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 문파를 옮겨라(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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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회동을 마치고 나오니 시간은 어느새 삼경을 훌쩍 넘긴 상태였다·
숙소인 창룡전으로 가는 동안 나는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계획에도 없었던 초대형 의뢰를 맡을 수 있게 된 것도 기쁘지만 그게 무림사의 큰 사건이었던 도화곡 이전건이라는 게 더 감개무량했다·
‘이번엔 꼭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 줘야지·’
한데 나보다 더 좋아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거야말로 그물은 다른 사람이 당기고 고기는 우리가 주운 격이로군· 구경이나 하다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횡재수가 있나·”
“솔직히 우리는 구경만 한 게 맞지요· 일은 국주님과 십칠각주가 다했고요· 부전자승(父傳子承)이라더니 오늘 부자의 궁합이 아주 찰떡이었습니다·”
내가 보기엔 손지백과 곽석산의 궁합도 예사롭지 않았다·
이종산은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표행을 하는 게 그리 좋으냐?”
“그렇습니다·”
“어째서?”
“말은 평원을 달리고 새는 하늘을 날아야 하는 것처럼 제게는 표행이 그렇습니다· 심장이 뛰면서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줍니다·”
“하면 더 신중해야 하느니라·”
“예?”
갑작스러운 한마디에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곽석산과 손지백도 곧장 입을 닫았다·
허락도 없이 끼어든 것을 나무라는 게 아니다·
다른 무언가가 더 있다·
이종산은 걸음을 멈추고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물었다·
“너는 표행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예전 같았으면 의뢰인이 맡기는 표물을 약속한 기한에 맞춰 최대한 안전하게 운송하는 일이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대답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좀 전의 일이 있고 난 후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그건 문파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는 이종산의 일갈은 전생의 기억으로 결과를 이미 알고 있는 내게도 큰 충격이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열심히 한다고?”
“꼭 알아야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요·”
“네 말이 옳다· 무언가를 좋아하기 위해 그걸 전부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 그리고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다· 너도 보았겠지만 표행에 대한 정의는 각자가 처한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런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표국업에 일생을 바친 사람이라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건 세상에 중요하지 않은 표행이란 없다는 것이다·”
“···?”
“네가 오늘 피력한 의견은 한 문파의 존립과 다른 문파의 생사여탈에 관한 것이었다· 어떤 결정이 내려지느냐에 따라 수백 명의 목숨이 왔다 갔다 했었지· 그만큼 신중했는지 묻고 싶구나·”
철퇴로 한 대 두들겨 맞는 것 같았다·
전생에서 나는 무언가를 결정하는 위치에 있어 본 적이 없다·
항상 윗사람들이 시키는 일을 할 수 있는만큼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딱히 무언가를 심사숙고 할 필요가 없었다·
한데 이제부터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나의 말 한마디에 많은 사람의 인생이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종산은 아마 평생 그런 문제들과 마주치고 또 결정들을 내려왔을 것이다·
그가 얼마나 큰 짐을 지고 살아왔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실력 있는 표사들은 많다· 하지만 강호인들이 단 네 명에게만 명표라는 명칭을 허락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네가 그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오늘의 가르침 또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너의 의견은 분명 매우 인상적인 것이었다· 나 또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 거라고도 생각한다· 아비로서 자랑스러웠느니라·”
“저도 아버지가 자랑스러웠습니다·”
***
이른 아침에 남궁세가와 천룡표국 그리고 도화곡의 수뇌부만 참석하는 회의가 있었다·
남궁세가 쪽에는 남궁유룡을 비롯해 남궁중백 남궁세옥 남궁소소가 대표로 나왔다·
남궁세옥까지는 이해가 가는데 남궁소소가 왜 나왔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도화곡은 곡주인 여종매와 어젯밤 회동에서 보았던 일곱 명의 젊은 여검사 중 한 명이 나왔다·
젊은 여검사는 여전히 암녹색의 장포에 유건을 쓰고 허리에는 협봉검을 찼는데 스물예닐곱 살 정도로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기도가 대단했다·
그리고 예뻤다·
희고 투명한 피부하며 흑백이 뚜렷한 눈동자가 누구라도 돌아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어른들께 정식으로 인사드리거라·”
“도화곡 칠검향(七劍香)의 향주 섭부용 남궁세가주님과 천룡표국주님을 비롯해 여러 선배님들께 인사드립니다·”
어젯밤 보았던 일곱 명의 여검사가 칠검향이었나 보다·
보통은 대(隊)나 조(組)로 끝이 나는데 향기 향(香)자를 붙인 것이 독특했다·
한동안은 호흡을 맞춰야 할 터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이참에 제대로 된 인사를 했다·
“천룡표국 십칠각주 이정룡입니다·”
“반갑습니다·”
남궁소소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포권을 쥐었다·
“남궁소소예요·”
“반가워요·”
“실례지만 올해 나이가····”
“스물여덟이에요·”
“전 스물다섯이에요·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예?”
“제가 너무 서둘렀나요?”
“네 조금·”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께 도화곡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좋은 사람들이 신비한 검맥을 이으며 살고 있다고· 그래서 저도 모르게 빨리 친해지고 싶었나 봐요· 무례를 용서하세요·”
“무례라뇨· 그렇게 생각지 않아요·”
“휴우 다행이에요·”
“오늘따라 어른들 앞에서 왜 이렇게 수다스러운 것이냐· 그만하고 앉거라·”
“예· 오라버니·”
남궁세옥이 일침을 놓자 남궁소소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다소곳하게 자리에 앉았다·
“아이들끼리 벌써 이렇게 사형제처럼 구는 걸 보니 이번 여정은 아주 잘 풀릴 것 같습니다· 껄껄·”
손녀의 붙임성이 마음에 드는지 남궁유룡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대남궁세가의 영애가 자신의 아끼는 제자를 언니라고 부르며 친해지고 싶다는데 누가 싫겠나·
여종매도 밝은 얼굴로 응수했다·
“그랬으면 좋겠군요·”
그리고 이종산을 돌아보며 물었다·
“도화곡을 옮기는 것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은 언제쯤 나올까요?”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벌써요?”
우선 늦어도 열흘 후에는 대별산에서 첫 여정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게나 빨리요? 한 달은 여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만·”
양주에서 대별산까지 말을 재촉해 달리면 대략 이틀 정도 걸린다·
열흘이면 사실상 준비할 시간을 8일 정도밖에 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모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종산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청명(消明)이 지나면 강수량이 갑자기 늘어나면서 강물이 불기 시작합니다· 하면 성도로 가는 동안에 배로 건너야 할 강의 개수가 최대 일곱 개까지 늘어날 겁니다· 배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삼백의 인원이 모두 강을 건너려면 하루가 꼬박 걸릴 수도 있습니다·”
간밤에 세 노인이 모여 밤새 천룡표국에서만 쓰는 지도를 펼쳐놓고 계획을 세운 모양이었다·
한데 화양표국이 한 달에 걸쳐 파악한 강의 개수를 불과 하룻밤 만에 그것도 지도만 펼쳐놓고 파악을 했다고?
그 지도에 세 노인의 평생 경험이 더해진 탓이다·
“한데 이 조차도 강에 한정할 때입니다· 갑자기 불어난 협곡이나 시내를 만나면 상류로 올라가 돌아가야 합니다· 정리를 하자면 20일 정도 일찍 출발하고 하지 않고의 차이로 여정이 두 배까지 늘어날 수도 있습니다· 긴 여정은 그만큼 많은 위험에 노출되게 됩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우리가 무얼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려 주세요·”
“오늘 당장 곡주님께서는 저희와 함께 도화곡으로 가시지요· 자세한 건 가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종산은 이어 곽석산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대장궤와 함께 곡주님을 따라 곧장 도화곡으로 갈 테니 총표두는 항주로 돌아가 내가 없는 동안 표국을 맡아 운영하도록 하시게· 전권을 위임하는 편지를 써주겠네·”
“알겠습니다·”
“도화곡의 상황을 파악한 후 전서구를 날리겠네· 전서가 도착하는 즉시 대별산으로 보낼 수 있도록 표사와 쟁자수들 그리고 표마차까지 넉넉하게 준비 해두시게·”
“알겠습니다·”
나는 이때다 싶어 얼른 덧붙였다·
“가시면 가불염 표사에게 일러 서호삼절을 객원표사로 고용한 다음 최대한 빨리 도화곡으로 보내라고 전해주십시오· 조금만 방심해도 바가지를 왕창 씌우는 분들이니 호구 잡히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라고도 하시고요·”
갑작스러운 서호삼절의 출연에 곽석산은 물론이거니와 이종산 손지백 남궁세옥 남궁소소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들은 모두 서호삼절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의 반응에 서호삼절이 누구인지 모르는 남궁유룡 남궁중백 여종매 섭부용도 덩달아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남궁유룡이 남궁세옥에게 조용히 물었다·
“서호삼절이 누구냐?”
“항주의 유명한 흑도들로 각각 도•검•창을 제법 귀신처럼 잘 다루는 노고수들입니다· 항주의 무림인들은 서호삼견이라고도 부르고요·”
“서호삼견?”
“그렇습니다·”
서호삼견이라는 한 마디가 어떤 부류인지 모든 걸 다 설명해 준다·
남궁유룡 남궁중백 여종매 섭부용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얼른 설명했다·
“흑도의 생리를 그분들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번 일에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제가 모두 책임지겠습니다·”
처음엔 당황했던 사람들은 내 말을 듣고 나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남궁유룡부터 시작해 이내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종산이 곽석산에게 말했다·
“그렇게 하게·”
“알겠습니다·”
“남궁세가에서도 함께 갈 사람들이 있소이다·”
남궁유룡의 말이었다·
모두가 의아해하는 사이 남궁세옥이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나 이종산에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어젯밤 할아버지께서 명령하셨습니다· 후배가 비검대(秘劍隊)의 무사 열 명을 이끌고 국주님과 함께 도화곡으로 가겠습니다·”
비검대는 남궁세옥이 스무 살 때부터 직접 무사들을 골라서 키워 낸 타격대로 본래는 숫자가 백 명에 달했다·
주객이 전도되면 안 되니 아마도 천룡표국의 입장을 고려해 가장 쓸만한 고수 열 명 정도로 추려 올 모양이었다·
그때 남궁소소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궁중백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너는 왜 일어나느냐?”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또?”
“아시다시피 도화곡의 제자들은 모두 여자들이에요· 속세로 나와본 적도 없고 이렇게 오랜 시간 여행을 해본 적도 없어서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닐 거예요·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할 사람이 필요해요·”
“도화곡의 제자들은 입이 없다더냐?”
“그런 뜻이 아니오라····”
“그렇게 하거라·”
갑자기 말을 자르고 들어온 사람은 남궁유룡이었다· 그가 한 번 더 말했다·
“그렇게 해·”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대신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예 할아버지·”
절대 권력자답게 남궁유룡은 한방에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해 버렸다·
서른의 나이에 벌써 초절정 소리를 듣는 손자와 애지중지하는 손녀까지 남궁유룡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아낌없이 내준 것이다· 이종산이 다시 한번 포권을 쥐었다·
“감사합니다·”
“하면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이외까?”
“가장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외까?”
“사천구룡방의 정확한 전력과 고수들의 면면 그리고 그동안 그들이 벌였던 여러 가지 패악질과 사건들에 대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한데 애석하게도 성도는 물론이거니와 사천성에조차 천룡표국의 분타가 없습니다·”
“무림맹에 협조를 구한다면 당문과 청성파를 연결해 주기는 할 것이오· 한데 청성파는 중원무림을 위협할 정도의 큰 사건이 아니라면 좀처럼 속세의 일에 관심이 없고 사천당문은 성도에서 너무 떨어진 곳에 있어 그곳의 사정을 잘 모를 것이외다·”
“부탁한다고 해도 무림방파의 뒤를 캐는 일은 본래 시간이 오래 걸리는 법이지요· 그것이 제 손에 전해지는 시간도 필요하고 말입니다·”
“최대한 빨리 사천으로 믿을만한 사람들을 보내야겠군· 대체 몇 명이나 보내야 하려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나는 이번에도 참지 못하고 또 끼어들었다·
그래도 오늘은 어제와 다르다·
탁자에 함께 앉는 순간부터 내게도 발언권이 주어졌다는 뜻이니까·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남궁유룡이 잔득 호기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이번엔 무슨 의견이신가?”
“어젯밤의 회동으로 사천구룡방이 우리의 계획을 알게 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이건 순전히 저의 실수입니다· 공개적으로 그런 말을 할 때는 좀 더 신중했어야 했습니다·”
“어차피 선전포고를 할 계획이었거니와 자네가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도화곡주께서는 화양표국을 선택했을 것이고 천룡표국이라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을 걸세· 하니 자책일랑 집어치우고 어서 이 늙은이나 또 놀라게 해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