창진은 은아의 노력 끝에 감화되고 말았다·
아니 노예가 되고 만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노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