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 붕정만리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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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현령의 등장에 모두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장한 관병까지 백여 명이나 동원한 걸 보면 호의적으로 찾아온 게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그 바람에 잠수교를 건너기 위해 강변에 대기 중인 상단과 여행객들까지 싸움 구경을 놓칠세라 헐레벌떡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현령 왕조발이 말했다·
“관병들을 이끌고 저자를 시찰하던 중 유민들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 달려오는 길이오·”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군요·”
“그건 본관이 이제부터 살펴볼 일이고·”
왕조발은 좌중을 정확하게는 전부 여자들뿐인 도화곡의 제자들을 쫙 훑었다·
그러다 몇몇 여자에게 이르러서는 눈동자를 반짝이기도 했다·
길가는 여자 아무나 열 명만 모아 놓아도 그중 한두 명은 용모가 빼어나길 마련이다·
하물며 삼백여 명을 헤아리니 눈을 비비고 볼만큼 뛰어난 미인이 얼마나 많겠나·
그건 구경꾼들 또한 마찬가지여서 표행단이 강변에 나타난 순간부터 뜨거운 시선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목적지가 어디오?”
“사천성 성도로 가는 중입니다·”
“성도는 무엇 하러?”
“대별산에 깃들어 있던 무림문파 도화곡이 사천성 성도로 터전을 옮겨 가는 중입니다· 부디 관의 너그러운 처분과 협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종산은 천룡표국주이기 이전에 한 명의 백성으로서 관원인 왕조발에게 충분히 예를 갖추었다·
순간 모여든 구경꾼들이 크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대별산을 넘나드는 사람이라면 도화곡이라는 신비문파에 대해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 문파의 제자 수백 명이 갑자기 세상에 등장한 것만으로도 신기한 일인데 사천성 성도로 문파를 통째로 옮긴다고 하니 다들 놀라 나자빠질밖에·
“숫자는?”
“도화곡의 제자가 삼백아홉 명이고····”
“한데 무슨 이사가 이렇게 단출하오?”
“어쩌다 보니 그리되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가까운 거리라면 모를까 삼천 리나 되는 먼 길을 가져갈 정도로 중요한 물건들은 사실 그리 많지 않은 법이지요·”
“다시는 본관의 질문에 그런 식으로 대답하지 않기를 바라오·”
“조심하겠습니다·”
나는 속에서 무언가 욱 하고 치밀어 오르는 걸 꾹 참았다·
아무리 촌구석 현령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다스리는 현(縣) 안에서만큼은 황제와도 같은 권세를 누렸다·
적어도 천룡표국의 깃발을 내세운 상태에서는 함부로 관원의 권위에 도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호패와 노인들은 모두 가지고 있소?”
“물론입니다·”
“준비가 철저하시구려·”
“감사합니다·”
“국주의 말씀은 잘 알아 들었소· 그러나 사백여 명이나 되는 무장 병력이 지나가는 걸 홍안현의 현령으로서 묵과 할 수 없소· 하니 도검을 하나도 빼놓지 말고 본관의 앞에 가져다 놓으시오· 하면 내 특별히 국주의 얼굴을 보아 이곳까지 도검을 소지하고 온 연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소·”
무림인에게 도검을 소지하게 된 연유를 묻지 않겠다니·
살다 보니 별 희한한 개소리를 다 들어 본다·
나는 왕조발의 계획을 알아차렸다·
그는 명분과 평판을 중요시하는 무림인들이 함부로 도발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검문소의 체증을 유발해 군중을 만들었다·
그리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관의 권위를 내세워 천룡표국과 도화곡을 핍박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사백 명에 육박하는 무장병력이 지나가는 걸 모른 척할 수 없다는 그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모든 민란이나 반란이 그렇게 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노인을 통해 여행을 통제하고 도검의 소지를 엄격하게 규제하는 것 또한 이런 일들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종산의 주변으로 수뇌부가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내가 하오문도에게 들은 얘기부터 작은 소리로 전했다·
“조금 전 하오문과 접촉을 했습니다· 그들이 말하길 저 현령은 화양표국의 거인표사 출신이라고 합니다·”
이 한 마디로 사람들은 단숨에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나 여종매와 오대장로는 거인표사가 무엇인지 몰라 내가 짧게 설명을 덧붙여야 했다·
설명을 듣고 나더니 그녀들도 화양표국이 이렇게 치졸하게 나올 줄 몰랐다며 혀를 끌끌 찼다·
“전력을 약화시켜 놓을 속셈이군요· 하면 앞으로의 여정 중에 다른 적들이 공격해올 경우 우린 속수무책이 될 겁니다·”
“실패하든 성공하든 이런 시비 자체가 발목을 잡아 시간을 끌고 있습니다· 그것도 놈들이 의도한 것 중 하나이겠지요·”
“대별산을 넘자마자 협봉검을 빼앗기면 제자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질 것입니다· 검수로서의 자존감에도 상처를 입을 것이고요·”
오대장로들이 돌아가며 한 말이었다·
가장 마지막 말은 오대장로 중 막내이자 섭부용의 사부이기도 한 이막하가 한 것이었고·
이막하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포두를 만나러 갔던 양진각이 돌아왔다·
한데 아주 희한한 말을 했다·
“포두의 말이 보는 사람들도 많은 데다 현령의 체면도 있고 하니 일단 시키는 대로 도검을 전부 바치라고 합니다· 하면 홍안현을 벗어날 무렵에 자신이 책임지고 현령을 설득해서 돌려주겠다고요·”
무슨 소린지 몰라 한동안 모두가 어리둥절해 했다·
단 한 사람 이종산만큼은 너무나 태연하게 물었다·
“그래서 얼마를 달라고 하오?”
“은전 오백 냥입니다·”
“흉악한 자들이로군·”
“분명 현령과 얘기가 된 내용일 겁니다·”
“화전양면술이오·”
“예?”
“우리와 싸울 자신은 없는데 발목은 잡아야겠고· 하니 일부러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국법을 들먹이며 윽박지르는 한편 뒤로는 빠져나갈 길을 열어 주는 것이오· 그 과정에서 한몫도 챙기고·”
나도 이종산과 똑같은 생각이었다·
왕조발의 입장에선 전혀 손해 볼 게 없다·
어쨌든 발목을 잡았고 시간도 지체시켰으며 경제적 타격까지 주었으니까·
게다가 자기는 단단히 한몫 챙기고·
교활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다·
여종매가 이종산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좀 깎아야지요·”
“그 말씀은···?”
“아무래도 이번엔 져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화양표국주가 제법 덫을 잘 놓았군요· 그래도 가는 동안 만나는 현령들이 모두 화양표국의 수족은 아닐 테니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는 않을 겁니다·”
“속도 좋으시군요·”
“관원들을 다치게 할 순 없습니다· 현령은 까맣게 모르겠지만 그것이야말로 화양표국이 노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양가장이 노리는 것일 수도 있고요·”
“무슨 말씀입니까?”
“제가 만약 화양표국주라면 군중 속에 노련한 표사들 몇 명을 섞어 놓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힘으로 뚫으려고 하면 혼전 중에 끼어 들어 현령에게 중상을 입히도록 하겠습니다· 마치 우리가 한 짓인 것처럼·”
“···!”
여종매를 필두로 모두가 눈을 번쩍 떴다·
왕조발이 섣부른 칼을 휘두르는 가해자라고만 생각했지 그가 화양표국이나 양가장이 파놓은 진짜 함정의 미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던 것이다·
양가장은 오랜 세월 양가창법을 군문에 보급해 오면서 유력한 군벌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만약 현령에게 중상을 입힌 일로 양가장이 암중에서 군부를 움직이기라도 한다면 일이 여간 복잡해지지 않는다·
‘생각하는 폭이 다르구나·’
나는 품속에 손을 넣어 동패를 만지작거렸다·
동패는 사람들이 내 신분을 모르는 상황에서나 편하게 쓸 수 있다·
서호삼견이야 동패를 진왕에게 얻은 줄 알지만 나와 진왕과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분명 회시에 합격한 대가로 얻은 줄 알 것이다·
함부로 썼다가 이부시랑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무슨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른다·
그때 서호삼견 중 이견이 다가왔다·
그는 이종산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쳐다보지는 말고 듣기만 하게· 지금 내 뒤쪽으로 십여 장쯤 떨어진 곳에 죽림을 쓴 네 명의 사내들이 보이나?”
“허리에 칼찬 자들 말씀입니까?”
“쳐다보지 말라니까·”
“보라는 겁니까? 보지 말라는 겁니까?”
“호북사흉(湖北四凶)일세·”
“여기서 그들을 보는 게 아무래도 우연인 것 같지가 않아서 일단 보고를 하는 것이네·”
이견은 그 말만 남기고 밥값은 했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이 되어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강호인들은 동정호를 기준으로 호광성의 북쪽을 달리 호북성이라도 불렀다·
호광성을 절반으로 쪼갠 것이지만 복건성이나 절강성 보다도 컸다·
호북사흉은 바로 그 호북성 일대에서 악명을 떨치는 흉신악살이자 돈만 주면 누구의 목이든지 따다 준다는 유명한 살인청부업자들이었다·
무공도 고강한 데다 그 수법 또한 잔혹하고 지독하기 이를 데 없어 전문 살수들조차도 혀를 내두른다고 들었다·
이종산이 나지막이 말했다·
“저 살인마들이 여긴 왜?”
남궁세옥이 의견을 말했다·
“도화곡과 개인적인 원한이 없다면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왔겠지요· 본래 그렇게 움직이는 자들이니까요·”
“누구의 사주를 말인가?”
“배후가 누구인지는 모르나 홍안현 현령과 관련이 없는 것만은 확실한 듯합니다· 호북사흉은 관원이라면 치를 떨 정도로 관부와 원한이 깊습니다·”
호북사흉이 쥐약을 처먹지 않은 한 이종산이나 도화곡주 그리고 남궁세옥이 지켜보는 앞에서 기습을 해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도화곡의 무공을 견식해 보고 싶다는 핑계로 정중하게 비무를 청해온다면?
도화곡에서는 나이와 배분을 따져 응해줄 수밖에 없다·
이는 이종산이 이사를 하기 전부터 예고했던 일이다·
안갯속에 감춰져 있던 신비 문파가 하산했으니 호전적인 고수들이 숱하게 찾아올 것이라고·
정사마를 구분하지 말고 도전에 응해주어야 할 것이라고·
호북사흉은 백전을 치른 실전의 고수들이었다
그에 반해 도화곡의 제자들은 실전을 치러 본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산 사람을 검으로 찔러 본 경험은? 정말로 숨통을 끊어 본 경험은?
여기서 만약 도화곡의 제자가 호북사흉에게 당해 죽기라도 한다면 대번에 사기가 꺾이면서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언젠가는 싸워야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저들이 비무를 청해올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도검을 모두 내놓으라는 현령에 이어 생각지도 않은 호북사흉의 등장까지·
난감한 상황에 사람들은 모두 고민이 깊어졌다·
“시간이 얼마 없소이다!”
왕조발이 으름장을 놓더니 확 하고 쥘부채를 펼쳤다·
그리고는 등받이에 거만하게 기대며 설렁설렁 부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얄미운지 돌로 면상을 찍어 버리고 싶었다·
순간 나는 번쩍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종산에게 작은 소리로 얼른 말했다·
“일단 말씀하신 것처럼 검을 전부 갖다놓도록 하시지요· 대신 소자가 홍안현을 벗어날 것도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도로 찾아 놓도록 하겠습니다·”
이종산에게 한 말이지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들었다·
갑작스러운 내 제안에 다들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동안 내가 했던 활약으로 미루어 이번에도 무언가 묘수가 생겼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종산은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물었다·
“내가 도와줄 일은?”
“말 탄 관병들을 현령의 옆으로 최대한 바짝 모아 주십시오·”
이종산이 표마차 아래에서 검 한 자루를 거침없이 뽑아 들었다·
이어 검을 아래로 축 늘어뜨린 채 현령을 향해 저벅저벅 다가갔다·
그 기세에 놀란 현령이 부채질을 뚝 그쳤다·
이종산의 정확한 의중을 모르는 탓에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사인교를 맨 장한들도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말 탄 관병들이 대열을 좁히는 한편 서둘러 왕조발의 앞을 막아섰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챙그렁!
걸음을 멈춘 이종산이 현령의 발아래를 향해 검을 던지고 돌아섰다·
뒤이어 여종매도 표마차 아래에서 협봉검을 뽑아 들고 와서는 현령의 발아래로 던졌다·
두 사람을 시작으로 모든 표사와 도화곡의 제자들이 차례로 자신들의 검을 뽑아다 바쳤다·
남궁세옥과 비검대도 행렬에 동참했다·
현령의 발아래에는 협봉검을 비롯해 갖가지 모양의 도검들이 무더기를 이루며 쌓여가고 있었다·
이종산이 고작 일개 현령 따위에게 굴복할 줄 몰랐던 구경꾼들은 끝도 없이 술렁였다·
반대로 왕조발은 이름난 무인이자 절강성을 대표하는 대가문의 수장을 굴복시켰다는 생각에선지 그야말로 감개무량한 표정이었다·
그러면서도 무인들이 검을 내려놓는 척하며 언제 도발해 올지 몰라 말 탄 관병들로 하여금 자신을 이중삼중으로 둘러싸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