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 붕정만리(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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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곡을 떠난 지 열흘째 되는 날 우리는 천문(川門)을 지나 당양(當陽)을 향해 가고 있었다·
늦은 오후가 되자 이종산은 이동을 멈추고 숙영을 선언했다·
나는 십칠각의 객원표사들과 함께 사냥을 나갔다·
[하나 둘 셋!]
퓨슝!
퓨슝!
내가 전음으로 보낸 신호에 맞춰 두 대의 화살이 허공을 날았다·
잠깐의 사이를 두고 귀청을 찢는 비명이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꿰애애액!
꿰애애액!
꿰애애액!
넷가에 물을 마시러 온 멧돼지 세 마리가 죽겠다고 비명을 지르며 자빠졌다·
나와 남궁소소가 동시에 활을 쏜 것이다·
두 발을 쏘았는데도 불구하고 세 마리가 쓰러진 것은 내가 쏜 화살이 나란히 물을 마시던 두 마리의 목을 한꺼번에 꿰뚫었기 때문이다·
‘심장을 노렸는데····’
대기하고 있던 서호삼견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버둥거리는 멧돼지들의 숨통을 단도로 끊어 놓았다·
그리고 행여나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세라 배를 갈라 쓸개부터 떼어냈다·
이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쓸개를 생으로 먹으려 했다·
뒤늦게 밧줄을 들고 어슬렁거리며 다가간 호리독사가 쓸개는 술에 타 먹어야 효과가 좋다는 소리를 시전했다·
서호삼견은 잠시 망설이더니 쓸개를 나뭇잎에 정성스럽게 싸서 따로 챙겼다·
저것들 중 하나는 호리독사의 입에 들어갈 거라고 나는 장담할 수 있었다·
남궁소소가 내게 말했다·
”언제나 사람을 놀라게 하는군요·“
”운이 좋았소·“
”패왕궁(顯王弓)을 운으로 당겼다고요?“
지금 내가 손에 쥐고 있는 활은 양조창과의 대결에서 이긴 후 남궁유룡이 포상으로 준 패왕궁이었다·
최소 육십 년의 내공이 있어야만 당긴다는 초강궁을 아무렇지도 않게 당기니 하는 말이었다·
“반밖에 못 당겼소·”
“그래도 두마리나 꿰뚫었죠·”
“믿지 않겠지만 심장을 노렸소·”
“믿어요·”
“그렇게 쉽게?”
“궁간을 잡는 법이나 살을 걸고 당기는 동작이 엉성하기 짝이 없는데 어떻게 안 믿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고작 오 장 앞에서 송아지 만한 멧돼지의 심장도 못 맞추는 건 너무 심한 것 아닌가요?”
“오 장은 더 되는 것 같은데·”
“궁술은 어디서 익혔어요?”
노련한 쟁자수들은 겨울이 되면 표행을 갈 적에 표마차에 활 한 자루씩을 꼭 싣고 다닌다·
눈밭에서 행동이 굼뜬 토끼들을 만나면 냅다 쏘아서 잡으려고·
솜씨가 좋은 쟁자수들은 제법 잘 잡는데 나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잘 잡는 쟁자수라고 해도 무림인들의 궁술에 비할 바는 물론 아니었고·
“혼자 대충 쏴본 것이오·”
“하긴 그걸 궁술이랍시고 누구한테 배웠다는 것도 이상하겠네요·”
“소저는 솔직해서 분명 원한도 많이 샀을 것이오·”
“그러지 말고 내가 좀 가르쳐 줄까요?”
“이제 사부 노릇까지 하시려고?”
“새벽에 반 시진씩만 일찍 일어나세요·”
“왜 하필 새벽이오?”
“밤에 만나면 소문나요·”
그 사이 서호삼견과 호리독사가 밧줄에 묶은 멧돼지를 질질 끌고 돌아왔다·
순간 남궁소소가 재빨리 다시 화살을 재어 숲속을 겨누었다·
그 속도가 가히 전광석화와도 같았다·
한데 숲속에서 나타난 건 또 다른 멧돼지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망태기에 도라지와 더덕을 잔뜩 담고 손에는 작은 괭이를 든 것이 누가 보아도 늙은 약초꾼이었다·
하지만 약초꾼이 숨어 있다가 들킨 것도 아니고 이렇게 제 발로 사냥 중인 무림인들 앞에 나타난다고?
“돼지를 가지고 먼저들 숙영지로 돌아가십시오·”
서호삼견과 남궁소소는 알만하다는 듯 앞서 떠났다·
“무림이 온통 천룡표국과 도화곡 이야기뿐입니다· 홍안현을 시작으로 어디쯤 가고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들까지 각각의 정보망을 통해 빠르게 퍼지고 있습니다·”
약초꾼 노인의 보고였다·
홍안현 이후 세 번째로 만나는 하오문도였다·
앞서 찾아온 하오문도는 사천성 성도가 발칵 뒤집혔으며 사천구룡방이 전쟁에 대비해 세를 결집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리고 사천구룡방의 현재 전력과 그동안 벌였던 패악질들을 소상히 적은 소책자를 한 권 주고 돌아갔다·
“눈에 띄는 무림인들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각각의 문파에서 파견한 척후병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호기심에서 따라다니는 자들입니다· 워낙 안갯속에 가려져 있던 문파인데다 전부 여제자들이다 보니 구경도 하고 무공도 견식하고 싶은 것이지요·”
“싸움이 일어나기만을 바라고 있겠군요·”
“직접 도전을 해볼 수도 있지요·”
“무언가 알고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만·”
“몰려든 무림인들 중에 이름만 대면 알만한 고수들이 적지 않습니다· 지금은 천룡표국과 표왕이라는 이름 때문에 다들 몸을 사리지만 곧 송곳처럼 튀어나오는 자들이 있을 겁니다·”
“이미 각오했던 바입니다·”
“무공비급을 노리는 자들도 있고요·”
“무공비급이라고요?”
“아시다시피 도화비검과 천금풍은 구대문파의 대표적인 무공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절학들입니다· 탐내는 자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요·”
본래 대별산 도화곡에는 각종 기관진식이 설치되어 있었는데다 비급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지금은 열 대의 표마차 중 하나에 실려 있었다·
그것도 계속 따라다니며 살피다 보면 식량을 실은 마차들과 금방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문파의 비급을 그리 허술하게 옮길 리가 있나·
이종산은 분명 여종매와 의논한 후 모종의 조치를 취했다·
이건 나도 짐작만 할 뿐 정확히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또 있습니까?”
“도화곡의 제자들 셋 중 하나는 엄청난 미녀라는 소문이 돌면서 화화공자 색마 음적으로 불리는 자들이 종종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셋 중 하나까지는 아니어도 구대제자 다섯 명 중 하나 정도는 엄청 예뻤고 열 명 중 하나 정도는 눈이 부시게 예뻤다·
하오문도가 물어다 준 소식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온갖 잡것들이 다 꼬이고 있다·’였다·
그리고 그 잡것들의 접근을 억제하고 있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천룡표국과 표왕이라는 이름이었고·
한데 이 모든 것들은 출발을 하기 직전 이종산이 수뇌부 회의 때 이미 예견한 것이었다·
심지어 음적들이 나타날 거라는 것까지 정확히 내다 본 이종산의 귀신같은 안목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나는 은전 한 냥을 꺼내 노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성도를 계속 주시해 달라고 하십시오· 구룡이 어떻게 세를 불리는지 다른 흑도 문파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겠습니다·”
하오문도와의 대화를 끝낸 나는 숙영지인 협곡으로 돌아갔다·
곡구에 도착하자마자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사십여 개의 모닥불에서 각각의 조가 먹을 고깃덩어리를 꼬챙이에 꿰어 지글지글 굽는 탓이었다·
한데 고기를 굽는 실력이 천차만별이었다·
표사들과 쟁자수들 그리고 남궁세옥이 있는 비검대는 그야말로 능숙했다·
반면 도화곡의 제자들은 하나같이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솥에 삶거나 볶아내는 식으로만 요리를 하다가 이렇게 바깥에서 직화로 구워 먹으려니 낯선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도 유독 쩔쩔매는 사람들이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직화에 굽지도 않았다·
화공 안여여가 포함된 구대제자의 한 조였다·
때마침 가는 길목이어서 잠시 들렀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모닥불에 얼굴을 박고 있던 열 명의 어리고 젊은 여자들이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주변의 다른 모닥불 앞에서 이른 저녁을 먹던 여자들도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선배님!”
안여여가 반색을 했다·
“왜 아직 식사들을 안 하시고요?”
“나무가 젖어서 그런지 불이 잘 안 붙어서요·”
아침에 보슬비가 내린 탓에 협곡의 나무들은 대부분 조금씩 젖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조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들 공기의 유입이 많은 개방형의 모닥불을 피웠기 때문이다·
한데 이 조는 좌우에 돌벽을 좁고 높게 세우고 다시 그 위에 넓은 돌판까지 얹어 고기를 굽고 있었다·
나는 돌판을 좀 치우라고 한 후 연기가 눕는 방향과 일직선이 되도록 돌벽 두 개를 살짝 옮겨 놓았다·
그러자 불길이 금방 살아났다·
“와 신기하다!”
“연기도 잘 빠지네·”
“진작 이렇게 할걸·”
“그러게 내가 표사님들께 여쭈어보자고 했잖아·”
“이런 일은 표사보다는 쟁자수들이 훨씬 잘 압니다· 다음부터 모르는 게 있으면 쟁자수들에게 물어보세요·”
내가 조언을 해주었다·
모두가 고맙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선배님!”
“뭐 또 필요한 거라도?”
“혹시 식사하셨어요?”
“이제부터 해야죠·”
“그럼 저희랑 같이 하실래요?”
슬쩍 눈치를 보니 열 명 전부 잔뜩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주변의 다른 모닥불 앞에 있는 여자들은 들고 있던 밥그릇이며 젓가락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조금 놀란 모양이었다·
그때 저만치 십여 장 밖에서 신나게 고기를 뜯고 있는 십칠각의 객원표사들이 보였다·
객원표사도 아니면서 걸핏하면 찾아와 함께 밥을 먹는 남궁소소도 보였고·
한데 모닥불 위 꼬챙이에 꿰여 익어가야 할 고깃덩어리가 보이지 않았다·
‘저 인간들이 그러면 그렇지·’
반면 여기는 아직 고기가 다 익지도 않았다·
굽는 방식을 바꾸는 바람에 생긴 불상사인데 오히려 내게는 행운이었다·
“그럼 그럴까·”
“이리로 앉으세요·”
“대충 아무 데나 앉지 뭐·”
내가 자리에 앉자 그제야 다른 사람들도 앉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돌판을 가운데 두고 열 명의 여자와 내가 둘러앉아 식사를 하게 됐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누군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 보법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무슨 보법 말인가요?”
“지난번 홍안현에서 호북사흉을 상대로 싸울 때 펼쳤던 그 보법 말이에요· 굉장히 인상 깊었거든요· 권법도 그렇고요·”
“권법과 보법 모두 천룡표국의 무공은 아닙니다· 그리고 사정이 있어서 이름을 말씀드릴 수는 없을 것 같군요·”
“제가 괜한 걸 여쭈었군요· 사과드립니다·”
“대신 다른 건 얼마든지 물어보십시오·”
“정말인가요?”
“물론입니다·”
그때부터 여기저기서 질문들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호북사흉 정도면 강호에서 얼마나 강한가요?”
“그들이 다시 올까요?”
“더 강한 무림인들도 나타나겠죠?”
“도화곡의 무공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세요?”
기껏해야 신변잡기에 관한 것들이나 물어 올 줄 알았다·
한데 하나같이 도화곡이 처한 현실과 관련된 진지한 질문들이어서 속으로 조금 놀랐다·
그러다 모두의 입을 다물게 만드는 질문 하나가 불쑥 튀어 나왔다·
“우리 중 몇 명이나 죽을까요?”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니 섭부용 못지않게 예쁜 하지만 나이는 열예닐곱 살 정도로 비교적 어린 여자가 서 있었다·
주변엔 어느새 다른 모닥불에서 모여든 여자들까지 이십여 명 정도가 둘러싸고 있어서 무슨 약장수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건 왜 묻는 겁니까?”
“도시를 지날 때마다 만난 무림인들이 수군대는 소리를 들었어요· 성도에 도착하면 전쟁이 일어날 텐데 그때 저 여자들 중 절반은 죽을 거라고요· 공자님도 그렇게 생각하세요?”
전생에선 성도에 도착한 이후 반년 동안 도화곡의 제자 절반가량이 죽었다·
이번엔 분명 다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 한 명의 희생도 없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제가 귀신도 아닌데 어떻게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겠습니까? 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압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겁을 먹으면 죽을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 그러면 내가 등을 지켜주던 동료도 위험해진다는 것·”
나름 마음을 굳게 먹으라고 한 말인데 전혀 효과가 없었다·
다들 여전히 긴장되고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러다 몇 명이나 죽을 것 같냐고 물었던 여자가 다시 물었다·
“천룡표국주님과 공자님께선 끝까지 우리와 함께 싸워 주실 건가요? 그러니까 제 말은··· 우리가 성도에 도착한 후 다른 문파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때까지요·”
대신 싸워 줄 것이냐고가 아니라 함께 싸워 주겠냐고 물었다·
나는 저 심정을 잘 알고 있다·
전생에서 표행을 나갈 때도 믿을만한 표사가 한 명 더 있고 없고의 차이로 든든함의 정도가 얼마나 달랐던가·
“물론입니다·”
그제야 굳었던 여자들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활짝 펴졌다·
심지어 옆 사람들과 마주 보며 함께 각오까지 다졌다·
“고기가 다 익었어요·”
안여여가 말했다·
누군가 직접 대나무를 깎아 만든 것으로 보이는 젓가락을 얼른 챙겨 주었다·
마침내 고기를 한 점 집어 먹으려는 순간 돌판이 눈에 확 들어왔다·
회백색의 바탕에 반점이 가득한 것이 아무래도 눈에 익었다·
‘설마?’
나는 얼른 돌판의 양쪽을 손으로 잡아 옆으로 옮겨 놓았다·
불에 달궈진 돌판을 맨손으로 옮기자 여자들은 그야말로 경악했다·
안여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세요?”
“화맥석(火麥石)이라고 불에 달구면 폭발하는 성질이 있어요· 그러고 보니 왜 갑자기 돌판에 구워 먹을 생각을 한 겁니까?”
“고기를 씻으러 넷가로 갔다가 만난 표사님들이 가르쳐 주셨어요· 얇게 썰어서 소금을 뿌린 다음 널찍한 돌판에다 구워 먹으면 맛이 끝내준다고요· 이 돌판도 표사님들이 주워 주신건데····”
“표사들이 화맥석을 모를 리 없을 텐데·”
그때였다·
꽈앙!
굉음과 함께 숙영지 한복판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소리가 어찌나 큰지 귓구멍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황급히 일어나 소리가 난 쪽을 살폈다·
모닥불이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가운데 서호삼견과 호리독사와 남궁소소가 대(大)자로 뻗어 있었다· 대경실색한 사람들이 달려들어 다섯 사람을 부축해 일으켰다·
돌판에 구워 먹던 고깃조각들이 얼굴이며 몸에 붙어 있어서 그렇지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면 그렇지·”
객원표사와 정식표사는 뭐가 달라도 다른 법이다·
그때였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 숙영지를 빠르게 관통해 이종산의 막사로 들어가는 그림자가 있었다·
척후를 살피러 간 적룡당의 표두였다·
‘무슨 일이 있군·’
예상은 적중했다·
잠시 후 표사 한 명이 와서 수뇌부 회의가 소집되었음을 알렸다·
이종산의 막사에 모인 사람은 여종매와 오대장로들 양진각 남궁세옥 그리고 나였다·
양진각이 척후병으로부터 받은 보고 내용을 설명했다·
“내일 아침에 건널 예정이었던 잠강(潛江)의 배가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고 합니다· 인근 포구 세 곳이 같은 상황인 걸로 미루어 잠강 전역이 봉쇄된 것으로 보입니다·”
가장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산은 길이 없어도 어떻게든 넘을 수가 있다·
하지만 강은 배가 없으면 건널 도리가 없다·
오대장로 중 한 명이 물었다·
“대안은 무엇입니까?”
“백 리 정도 상류로 거슬러 올라간 다음 잠강의 발원지인 복마산(伏馬山)을 넘어가는 길이 있습니다· 하루 정도 더 걸리겠지만 배를 구하지 않는 한 현재로선 유일한 대안입니다·”
복마산이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나와 남궁세옥은 그대로 표정이 굳었다·
아무리 속세의 사정에 어둡다고 해도 복마산까지 모를 리는 없었다·
오대장로도 안색이 어두워졌다·
양진각의 말이 이어졌다·
“모두 아시는 것처럼 복마산에는 큰 호랑이가 한 마리 웅크리고 있습니다· 바로 흑두산장(黑頭山底)이라고도 불리는 녹림맹의 총타이지요·”
“표국들은 원래 녹림맹과 긴밀한 관계라고 들었습니다· 하면 복마산을 지나는 건 큰 무리가 아니지 않나요?”
“잠표(潛鏡)라는 것이 있습니다· 특정한 지역에 이르면 표기를 내리고 표사들도 말에서 내리고 모두에게 금언령 내린 다음 최대한 조용히 지나가는 것을 말하지요·”
용이 사는 연못이나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산을 지날 때 하는 표행 방식이다·
강호에는 이런 곳이 수십 군데도 넘는다·
양주에도 한 곳이 있는데 바로 남궁세가가 있는 수서호의 서쪽 호반이었다·
그 외 구대문파와 오대세가가 있는 곳이나 유력한 군벌이 사는 고장도 그렇다·
황제가 사는 북경은 도시 전체가 잠표의 대상이었다·
“복마산도 그중 한곳이군요·”
“그렇습니다·”
“잠표를 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말을 자르고 들어온 사람은 이종산이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이번 표행은 아주 특별합니다· 아시다시피 단순히 물건을 운송하는 것이 아니라 한 문파를 옮기고 있기 때문이지요· 깃발을 내리고 잠표를 하는 순간 강호인들은 도화곡이 녹림맹의 위세가 두려워 무릎을 꿇었다고 할 것입니다· 하면 성도에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만약 잠표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녹림맹주는 우리가 자신과 흑두산장을 우습게 보았다고 여길 것입니다· 아마도 쉽게 복마산을 통과하지 못하겠지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오대장로들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굳어졌다· 섭부용의 사부인 이막하가 말했다·
“누군가 우리를 복마산으로 몰고 있군요·”
다른 오대장로들의 말이 잇달았다·
“대체 어떤 자들이?”
“혹시 또 화양표국?”
“양가장일수도 있지요·”
“양가장은 아직 개입을 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어요·”
“흑두산장이 벌인 짓일 수도 있습니다·”
마지막 말은 내가 한 것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이막하가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산적들의 본산인 녹림맹이 이런 큰 표행건에 한 발을 슬그머니 걸친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다만 통행세를 무엇으로 얼마나 받으려 할지를 모를 뿐·”
과연 그렇다는 듯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하오문도에게서 받은 보고를 그대로 전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덧붙였다·
“이럴 때일수록 조금의 동요도 없이 복마산으로 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 그러면 온갖 잡귀신들이 우리를 우습게 보고 달려들기 시작할 겁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도 속으로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녹림맹 총타가 어떤 곳인가·
맹주를 비롯해 온갖 괴수들이 우글대는 곳이다·
생각만 해도 심장이 쪼그라 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무사히 복마산을 지나가기만 한다면 도화곡의 위상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더불어 웬만한 잡귀들은 전부 떨어져 나갈 것이고·
이종산이 남궁세옥에게도 물었다·
“대주의 생각은 어떠신가?”
“초대를 하면 가야지요·”
과묵한 성격답게 남궁세옥의 대답은 깔끔했다·
표정에서도 두려움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종산은 여종매와 잠시 시선을 나누었다·
어차피 모든 결정을 위임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의견을 묻는 것은 도화곡의 단단한 결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종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이종산이 결정을 내렸다·
“동이 트는 즉시 복마산으로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