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라이프 플레이어 (923)
After Story 1· 컴백
선력 40년·
인류는 마침내 모든 흑색던전을 공략했다·
세상에는 평화가 찾아오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또 하나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오빠밖에 해낼 사람이 없어·”
선력 44년·
멸망은 여전히 가까이 있었다·
* * *
서울시 중구 판도라 클랜회관·
마인 아바돈의 습격으로 반파됐던 클랜회관은 재건축되어 22년 동안 몇 번의 증축을 반복하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지금에 이르러 중구의 클랜회관은 중구 서울 나아가 한국의 심장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곳 지하에 위치한 은하신교에서·
“인류가 당면한 재앙을 해결하려면 과거로 돌아가서 미래를 바꿔야 해· 우리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니까·”
여인은 확신에 찬 듯 말했다·
길게 늘어뜨린 보라색 머리카락과 머리 위에 돋아 있는 두 개의 뿔 아인인 것을 알 수 있는 붉은색 눈 마지막으로 악마 꼬리가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그러니 과거의 도움을 받아야 해·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노은하와 이리야 사이에서 태어난 올해로 20세가 된 노유은·
〈신교의 성모〉가 된 어머니에게 〈신교의 성녀〉란 이명을 물려받은 그녀는 노은하와 하백련 다음으로 국가의 상징적인 인물이자 자체로 은하신교의 총본산으로 통했다·
한편 그녀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대 또한 유명인에 속했다·
“나 보고 아버지처럼 회귀를 해서 미래를 바꾸란 소리야?”
노은하 일가의 장남 노유성·
노은하와 한서현 사이에서 태어나 올해로 24세가 된 그는 일각에서 노은하의 모든 것을 계승할 존재로 점쳐지고 있었다·
또한 전 세계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시리우스그룹의 회장인 한서연에게 사랑받고 있는 조카이기도 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기는 해· 하지만 오빠도 잘 알겠지만 회귀는 많은 대가를 필요로 하는 현상이야· 그 대가가 회귀한 세상에서 어떻게 작용할지도 알 수 없는 일이고· 못할 것은 없겠지만 리스크가 커·”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대가를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현재의 오빠를 한시적으로 과거로 보내는 거야·”
“나를 이대로 보내겠다고? 그럼 과거의 나와 만나게 될 텐데····”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그 대가는 이쪽에서 어떻게든 감당할 테니까· 오빠가 과거의 오빠를 만나더라도 아무 문제도 없을 거야·”
“무리하는 거 아니지?”
“오빠를 과거로 보내겠다는 것부터 이미 무리하고 있는 거지 어쩌겠어· 나나 아버지나 어머니들이나 모두 이것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그런데 가서 과거를 바꿀 거라면 아버지나 어머니들 다른 사람들이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노유성이 물었다·
이에 노유은이 붉은 눈을 치떴다·
“오빠는 생각이 있어 없어?”
“너한테 그런 소리 듣기 싫은데····”
“다른 사람들이 과거로 돌아가면 미래는 누가 지키라고?”
“그래도 한 명 정도는 가능····”
“가능이야 하지· 대가가 크겠지만·”
“그런 거야?”
“보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없어· 문제는 과거의 자신에게 인식되는 대가에 차이가 있는 거지· 만약에 과거의 아버지가 미래의 아버지를 인식한다면···· 우리가 감당해야 할 대가가 어마어마할 거야· 그러니까 과거에는 꼬꼬마에 불과한 오빠를 보내는 게 부담이 덜하지·”
“그런 건가····”
“그리고 〈별헤는 마녀〉 님이랑 〈시간의 마녀〉 님이 오빠나 나처럼 아버지의 자식은 세계의 인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고 하기도 했고·”
“그럼 너도 가도 되는 거잖아·”
“나는 여기 남아서 상황을 봐야지·”
“그래 알겠어· 내가 가도록 할게· 그런데 언제로 돌아가는 거야?”
“과거로 돌아가 미래를 바꾸기에 가장 최적의 시간대는 선력 24년이 아닐까 싶어·”
“선력 24년이면 분명····”
“아버지가 세계 최초로 흑색던전을 공략한 해야·”
“···내가 네 살 때인가·”
“그때를 기점으로 전 세계적으로 흑색던전 공략 열풍이 불어 버렸고 세상의 마나가 혼재하게 됐으니까· 그때 재앙의 단초를 바로 잡았다면 상황이 이 지경까지 안 됐을 거야·”
“그래서 최적의 시간대란 거구나· 틀린 말은 아니네· 문제는 어떻게 그때로 돌아갈 건데? 내 생각에는 정확히 그때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좌표가 필요할 것 같은데····”
“좌표라면 여기 있어·”
노유은은 가슴 속에서 꺼낸 책을 노유성에게 척 내밀었다·
노유성의 눈은 짜게 식었다·
한서현을 연상케 하는 표정이었다·
“아버지가 알려 준 웜 홀 마법으로 아공간에 물건을 넣는 것은 좋은데 꼭 그런 곳에다가 사용해야겠어?”
“오빠가 몰라서 그러는데 가슴만큼 많은 물건을 넣을 수 있으면서도 내가 몸의 일부처럼 인식할 수 있는 좌표가 없어· 실제로 몸의 일부고· 보안성도 뛰어나잖아?”
“포켓에 넣으면 되잖아 포켓에·”
“포켓은 내부를 들여다보는 순간 공간을 인식하게 되잖아· 거기에서 무의식이 아공간의 크기를 제한해 버리고 마는데?”
“그럼 가슴은 아니야? 공간이라면 거기가 더 좁을 텐데?”
“오빠가 그걸 어떻게 확신해? 정말 확신할 수 있어? 가슴 사이에 있는 공간을 가늠할 수 있어?”
“····”
“보기 전까진 알 수 없는 법이야· 모르기에 공간의 크기를 무한하게 규정할 수 있는 거고· 하긴 오빠는 가슴이 납작해서 모르겠네·”
“리야 어머니는 그러지 않는데 왜 너는 이상한 발상만 떠올리는 거···· 아니지 리야 어머니도 이랬지·”
“우리 엄마 욕하지 마라 첫째야·”
“너희 엄마는 내 엄마기도 하거든? 리야 어머니 부끄럽게 하지 마라· 그리고 오빠라 불러라 다섯째야·”
“아버지는 작은고모한테 잘하는데 왜 오빠는 그러는지 모르겠어·”
“네가 작은고모만큼 잘했어야지·”
“난 충분히 잘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유주보다는 낫잖아?”
“걔는 진짜···· 그래서 이게 뭔데?”
노유성이 책을 홱 낚아챘다·
표지가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는 양장본으로 이루어진 책이었다·
최상단 중앙에는 과거 은하신교의 상징이었던 진홍의 날개가 새겨져 있었다·
“은하신교의 성서?”
“그 성서의 기반이 되는 책이야· 어머니가 교리의 체계를 재정립하러 〈심연의 던전〉을 공략한 이후에····”
“그러니까 리야 어머니의 망상이 잔뜩 들어간 소설 같은 거란 거네·”
“우리 엄마 욕하지 마라 첫째야·”
“오빠라 불러라 다섯째야·”
“나는 오빠가 정말 싫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이거든· 그래서 이게 좌표라고?”
“응 그게 좌표가 될 거야·”
노유성은 책의 표지를 넘겼다·
서문에는 이리야의 유려한 필체와 그에 비해서 어린아이 같은 그림이 담겨 있었다·
세상은 혼돈과도 같았다· 우리는 그 혼돈 속에서 질서를 가져올 구세주를 간절히 바랐다·
그때 진홍의 신이 강림하면서 혼돈을 평정하고 질서가 되었다· 그날이 곧 첫째 날 월요일이다·
둘째 날 진홍의 신은 군림의 천사를 반려로 맞이했다· 이로써 화요일이 생겨났다·
셋째 날 진홍의 신은 지식의 천사를 반려로 맞이했다· 이로써 수요일이 생겨났다·
넷째 날 진홍의 신은 화애의 천사를 반려로 맞이했다· 이로써 목요일이 생겨났다·
다섯째 날 진홍의 신은 수호의 천사를 반려로 맞이했다· 이로써 금요일이 생겨났다·
여섯째 날 진홍의 신은 이리야 성녀와 사랑에 빠졌다· 이로써 세상에 사랑이 생겨나고 즐거운 토요일이 생겨났다· ♥♥♥
일곱째 날 진홍의 신은 편히 휴식을 취했다· 이로써 일요일이 생겨났다·
이리하여 세상은 평화를····
“도중에 취소 선은 뭐야?”
“일요일에···· 아버지는 쉬지 않고 백련 어머니에게 씨를 뿌렸으니까· 그리고···· 어머니는 아예 성서에서 월화수목금토일을 없애 버렸지·”
“잘한 선택이었네····”
“하하····”
“하하하····”
유성과 유은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냥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웃어야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애절한 감정을 공유했다·
이내 노유은이 얼굴을 고쳤다·
“어쨌든 이 책을 매개로 설정하면 이론적으로 오빠를 선력 24년으로 보낼 수 있을 거야·”
“겨우 책 하나로 좌표 설정이 정말 가능하기는 한 거야?”
“당연하지· 이 책도 따지고 보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신화를 구성하는 일부라고 할 수 있으니까· 단순한 책이 아니야·”
“이론적으로 보낼 수 있다는 것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는 뜻이네·”
“그러니까 장남인 오빠가 가설을 검증해 보도록 해·”
“····”
“너무 걱정하지 마· 높은 확률로 성공할 테니까·”
노유은이 가슴을 활짝 편다·
노유성은 여전히 떨떠름한 얼굴을 지우지 못했다·
그러나 노유은이 말한 대로 현재 인류가 맞닥뜨린 재앙을 해결하려면 과거로 돌아가서 미래를 바꾸는 게 최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노은하의 피를 이른 자식들 중에서 누가 그 일을 해낼 것이냐고 하면 맏이인 자신밖에 없었다·
“알았어 내가 할게·”
“오빠라면 그럴 줄 알았어!”
“믿는다· 꼭 성공해야 해·”
“나만 믿어· 내가 누구인데·”
“신도들에게 떠받들어지다 보니까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듯이 잘난 체하고 그런 주제에 툭하면 실수나 저지르는 여동생·”
“그래? 그럼 실수나 저질러 볼까? 시간의 틈새에서 영원히 갇혀 볼래?”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 * *
노유성을 과거로 보낸다·
노유은의 발안에서 시작된 계획은 판도라 클랜의 간부들뿐만 아니라 여러 조력자들의 도움을 받는 걸로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그중에는 마나관리기구도 있었다·
“천체의 운동을 계산해 보았을 때 마나가 우리의 의지에 가장 강하게 공명할 기회는 오늘 밤밖에 없어요· 이번 기회를 놓치게 되면 다음에는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알 수 없으니 절대 실패해서는 안 돼요·”
마나관리기구 관리국 모니터실·
하백련이 2대 선녀로 즉위하면서 마나관리기구의 장관으로 취임한 〈별헤는 마녀〉 송윤서가 말했다·
〈심연의 던전〉 공략 이후로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녀에게서는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미모는 한결 완숙해졌고 분위기에서 고아함이 묻어났다·
그것은 그녀에게만 해당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막 서울의 모든 행정구에서 답신이 도착했어요· 마법을 보조할 매개체 설치 완료· 지시만 떨어지면 언제든 가동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양아 각 행정구의 마나 상태는 너한테 부탁해도 될까?”
우수한 능력을 인정받은 것으로 한국 마나관리기구가 설립된 이래로 최연소로 마나관리기구 부장관이란 자리에 오르게 된 윤이별·
〈관리국의 마녀〉로 불리고 있는 그녀는 송윤서의 장관 자리를 이을 후보로 유력시되고 있었다·
그녀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과거와 달리 머리를 길게 기르고 다시 렌즈를 낀 그녀의 얼굴에서는 자신감이 넘치는 듯했다·
“응 나한테 맡겨 줘· 그러려고 내가 여기에 온 거니까·”
한편 정하양은 옆에서 윤이별을 보조하고 있었다·
분홍색 리본으로 묶은 머리카락을 한쪽 어깨에 얹은 그녀의 눈동자는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작은 정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지금에 이르러 그녀는 어마어마한 정보 처리 능력을 자랑했다·
[볼 때마다 정말 아쉽군· 그만한 실력이라면 라이브러리를 원활하게 운용할 수 있을 텐데 일개 클랜의 서브 로드를 맡고 있기나 하고····]
“스승님 일개 클랜이라 하기에는 저희가 좀 크지 않나요?”
[···하기야 너희가 워낙에 커야지· 노 서방이 선녀랑 결혼하고 클랜을 거의 국가기관에 준하는 위치까지 승격시켜 버렸으니 원·]
그때 수십 개의 모니터 중 하나에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외견의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3기 십이좌 필두에서 물러나고 언젠가를 기점으로 노은하에 의해 국제마나관리기구의 이사가 돼 버린 〈인덱스〉 윤성진이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을 일하게 하는 노은하를 욕했다·
그의 노고를 알고 있는 정하양은 쓴웃음을 짓기만 했다·
“그래서 스승님 아직까지 특별한 이상은 없는 거죠?”
[현재로서는 그렇다· 우리 눈으로 모든 재앙을 관측하고 있진 않지만 요주의로 여기고 있는 놈들은 아직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더군·]
“휴우 일단은 다행이네요· 일단은·”
[그래 일단은 다행이다만···· 필시 마법이 발동하게 되면 그 재앙들도 알아차리게 될 거다· 그러니 대책은 잘 세워 놨겠지?]
“그쪽은 다른 애들의 일이지만···· 괜찮을 거예요 다들·”
[그러기를 바라마· 놈들의 동태는 〈전뇌(電腦)〉에게 전달하마·]
“네 부탁드릴게요·”
하백련 정부가 들어선 이후로도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아직까지도 플레이어 라이브러리의 관리자로서 활동하고 있는 모라율·
과거 〈빅 데이터〉로 불린 그녀는 이제는 라이브러리의 대명사로서 〈전뇌〉라고 불리고 있었다·
정하양은 윤성진과 연락을 끊고 윤성진이 라이브러리로 전송했다는 정보를 열람하기로 했다·
하지만 일이 워낙 많았던 나머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녀는 자신과 함께 이곳으로 온 클랜원들에게 지시했다·
“유정아 태희야· 〈인덱스〉 님이 라이브러리에 보냈다는 정보를 대신 파악해 줄 수 있을까?”
“응 이쪽은 우리한테 맡겨 줘·”
“네 언니· 지금 보고 있어요·”
자신도 은하에게 도움이 되겠다며 육아를 병행하며 아카데미를 졸업해 네비게이터가 된 이유정·
머리를 묶어 올린 그녀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온태희도 그녀를 거들었다·
“미예는 이별이 보조를 부탁해·”
“네 그럴게요· 이별 언니 제가 뭘 도우면 될까요?”
“아 그럼····”
선미예는 윤이별을 보조하기 위해 그녀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 관리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텔레파시가 전달되었다·
[진서나입니다· 하백련 선녀님의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전국 아인 생활 복지 협회 대표는 〈힐링 노츠〉 김메리에게 내어 주고 판도라 클랜의 대변인을 맡고 있는 〈미호〉 진서나·
그녀가 보낸 낭랑한 텔레파시에 사람들은 작전을 개시하기로 했다·
정하양이 입을 열었다·
“메리야· 서나가 지금 보낸 내용을 각지로 보내 줘·”
“네 맡겨 주세요·”
옅은 회색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김메리가 점잖게 응답했다·
그녀가 각지로 텔레파시를 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답신이 도착했다·
판도라 클랜에서 온 답신도 있었다·
[아리엘이 클랜회관에서 보냅니다! 링린 쌍둥이의 답신이야! 메시지는 잘 받았어요! 이쪽도 준비 오케이! 언니 그런데 유성이가 과거로 가서 우리한테 손···· 아 이건 커트할게! 은하은하랑 서현 언니가 노려본다! 우리 아들이 난봉꾼은 아니지 암! 이상 아리엘이었습니다!]
한때는 연예계를 주름잡기까지 한 〈머메이드〉 아리엘의 텔레파시였다·
판도라 클랜과 인연이 있는 이들은 나이를 먹고도 변하지 않은 것 같은 그녀나 쌍둥이 자매들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