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 마침내 남궁세가로(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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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객들의 환호성은 좀처럼 끝날 줄을 몰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양조창에게 환호를 보내던 사람들이 고작 자객 몇 명 더 죽였다고 이렇게까지 나를 응원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남궁소소 때문이다· 위험에 빠질 뻔한 그녀를 내가 구해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남궁소소가 이곳 사람들에게 얼마나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유명인사가 되셨네요·”
“유명세는 돈이 안 되오·”
“누가 보면 가난뱅이인 줄 알겠네·”
혼란한 틈을 타 나는 아무도 모르게 비격쌍뇌창의 바늘부터 회수해 소맷자락 속으로 숨겼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죽간을 통해 우연히 손에 넣은 선천오법술과 백발노성이 남긴 비격쌍뇌창의 궁합이 이렇게까지 기가 막힐 줄은 몰랐다·
그때쯤엔 남궁세가의 무사 십수 명이 바위로 올라와 주변을 정리했다·
한 사람이 두꺼비 바위의 머리 쪽에 누운 시체를 치우자 가려져 있던 철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힐끗 돌아보니 양조창과 남궁소소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철전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저건 내가 가졌으면 하는데·”
남궁소소는 그때까지 들고 있던 검을 검집에 갈무리했다·
철전을 가지고 더는 다툴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양조창이 내게 물었다·
“무공을 숨기고 있었나?”
“운이 좋았을 뿐이오·”
“운?”
“겸손의 말이 아니오·”
선천오법술과 비격쌍뇌창은 표행을 하던 중에 우연히 손에 넣은 것이다·
결코 내가 열심히 수련을 해서 얻은 것이 아니었다·
“정말 운이라면 곧 끝나겠군·”
“그럴지도·”
“철전은 너의 것이다·”
양조창은 남궁소소를 잠시 눈에 담더니 연못 위로 몸을 날렸다·
그러곤 올 때도 그랬던 것처럼 표표한 경신법을 펼치며 달려나갔다·
나는 두꺼비 바위의 머리로 가서 철전의 꼬리를 잡았다·
이어 내공을 주입해 한 번에 힘차게 뽑았다·
화살을 뽑은 순간 손이 저절로 하늘로 향했다·
그러자 연못 건너편에서 지켜보고 있던 방문객들이 또다시 우레와 같은 환호성을 질러댔다·
“와아아아!”
나는 방문객들을 뒤로하고 남궁소소에게 말했다·
“우리도 이제 그만 돌아갑시다·”
“쪽배를 타고 갈 건가요?”
“그래야지·”
“직접 삿대를 찍고요?”
“물론이오·”
“혹시 모르고 있어요?”
“무얼 말이오?”
“엉덩이에서 피나잖아요·”
무심코 뒤를 돌아본 나는 화들짝 놀랐다·
볼기 부위의 옷자락이 손가락 두 마디 정도 찢어져 있고 거기서 흘러내린 피가 바지를 흥건하게 적시는 중이었다·
처음 자객들이 나타났을 때 닥치는대로 날렸던 불가사리 모양의 날붙이에 찍힌 것이 분명했다·
“이게 언제!”
의각(醫閣)에 도착한 나와 남궁소소는 각자 다른 방으로 안내되었다·
늙은 의원은 나를 침상에 엎어 놓더니 다짜고짜 엉덩이를 까고 온갖 약재를 발라대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바늘이 훅 들어왔다·
“읍!”
“마비산(麻傳散)이 잘 안 듣는군·”
“그럼 조금 있다가 하시죠·”
“지금까지 안 듣는다면 이게 최선인 겁니다·”
늙은 의원은 무려 일곱 바늘을 거의 생으로 꿰맸다·
그런 다음 금창약을 잔뜩 바르고 깨끗한 천으로 감아준 후 나갔다·
얼마나 이를 악물었던지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좀 어떤가?”
말과 함께 방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남궁세옥이었다·
한 걸음 뒤에서는 호위무사가 뒤따르고 있었다·
예전에 매소옥을 데리고 다선초당을 찾아갔을 때 본 적이 있는 검사였다·
이름이 동천이었던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려는 나를 남궁세옥이 만류했다·
“그냥 엎드려 있게·”
나는 그래도 기어이 일어나 두꺼운 방석을 깔고 조심스럽게 앉았다·
남궁세옥도 맞은 편에 있는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소소 소저는 좀 어떻습니까?”
“무사하네·”
“대체 뭐 하는 작자들이랍니까?”
“왜국의 무사들이었네·”
“왜놈들이라고요?”
“작년 가을에 할아버지께서 왜구를 크게 소탕하신 적이 있네· 그때 젊은 두목을 포함해 십여 명을 생포해 뇌옥에 가두었는데 알고 보니 두목이 대단한 귀족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였던 모양일세·”
”귀족 가문의 후계자가 왜 그런 짓을?”
“몇 년 사이 동해에 출몰하는 왜구들은 단순한 해적단이 아닐세· 왜국 내의 세력 싸움에서 밀려난 후 재건을 위해 동해에 상륙한 귀족의 가병들이지·”
“그런 것들이 귀족이라고요?”
“놈들은 며칠 동안 바닷가 여러 마을을 돌며 돈이 될만한 것들과 여자와 노예로 쓸 아이들을 약탈한 후 돌아가곤 하지· 대형 선단이 상륙했을 때는 가까운 소도시까지 진격해 올 때도 있고·”
“천인공노할 놈들 같으니라고!”
“아무튼 그때 이후로 적지 않은 뇌물을 가지고 와서 자신들의 소주군을 풀어주길 요청했네· 하지만 씨알도 안 먹히자 이젠 자객을 보내온 것일세·”
“혼란을 틈타 소소 소저를 납치한 다음 인질로 삼고 교환을 할 작정이었을 겁니다· 잠입은 연못과 연결된 수로를 통했을 것이고요·”
“짐작하는 대로일세·”
“그만하길 천만다행입니다·”
“자네가 지켜준 덕분이지·”
“제가 아니었어도 가주님께서 그 무시무시한 궁술로 소저에게 접근하는 자객놈들의 명줄을 끊어 놓았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자네가 죽음을 무릅쓰고 소소를 지키려고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
“사내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겁니다·”
“양조창은 그러지 않았네·”
“···?”
“소소는 항상 자기가 먼저 천룡표국의 객원표사가 되길 자처했다고 말했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네·”
“역시 알고 계셨군요·”
“자네도 날 바보로 보지는 않았군·”
“창룡검 남궁세옥을 천하의 누가 바보로 볼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자야말로 진짜 멍청이겠지요·”
“소소를 두고 하는 말인가?”
“그게 그렇게 되는군요·”
나와 남궁세옥은 동시에 훗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조용히 다시 물었다·
“왜 속아 주신 겁니까?”
“속아준 게 아니라 궁금해서 지켜본 것이네· 저 녀석이 왜 저런 짓을 하고 다니나 하고· 매사에 제멋대로였어도 그렇게까지 엉뚱한 짓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 객원표사라니·”
“혹시 남궁가주님께서 편지까지 보내시어 저를 데려오라고 당부하신 것과 좀 전에 있었던 비무에 갑자기 소저를 참여시키신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까요?”
“짐작하는 대로일 걸세· 그리고 나는 이제 더는 궁금하지 않게 되었네· 내가 볼 수 있는 것을 할아버지께서 보지 못 하셨을 리 없겠지·”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께서는 아무도 보지 못한 것까지 보신 모양이네· 잠시 후 주연(酒宴)에 가면 자네가 할아버지의 새로운 궁금증을 깨끗이 해소해 줄 수 있기를 바라네·”
의미심장한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마지막에 남궁유룡이 봤다고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선천오법술은 눈으로 본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비격쌍뇌창은 터럭보다 약간 굵은 바늘 하나만 썼다·
해 질 무렵이었는 데다 반짝임도 없는 청동빛이어서 제아무리 남궁유룡이라고 해도 이십여 장 밖에서는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였다·
‘귀영무다!’
천하십대권사 중 한 명이자 맨손 격투에 관한 한 북방 삼성에서 적수를 찾아볼 수 없었다는 무적자 북해투왕 혁방세의 비전절기·
그는 곤륜파에게 쫓겨 청해성을 떠나 머나먼 항주까지 와서 숨어지내고 있었다·
다시 말해 곤륜파의 공적이라는 뜻이다·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주연은 무슨 말씀입니까?”
“금하루에서의 저녁 식사가 그렇게 끝난 것이 죄송하다시며 할아버지께서 주연을 제안하셨네· 하여 내원의 가주부(家主府)에서 양가의 어른들끼리 모여 가볍게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계시지·”
가주부라는 이름만 들어도 어떤 곳인지 짐작이 간다·
남궁세가주의 집무실이자 거처로 천룡표국으로 치면 표왕부와도 같은 곳이다·
“양가라시면····”
“남궁가와 천룡표국 말일세·”
“금대선생과 양가장은 어쩌고요?”
“그분들께선 급한 일이 있다시며 먼저 떠나셨네·”
남궁유룡을 직접 만나 축하까지 했으니 급한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먼저 떠날 수도 있다·
장원도 불과 한나절 거리인 남경에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는 건 삼척동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제야 이종산과 두 명의 노인네들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그들은 남궁유룡에게 잡혀 간 것 같았다·
내가 세 사람과 입을 맞추지 못하도록 하려는 조치가 아니었을까?
남궁세옥은 양가의 어른들이 중요한 만남을 가지는 동안 대공자로서 좀 전에 있었던 일들을 처리한 모양이었다·
보고를 위해 가주부로 돌아가는 길에 잠깐 내게 들렸던 것이고·
이유는 모르겠으나 호의가 잔뜩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그럼 잠시 후에 보세·”
그 말을 끝으로 남궁세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호위무사인 동천과 함께 나가려다 말고 내게 물었다·
“아까부터 어린 소저 하나가 의각의 입구에서 서성거리고 있네· 경계무사들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매염방의 은약빙이라고 했다는데 혹시 아는 사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들여보내 줄 테니 잠깐 만나 볼 텐가?”
“아닙니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습니다·”
“그렇군·”
남궁세옥과 동천이 진짜로 나가자 시비가 하나 들어왔다·
그녀는 정갈하게 접은 옷가지들을 침상 발치에 조심스럽게 놓으며 말했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으시면 바깥에 있는 무사들이 가주부로 안내해 드릴 겁니다·”
시비까지 나가자 나는 혼자가 되었다·
옷을 갈아 입은 후에도 밖으로 나가지 않고 창가에 섰다·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밖으로 나가는 순간 왠지 많은 것들이 달라질 것 같아서였다·
어둠이 내린 창밖 하늘엔 오늘따라 별이 유난히 많다·
온갖 상념들이 머릿속에서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전생의 일들과 환생 후 겪은 일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지 모를 일들이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오가며 나를 달리는 말처럼 어디론가 이끌었다·
그러다 어쩌면 오늘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남궁소소를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문득 깨달았다·
그건 결코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만나야겠어·’
그제야 나는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가주부로 안내해 줄 거라던 무사를 꽁무니에 달고 회랑을 한참 걸어갔다·
잠시 후 대여섯 명의 무사들이 삼엄하게 지키는 방이 나타났다·
“남궁 소저를 뵈러 왔습니다만·”
책임자로 보이는 무사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안쪽에다 대고 시원한 소리로 말했다·
“천룡표국의 이 공자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직접 문까지 열어 주었다·
“고맙소·”
“저희가 더 감사하지요·”
왠지 호의가 느껴지는 무사의 말을 뒤로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대답도 듣지 않고 문을 열어 주더라니 안쪽은 손님을 맞는 작은 다실이었다·
다실의 한쪽 끝에는 길게 늘어져 있는 주렴과 함께 침실로 들어가는 또 다른 육각형의 통로 겸 입구가 있었다·
나는 주렴 너머를 향해 말했다·
“가주님께서 나를 부르셨는데 아무래도 아주 곤란한 질문을 하실 것 같소· 어쩌면 그 대답 여하에 따라 이번엔 내가 소저를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르겠소· 그 전에 소저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
푸르르렁!
흡사 당나귀가 투레질하는 듯한 소리에 입 밖으로 나오던 말이 뚝 끊어졌다·
그 작은 콧구멍에서 저렇게 우렁찬 소리가 나온다고?
주변을 둘러보니 숯불이 담긴 큼지막한 청동화로가 보였다·
화로 속에는 숯덩이를 뒤집는데 쓰는 부젓가락 두 개가 꽂혀 있었다·
부젓가락을 집어 화로를 세차게 두들겼다·
땅땅땅땅!
요란한 소리에 코 고는 소리가 뚝 그쳤다·
잠시 후 주렴 사이로 힘깨나 쓸 것 같은 젊은 여자가 슬그머니 나타났다·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누 누구요?”
“소소 아가씨의 시비입니다·”
“아가씨는 어디 가시고·”
“나가셨어요·”
“어디로?”
“저기로요·”
그러면서 창문을 가리켰다·
후다닥 달려가 창문을 열어보니 무사 두 명이 창밖에 편안하게 앉아 잠을 자고 있었다·
행여나 가주부에서 열리는 주연에 참석해야 할까봐 무사들의 혈도를 짚고 탈출한 모양이었다·
무언가 내키지 않는 거다·
뒤늦게 소란을 느끼고 들어온 무사들도 매우 당혹스러운 눈치였다·
“아가씨가 갈만한 곳이 있소?”
“너무 많습니다·”
“함께 찾아봅시다·”
“지금요?”
“꼭 찾아야 하오·”
그때부터 무사들의 도움을 받아 한 식경 정도 장원을 뒤졌다·
하지만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남궁소소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가 평소 좋아했다는 장소들만 잔뜩 알게 됐다·
나는 빨리 주연에 참석해야 한다는 무사의 간곡한 부탁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가주부로 향했다·
고아한 정취가 느껴지는 방안엔 기다란 탁자를 가운데 두고 양쪽 가문의 남자들이 마주보며 앉아 있었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삼 대 삼이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시간은 고작 두 식경 정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그동안 이들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조용히 곽석산의 곁에 가서 앉았다·
이종산이 나직하게 나무랐다·
“왜 이렇게 늦었느냐?”
“죄송합니다·”
남궁중백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다친 곳은 좀 어떤가?”
“대수롭지 않은 부상입니다·”
“그럴 리가 있나· 하지만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네· 목숨을 돌보지 않고 소소를 구해주려고 한 것은 더욱 고맙고·”
구해준 것이 아니라 구해주려고 한 것이라 말했다·
짐작했던 대로 내가 아니었어도 남궁소소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어찌 보면 천하의 뇌검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보는 앞에서 그의 손녀가 죽는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소리긴 했다·
남궁유룡이 말했다·
“소가주의 말씀이 맞네· 오늘 자네가 한 일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암 그렇고말고·”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자네의 무공이었네· 단언하건대 오늘 자네가 사용했던 무공들 중 어떤 것은 천룡표국의 것이 아니었네· 그렇지 않은가?”
마침내 올 것이 왔다·
중원 대륙의 넓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무림인들의 숫자는 밤하늘의 별처럼 많다·
제아무리 견문이 넓은 사람이라고 해도 그들 모두를 알 수는 없다·
특히 무공 초식같은 경우 수련하는 장면을 훔쳐보았거나 직접 손속을 나눠 보지 않았으면 알아 볼 수가 없다·
북해투왕처럼 문파나 제자도 없이 홀로 비전절기를 익힌 채 독보강호 하는 고수들의 경우엔 거의 절대적으로 그렇다·
과연 대륙의 가장 동쪽 바닷가 인근에 사는 남궁유룡은 북방 삼성을 무대로 활동했던 북해투왕의 무공을 알아보았을까?
일단 양불군과 모삼풍은 알아보지 못했다·
알아보았다면 나의 약점을 알게 된 것인데 그렇게 도망치듯 떠났을 리 없다·
그때 이종산의 전음이 들려왔다·
[무슨 말이든 당당하게 하거라· 만약 네가 감당해야 할 것이 있다면 이 아비도 함께 감당할 것이니라·]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노인네 내가 북해투왕에게서 무공을 배웠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렇게 조심을 한다고 했건만·
그런데도 여태 모른 척 눈을 감아주었다고?
대체 왜?
그걸 알고도 이 자리에 있다면 이종산은 내 생각과 달리 남궁유룡에게 잡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가문과 가문의 만남이라는 걸 생각해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고 있었을 뿐·
“그렇습니다·”
“어느 고인에게 무공을 배웠는지 말해 줄 수 있겠나?”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어째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묻는 것임에도?”
“예외는 있을 수 없습니다·”
“단호하군·”
“죄송합니다·”
“그래서 배사지례는 올렸는가?”
“사부 노릇 하는 것이 번거롭다시며 한사코 거절하셨습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그분은 저의 사부님이십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그렇습니다·”
“한데도 무공을 배웠단 말이지?”
미치겠다·
이 노인네도 알고 있다·
내가 펼친 무공이 북해투왕의 귀영무라는 걸 정확히·
그가 북해투왕과 싸웠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만약 그랬다면 어떻게든 알려져서 강호가 발칵 뒤집혔을 것이다·
두 사람이 비무를 겨루었을 확률은 더욱 낮다·
북해 투왕은 권사고 뇌검은 검사다·
권사가 검을 쓰지 않는 것도 아니고 검사가 권을 익히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각각 권과 검의 극을 본 사람들·
이런 사람들끼리는 비무가 좀처럼 성립되기 어려운 법이다·
무엇으로 겨루든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가 될 테니까·
하면 대체 어떻게 알아차린 걸까?
“그렇습니다·”
“어째서?”
“그는 본래 협객으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지금은 자신을 뒤쫓는 이들을 피해 은둔의 삶을 사시고요· 하지만 그것 역시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들을 해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이라면 말 못 할 곡절이 있지 않겠습니까?”
“세상에 곡절 없는 무림인이 있다든가· 중요한 것은 자네가 그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네· 무공을 배운다는 것은 은원도 함께 계승한다는 뜻· 만약 그들이 그에게서 받아내지 못한 혈채를 자네에게 요구한다면 감당할 수 있겠는가?”
“최선을 다해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겠습니다·”
“반대로 그가 자신을 노리는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그때는 자네가 대신 복수를 해줄 것인가?”
“···!”
“그것까진 생각해 보지 않은 모양이군· 하긴 그가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을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지· 하지만 그는 생각했을 것이네· 하여 자네에게 짐을 지워 주지 않으려고 한사코 배사지례를 거절한 것이지· 그는 그런 사람이라네·”
“그분을 잘 아시는지요?”
“그는 나의 의제일세·”
“예에?”
“예에?”
“예에?”
나와 손지백과 곽석산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온 신음이었다·
나는 남궁유룡의 말에 한번 놀라고 손지백과 곽석산의 반응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리고 신음을 내지는 않았지만 남궁중백과 남궁세옥도 내가 무공을 배운 스승이 북해투왕이라는 걸 알고는 화들짝 놀라는 눈치였다·
남궁유룡이 말했다·
“아무래도 숙백부들께서는 자네가 누구에게 무공을 배우는지 알고 계셨던 모양이로군· 그렇다면 당연히 부친께서도 알고 계셨을 것이고·”
딱 내 심정을 대변하는 말이었다·
이종산이 말했다·
“제게도 궁금하신 것이 있다면 기탄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가주님과 그분의 인연에 대해서도 듣고 싶군요·”
말은 부드럽지만 태도는 당당했다·
“그건 어른들끼리 하도록 하지요· 오늘 밤은 다른 일정일랑 모두 제쳐두고 세 분과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술을 마시고 싶은데 시간을 내어 주실 수들 있으신지요·”
“기꺼이 내겠습니다·”
그토록 만나보기를 소원하던 뇌검과 밤새 술을 풀 생각에 곽석산과 손지백은 벌써부터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남궁유룡이 다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른 이를 욕보일 생각은 없으나 천하십대권사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강한 순서대로 서열을 정한다면 금대선생은 가까스로 말석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네· 그러나 자네의 사부는 수좌를 다툴 것이고·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겠는가?”
“큰 기연을 얻었으니 용맹정진하라는 뜻인 줄 압니다·”
“그는 항상 자신의 대에서 절학이 끊어질 것을 염려했지· 뛰어난 무재를 지닌 이는 많으나 업까지 계승할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까· 한데 이렇듯 훌륭한 제자를 둔 걸 보니 이제야 내 마음이 조금 놓이는군·”
“부끄럽습니다·”
“지금처럼 끝까지 사승의 의리를 지켜주시게· 훗날 만약 자네가 그로 말미암아 감당해야 할 빚이 있다면 나와 남궁세가도 기꺼이 나누어 감당할 것인즉·”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귀문의 십일대 제자 이정룡· 남궁유룡 사백부님을 뵙습니다·”
그리고 남궁유룡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