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 마침내 남궁세가로(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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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룡표국은 한결같았다·
여전히 표물을 맡기러 온 사람들과 표행을 떠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사공자님 돌아오셨습니까?”
“사공자님 돌아오셨습니까?”
마주치는 표사와 장궤들마다 내게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해왔다·
그러나 천룡표국 안에서도 숫자가 가장 많은 쟁자수들은 조용히 묵례만 보냈다·
전생의 내가 딱 저랬다·
소위 용혈이라 불리는 표왕의 일족이 지나가면 감히 말도 붙이지 못하고 멀리서 조용히 머리와 허리만 숙였다·
표사는 조장도 되고 각주도 되고 당주도 될 수 있다·
하지만 한번 쟁자수는 죽을 때까지 쟁자수였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아무리 큰 공을 세워도 쟁자수는 표국에서 가장 낮은 신분이었다·
지금도 젊은 표사 세 명이 십여 명의 쟁자수들을 일렬로 세워 놓고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방금 뭐라고 했소?”
서른 중반의 표사가 칠순 가량의 상자수에게 눈을 희번덕거리며 물었다·
“저희 표국에선 원래부터 겨울 동안 말에게 먹이는 콩은 벌레 먹은 걸 대량으로 구입해서 썼습니다· 말에게 해롭지도 않은 데다 같은 비용으로 훨씬 많이 먹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절대 뒷돈을 받고 싸구려를 들여온 게 아닙니다·”
“콩에 문제가 없다면 당신들의 손이 문제겠군· 우릴 골탕 먹일 생각에 무언가 해로운 것을 섞지 않았다면 왜 하필 우리 말들만 닷새째 설사를 멈추지 않는단 말이오?”
“그건 물과 먹이를 바꾸는 과정에서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틀 전에 이미 진정세로 돌아섰고요·”
내가 말머리를 돌려 다가가자 주변에 있던 쟁자수들이 깜짝 놀라며 앞다투어 묵례를 해 왔다·
세 명의 표사들은 인사는 하지 않고 아래위로 나를 훑기만 했다·
꾀죄죄한 차림새에다 새파랗게 젊기까지 하니 먼 길을 다녀온 다른 당 소속의 신입 표사쯤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물었다·
“못 보던 얼굴들입니다만·”
“최근에 들어왔소이다·”
“신입 표사들이십니까?”
“훗 신입은 아니고·”
신입이라는 말에 세 명이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경력 표사들이시군요·”
“귀하는 누군데 자꾸 캐묻는 것이오?”
“십칠각주입니다·”
“대체 몇 살이신데····”
“해가 바뀌었으니 스물세 살입니다·”
“정말 각주이시오?”
“거짓말일 것 같습니까?”
표사들은 살짝 당황해했다·
직급이 각주라면 절대 함부로 해선 안 되는 것이다·
천룡표국의 기강은 군대보다 더 엄격하다·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저희는 보름 전 강룡당으로 들어온 표사들입니다· 이전에는 하남성 여남(決南)의 조양표국에서 10년 넘게 표사일을 했었지요·”
“10년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말에게 먹일 콩도 볼 줄 모르는 것들이 무슨 표사랍시고· 그리고 처음 대면하는 상관에게 이름도 밝히지 않는 것은 무슨 경우지?”
“예?”
“혼잣말입니다·”
“···!”
“···!”
“···!”
상식적이지 않은 나의 어법에 세 표사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이렇게 슬쩍 발을 빼는 것은 아무리 각주라고 해도 다른 당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단순한 사공자의 신분도 아니니 더욱 조심해야 한다·
이들은 지금 쟁자수들을 상대로 군기를 잡고 있었다·
표사들이 표국을 옮기면 흔히 하는 짓거리들이다·
편견은 무서운 것이어서 이렇게 한동안 조져 놓아야 거칠고 무식한 쟁자수들을 다루기가 수월해진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수십 년 경력의 늙은 상자수들이 새파랗게 젊은 표사들에게 갖은 모욕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표사들을 뒤로하고 늙은 상자수에게 물었다·
“허리는 좀 어떠십니까”
“예?”
“두 달 전 진창에 빠진 마차를 끌어 올리다가 허리를 다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저를 아십니까?”
“할아버지 때부터 천룡표국을 위해 헌신해오신 마지막 상자수 용소백 노사가 아니십니까?”
“노사라뇨 가당치 않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용소백은 감개무량한 표정이었다·
천룡표국에서 오랜 세월 일해온 쟁자수들만이 느끼는 저런 심정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직 강룡당에 계시지요?”
“이번 달까지는 그렇습니다·”
“이번 달까지라면?”
“보시다시피 표행을 다니기엔 너무 늙어버렸습니다· 표행을 나가지 못하는 쟁자수는 천룡표국에서 설 자리가 없지요·”
용소백의 깊게 팬 주름에 근심이 가득했다·
어느 표국이든 쟁자수의 나이가 일흔을 넘기면 근속 연수에 따라 약간의 돈을 쥐여주며 강제 퇴직시킨다·
쟁자수가 하는 일들이 워낙 중노동이어서 더는 데리고 쓸래야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 노인은 지금 일을 쉴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그는 수년 전 광산에서 죽은 아들을 대신해 세 명의 어린 손자들을 사실상 먹여 살리고 있었다·
젊은 며느리가 저잣거리에서 국수를 말아 팔지만 맛이 더럽게도 없어서 적자나 겨우 면하는 수준이었다·
잠깐 사이 주변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근 한 달 만에 돌아온 사공자가 마상에서 늙은 쟁자수를 붙잡고 있으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몰려온 것이다·
몰려온 사람들 중 열에 아홉은 쟁자수들이었다·
“십칠각으로 오시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요?”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저같이 늙은 것을 데려다 무엇에 쓰시게요?”
“쟁자수들을 뽑고 가르치고 훈련해 주십시오· 대우는 10년 경력 표사의 두 배를 드리겠습니다·”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한 분야에 평생을 바치면 그 분야에 관한 한 다른 사람들은 범접할 수 없는 지혜가 생긴다고 했습니다·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웅성거림이 조용하게 번져갔다·
사람들은 내가 자신들을 대표하는 상자수에게 깍듯한 태도를 보인 것에 대해 고마워했고 파격적인 제안을 한 것에 대해 부러움의 눈길을 보냈다·
그때 소식을 듣고 달려온 강룡당 소속의 오래된 표사 하나가 내게 포권지례를 했다·
“사공자님을 뵙습니다·”
사공자라는 말에 용소백을 닦달하던 세 표사들의 얼굴이 노래졌다·
그들은 나와 용 노인을 번갈아 보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혹시 저희 쟁자수들이 무슨 실수라도····”
“강룡당엔 표사들이 텃세 같은 거 안 부립니까? 웬만하면 좀 부리시죠? 그러면서 시건방진 신입 표사들 길도 들이고 그러는 건데·”
***
십칠각에 모인 사람은 장궤 전립성 수석 표사 가불염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었다·
전각 밖으로 나가면 장삼이 호리독사와 함께 화로에 넣을 숯불을 열심히 피우고 있었고·
전립성이 물었다·
“함께 온 이는 누굽니까?”
“처음 만났을 때는 저를 죽이러 온 장강의 수적이었습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제가 길잡이로 써먹었고요·”
“전서의 내용이 사실이었군요·”
“무슨 전서 말입니까?”
“합비 분타에서 보내온 전서에 삼룡채의 수적 이야기가 두어 줄 들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게 저 친구였군요·”
지금 천룡표국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은 중간에 상황이 바뀌는 바람에 내가 백발노성을 주도적으로 호송했고 멋지게 성공을 했다는 정도였다
그 후 성물을 호송하는 일에 새롭게 뛰어들었던 것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소문이 나서 항주까지 닿거나 누군가 전해 주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하지만 내가 백발노성을 성공적으로 호송해서 무림맹에 인계했다는 것만으로도 모두 충분히 감탄해 하고 있었다·
“한데 어찌하여 여기까지 데려온 것입니까?”
“한번 가르쳐 보려고요·”
“예?”
나는 가불염을 돌아보며 말했다·
“몇 달 객원표사로 머물게 하며 이것저것 가르쳐 보십시오· 쓸만하면 정식표사로 채용하고 아니면 쫓아낼 겁니다·”
“알겠습니다·”
수적을 표사로 쓰겠다는 말에 전립성은 눈을 번쩍 떴다·
반면 가불염은 더는 묻지도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여 버린다·
내가 그렇게 하라고 할 때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고 나머지는 차차 가르치면서 알아가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과묵함이 가불염의 가장 큰 장점이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지는 말에는 가불염도 평정심을 잃고 말았다·
“참고로 주정뱅이에 도벽이 심합니다·”
“예?”
이렇게 해서 십칠각의 표사는 무림맹으로 떠나기 전 뽑아 놓고 간 세 명까지 포함해 모두 다섯 명으로 늘어났다·
“신입 표사들은 어떻습니까?”
가불염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옆에서 전립성이 피식하고 웃었다·
이번에는 전립성을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시다시피 세 명의 성이 공교롭게도 전부 왕 씨였습니다· 그 바람에 다른 당과 각의 표사들이 그들을 두고 십칠각의 왕 씨 표사 셋이라는 뜻에서 십칠왕삼표라고 싸잡아 불렀습니다·”
“그래서요?”
“보통은 이런 경우 발끈하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이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나이에 따라 각각 왕대표 왕중표 왕소표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물론 호적에서까지 바꾼 것은 아니고요·”
“예에?”
“이름을 알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나요·”
“재밌는 친구들이군요·”
“빨리 적응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기존에 있던 표사들과의 기 싸움에서도 절대 밀리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다행이군요·”
“공들여 고른 덕분이지요·”
“다른 일들은 어떻습니까?”
“모두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일단 공자님께서 주고 가신 명단의 주루 다섯 곳의 보호일을 시작하는 중입니다· 보호를 요청해 오는 주루와 장원이 줄을 섰으니 표사들을 증원하는 대로 조금씩 확장할 생각이고요·”
“슬슬 표행 의뢰도 받을 준비를 하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표사들을 뽑을 때 쟁자수도 함께 뽑을까 합니다· 그러려면 신입 쟁자수들을 가르치고 기강을 세울만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강룡당에 용소백이라는 늙은 상자수가 있습니다· 나이가 이미 일흔이라 이번 달을 끝으로 퇴직을 하는데 그를 불러다 일을 맡겨보면 어떨까 합니다·”
“너무 늙은 것 아닙니까?”
“직접 표행을 하는 게 아니니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그리고 지금 천룡표국에서 상자수 소리를 듣는 사람들 대부분 그에게서 일을 배웠습니다· 실력 하나만큼은 최고입니다·”
“역시 저랑 같은 생각이실 줄 알았습니다·”
“예?”
“이미 모셔 오기로 했습니다·”
“그게 무슨?”
“강룡당에서 퇴직하는 날부터 십칠각으로 출근할 겁니다· 급여는 중견 표사의 두 배를 약속했으니 알아서 좀 챙겨 주십시오·”
“언제 그런 일을?”
“조금 전 오는 길에요·”
사실 십칠각 돌아가는 사정이야 어느 정도 짐작했던 바였다·
용소백은 이미 오래전부터 점찍어 놓은 사람이었고·
“항상 저희보다 한발 앞서 나가시는군요·”
“전쟁터에선 장수가 가장 앞서 달려야죠·”
“저희도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목장은 어떻게 되어갑니까?”
내게는 회시에서 장원급제한 후 포상으로 받은 천목산 기슭의 버려진 땅 오만 평이 있었다·
두 달 전 마침내 그 땅을 누군가에게 거짓으로 넘겼고 그를 앞세워 목장으로 개발 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목장은 한 달 전 이미 완성된 상태이고 지금은 암망아지 오백 마리를 사들여 기르는 중입니다· 한데 지금 국주님과 총표두께서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왜요?”
“종마로 쓰기 위해 거액을 주고 들여온 보마(賣馬) 수십 필이 있습니다· 어떻게 아셨는지 그중 한 마리를 살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왜요?”
“남궁세가주의 팔순 잔치 때 선물로 가져가실 계획인 것으로 압니다·”
“혹시 그 목장의 실소유주가 저라는 걸 눈치챈 건 아니고요?”
“총표두님께서 항주에 있는 보마들을 수소문하다가 우연히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꼬리를 모두 잘랐으니 공자님과 연결 짓지는 못할 겁니다·”
어쩌다 보니 자식이 부모에게 말을 팔게 생겼다· 나중에 알게 되는 날에는 어처구니없어 하겠지만 지금은 철저하게 숨겨야 한다· 이유가 있다·
몇 달 전 이종산이 십칠각을 만들어 내게 하사하며 했던 말이 있었다·
“반년 후 내가 금전 백 냥의 행방을 찾아내지 못하면 그땐 십칠각에 대한 그 어떤 간섭도 영구적으로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반대로 그가 총표두를 시켜 장원급제 후 포상으로 받은 금전의 행방을 모두 찾아낸다면 나는 다른 형들처럼 십칠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보고하고 회계장부까지 감사받아야 한다·
이 차이는 매우 컸다·
십칠각을 열심히 키워 당(黨)으로 만들어도 이종산이 다른 사람을 당주로 앉혀 버리면 그만이라는 얘기가 되니까·
나는 품속에서 묵직한 전낭을 꺼내어 전립성의 앞으로 밀어 놓았다·
“이게 무엇입니까?”
“금전 천 냥입니다·”
“예에?”
전립성이 황급히 전낭을 열어보고는 눈이 빠질 것처럼 튀어 나왔다·
웬만해선 놀라지 않는 가불염도 마른 침을 연거푸 꿀꺽꿀꺽 삼켰다·
“이런 거액을 어디서····”
“어떤 돈 많은 노인의 목숨을 구해주었더니 전 재산을 물려 주더군요· 이 돈으로 지금부터 한 달간 젊은 암말을 집중해서 사들이십시오·”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한 달 후면 북방에서 대규모 전란이 일어나 말값이 갑자기 두 배까지 폭등한다·
다시 한 달이 더 지나 북방 삼성 전역으로 전선이 확대되면 세 배까지 오르고 새끼를 밴 암말은 무려 다섯 배까지도 오른다·
불과 몇 달 후면 나는 십칠각도 완벽히 내 것으로 만들고 재산도 다섯 배까지 불릴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얘기를 어떻게 해주겠나·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형님들은 요즘 어떻습니까? 오다 보니 강룡당에서 다른 표국의 표사들을 여러 명 고용한 것 같았습니다만·”
“강룡당에서 하남성 여남에 있는 조양표국으로부터 표두 한 명과 그를 따르는 표사 다섯 명을 고용했습니다· 복룡당에서는 마찬가지로 여남에 있는 철산표국의 표두와 표사들을 일곱 명 정도 고용했고요·”
“왜요?”
“무슨 일인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어느 날 갑자기 표두와 표사들이 온 것으로 미루어 누군가 외부의 조력자들이 있는 듯합니다·”
아마 그들의 친모 쪽 사람들일 것이다·
한데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 봐도 이맘때 두 사람이 무언가를 한 게 없었다·
사실 내가 개입하면서 전생과는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당장 남궁세가행도 전생에서는 없었던 일이다·
‘이 인간들이 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거지?’
그때 인기척과 함께 장삼이 들어왔다·
“국주님께서 방금 귀가하셨습니다· 사공자님께서 돌아오셨다는 말씀을 들으시고 오늘 밤 열리는 장로회의에 참석 하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