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 문파를 옮겨라(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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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놀란 나머지 나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이건 또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 치는 소리란 말인가·
하오문도라는 건 어느 정도 짐작했다·
개방 분타주가 보고 똥줄이 탈 정도였으니 간부급일 것이고 양주를 관리하는 향주 정도면 정말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다·
한데 하오문주의 제자라니·
나는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사람이 매용초 그 자신이라는 걸 직감했다·
그녀는 나와 둘만의 시간을 가지며 옛날을 기억하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다가 하오문주의 제자가 된 것이오?”
“제가 기녀들의 청탁을 모아 공자님께 전달하는 역할을 했고 그러다 보니 어린 나이에 기녀들의 큰 신뢰를 얻게 되었어요·”
신뢰만 얻은 게 아닐 것이다·
신중한 말투를 보면 아마 조직의 흐름이나 체계에 관해서도 많은 걸 익혔을 것 같다·
“그걸 기특하게 여기신 하오문주께서 절 제자로 거두어 주셨어요· 지금은 남직예성을 총괄하는 당주가 되어 공자님과 했던 일을 해오고 있고요·”
“나와 해왔던 일이라면?”
“기녀들이 고향에 있는 부모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받을 수 있도록 돕는 일 말이에요· 그건 이제 하오문의 주요 사업이 되었어요· 덕분에 하오문은 기녀들에게 큰 신뢰를 얻었고 그걸 이용하기 위해 하오문의 문도가 되겠다며 찾아오는 기녀들도 많아요·”
“다행이구려·”
“모두 공자님 덕분이죠·”
“내 덕분이 아니오· 소저 아니 당주께서 영민하신 탓이오· 그런데 이렇게 말을 편하게 해도 되나 모르겠네·”
“다 기억을 못 하신다지만 제게 하시는 말투는 그대로예요· 그것까지 바꾸면 정말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것 같아요·”
“이해해 주셔서 고맙소·”
“공자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어요· 한데 그렇게까지 뛰어난 재능을 숨기고 계신 줄은 몰랐어요· 늦었지만 향시와 회시에 장원급제 하신 것 다시 한번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그리고 감사해요·”
“무얼 말이오?”
“우리가 아니었다면 좀 더 일찍 재능을 발휘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의도치 않게 공자님의 발목을 잡았던 것 같아서 죄송했어요· 이제라도 빚을 갚고 싶어요·”
“그럼 날 좀 도와주시겠소?”
“무엇이든 말씀해 보세요· 그 옛날 공자님께서 울고 있는 제 손을 잡아 주셨듯이 이번엔 제가 공자님의 손을 잡아 드리겠어요·”
나조차도 호구 등신에 반푼이라고 욕했던 이정룡의 과거 행적 때문에 이렇게 큰 이득을 볼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해봤다·
나는 매용초를 뚫어지게 노려보며 말했다·
“도화곡을 통째 사천성 성도로 옮길 것이오· 나와 천룡표국이 길잡이가 될 것이고· 가는 동안 사천성 성도에 있는 무림방파들의 동향을 계속해서 보고 받고 싶소· 특히 사천구룡방의 지난 행적과 동향을 중심으로· 가능하겠소?”
매용초는 대답 대신 품속에서 청홍색의 실로 정교하게 매듭을 묶어 장식한 수실을 꺼내 내게 주었다·
“이게 무엇이오?”
“하오문주의 칠제자인 소수옥녀(素手玉女)를 상징하는 증표예요· 가는 동안 검의 손잡이 끝에 매달아 주세요· 하면 하오문도들이 공자님을 찾아갈 거예요·”
“헛!”
“왜 그러세요?”
“아 들어본 별호라서·”
“정말 까맣게 기억을 못 하시네·”
“무얼 말이오?”
“손이 명주실처럼 희다며 공자님께서 제게 지어 주신 별호잖아요·”
“···!”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5년 후 하오문 역사상 가장 젊은 문주가 된다·
나는 지금 장차 하오문주가 될 여자와 절친한 친구가 된 것이고·
세상에 이런 횡재수가 있다니·
수실을 받아 품속에 갈무리하며 말했다·
“고맙소·”
“공자님께 그 말 듣게 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어요· 그땐 저도 공자님께 무언가 도움이 되었다는 뜻일 테니까요·”
수서루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기루의 칼잡이들과 기녀 대여섯 명이 남궁소소가 있는 객방 앞에서 서성이는 중이었다·
옆에는 매용초를 그림자처럼 따르던 호위무사 두 명이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특히 얼굴이 만신창이었는데 아무래도 둔기에 여러 차례 맞은 것 같았다·
“무슨 일이지?”
매용초가 놀라서 물었다·
칼잡이 하나가 대답했다·
“천 공자께서 친우분들이 마혈을 짚혀 쓰러졌다는 걸 아시고는 여기까지 찾아와서 호위무사들을 상대로 매질을 했습니다·”
“무엇으로 때렸길래?”
“처음엔 주먹으로 때리다가 나중엔 주먹이 아프다시며 땅바닥에 누우라고 하더니 일곱 명이 번갈아 가며 발로 얼굴을····”
“지금 어디 계시지?”
“소란을 듣고 함께 오신 두 분 아가씨들께서 밖으로 나오시더니 공자님들을 달래셨습니다· 그러다 누군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술이나 한잔하자고 했고 함께 객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오늘 장사는 접는다· 다른 객방에 있는 손님들께는 양해를 구하고 모두 물러가시도록 해라· 돈은 일절 받지 말고”
“알겠습니다·”
“비각(秘閣)에 일러 그동안 천 공자가 양주에서 지내는 동안 저질렀던 온갖 패악질과 비위를 적은 보고서들을 전부 찾아 내게로 가져오라고 일러라· 작년 겨울 지부대인의 애첩이 천공자의 아이를 몰래 유산했다는 문서도 빼놓지 말고·”
“알겠습니다·”
칼잡이가 바람처럼 사라지자 매용초가 내게 말했다·
“남경천가장(南京天家底)이라고 대대로 고관대작들을 배출해온 남경의 유력한 문벌귀족 가문이 있어요· 지금은 장주가 남경 조정에서 이부상서의 벼슬을 하고 있고요·”
”천운비가 그의 아들이고요?“
“남경에서 하라는 글공부는 않고 하도 말썽을 피우니 장주께서 이곳 양주의 별장으로 보내버렸어요· 한데도 저렇게 지내고 있죠·” 당대의 황제는 남경에도 조정을 유지하는 한편 육부까지 두고 호족세력들을 벼슬에 임명해 왔다·
이부상서는 관리의 임용과 인사를 총괄하는 이부의 최고수장으로 막강하기 짝이 없는 자리였다·
하지만 황제가 있는 북경 조정의 이부상서에 비할 바는 물론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남경천가장을 조금 알고 있었다·
객방 안은 생각했던 것만큼 난장판은 아니었다·
남궁소소와 섭부용이 뿜어내는 기세에 압도된 일곱 명의 화화공자들은 잔뜩 얼어붙은 채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특히 섭부용은 자신의 검까지 탁자 위에 척 올려놓았는데 누구라도 실수만 하면 그대로 뽑아서 베어버릴 기세였다·
화화공자들은 그래도 좋은지 다들 넋을 잃고 두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감상하고 있었다·
처음에 만난 두 명만 인사불성이지 나머지는 술 냄새는 조금 풍길지언정 모두 멀쩡했다·
우리가 들어갔더니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그중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다들 두 여자의 기세에 압도된 와중에도 홀로 여유를 부리며 나와 매용초를 바라보는 미공자가 있었다·
나는 남궁소소를 돌아보며 전음을 보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요?]
[부탁을 하러 온 마당에 소란을 피우면 안 되잖아요· 해서 잠시 데리고 있었어요· 얘기는 잘 되었나요?]
[원하는 건 모두 얻었소·]
[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
매용초가 가운데 앉은 미공자에게 포권지례를 하며 말했다·
“천 공자님 아무래도 소인이 실수를 하여 공자님을 노하시게 한 것 같습니다· 기회를 주신다면 다른 객방으로 모시어 소인이 미천하나마 비파 솜씨를 한번 자랑해 볼까 합니다만 어떠신지요?”
“네년이 나를 아주 어린애 다루듯 하는구나·”
“소인이 어찌 감히····”
“주루를 운영하고 있으니 나와 비슷한 신분이라 생각하는 것이냐? 한낱 늙다리 기녀 나부랭이 주제에 어디서 감히 수작을· 방해하지 말고 꺼져라·”
“그럴 필요 없어요·”
말과 함께 남궁소소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섭부용도 기다렸다는 듯이 탁자 위의 검을 집어 들고는 일어섰다·
남궁소소가 천운비를 돌아보며 말했다·
“천 공자 만나서 반가웠어요·”
“벌써 가시려고요?”
“보시다시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그러면서 남궁소소가 나를 한번 슬쩍 돌아보았다·
천운비의 눈길도 아주 잠깐 나를 향했다가 다시 남궁소소에게로 돌아갔다·
“오래전부터 한번 만나 뵙기를 고대한 남궁 소저를 비로소 뵙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다음엔 좀 더 격식이 있는 곳에서 술과 식사를 대접하고 싶군요·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사양하겠어요·”
“제가 무슨 실수라도?”
“한창 글공부에 매진 하셔야 할 천 공자를 제가 방해하면 쓰나요· 듣자 하니 향시에도 급제를 하셨다던데· 빨리 회시에도 급제해 북경 조정으로 진출하셔야죠·”
향시 급제도 보나 마나 아비가 힘을 써서 만들어 준 그림일 것이다·
그런 자에게 열심히 글공부를 해서 회시에 급제하라고 했으니 이건 정신 차리라고 일갈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천운비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의 눈빛이 대번에 바뀌었다·
“회시에 급제하지 않아도 나는 얼마든지 원하는 벼슬을 할 수 있소이다·”
“향시에 급제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요?”
“무인들이라 잘 모르시는 모양인데 향시에 급제한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오· 급제를 못 한다고 해서 모자라는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지·”
“항주의 어느 표국에는 무인이면서 향시와 회시에서 연달아 장원급제한 사람도 있죠·”
나는 속으로 뜨끔했다·
향시는 대충 그렇다 쳐도 회시는 순전히 내 실력으로 장원급제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소문은 나도 들었소· 하지만 그런 사람은 지난 오십 년 동안 없었소· 장담컨대 앞으로 오십 년 동안에도 없을 것이고·”
“그럴지도 모르죠· 그럼 저희는 이만·”
남궁소소는 섭부용을 데리고 그대로 나가 버렸다·
딱히 힘을 쓸 필요가 없게 된 매용초도 천운비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나갔다·
나도 조용히 따라 나가려고 했다·
남궁소소와 매용초의 입장을 생각해서 양주에서만큼은 최대한 사고를 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한 놈이 중얼거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칼찬 계집들이라 그런지 더럽게 비싸게 구는군·”
한 발을 문턱 너머로 보냈던 나는 도로 뺐다·
그리고 안쪽에서 가만히 문을 닫았다·
천천히 뒤돌아서자 모두 적의가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바깥에 호위무사를 저렇게 팬 분이 누굽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나?”
천운비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거만한 자세로 되물었다·
“초면에 말이 좀 짧군요·”
“꼴에 무림인이다 이건가? 네 놈이 아무리 검을 잘 휘둘러도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베어 죽일 배짱이 없다면 조용히 물러가는 게 좋을 것이다· 관병들이 네 놈의 가문을 찾아가 쑥대밭으로 만드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커다란 대리석 탁자를 잡아 그대로 벌떡 뒤집어 버렸다·
한순간 공중으로 날아오른 탁자는 음식을 와장창 쏟아내며 한 바퀴를 돈 후 그대로 착지 했다·
어느새 천운비의 옆으로 다가간 나는 놈의 뒤통수를 잡고는 깨끗해진 탁자에다 안면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퍽퍽퍽퍽!
“으아악!”
대경실색한 친구놈들이 갑자기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서는 나를 덮쳐왔다·
놈들에게는 무공 초식도 아까웠다·
퍼퍼퍼퍼퍽!
주먹과 발길질이 가해지길 수차례 잠깐 사이에 놈들은 전부 대자로 바닥에 뻗었다·
나는 쓰러진 놈들의 머리통을 발로 한 번씩 꾹꾹 눌러 턱뼈를 부수어 주었다·
그러자 모조리 정신을 잃고 까무러쳐 버렸다·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천운비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구석을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나는 놈의 뒷덜미를 잡아 번쩍 들어서는 다시 탁자 위에 시체처럼 올려놓았다·
공포에 질린 놈이 어금니를 빠드득 갈며 말했다·
“네 놈이 정녕 미쳤····”
나는 놈의 입술에 손가락을 넣어 양쪽으로 쫙 찢어 버렸다·
“으아악!”
마지막으로 주먹으로 하관을 쳐서 턱뼈를 마저 부수어 버리려는 찰나 놈이 찢어진 입술을 덜렁거리며 말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나는 피 묻은 손을 놈의 옷에 쓱 닦았다·
이어 이부시랑에게서 받은 마패를 꺼내 놈의 눈앞에서 흔들어 보였다·
“이게 무엇인 줄 알아보겠느냐?”
보통의 마패는 두루마리로 만든다·
동패로 만든 것은 북경의 황실에서만 그것도 고위직이나 첩보 기관들이 쓰는 물건이었다·
이부상서의 아들이라면 그 정도는 알아볼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놈의 눈알이 툭 튀어나왔다·
“네 놈의 아비에게 가서 전해라· 해마다 복건성에서 배편으로 대규모 밀염(密鹽)을 들여와 항주와 소주에 푼다는 걸 잘 알고 있다고· 북경에선 남경천가장이 역모 자금이라도 모으는 건 아닌지 우려하고 있다고도·”
“다 당신은 누구시오?”
“알면 죽어야 하는데 그래도 알고 싶어?”
“아 아닙니다·”
“지부대인의 애첩은 아직도 만나나?”
“그 그걸 어떻게?”
“조심하라고· 아끼는 첩이 다른 놈의 아이를 가졌다가 유산한 걸 알면 상대가 아무리 이부상서의 자식이라고 해도 지부대인이 가만있지 않을 거야·”
“살려 주십시오·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앞으로 수서루에는 얼씬도 하지 마라· 만약 다시 한번 내 눈에 띄었다가는 네놈은 쥐도새도 모르게 죽고 남경천가장은 풍비박산이 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