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인맥 끝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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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흘러내린 귀밑머리를 슬쩍 쓸어 올렸다· 그리곤 겸연쩍은 듯 양쪽 귓불을 번갈아 긁었다·
순간 나는 그녀의 양쪽 귓불에 남아 있는 팥알만한 홍점을 뒤늦게 발견했다·
‘저건!’
장담하건대 저건 감포초의 독성으로 생겼다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점이다·
‘설마!’
지금 항주에서 값비싼 감포초로 염색한 유건을 쓰고 다니는 유생이 몇 명이나 될까?
그중에 이성 경험이 없는 남녀가 몇 명이나 될 것이며 다시 그런 남녀 백 명 중 한 명을 내가 하루에 두 번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죄송해요· 일부러 웃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 우린 오늘 처음 보는 사이인 것 같군요· 전 남궁소소라고 해요·”
“남궁소소라면 혹시···?”
“현 남궁세가의 가주이신 뇌검(雷劍) 남궁무룡 대협께서 저의 조부님 되세요·”
“···!”
남궁세가라면 저 북쪽 양주에 뿌리를 내린 문파로 천룡표국이 절강성의 패자라면 남궁세가는 남직예성의 패자로 군림하는 초거대 무림세가였다·
양주 출신이라는 것까지 그 유생과 똑같다·
더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선약이 있다더니 이거였군· 얼레벌레 촌뜨기 어린 유생인 줄 알았더니 대 남궁세가의 아가씨였을 줄이야· 한데 남궁소소가 젊은 시절 역용을 하고 향시를 보았었구나·’
이제야 나는 남자들이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남궁세가의 아가씨와 그것도 현 가주의 직계손녀와 친해지는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이병룡에겐 천금같은 자리다· 남궁세가는 손이 귀해 직계혈족이라고는 남궁소소와 검술의 천재라 불리는 그녀의 오라비밖에 없었다·
틀림없이 실세로 성장하게 될 남궁소소와 친분을 쌓아가다 보면 훗날 형들과의 전쟁이 벌어졌을 때 남궁세가라는 든든한 우군을 얻을 수도 있다·
한마디로 인맥의 끝판왕이다·
한편 남궁소소는 내가 그녀의 비밀을 눈치챘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여태 말없이 지켜만 본 것도 내가 자신을 알아보는지 시험하려고 그런 모양이다·
’남궁세가에 분영축골(分影縮骨)이라고 하는 역용술이 있어 무림 일절이라고 하더니 과연····’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그 유생과 연결지을 생각은 전혀 못 했다· 감포초의 독성 반응이 없었다면 절대로 못 알아봤을 것이다·
“그렇군요· 이정룡입니다·”
“알고 있어요·”
“처음 본 사인데 절 아신다고요?”
“항주 유흥가에서 이미 유명 인사시더군요·”
슬쩍 한번 떠 본건데 흔들리기는커녕 대응이 능수능란하다·
“소문이란 늘 과장되기 마련입니다·”
“불지른 사람이 없는데 연기가 나는 법도 없죠·”
“작은 불에도 큰 연기가 나는 법입니다·”
“온 산을 태운 불도 결국엔 작아지죠·”
“···!”
이 여자 보통 여자가 아니다·
“한데 정룡 공자께서는 아직 본인이라면 어떻게 답문을 쓸지 말하지 않았어요· 본래 남의 사소한 실수를 지적하기는 쉬우나 나만의 생각을 논리로 펼치기란 어려운 법이죠· 특히 정답이 없는 주제에 관해서는 더더욱·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남궁소소의 말에 남자들은 살짝 화색이 돌았다· 자신들의 실수는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얘기해주는 반면 나의 생각이 없음을 지적하니 마치 자기들 편인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나는 남궁소소를 상대로는 멍청한 남자들과 달리 대충 넘어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저라면 그냥 내버려 두겠습니다·”
“왜죠?”
“화북지방은 예로부터 목화의 최대 생산지고 해마다 겨울이 되면 도적떼가 들끓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춘궁기를 지나 목화 수확철이 왔을 때 양민이었던 도적들은 자연스레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도적질 보다는 목화를 따는 게 나을테니까요·”
“그게 전부인가요? 그렇다면 실망인데요·”
“대신 지주와 거상과 표국에 세금을 지금보다 더 무겁게 매길 것입니다·”
“불똥이 왜 그리로 튀죠? 그들은 오히려 도적들로 말미암아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아닌가요?”
“지주들이 소작농과 인부들을 헐값에 후려쳐 먹으니 흉년이나 춘궁기만 되면 굶는 이들이 생겨 도적떼가 되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고 소작농과 인부들이 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힘들게 생산한 목화를 거상들이 내다 팔아 큰 이문을 남기니 두 번째 이유고 도적이 들끓어 표국업이 크게 흥하니 세 번째 이유입니다· 이들은 벌어들이는 것에 비해 세금을 소작농들보다도 적게 내고 있습니다·”
“거둬들인 세금으로는 무엇을 할 건가요?”
“나라의 곳간을 채워야겠죠· 하면 위정자라는 이름의 진짜 도둑들이 그 재물을 훔쳐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백성은 안중에도 없고 위정자들 배만 불리는 거잖아요· 대체 그런 일을 왜 하는 거죠?”
“그래야 그중에 한두 명 있는 청렴하고 훌륭한 관리들이 비록 적은 양일지언정 곳간 속 남은 재물로 양민들을 위해 꼭 필요한 일들을 할 테니까요·”
“세상에 그렇게 비효율적인 게 어딨어요?”
“그게 정치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도적을 토벌할지 교화시킬지만 생각했지 누구도 화북지방의 특성과 결부해 원인과 현상을 살펴볼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그것도 위정자들의 속성까지 들먹여 가며·
남자들은 자신들과는 다른 사고의 폭에 할 말을 잃었다· 진금봉은 연거푸 마른 침을 삼켰다· 조영영은 뭐라 말할 수 없이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남궁소소는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더니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심사관들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아할 답문이군요·”
이 여자 정말 날카롭다·
나는 정확히 그런 목적으로 저 답문을 썼다· 향시의 심사관들은 죄다 전·현직 관리들이고 그들은 누구보다 나라의 곳간 속에 있는 재물을 탐하는 위정자들이다·
솔직히 말해 양민이 도적떼로 변하는 걸 막으려면 지주들을 쥐어짜 소작농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가도록 하면 된다·
완벽하진 못해도 양민들이 도적떼로 변하는 숫자를 훨씬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정자들은 그렇게 할 생각이 전혀 없다· 지주들이 해마다 자신들에게 몰래 갖다 바치는 재물이 얼마인데 그걸 포기하고 소작농들 배 불리는 일을 할까·
나는 다만 지주들에게 뒷돈도 받으면서 세금을 가장해 한 번 더 빼앗는 방법을 제시했을 뿐이다·
위정자들이 보았을 때 이런 놈을 뽑아 벼슬자리에 앉혀 놓으면 불철주야로 자신들 배를 열심히 불려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도록·
그런데 이걸 저 멍청한 남자들은 무슨 말인지도 못 알아먹는 반면 남궁소소는 정확히 간파했다·
“인상적인 대화였어요· 기회가 있다면 다음에는 좀 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군요·”
진금봉과 조영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자들은 그야말로 질투의 화신이 되어 나와 남궁소소를 번갈아 보았다·
누가 뭐래도 지금 이 순간 가장 열 받는 사람은 이 모임의 주재자인 이병룡이었다·
지나가는 나를 불러다 조영영이 보는 앞에서 개망신을 주려고 했던 그는 거꾸로 자신이 개망신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여긴 너무 시끄러운 것 같으니 모두 자리를 옮겨 술이나 한잔하도록 하지· 물론 내가 사겠네· 먼저들 내려가서 기다리게· 난 잠시 정룡과 할 얘기가 있어서·”
안그래도 도망칠 구실이 필요했던 남자들은 얼른 일어나 꽁지가 빠지도록 사라졌다·
조영영과 두 명의 여자들 아니 남궁소소와 두 명의 여자들도 뒤를 따랐다·
눈치 빠른 철탑은 장삼을 반강제로 끌고 내려갔다· 그 바람에 3층엔 이제 나와 이병룡만 남게 되었다·
“뭐 잘못 처먹었어?”
“먹다 남은 음식을 먹었을 뿐인데요·”
“이런 등신같은 새끼가!”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등신이라뇨·”
“닥쳐! 항주에서 네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천룡표국의 사공자가 서호에 뛰어들어 죽으려 했다는 소문을 모르는 이는 없다· 집 안에 조용히 처박혀 있어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돌아다니며 집안 망신을 시켜?”
“그냥 나가려는 절 끌어다 앉힌 건 형님이십니다·”
“형님은 무슨· 천한 종년의 핏줄 따위가·”
순간 나는 지독한 살의를 느꼈다· 나를 욕하고 미워하는 것까진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을 두고 그것도 피 한 방울 안 섞였을지언정 어머니였던 사람을····
“어금니 꽉 깨물어·”
“지금 다 큰 절 때리겠다는 겁니까?”
“왜 새삼스럽게 겁나느냐?”
이런 미친!
이정룡 너는 여태까지 저 자식에게 맞고 살았던 거냐? 그래서 조영영을 놓고 한번 싸워볼 생각도 못 하고 호수에 뛰어들었던 거고? 공포와 폭력에 길들여져서?
나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병룡은 이미 일류의 문턱에 있다는 고수· 어차피 죽도록 처맞을 거 나는 조금이라도 덜 억울하려면 말로라도 저 인간을 죽여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수향문주가 왜 하필 셋째 형님을 콕 찍어 청혼을 해왔는지 아십니까? 이미 혼기가 꽉 찬 큰 형님과 둘째 형님도 계신데 말이죠·”
“형님들이야 원래····”
“원래 늦게 결혼하겠다고 선언을 하셨죠· 하지만 그건 당분간 표국 일에 매진하겠다는 결의 같은 것입니다· 처녀가 시집을 안 가겠다고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설마 그걸 곧이곧대로 믿으셨습니까?”
“무슨 개소릴 하려는 거야?”
“그건 큰 형님과 둘째 형님은 언감생심 욕심낼 수 없는 사윗감이라는 걸 수향문주가 알기 때문입니다· 괜히 청혼을 해보았자 망신만 당했을 테니까요· 그래서 셋째 형님을 선택한 겁니다· 꿩 대신 닭이라고나 할까····”
“가 갑자기 그 얘길 왜 하는 거야?”
“항주 사람들은 다 아는데 심지어 셋째 형님의 친우분들도 다 아는 사실인데 정작 본인만 모르시는 것 같아서요· 아 그러고 본인만 모르는 게 또 하나 있군요·”
“·····?”
“셋째 형님도 첩의 자식이라는 거 말입니다·”
“이런 미친 새끼가!”
다짜고짜 손바닥이 날아온다·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먼저 몸이 반응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한 발을 빼며 허리를 꺾었다· 이병룡의 손바닥은 바람을 잔뜩 불어주고는 빗나갔다·
어라 이게 되네!
“이 새끼가 피해?”
다른 쪽 손바닥이 날아왔다· 나는 이번에도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여 피했다·
“어쭈?”
세 번째 손바닥도 어찌어찌 피했다·
“어디 이것까지 피하나 보자!
이병룡도 처음엔 싸대기 한 대 정도로 끝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세 번이나 연달아 피하자 약이 바짝 오른 나머지 그만 눈동자가 뒤집혀 버렸다·
손바닥이 주먹으로 바뀐 것이다· 훅! 하고 날아든 주먹은 턱주가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갔다· 단지 스치기만 했는데도 불구하고 턱이 얼얼했다·
다시 그 주먹의 뒤에서 튀어나오는 또 다른 주먹· 한순간 구름을 뚫고 나오는 용의 발톱처럼 눈앞의 허공을 찢어대는 것 같았다·
천룡표국 가문비전의 무공인 박룡수(搏龍手)다·
얼굴에 맞으면 턱뼈는 물론이거니와 이빨까지 몽땅 박살 나버릴 것이다·
나는 전생에서 서른 살이 된 이병룡이 저 수법으로 미쳐 날뛰는 황소의 머리통을 단 일격에 부수어 버리는 걸 본 적 있다·
‘이 새끼가 사람을 진짜 죽이려고!’
놀란 나는 연거푸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마다 약이 잔뜩 오른 이병룡은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주먹을 내질렀고· 또 그때마다 허공이 쫙쫙 찢어졌다·
그런데····
‘왜 이렇게 느리지?’
무슨 조화인지 모르지만 이병룡의 주먹 날아오는 게 마치 일부러 느린 동작으로 보여주듯 또렷하게 보였다· 그러다 보니 얼마든지 뒷걸음질 치며 피할 수 있었다·
‘이거 잘하면 내가 때릴 수도 있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