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 백 명의 호송단(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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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사 안에는 심연과도 같은 침묵이 흘렀다·
두 명의 노강호는 허망함에 마른 침만 계속 삼켰다·
죽간의 순서를 맞추어 불이 나게 만든 장본인인 나는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
한참 후에야 장초풍이 사마옥을 돌아보며 물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짐작이 가십니까?”
“아무래도 영화술 인 듯합니다·”
“영화술이라면···”
“죽간이 다른 이의 손에 들어가서 정확하게 재조합될 경우 발화가 되도록 전 주인이 강력한 술법을 걸어 놓은 것이지요· 그것 외에는 설명이 되질 않습니다·”
“하면 가죽끈이 저절로 끊어진 것이 아닐 수도 있겠군요·”
너무나 그럴듯한 나머지 나는 하마터면 두 사람의 말을 그대로 믿을 뻔했다·
하지만 죽간본이 불탄 것은 분명 내 몸속에 있는 부적의 영기가 흡수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제가 방정맞게 순서를 맞춰 보겠다고 설레발을 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터인데·”
“우리가 부탁한 걸세· 그리고 자네는 분명 큰 도움이 되었네· 덕분에 비경기서를 정말로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일세· 물론 공자의 손때가 묻은 보물이 사라진 것은 아깝지만·”
“예?”
“논어가 유가의 성전(聖典)으로 추앙받는 것은 공자께서 직접 새겨 넣은 죽간본으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세·”
그러면서 사마옥은 품속에서 또 다른 사슴 가죽을 꺼냈다·
가죽을 펼치자 조금 전 불타 없어져 버린 것들과 똑같은 죽간 열여덟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틈이 날 때마다 순서를 맞춰 보기 위해 만든 복제품일세· 물론 죽간에 새겨진 글자나 먹선도 동일하고· 다시 순서를 맞춰 볼 수 있겠지?”
그러면 그렇지· 그 중요한 물건을 사본 하나 만들어두지 않았을 리 있나·
내용이 남아있다면 죽간은 아직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이쯤 되니 고대의 비급을 불태웠다는 죄책감이 조금 사라지면서 마음도 편안해졌다·
정신이 맑아지자 아까 곤장도 그렇고 이건 뭔가 계산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저도 부탁이 한 가지 있습니다·”
“부탁?”
“엄격히 말해 이건 호송과는 관계가 없는 별건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호송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고요·”
“그래서?”
“호의는 오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깐 왜 그냥 해주었나?”
“맹주님과 총군사님의 기세에 압도되어 정신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고?”
“견딜만 합니다·”
“정신을 차리면 아주 무서운 사람이 되는군·”
“장사꾼은 계산이 정확해야 하지요·”
“표국이 상방은 아니지 않나?”
“무림문파 보다는 상방에 훨씬 가깝습니다·”
장초풍과 사마옥은 기가 막힌 지 잠시 시선을 나누었다·
그러다 장초풍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일단 들어보세·”
“앞으로 10년 동안 무림맹에서 남직예성 절강성 복건성으로 보내는 표물은 전량 천룡표국의 개봉분타를 이용해 주십시오·”
“개봉엔 천룡표국의 분타가 없는 것으로 아네만·”
“곧 생길 겁니다·”
“표왕께서 그리 말씀하셨나?”
“소망은 늘 하셨습니다· 다만 여러 가지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진출을 못 하셨지요·”
“개봉엔 이미 많은 크고 작은 표국들이 성업 중이네· 제아무리 천룡표국이라고 해도 그들이 선점한 땅에다 송곳을 꽂기란 쉬운 일이 아닐 걸세· 표왕께서 선뜻 결심하지 못하신 것도 그 때문일 것이고·”
“무림맹에서 도와준다면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강동 삼성으로 향하는 표물은 전량 천룡표국의 분타를 이용하는 것으로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세·”
“예?”
“그렇게 하자고·”
“이렇게 쉽게요?”
“호송이 모두 끝나면 총군사님과 의논한 후 자네가 세운 공에 대해 어떻게든 정식으로 포상을 할 생각이었네 · 차라리 잘 됐군· 기왕이면 원하는 걸 해주는 게 낫겠지·”
“그건 곤장을 면제해 주신 걸로 끝난 거 아닌가요?”
“마흔일곱 명의 목숨을 구한 대가가 고작 곤장을 면제해 주는 것일 리가 있겠나· 만약 그렇다면 맹주인 내가 맹도들의 목숨을 너무 가벼이 여긴 것이 되겠지·”
슬그머니 옆을 돌아보니 사마옥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느 정도 말이 오고 간 모양이었다·
병법에 전투에서 승리한 장수에게는 황금을 주고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에게는 벼슬을 준다고 했다·
전중에 내리는 것은 사기진작을 위한 작은 포상일 뿐 진짜 논공행상은 전쟁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법이다·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이래서 강호는 무공보다 경험이다·
‘조금만 더 참을걸·’
민망함에 나도 모르게 손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처처처처척!
순식간에 열여덟 개의 죽간이 모두 본래의 순서에 따라 배열되었다·
장초풍과 사마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번 해본 거라서요·”
***
막사를 나온 나는 곧장 천룡표국의 모닥불로 향했다·
도착해 보니 호리독사가 팔뚝 굵기의 통나무에 돼지머리를 끼워 굽는 중이었다·
남궁소소는 옆에 앉아 군침을 흘리며 지켜보고 있었고·
“죽간은 완성했나요?”
“불에 타버렸소·”
“왜요?”
질문을 한 남궁소소도 통나무로 돼지머리를 돌리고 있던 호리독사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막사 안에서의 일로 죽간본이 무엇인지 얼마나 중요한 물건인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겠소· 다 맞췄더니 갑자기 발화가 되었소· 나와 맹주님과 총군사님이 갖은 방법을 동원해 끄려고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소·”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요?”
“사본이 있어서 죽간에 적힌 내용까지 사라진 건 아니오· 다만 호송은 여기서 멈출 것 같소·”
“원래 목적지가 어디였는데요?”
“무당파였다고 하오·”
“무당파라고요?”
“유서 깊은 도맥이 흐르는 무당파의 비처에 봉인할 생각이었던 모양이오· 자고로 복마(伏魔)는 불가보단 도가니까·”
“그럼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호송할 물건도 사라졌고 곤장 맞을 일도 없으니 표행단도 해산을 해야겠지· 난 여기서 곧장 항주로 돌아갈 생각이오·”
“그럼 전 양주로 가겠어요·”
“나와 함께 항주로 가지 않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난 당연히 그런 줄 알았는데·”
남궁소소는 말갛게 웃으며 말했다·
“항주로 가도 곧 양주로 가야 해요· 그럴 바에야 곧장 양주로 갈래요· 먼 길을 여행하는 것도 이젠 힘들고요·”
순간 뇌검의 팔순 잔치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천룡표국은 남궁세가로부터 공식적으로 초청장을 받았다·
항주의 노인네들은 오매불망 남궁세가로 가는 날을 기다리는 모양이다만 나는 어떻게든 빠지고 싶었다·
그동안 남궁소소를 위험에 빠뜨린 게 한두 번이었어야지·
뇌검이 전후 사정을 모두 알기라도 하는 날에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그럼 오늘 밤이 마지막이네요·”
“그동안 고생이 많았소·”
“언제 또 볼지 모르지만 건강하세요·”
“소저도 건강히 지내시오·”
남궁소소는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나를 힐끔거렸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얼른 돼지머리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할 말이 있는 게 아니라 내게 무언가 더 할 말이 없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객원표사비는 확실히 계산해 주겠소·”
“···!”
“···?”
“동전 한 푼까지 정확히 챙겨 주세요!”
“물론이오·”
“부자 되시고요!”
“난 명표가 될 거요·”
“어련하시겠어요·”
그때 ‘뻥!’ 하는 소리가 났다·
돼지 껍데기가 모닥불에 부풀어 올랐다가 터지는 소리였다·
나는 그때까지도 통나무를 살살 돌리고 있던 호리독사에게 물었다·
“웬 돼지요?”
“천중산에서 천라지망을 펼치며 적들을 포위할 때 우연히 갇힌 멧돼지 일곱 마리도 함께 때려잡았다고 합니다·”
“멧돼지를 왜?”
“싸움이 끝난 후 먹으려고요·”
“한데 왜 하필 머리요?”
“제가 돌아왔을 때는 다른 부위는 다 처먹고 머리만 남았더라고요· 할 수 없이 이거라도 갖고 와서 굽는 중이고요·”
잠시 후 돼지머리가 노릇노릇하게 익자 각자가 지닌 단도로 살점을 잘라 먹기 시작했다·
남궁소소는 한쪽 귀때기를 쓱쓱 자르더니 소금에 찍은 후 쩝쩝 거리며 잘도 먹었다·
“맛있소?”
“누가 해주는 밥보다 훨씬 낫네요·”
“보기에도 그런 것 같소·”
“술도 한 병 있었으면 좋았을걸·”
“구해보지 그랬소·”
“진작에 바닥났지 아직도 있겠어요? 돼지머리도 하 표사와 내가 야영지를 돌아다니며 겨우 구했고만·”
“제가 한번 구해볼까요?”
불쑥 끼어든 사람은 호리독사였다·
그는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깔고 앉은 바위틈에서 호리병 하나를 꺼내 슬그머니 앞으로 밀어 놓았다·
“타격대들이 말 매어둔 곳을 한 바퀴 쓰윽 돌았습니다· 아무리 탈탈 털어 마셨다고 해도 한두 병씩은 꽁꽁 숨겨 놓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지요·”
이런 어처구니없는 인간을 봤나·
전낭을 훔치고 비고를 침범한 일로 그 고생을 하고도 또 도둑질을 하다니·
“도로 갖다 놓을까요?”
호리독사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슬쩍 옆을 돌아보니 만약 그랬다간 남궁소소가 들고 있는 칼로 내 귀때기를 자를 것 같다·
“그러다 들키면 더 복잡해지오·”
사실 방금 표행단의 해산을 선언했으니 이제 호리독사가 무얼 훔치건 말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저 이번 건만 들키지 않고 넘어가길 바랄 뿐이었다·
“한 사람당 한 병이면 더 좋았을걸·”
남궁소소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위 아래서 두 병이 더 나왔다·
호리독사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음충맞게 웃었다·
나와 남궁소소는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그때 저만치에서 황보중악을 비롯한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이 이쪽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전부 치워!”
내가 말 했다· 세 개의 손이 튀어나와 재빨리 한 병씩을 집어서는 각자의 품속에 숨겼다·
잠시 후 황보중악 일행이 도착했다·
“호송이 취소되었다고 들었네·”
“그렇다고 하더군요·”
이 인간이 또 무슨 일로 시비를 걸려고 이러시나·
황보중악은 기름이 뚝뚝 떨어지는 돼지머리를 힐끗 바라본 후 물었다·
“함께 모닥불을 쬐어도 되겠나?”
“열세 명이 달라붙을 양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우리가 먹을 건 우리가 갖고 오지·”
“그럴 바에야 각자의 모닥불에서 먹도록 하죠·”
“그것도 좋겠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황보중악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참다못한 내가 물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황보중악은 잠시 갈등 하더니 이내 결심을 한 듯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이어 품속에서 가운데 손가락보다 조금 큰 나무 조각을 꺼내 내 앞의 작은 바위 위에 올려 놓았다·
놀랍게도 그건 황보중악의 이름이 음각으로 새겨진 호패였다·
“자네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잘 알고 있네· 솔직히 나도 자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구명지은까지 몰라
볼 정도로 인면수심은 아닐세·”
“···?”
“언젠가 내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사람을 통해 이 호패를 보내게· 하면 이유 불문하고 한번은 어디든 달려가 자네를 위해 칼을 뽑겠네·”
황보중악이 한 걸음을 물러나자 이번엔 두소부가 앞으로 나왔다·
그 역시 자신의 호패를 꺼내 바위 위에 올려 놓고는 돌아섰다·
다음엔 양조광이 그다음엔 악도광이 당군백이····
잠깐 사이 바둑판 만한 바위 위에는 열 개의 호패가 놓였다·
황보세가 청성파 점창파 산동악가 사천당문 등등· 호패에 새겨진 글자들을 보고 있자니 새삼 이들이 어떤 곳의 후예들인지 실감 났다·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은 지금 내게 보은패(報思牌)를 준 것이다·
무림의 관습에 따르면 이들은 수십 년이 지나도 보은패를 보는 그 즉시 달려와야 한다·
심지어 나는 보은패를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도 있고 대를 이어 자식에게 물려 줄 수도 있다·
그때도 보은패를 준 사람은 목숨 걸고 일을 해주어야 한다·
그가 죽고 나면 그의 무맥을 이은 제자나 자식이 해주어야 한다·
보은패는 그런 것이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남궁소소도 호리독사도 눈이 툭 튀어 나왔다·
가장 당혹스러운 건 나였다·
문득 천룡표국을 떠나기 직전 이종산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무림맹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은 20년 후 각자의 사문을 지탱할 동량지재들이다·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든든한 외가가 없는 너에게는 그들과의 인연이 훗날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너는 병룡이 항주무림의 후기지수들에게 적지 않은 공을 들이고 있음을 알고 있겠지?”
눈앞에 있는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은 아직 각성하지 못한 새끼 용과 봉황이었다·
그에 비하면 이병룡이 공들이고 있는 항주무림의 후기지수들은 각성을 하더라도 별반 차이가 없는 잉어나 두루미 수준이었다·
애초에 비교가 되질 않는다·
“객원표사가 열 명이나 생겼군·”
나는 바위 위에 놓인 호패를 하나씩 줍기 시작했다·
앞서 내가 놀란 만큼이나 이번엔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이 놀란 것 같았다·
기껏 보은패를 주었는데 객원표사로 써먹겠다고 하자 당황한 것이다·
“그거 만만치 않을걸요·”
옆에서 남궁소소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후기지수들은 갈아입을 옷이 없어 아직도 거지꼴을 하고 있는 남궁소소를 일제히 돌아보았다·
이어 공감한다는 듯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후회하는 표정을 짓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쉬게·”
“잠깐만요·”
황보중악이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 찰나 내가 그를 붙잡았다·
이어 호리독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한 바퀴 더 돌고 올 수 있소?”
“어딜 말입니까?”
“알아들었잖소·”
“몇 병이나 필요하십니까?”
“한 열 병?”
호리독사는 쓰윽 일어나더니 그때까지 깔고 앉아 있던 바위를 옆으로 힘껏 밀었다·
그러자 움푹 팬 모래 바닥 속에서 술호리병 십여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미친!”
***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고 일어났을 때는 깜깜한 밤이었다·
처음보다 몇 배나 커진 모닥불 주변에는 후기지수들과 객원표사들이 잡탕으로 뒤섞여 잠들어 있었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계곡가로 갔다·
곳곳에서 번을 서던 무림맹의 무사들이 나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끄덕여 왔다·
두 손으로 계곡물을 떠다 벌컥벌컥 마셨더니 그제야 갈증이 좀 가셨다·
바위에 털썩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별이 유난히 많다·
지나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향시와 회시를 치른 것부터 시작해 화조신옹을 만난 일 진왕과 그 일족을 지킨 일 백발노성을 호송한 일 그리고 이번 호송에 이르기 까지·
맹주와 총군사가 착각하는 게 있다·
죽간에 적힌 글자들은 일종의 무공구결이었다·
그러나 구결을 따라 운기행공을 하며 꾸준히 내공을 쌓는 정종 무공들과는 궤가 달랐다·
죽간에 적힌 구결은 애초부터 어떤 신비로운 힘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 신비로운 힘은 바로 부적의 공능이었다·
부적의 공능이 없으면 구결은 그저 메아리에 불과했다·
반면 부적을 지닌 자가 구결에 따라 수련해서 일정한 성취에 이르면 실로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염동술(念動術)이라니····’
천지령의 백 년 공력 북해투왕의 십초박과 귀영무 표왕의 천무진경과 천무십검 백발노성의 망혼소 그리고 공자에 의해 전해진 고대의 두 가지 영능력까지·
이 엄청난 것들이 모두 내 한 몸에 있다는 게 잘 믿기지 않았다·
어느 것 하나 대성을 한 것이 없고 훗날 대성을 하더라도 어디에 쓸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언젠가 때가 되면 나는 강호에서 더는 적수를 찾기 어려운 존재가 될 것이다·
그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말이다·
“혼자 적적하지 않으십니까?”
나는 정면의 어둠 속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왼쪽으로 십여 장 정도 떨어진 바위 위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눈치챘나?”
“갑자기 기척을 숨기셔서요·”
“기척은 처음부터 숨기고 있었네· 방해하지 않으려고 완벽히 숨긴다는 것이 오히려 자네의 관심을 끈 모양이군·”
“오히려 제가 방해를 했군요·”
“기감이 대단한 걸· 번을 서는 타격대의 무사들조차 세 명이나 모르고 지나쳤는데·”
내가 그랬나?
기감을 느끼는 건 거의 내공의 영역이다·
요즘 들어 자고 나면 공력이 늘어나는 걸 느꼈으니 나도 모르게 기감이 더욱 발달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주변을 살피러 나왔다가 달이 좋아서 한잔하고 있었네· 자네도 조금 마셔 보겠나?”
대답도 하기 전에 어둠을 뚫고 무언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손을 뻗으며 금나수(德掌手)의 수법을 펼쳤다·
그러나 호리병을 잡아채기는커녕 허공에서 손등으로 쳐서 떨어뜨리는 실수를 범했다·
철퍽!
아까운 술호리병 깨지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걸 멋지게 잡아챘어야 하는데· 하필 가장 동경하는 명표가 던져주는 술병을 놓치다니·
“죄 죄송합니다·”
“자네는 정말 종잡을 수가 없군· 어떤 때 보면 엄청난 고수인 것 같다가도 어떤 때 보면 기본공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하수인 것도 같고·”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표사로서는 단연코 최고였네·”
“예?”
“강호인들이 자네를 부르는 별호가 있는가?”
“아직 없습니다·”
“하면 함께 표행을 한 기념으로 내가 하나 선물해도 될까?”
“저야 더할나위 없이 영광이지요!”
“풍운비룡(風雲飛龍)이 어떤가?”
“풍운비룡요?”
“나의 별호인 풍운표검에서 앞 두 글자를 따오고 구만리를 승승장구하라는 뜻에서 비룡이라는 말을 붙여 보았네·”
풍운은 본래 큰 변화의 기운을 뜻하고 비룡은 그때에 나타난다는 영웅호걸을 말한다·
설인탁은 지금 내게 표사로서 가야 할 길을 일러주고 있었다·
나는 그가 앉아 있는 바위 쪽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올리며 말했다·
“멋진 별호를 지어 주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가르침은 가슴에 깊이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어둠 속에서 설인탁도 나를 향해 포권지레를 하는 게 느껴졌다·
“훌륭한 후배를 만나 진심으로 기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