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 백 명의 호송단(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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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전 끝에 잡혀 와 무릎을 꿇은 자들은 모두 다섯이었다·
강렬한 인상도 인상이지만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도 또한 예사롭지가 않았다·
“어찌 된 것이오?”
“한 식경 전 야영장으로 침투해온 자들입니다·”
“한 식경?”
“내부 순찰 하는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바위와 그늘을 찾아다니며 극도로 천천히 움직였습니다· 하나같이 고도의 은신술을 익힌 자들입니다·”
사마옥의 질문에 설인탁이 한 대답들이었다·
한 식경이나 참을성 있게 움직인 놈들도 대단하긴 하다·
그러나 그들에게 들키지 않고 숨어서 지켜본 설인탁과 유성표국의 표사들이 나는 더욱 대단해 보였다·
“어째서 한 식경이나 기다린 것이오?”
“놈들의 목적을 알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소득이 있었소?”
“한 명이 총군사님의 막사를 노리고 가는 중이었습니다· 나머지는 야영지 여러 곳에 매복해 있었는데 거사 중 또는 후에 일어날지 모르는 돌발상황을 염두에 둔 지원조인 듯합니다·”
“거사?”
“셋 중 하나로 짐작됩니다· 총군사님을 제거하는 것 호송 중인 물건을 훔치는 것 우리의 경계 태세를 점검하는 것·”
설인탁은 간자에 대해서는 언급은 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몰려든 사람들이 워낙 많으니 신중한 것이다·
그러나 말하지 않아도 사마옥은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사마옥이 사로잡힌 자들 중 두령으로 짐작되는 자에게 물었다·
“정체가 무엇이냐?”
“말할 리가 없잖소·”
“임무는?”
“차라리 죽이시오·”
사마옥이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놈의 왼쪽 소맷자락을 어깨까지 찢어라·”
혈검대의 무인들이 달려들어 놈을 잡고는 시키는대로 했다·
그러자 어깨 아래에 작은 문신 같은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너무 어두워서 잘 보이지가 않았다·
그때 혈검대의 무사 하나가 횃불을 들고 왔다·
모닥불은 횃불보다 몇십 배나 크지만 땅바닥에 찰싹 붙어 있기 때문에 고작 일 장 정도의 반경을 비출 뿐이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횃불은 모닥불보다 훨씬 작아도 삼 장까지 비출 수 있다·
횃불이 다가오자 문신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건 불타는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거대한 괴조(怪鳥)였다·
“천마성교(天魔聖敎)!”
남궁소소가 조용히 목구멍을 쥐어짰다·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내가 헛것을 본 게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았다·
번개가 온몸을 관통하고 지나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이미 수십 년 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옛 마교의 문장이 왜 지금 갑자기 나타난단 말인가·
주위를 둘러보니 놀란 건 남궁소소와 나만이 아니었다·
혈검대의 고수들도 후기지수들도 유성표국의 표사들도 모두 아연실색했다·
심지어 사마옥이 모든 걸 의논하고 있다는 설인탁 조차도 까맣게 몰랐던 눈치였다·
유일하게 두 사람 혈검대주 팽문룡과 총군사 사마옥만이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모두가 당황해하는 사이 마교도의 어깨를 비추었던 횃불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사마옥의 얼굴 쪽으로 향했다·
순간 나는 표행 중 해선 안 될 것에 대한 오랜 금언 한 가지가 생각났다·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나와 설인탁은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먼저 나는 사마옥을 향해 다짜고짜 좌장을 힘차게 뻗었다·
대경실색한 사마옥은 찰나의 순간에도 허리를 틀며 우장으로 맞섰다·
뻐엉!
접장의 순간 고막이 얼얼해지는 굉음과 함께 사마옥과 나는 각각 일 장씩 뒤로 밀려간 끝에서야 멈추었다·
내가 사마옥을 공격하는 사이 설인탁은 칼을 뽑아 혈검대의 무사가 들고 있는 횃불의 모가지를 뎅겅 쳐서 날려 버렸다· 그와 동시에 조금 떨어진 바위에서는 번갯불 같은 불꽃이 튀었다·
이 모든 게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에 일어났다·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났을 때 나와 설인탁의 목에는 각각 대여섯 자루의 칼끝이 붙었다·
혈검대의 무사들이 우리를 에워싼 것이다·
팽문룡이 진노해 내게 소리쳤다·
“무슨 짓이냐!”
“상황이 다급해서 일단 손부터 쓴 것입니다·”
“대주 왼쪽에 있는 바위 사이를 보십시오·”
마지막 말은 설인탁이 한 것이었다·
팽문룡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조금 전 바위에서 번갯불이 튀는 걸 보았을 것이다·
그는 설인탁이 떨어뜨린 횃불 뭉치를 발로 툭 차서 왼쪽에 있는 바위 쪽으로 날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바위를 뚫고 들어가 박힌 화살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데 화살의 모양이 이상했다· 보통의 화살보다 훨씬 가늘고 거무튀튀한 색깔에 어찌 된 영문인지 깃이 없었다·
“무성추명전 (無聲堅命電)!”
팽문룡이 목구멍을 쥐어짰다·
한때 천마성교의 특무조가 사용했다는 철전의 일종으로 소리가 거의 없는 것이 특징이었다·
나도 전생에서 긴긴 여름밤 표사들이 별을 보고 누워 잠들기 전에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 실제로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철전의 깃없는 꼬리는 조금 전 사마옥이 서 있던 자리를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예사롭지 않은 화살과 궁술에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경악했다·
“칼을 거둬라!”
나와 설인탁의 목에 붙어 있던 칼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설인탁이 유성표국의 표사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섯 명의 표사들이 철전이 날아온 방향으로 쏜살처럼 사라졌다·
팽문룡이 내게 말했다·
“내가 오해를 했군·”
“대주님께선 당연한 일을 하신 겁니다·”
“이해해 줘서 고맙네·”
이번엔 사마옥이 내게 말했다·
“대체 어떻게 알았나?”
“밤중에 호위의 대상에게 횃불을 비추는 것은 표행의 오랜 금기입니다· 암중에서 목숨을 노리는 적들이 있다면 곧장 표적이 되기 때문이지요· 조금 더 일찍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애초부터 내가 호위의 대상이 아니었으니 방심할 밖에· 아니 오히려 그 반대로군· 자네가 철저하게 주변을 살폈기에 내가 화를 면할 수 있었네·”
“운이 좋아 제가 먼저 보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비록 먼저 손을 썼다지만 설 대협께서 횃불을 쳐서 떨어뜨리지 않았다면 화살은 결코 한 발로 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랬겠지·”
사마옥이 설인탁에게도 묵례를 했다·
설인탁은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나는 이어 설인탁에게 서둘러 전음을 보냈다·
[아무래도 찾으시던 자가 나타난 것 같습니다·]
설인탁의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였다·
그는 단번에 내 말을 알아 듣고는 조금 전 횃불을 들었던 혈검대의 무사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게 전음을 보냈다·
[확실한가?]
[너무나 공교롭지 않습니까?]
[신중해야 하네· 만약 헛다리를 짚은 것이라면 아군들끼리 불신만 조장하게 되네· 적과 대치한 상황에서 내분은 자멸을 이끌 수도 있네·]
[불신이 간자를 그냥 놔두는 것보다 더 위험하겠습니까? 만약 제 짐작이 맞다면 우린 턱밑에 칼을 붙이고 싸우는 꼴이 될 것입니다·]
[좋아· 내가 감당해 보지· 일단 자넨 나서지 말게·]
설인탁이 팽문룡에게 말했다·
“방금 횃불을 든 수하를 확인해 주십시오·”
“무슨 뜻입니까?”
“호송단에 간자가 잠입해 있음은 대주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방금 그의 동작은 매우 수상한 것이었습니다·”
“이보십시오· 설 대협· 그는 나와 십 년 넘게 동고동락한 사이입니다· 간자일 리가 없습니다·”
“호송단으로 참여한 사람들 중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 간자가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유성표국의 표사일 수도 있습니다·”
“돌아오는 즉시 모두 확인시켜 드리지요·”
“설 대협!”
“확인시켜 드리게·”
사마옥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가 덧붙였다·
“이미 의혹이 제기된 이상 시원하게 해소하지 못하면 역효과만 날 걸세· 그리고 우린 지금 맹의 일을 집행하고 있는 중이네·”
팽문룡도 더는 고집을 피우지 못했다·
“어떻게 확인시켜 드리면 되겠습니까?”
“천마성교의 교도들은 언제 어디서든 서로를 확인하기 위해 몸 어딘가에 반드시 교를 상징하는 문신을 새겼습니다·”
팽문룡이 조금 전 횃불 든 수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옷을 전부 벗어라·”
“존명!”
기강이 엄한 타격대의 무사답게 사내는 거침없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남궁소소와 당군백이 잠깐 고개를 돌리는 사이 그는 전라가 되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문신 따위는 없었다·
팽문룡이 설인탁에게 말했다·
“이제 됐습니까?”
“머리카락을 밀어 보십시오·”
“그건 너무 심하지····”
말을 하던 팽문룡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수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팽문룡과 시선이 마주치자 혈검대의 무사는 더욱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엽호 그게 아니잖아· 네가 지금 당황해하면 안 되지·”
순간 혈검대의 사내가 질풍처럼 신형을 쏘았다·
하지만 불과 일 장도 달아나지 못해서 이미 준비를 하고 있던 다른 혈검대의 무사들에게 잡혔다·
팽문룡은 제압당한 수하에게로 다가가더니 품속에서 비도를 뽑아 놈의 상투를 툭 잘라 버렸다·
이어 산발이 된 그의 머리를 면도하듯 사정없이 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금 전 사로잡았던 자들과 똑같은 태양과 괴조의 문신이 빽빽한 머리카락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네가 어떻게···!”
한순간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정작 간자를 골라낸 나도 어안이 벙벙했다·
마교가 아무리 끈질기고 철두철미하다지만 무림맹에까지 잔당을 침투시켜 놓았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무려 십 년 전부터·
그러나 사마옥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가 설인탁에게 말했다·
“설 표두의 통찰이 놀랍구려·”
“제가 알아낸 것이 아닙니다·”
“하면?”
“이 표사의 생각이었습니다· 만약 아닐 경우를 생각해 제가 나선 것입니다· 그편이 혈검대의 무사들을 설득하기가 쉬울 것 같아서요·”
혈검대의 무사들과 후기지수들의 시선이 또다시 나를 향했다·
모두가 놀라고 감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남궁소소 조차도 이번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사마옥이 내게 말했다·
“오늘은 여러 번 놀라게 하는군·”
“소생이 의심이 많다 보니·”
“본래 같은 식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타인에게는 보이는 법이지· 거듭 수고했네· 덕분에 큰 가시 하나를 뽑았네·”
“혹시 예상을 하신 겁니까?”
“맹에 간자가 있었던 걸 말하는 거라면 충분히 예상을 했던 일이네· 천마성교가 건재했을 때 우리도 많은 간자들을 침투시켰으니까· 중요한 건 그가 어떤 직책을 차지하고 앉았느냐 하는 것이지·”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꿀꺽 넘어간다·
더불어 사마옥이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여기니 한편으로는 살짝 안심도 되었다·
“아무래도 오늘 밤 큰 싸움이 있을 것 같네· 천룡표국은 이미 충분히 제 몫을 했네· 만약 표사로서의 임무와 본인의 안전을 놓고 선택해야 할 시간이 온다면 자신을 먼저 돌보시게·”
잠시 후 척후를 살피러 갔던 유성표국의 표사들이 다급한 걸음으로 돌아왔다·
어쩐 일인지 표정이 잔뜩 굳어 있었다·
“전방에서 적들이 오고 있습니다·”
“숫자는?”
“세 배쯤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들은 것 중 가장 충격적인 말이었다·
“경계병들을 포함해 모두를 소환시키고 검진을 펼치게·”
휘이익!
사마옥의 명령에 팽문룡이 내공을 담아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야영지의 외곽에서 매복해 있던 용문표국의 표사들과 장내의 순찰을 돌던 후기지수들 그리고 혈검대의 무사들이 전부 한 곳으로 집결했다·
이어 팽문룡의 지도에 따라 각각의 방위를 점하며 검진을 펼치기 시작했다·
나와 천룡표국 그리고 후기지수들에게는 후방이 맡겨졌다·
사람들이 각각의 방위를 잡는 사이 남궁소소가 내게 전음을 보냈다·
[호리독사는 어딨어요?]
[나도 모르겠소·]
[같이 간 거 아니었어요?]
[그를 찾으러 나섰다가 아까 그 사달이 난 거요·]
[그럼 어딜 간 거죠?]
[그걸 모르겠소· 이 난리가 났는데도 설마 물건을 훔치고 있을 리도 없고·]
[도망간 게 아닐까요?]
[···!]
그때쯤 전방에서 말발굽 소리가 천천히 들리기 시작했다·
소리는 점점 많아지고 커지더니 이내 달빛 아래로 말을 탄 사람들이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괴인들은 이십여 장의 거리를 남겨두고 접근을 멈추었다·
이어 대여섯 장 간격마다 하나씩 횃불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조금 전 횃불을 이용해 상대의 수장을 저격하려 했으면서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자신만만 한 것이다·
잠시 후 횃불 아래 드러난 괴인들의 숫자는 무려 삼백여 명·
제각각의 복색에 도검창은 물론 판부 유성추 낭아봉 다절곤 등의 병기들로 무장하고 있었다·
한 명 한 명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짐작대로라면 저들은 천마성교의 재건을 위해 모인 잔당들이었다·
말이 잔당이지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만큼은 무림맹의 호송단 일백을 가볍게 압도하는 전력이었다·
전생에서 수많은 싸움을 보고 겪었지만 오늘처럼 큰 싸움판에 끼어든 적은 없었다·
나도 모르게 심장이 쿵광거렸다·
“내 곁에 꼭 붙어 있으시오·”
“어디 갈 데도 없어요·”
“따라온 걸 후회하오?”
“데려온 걸 후회해요?”
“나야 그럴 입장이 아니고·
“그럼 됐어요·”
“거듭 말하지만 내게서 떨어지지 마시오·”
“귀하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