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 마침내 남궁세가로(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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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뉘엿뉘엿 기울 무렵이 되자 다섯 개의 삼층 누각은 방문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때부터는 누각 앞 청석이 깔린 길에까지 사람들이 진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황금빛 노을이 내려앉은 연못 너머의 누각 쪽으로 모두가 시선을 던졌다·
남궁장 안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누각이라는 금하루(金露樓)에 남궁유룡과 귀빈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사방이 시원하게 트인 금하루에 도착했을 때는 남궁세가의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손님들까지 모두 도착한 상태였다·
각자의 앞에는 고풍스러운 백자 찻잔이 놓인 상태에서 젊은 시비들이 차 시중까지 드는 중이었다·
분위기로 미루어 이렇게 앉아 있었는지가 꽤 된 듯했다·
곽석산과 손지백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림의 한 배분 높은 남궁유룡을 기다리게 한 것도 문제지만 양가장 쪽 사람들보다도 늦은 것은 더욱 큰 문제였다·
“저희가 결례를 범한 듯합니다· 이렇게 기다리시는 줄을 모르고 그만·”
“국주께서 무언가 오해를 하셨군요· 실은 아까 우리가 헤어지고 난 후 줄곧 손님들과 함께 이곳에서 차를 마시며 저녁이 되기를 기다리던 중이었소이다· 껄껄·”
곽석산과 손지백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이건 우리가 늦은 것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우린 잠깐 인사만 하고 객방으로 쫓겨났지만 양가장 쪽 사람들로 짐작되는 저 세 명에게는 지금까지도 시간을 할애해 주었다는 말이 되니까·
이종산은 동요하는 기색 없이 차분하게 응수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인사들 나누고 자리에 앉도록 하십시다· 이쪽은 그 유명한 항주 천룡표국의 국주이시고 이쪽은 설명이 필요 없는 남경 양가장의 장주이시오·”
“이종산입니다·”
“양불군입니다·”
평생 중병기를 수련한 사람답게 양불군은 육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무색하게 우람한 근육을 자랑했다·
하지만 정작 강렬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안대를 찬 한 쪽 눈이었다·
소문에는 젊은 시절 군문의 요청으로 몽골 기병 일만이 포진해 있는 적진에 침투 포로로 잡힌 중요 인물을 데리고 탈출하다 생긴 부상이라고 했다·
송대부터 군문에 양가창법을 전수해온 양가장은 지금도 군벌들과 매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두 사람을 필두로 나머지 사람들도 일일이 인사를 주고받았다·
한데 양가장 쪽에 정말 생각지도 않았던 거물이 하나 섞여 있었다·
푸르스름한 안광에 가슴까지 내려오는 검은 턱수염이 인상적인 칠순 노인이 자신을 소개했다·
“모삼풍입니다·”
“금대선생(金帶先生)을 여기서 뵙는군요·”
천하십검이 있다면 천하십권도 있다·
금대선생 모삼풍은 산동제일의 권사이자 천하십권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극초절정의 고수였다·
그는 본래 산동의 서원들을 떠돌며 강론을 펼치던 유학자였다·
말이 좋아 강론이지 사실은 자신을 써줄 곳을 찾아 헤매던 낙방 수재였을 것이다·
한데 어느 날 산중에서 우연히 은둔고수가 남긴 신공비급을 얻었고 오랜 세월 폐관수련을 한 끝에 오늘날과 같은 고수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독보강호 하며 악명 높은 흑도의 고수들을 쓰러뜨리는 한편 무림맹의 위험한 일들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돕곤 했다·
덕분에 백도 무림인들로부터 존경과 경외를 한몸에 받는 중이었다·
생각지도 않은 거물의 등장에 곽석산과 손지백은 몸까지 뻣뻣하게 굳었다·
나도 온몸에서 전율이 흐르는 것 같았다·
천하십검과 천하십권의 인물들을 한자리에서 보다니·
‘이정룡 진짜 출세했구나·’
한데 더욱 놀랄 말이 남궁유룡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금대선생께서는 한 달 전 양조창 공자를 제자로 거두셨다고 하외다·”
곽석산과 손지백은 그대로 석상이 되어 버렸다·
어려서부터 기재라고 소문난 양조창이 가문비전의 창법에 이어 모삼풍의 권법까지 잇게 된다면 그야말로 엄청난 괴수가 탄생할 것이다·
그러나····
‘이건 내가 아는 것과 다른데·’
모삼풍이 어떤 연유로 양조창의 사부가 되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 구태여 함께 온 것은 양조창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임이 분명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곽석산이나 손지백과 달리 이종산은 시종일관 평정심을 유지했다·
이 와중에도 그는 양불군을 향해 인사를 잊지 않았다·
“양가장에 큰 경사가 있었군요· 축하드립니다·”
“못난 자식이 기연을 얻은 것은 기쁜 일이나 행여 금대선생의 명성에 누를 끼치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조창은 빈노가 지금까지 만나본 그 어떤 후기지수보다 비상한 두뇌에 뛰어난 무재를 지녔습니다· 하니 양 장주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껄껄·”
양불군의 겸양에 모삼풍이 호탕하게 웃으며 한 말이었다·
마지막으로 나와 양조창이 인사를 나누었다·
“양조창입니다·”
“이정룡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실물로 본 사람 중에 가장 잘생긴 사람은 단연코 남궁세옥이었다·
두 번째가 남장을 한 남궁소소고 세 번째가 무림맹에서 처음 만났던 황보중악이었다·
한데 오늘 아무래도 순서를 바꾸어야 할 것 같았다·
양조창은 남궁세옥 바로 다음이었다·
소문에 양가장주의 부인이 절세미인이라더니 아무래도 어머니를 닮은 모양이었다·
비상한 두뇌와 뛰어난 무재 건장한 체격 잘생긴 얼굴 거기다 천하십권 중 한 명의 제자가 되는 기연까지·
양조창은 그야말로 모든 걸 가진 완벽남이었다·
‘성격은 별로일 거야·’
대충 인사가 끝나자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를 찾아 앉기 시작했다·
직사각형의 탁자 세 개를 冂자 모양으로 붙여 놓고 상석에는 남궁세가 쪽 사람들이 좌우에는 양가장 쪽 사람들과 천룡표국 쪽 사람들이 마주 보며 앉게 되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남궁소소는 오라비인 남궁세옥의 옆에 조신하게 앉아서는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한 번쯤 눈을 마주쳐 줄 법도 한데·’
때를 맞춰 어디선가 수십 명의 시비들이 먹이를 나르는 개미 떼처럼 나타났다·
그녀들은 온갖 산해진미들을 탁자 위에 정갈하게 올려놓고는 사라졌다·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음식들은 하나같이 지금 막 조리를 한 것처럼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올랐다·
“시장들 하실 텐데 다들 식사부터 하시지요·”
“그 전에 무림의 거목이자 대검호이신 뇌검 남궁유룡 대협의 건강을 기원하며 모두 함께 축배를 들도록 하십시다·”
남궁유룡의 말을 모삼풍이 받았다·
사람들은 시비들이 각자의 앞에 놓고 간 호리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온 덕담들을 한마디씩 올린 후 동시에 잔을 꺾었다·
당연히 나도 그 대열에 동참했다·
‘크어!’
술을 모두 넘겼다가 숨을 내뱉는 순간 맑은 주향 대신 지독한 군둥내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면서 콧구멍이 화악 뚫리는 게 느껴졌다·
‘읍!’
주변을 돌아보니 나만 화들짝 놀랐을 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향을 음미하고 있었다·
심지어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손지백은 모르는 척 한 잔을 더 따라 마시기도 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던 내게 남궁소소가 딱 들어왔다·
그제야 나는 이 군둥내 나는 술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부창화인지 뭔지 하는 꽃에서 맡았던 바로 그 악취였다·
하지만 남궁소소는 지금 고개를 돌려 노을이 내려앉은 연못을 우수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며 조용히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맞는 것 같은데·’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다는 게 딱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다만 대체 왜 이런 골탕을 먹이는 지 모르겠다·
그때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옆을 돌아보았다·
양조창이 나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가만히 남궁소소를 한번 바라보았다가 다시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잠깐 남궁소소를 향했다가 돌아왔을 뿐인데 좀 전에는 없던 살기가 느껴졌다·
‘저 인간은 또 왜 저러지?’
그사이 어른들 사이에선 가벼운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식사가 한창 진행 중일 무렵 양불군이 이종산에게 말했다·
“천룡표국에도 큰 경사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북경에서는 아직까지도 향시와 회시를 동시에 석권한 천재에 대한 소문이 자자합니다·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아비는 자식을 내세움에 있어 겸손해야 한다·
이종산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차분하게 응수했다·
“매화가 아름답기는 하나 보리꽃 피기를 기다리는 농부에게는 잠깐 보기만 좋고 말 일이지요· 무림문파의 후기지수가 문과에 급제한 일이 꼭 그렇습니다·”
“천룡표국을 무림문파라고만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백도인들로부터 무림맹으로의 입맹을 수차례 요청받았을 때도 그런 이유를 앞세우신 것으로 압니다만·”
갑자기 끼어든 사람은 모삼풍이었다·
그러고 보니 남궁세가와 양가장 모두 무림맹의 대표적인 맹방이었다·
의도한 것인지 모르지만 지금 모삼풍의 말은 남궁세가와 양가장을 하나로 묶는 한편 천룡표국은 다른 정체성을 지녔다는 식으로 은근히 부각하는 것이었다·
“무림맹에 입맹을 하지 않은 것은 천룡표국을 찾는 고객들에게 피해가 갈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천룡표국이 무림문파가 아니라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지요·”
“달팽이에게도 뿔이 있지만 소라고 하지 않고 벌의 등에도 무늬가 있지만 호랑이라고 하지는 않지요·”
나는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무림의 명숙이라고 하지만 이건 말이 좀 지나치지 않는가·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종산은 자리가 자리인지라 일단 마음을 다스리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비슷한 연배인 손지백은 참지를 못 했다·
“금대선생께서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나는 표왕의 협명을 오래전부터 흠모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모욕을 주려는 뜻은 추호도 없었음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무림문파가 아니라는 말이 나쁜 말도 아니고요· 다만····”
“···?”
“수많은 무림문파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천룡표국을 비롯한 여러 표국들이 큰 변고를 겪지 않고 가업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임을 간과해선 안 될 것입니다·”
말 속에 뼈가 아주 굵직하다·
이번엔 곽석산이 참지 못하고 나섰다·
“그건 잘 못 알고 계신 겁니다· 강호가 어지럽고 도둑 떼가 들끓을수록 표국업은 흥하는 법입니다· 백도 무림문파들의 헌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금대선생께서는 지나친 억측으로 천룡표국을 욕보이지 말아 주십시오·”
“좀도둑들이 들끓을 때야 그렇겠지요· 설마하니 양가장과 남궁세가가 고작 좀도둑들의 발호를 억누르려고 무림맹에 동참했다고 생각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무림맹에 입맹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모두 흑도가 아닌 것처럼 입맹을 했다고 해서 전부 사명감의 발로하고 할 수도 없지 않을까요?”
“그만하시게·”
낮지만 묵직한 음성이 이종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적절한 순간에 끊어 주었다·
더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반박의 논리를 만들어야 하고 그러다 자칫 무림맹 최대의 맹방 중 한 곳인 남궁세가를 욕보이는 수가 있다·
“금대선생께서도 그만하시지요· 천룡표국이 무림맹에 입맹을 하지 않은 것으로 비난받을 이유도 없지만 오늘은 그런 걸 논할 자리도 아닌 듯합니다·”
양불군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모삼풍을 만류했다·
그는 매우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모삼풍의 직언이 자신의 의중인 양 비치는 것을 경계하는 것처럼·
“으음? 이거 어쩌다 보니 내가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한 모양입니다· 천룡표국 분들은 물론이거니와 남궁 대협께도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총표두와 대장궤께서도 하실 말씀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이종산의 말에 곽석산과 손지백도 남궁유룡에게 사과를 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곽석산은 이미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손지백은 화를 속으로 삭이느라 조용히 눈을 감아 버렸다·
“용과 범들이 만나니 역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구려· 너무 미안해들 할 것 없소이다· 오히려 여러분 덕택에 남궁장이 모처럼 활기를 띠는 듯하외다· 껄껄껄·”
자칫 무례하다고 화를 낼 법도 한데 남궁유룡은 산전수전 다 겪은 전대의 노강호답게 대범한 모습으로 받아넘겼다·
한데 모삼풍이 여기다 뜻밖의 사족을 붙였다·
“대협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한결 가볍군요· 그렇다면 기왕에 시작한 기 싸움이니 조금 더 여흥을 돋구어 보는 건 어떻습니까?”
“무슨 말씀이시오?”
“양가장과 천룡표국에서 대표로 한 명씩 나와 무공을 겨루는 것이지요· 고래로 무림인들이 만나면 비무를 통해 각자의 무공을 발전시키고 친구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곽석산과 손지백이 두 눈을 부릅떴다·
시종일관 평정심을 잃지 않던 이종산도 이번만큼은 살짝 당황한 듯했다·
남궁유룡이 모삼풍에게 물었다·
“대표라고 하면 누가 나온단 말입니까?”
“여흥과 친선을 위한 비무에 어른들이 나오실 수는 없겠지요· 각자의 진전을 이은 후기지수들로 하여금 서로의 실력을 겨루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면 어느 한쪽이 지더라도 큰 흉이 아닐뿐더러 더욱 정진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말인즉슨 나와 양조창을 싸움 붙이겠다는 뜻이다·
짐작하건대 지금까지 모삼풍이 한 모든 발언은 이걸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그걸 모르고 곽석산과 손지백은 먹물 든 늙은 구렁이의 계략에 말려든 것이고·
알았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을 것이다·
두 사람에게 천룡표국은 자신들이 살아온 삶의 족적이었다·
천룡표국이 누군가에게 욕보이는 걸 참고 지켜볼 사람들이 아니다·
‘학문적 소양의 대결로 몰고 가도록 도와준다더니만·’
재밌는 건 남궁유룡에게서는 당황한 기색을 조금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아무래도 그는 지금의 상황을 충분히 예견한 것 같았다·
대범하게 넘어가 준 것 역시 사실은 모삼풍이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도록 은근슬쩍 도와준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와 양조창의 비무를 통해 진짜 무공 실력을 보고 싶은 것이다·
그건 좌우에 앉아 있는 남궁중백과 남궁세옥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오직 한 사람 남궁소소만 얼굴이 노래지고 있었다·
남궁유룡이 양불군에게 먼저 물었다·
“양 장주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외까?”
“금대선생께서 오늘 양가장과 천룡표국 모두를 골탕 먹이기로 작정을 하신 모양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비 온 뒤의 땅이 더 굳어진다는 말도 있거니와 비무를 계기로 두 가문이 더 가까워지면 그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국주께서도 동의를 하시외까?”
“친선을 위한 비무라면 나쁠 것이 없지요·”
거절할 수가 없다·
거절하는 순간 겁쟁이라는 걸 스스로 시인하는 셈이 되어 버리니까·
곽석산과 손지백은 그야말로 눈앞이 캄캄해진 사람의 얼굴을 했다·
“이 늙은이의 즐거움을 위해 두 가문에서 이토록 애를 써주시는데 남궁장에서 가만히 있을 수야 없지요· 소소야 너도 준비를 하거라·”
“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