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 명표를 만나다(5) >
———————–
호리독사가 창백해진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속으로 움찔했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남궁소소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말 안 했나?”
“깜빡한 척 하지 말아요·”
“실은 입찰이 시작되기 전에 호리독사를 시켜 무림맹 무사들의 전낭을 몇 개 훔쳤소·”
“뭐라고요?”
“놀라지 마시오· 모두 돌려 줄 것이오·”
“대체 왜?”
“소저도 봐서 알겠지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다른 표국들을 이길 수가 없소· 그래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다른 계획을 준비해 두었소·”
“준비가 아주 철저하군요·”
“처음부터 입찰에 뛰어들지 않았다면 모를까 기왕에 하기로 했다면야 목숨을 걸어야지 않겠소?”
“그래서 내 전낭도 훔치라고 했나요?”
“음?”
“또 모르는 척 한다· 날 객원표사로 끌어들이기 위해 전낭을 훔치게 한 거잖아요· 그 틈을 타 노잣돈을 주는 척 하면서 은근슬쩍 계약금으로 코를 꿴 거고요·”
“맹세코 그건 내가 시키지 않았소·”
“훔치긴 훔쳤군요·”
“그건 나도 모르는 일이오·”
“호리독사 당신이 말해봐요· 이정룡 공자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훔친 거예요? 아니면 간이 배 밖으로 나와서 자발적으로 훔친 거예요?”
“질문을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왜요?”
“그건 아예 내가 시켰다고 하지 않으면 재미없을 줄 알라고 협박하는 거잖소· 이때다 싶어 내 약점을 잡고 싶은 모양인데 맹세코 나는 시킨 적이 없소·”
“저는 훔치지 않았습니다·”
불쑥 끼어든 사람은 호리독사였다· 그는 더없이 진지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증거도 없이 어떻게 사람을 도둑으로··· 제가 아무리 삼룡채의 수적 출신이지만 함부로 남의 전낭을 훔치고 그러진 않습니다· 섭섭합니다·”
“억울한 척 하지 마세요· 한 번이라도 훔치면 평생 도둑인 거예요· 그리고 아까 말하는 걸 보면 단순한 수적 같지도 않더만·”
“일단 증거도 없이 사람을 의심한 건 제 잘못이 맞아요· 사과드리겠어요· 하지만 만에 하나 두 사람 중 누구라도 날 속였다는 것이 밝혀지는 날엔 각오하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러면서 남궁소소는 나를 향해 억지로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겁을 주고 싶은 모양인데 그 모습이 웃을 때와는 또 다르게 귀여우면서도 예뻤다·
한편 그 틈을 타 그녀의 뒤쪽에 있던 호리독사가 나를 향해 눈을 찡긋해 보였다·
순간 나는 숟가락으로 그의 눈알을 파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나는 남궁소소를 속일 의도가 전혀 없었다· 다만 호리독사가 훔친 전낭을 다른 일과 엮어서 해결하려다 보니 이 지경까지 왔을 뿐· 이번 무림맹 호송건이 끝나고 나면 솔직하게 말한 다음 양해를 구해 볼까?
그때그때의 상황을 진실하게 이야기하면 그녀도 충분히 이해··· 는 개뿔 약점만 잡힐 것이다·
자고로 가까운 사람과는 약점을 나누는 법이 아니라고 했다·
적이 되는 순간 그 약점으로 내 숨통을 조여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쯤 볼일을 보러 갔던 표사들이 하나둘씩 돌아왔다·
시간이 벌써 일각 이상은 흘렀을 것이다·
“아무래도 두 사람만 다녀와야겠소·”
“우리 둘만요?”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소· 곧 심사가 다시 시작될 텐데 그때 나까지 없으면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오·”
“한 가지만 물어볼게요· 지금 귀하가 하려는 일이 무슨 일인지는 확실히 알고 있는 거죠?”
“물론이오·”
“좋아요· 그럼 믿고 가겠어요·”
두 사람이 조용히 일어나 사라졌다·
한 식경이 지나 심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때까지도 남궁소소와 호리독사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표사들을 배제한 채 심사가 재개 되었다는 점이다·
오전에 경력을 발표할 때 동행할 표사들의 면면은 충분히 보았으니 오후부터는 수장들만 앉혀 놓고 더욱 밀도 있는 심사를 하려는 것 같았다·
“여러분들께서는 모두 오랜 경력의 표사들이시니 만금백산로(萬金百散路)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 것입니다· 그때 표행을 실패한 원인에 대한 여러분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천년고도 장안에 만금산장(萬金0J任)이란 곳이 있었다·
도시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산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작은 산 하나를 통째 장원으로 썼기 때문이다·
욕심이 끝없었던 만금산장의 장주는 섬서성 제일의 부자로는 만족을 못 했다·
그는 더 큰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더 큰 권력과 가까운 곳에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장안을 떠나 황제가 사는 북경으로 이사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8대에 걸쳐 살아온 가문의 거점을 통째로 옮기는 대역사가 시작되었다·
가산을 정리하는 데만 3년이 걸렸다· 아홉 개 표국에서 구백여 명의 표사와 천오백여 명의 쟁자수가 동원되었다·
오백 대의 표마차와 천이백 필의 말도 동원되었다· 그야말로 전례가 없던 대표행이었다·
이른 봄에 장안을 떠난 표행은 가을이 되어서야 겨우 북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작 열 대의 표마차에 불과했다·
원인은 비적들의 습격이었다·
총장 삼천리에 달하는 길을 가는 동안 있었던 비적 떼의 습격은 무려 127회· 하루에 각기 다른 비적이 세 번이나 습격해 온 적도 있었다·
그 많던 재산은 비적들에 의해 백 방으로 흩어졌다·
가세가 기울자 수백을 헤아리던 가노들도 모두 도망치고 고작 열 명만 남았다·
만금산장주는 사실상 거지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어 북경에 도착했다·
그때 오백 대의 표마차가 지나간 길을 일컬어 강호인들은 만금백산로라 불렀다·
망한 것은 만금산장뿐만이 아니었다·
죽은 표사들과 잃어버린 표물에 대한 보상금을 감당하지 못한 표국 아홉 곳이 전부 간판을 내려야 했다·
녹림맹이 배후에 있었다더라· 무림의 초절정 고수들이 관여했다더라· 북경의 유력 가문들이 사주했다더라 등등·
수많은 괴소문이 뒤따른 이 사건은 지금으로부터도 20년 전에 일어났다·
그러나 표국사에 있어 워낙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표국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실패한 원인이야 많겠지만 첫 번째를 꼽으라면 소문을 관리하지 못한 탓이 가장 큽니다· 그때 만금산장에서 운송의 편리를 위해 가산을 모두 은원보로 바꾸어 마차에 싣고 간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습니다· 이 때문에 중원 전역에 있는 비적단이 몰려 들었던 것이고요·”
“만금산장의 표행이 실패한 첫 번째 이유는 내부 단속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평소 장주의 일족으로부터 천대받고 멸시당했던 가노들이 이 기회에 한몫 잡아 도망치고자 비적들과 결탁했다는 것이 훗날 밝혀졌지요·”
표행에 청춘을 바친 사람들인만큼 하는 말마다 버릴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사마옥의 표정을 밝게 만드는 결정적인 식견은 나오지 않았다·
설인탁 역시 굳게 다문 입술로 사람들의 의견을 청취한 할 뿐이었다·
만약 누군가 깊이 있는 식견을 피력했더라면 대번에 두 사람의 눈동자가 빛날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추가적인 질문을 할 것이다·
이윽고 용문표국의 차례가 되었다·
“모두 같은 얘기들입니다· 또한 그것들은 전부 예견을 했어야 하는 것이지요·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서로 경쟁 관계에 있던 아홉 개의 표국이 각자의 주장만을 내세우느라 단결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면 어떻게 했어야 하오?”
사마옥이 물었다· 처음으로 나온 질문이었다·
내가 볼 땐 엽천문의 대답도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을 한 것은 오전의 활약으로 관심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이해관계로 모인 사람들은 절대 단결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복종을 시켜 단결하는 것과 같은 힘을 내게 할 뿐이지요· 그러려면 모두가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총표두를 세워 전권을 맡겼어야 합니다·”
“혹시 귀하도 그 표행에 참여했소이까?”
이번엔 설인탁의 질문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때의 직급은?”
“산서성 남쪽의 지리에 밝은 신입 표사였습니다· 물론 그때 몸 담았던 곳은 용문표국이 아니었고요·”
“어떻게 생존했소이까?”
“태행산맥(太行山脈)을 지나던 중 기습을 해온 비적단 연합 세 곳과 전투를 치렀습니다· 그때 화살을 맞고 표국으로 호송되었습니다·”
“화살을 맞은 곳이 눈이었소?”
“그렇습니다·”
장내에 술렁거림이 파도처럼 번져갔다· 모두가 만금백산로의 실패 원인을 설명하는 데에만 급급했다·
한데 엽천문은 식견이 깊고 얕음은 둘째치고 직접 참여한 경험까지 피력했다·
세상에 경험만큼 좋은 이력은 없다·
이견인 없는 한 남은 두 자리 중 하나는 용문표국의 차지가 될 것 같았다·
“천룡표국은 어떤 고견이 있으신지요?”
마침내 내 차례가 되었다· 그때까지도 남궁소소와 호리독사는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나타나 성공했는지 여부를 가르쳐 주어야 나도 다음 작전을 진행할 수가 있었다·
“이정룡 표사?”
위맹관이 다시 한번 나를 가만히 불렀다·
남궁소소와 잘 아는 사이라고 하더니 일단 말투부터가 부드럽다·
나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행은 수많은 돌발상황이 곧 일상인 여정입니다· 모든 걸 다 예견할 수도 없고 예견한다고 막을 수도 없지요· 중요한 건····”
한참 말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장검을 찬 십여 명의 무사들이 장내로 뛰어들었다·
그중 수장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사마옥에게 달려가 무언가를 귓속말로 전했다·
사마옥의 눈매가 매의 그것처럼 날카로워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를 노려보며 사자후를 내질렀다·
“저 놈을 잡아라!”
채채채채챙!
십여 자루의 칼날이 뽑히더니 순식간에 날아와 내 목 주변에 꽃받침처럼 붙었다·
이어 누군가 칼날 사이로 쑥 들어와서는 손을 뒤로 꺾고 밧줄을 묶기 시작했다·
‘들켰구나!’
어차피 도망갈 생각도 없었기에 나는 순순히 오라를 받았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표사들과 구경꾼들은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웅성대기 시작했다·
“구경꾼들 속에 섞여 있던 두소부 양조광 당군백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끌고 가라!”
쇠창살로 만든 뇌옥엔 남궁소소와 호리독사가 먼저 들어와 있었다·
일단 얼굴이 멀쩡한 걸로 보아 싸움이 벌어지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건 천만다행이었다·
“어떻게 된 거요?”
“들켰습니다·”
“그건 말 안 해도 아오·”
“통풍구 속으로 전낭 다섯 개를 소리 나지 않게 무사히 던져 넣고 내려오는데 머릿속에서 갑자기 ‘성공하셨는가?’ 하며 천둥 같은 소리가 울리지 않겠습니까?”
“머릿속에서 소리가 울려요?”
“깜짝 놀라서 사방을 둘러보니 저 멀리 보이는 전각의 오층 창문 너머에서 웬 은발 노인이 뒷짐을 쥐고는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더라고요·”
“예에?”
“눈이 딱 마주치는 순간 거미줄에 걸린 파리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사지가 마비라도 된 것처럼 옴짝달싹할 수가 없더라고요· 살다 살다 그렇게 강렬한 기도를 뿜어내는 고수는 처음 봤습니다·”
“그래서요?”
“그때 머릿속에서 다시 목소리가 울렸습니다· ‘방금 던져 넣은 것들을 다시 빼낼 수도 있으신가?’라고요·”
“그래서요·”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죽을 것 같더라고요· 해서 다시 기어 올라가서는 다섯 개 전부 다시 빼냈습니다· 다른 장원 건물의 통풍구와 달리 도둑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쇠창살을 박아놓아 조금 힘들긴 했지만요·”
“그래서요?”
“머릿속에서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라는 소리가 울리더라고요· 그리고 다시 ‘멀리서 온 손님 같은데 식사나 하고 가시게·’라고 울렸습니다·”
“그래서요?”
“그제야 노인이 창문에서 사라지는가 싶더니 제 목덜미에 칼 두 자루가 와서 붙더라고요· 돌아보니 십여 명의 무인들이 어느새 지붕으로 올라와 뒤에서 저를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누군지 모르지만 엄청난 고수가 창밖을 구경하다 우연히 호리독사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이걸 재수가 없다고 해야 할지 역시 고수들이 우글거리는 무림맹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미 던져 넣은 전낭은 대체 어떻게 다시 빼낸 거요?”
“저기 있는 걸로다가·”
그러면서 호리독사가 뇌옥 밖 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물건들을 가리켰다·
탁자 위에는 누르스름한 실을 잔뜩 감아 놓은 머리빗 작은 갈고리 정체를 알 수 없는 엽전 그리고 코를 천 번 정도 풀어서 뭉쳐 놓은 듯한 정체불명의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저게 다 뭐요?”
“백 근은 들어 올릴 수 있는 천잠사와 그 끝에 매다는 삼(三) 종의 추입니다· 각각 갈고리 지남철 그리고 끈적끈적한 대왕거미줄 뭉치입니다·”
나는 그만 입이 딱 벌어졌다· 이것만 있으면 웬만한 것들은 창문 밖에서 다 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언가 따끔거리는 것 같아서 옆을 돌아보니 남궁소소가 가자미눈을 뜨고 나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이래도 평범한 수적이라고 할래요?”
“난 그렇게 말한 적 없소·”
“됐고요· 다음 계획이나 말해봐요·”
“당황할 것 없소·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니까·”
“뇌옥에 갇힐 걸 예상했다고요?”
“호리독사가 성공하면 어차피 내 입으로 다 얘기할 생각이었소· 하면 무림맹의 입장에선 당연히 일단 우리를 가둬 놓고 심문하려 했을 것이오·”
“말도 안돼·”
“그리고 망한 것 치고는 일이 잘 풀렸소·”
“망했는데 잘 풀렸다고요?”
“일단 전낭을 던져 넣고 나오다 걸렸으니 우리에게 훔칠 의도가 없었다는 건 증명이 될 것이오· 거기다 다시 올라가서 전낭을 빼내는 시연까지 했으니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비고 안에 있는 물건을 훔칠 수 있다는 것도 증명한 셈이 됐소· 아마 은발 노인도 그걸 보고 싶었을 것이오·”
“중요한 건 우리가 집법당의 뇌옥에 갇혀 있다는 거예요· 제가 아는 한 이곳에 갇혔다가 제 발로 걸어서 나간 사람은 없어요·”
“제 발로 걸어 나가지 않으면?”
“기어서 나가거나 들것에 실려 나가거나·”
나도 모르게 똥꼬에 살짝 힘이 들어간다·
무림맹을 만만하게 본 적은 없다· 다만 덮어놓고 사람을 두들겨 패거나 불구로 만들지 않을 거라는 믿음은 있다·
“한데 은발 노인이 누군 줄 아시오?”
“호리독사의 진짜 정체부터 말해줘요·”
그때 전각의 철문이 벌컥 열리면서 일단의 무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사마옥과 설인탁이 집법당 무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나타난 것이다·
잠시 후 쇠창살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자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짐작하시겠지만 모두 제가 꾸미고 지시한 일입니다· 그러니 저를 벌하시고 두 사람은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본인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알고 있나?”
“감히 무림맹의 비고를 살펴본 것에 대해서는 달게 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이 아니면 반드시 저희여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사로잡히는 것으로 말인가?”
“비록 사로잡혔지만 무림맹의 경계에 빈틈이 있음은 확실히 증명했습니다· 이것은 총군사님께서도 부정하지 못하실 겁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사마옥이 함께 온 젊은 검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강인한 인상의 그는 잔뜩 골이 나 있었는데 아무래도 비고의 경계를 책임진 사람인 것 같았다·
“맹의 경내인지라 방심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내가 얼른 다시 끼어들었다·
“호송 중에는 방심할 상황과 이유가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설마 물건을 잃어버린 후에도 표사들에게 지금처럼 너그러우시진 않겠지요?”
사마옥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됐다· 일단 그의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다·
나는 여세를 몰아 심사장에서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싸움을 잘 하는 표국 길을 잘 아는 표국 비적들을 상대한 경험이 많은 표국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물건을 훔치려는 자들의 수법과 심리를 우리보다 잘 아는 표국은 없을 것입니다· 도둑 하나를 막는 데 열 명의 포졸로도 모자란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도둑을 도둑으로 막으면 한 명으로도 족할 수 있습니다· 저의 객원표사 중에 그런 실력을 지닌 자가 한 명 있습니다· 그는 공령신투의 제자입니다·”
“하종도라고 합니다· 강호의 형제들은 호리독사라는 별호를 주었지요· 지금은 천룡표국의 객원표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호리독사가 눈치 빠르게도 얼른 포권지레를 올렸다·
공령신투의 제자라는 말에 남궁소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함께 온 집법당의 무사들 역시 매우 놀라는 눈치였다·
지독한 술꾼에다 삼룡채에 신변을 의탁하고 있어서 그렇지 공령신투의 제자라면 흑도들 사이에서는 제법 거물이었다·
그러나 사마옥과 설인탁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사건이 벌어지고 난 후 두소부를 불러 호리독사의 내력에 대해 자세히 물어본 모양이다·
이건 좋은 징조다· 우리에게 단순히 처벌을 넘어선 어떤 관심이 있다는 거니까·
“후기지수들의 전낭은 왜 훔친 거지?”
“제가 시켰습니다·”
“어째서?”
“어떻게든 실력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과욕을 부린 것 같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외람됩니다만 후기지수들에게 사과의 말을 전해 주십시오·”
비고에 던져 넣는 것은 굳이 후기지수들의 전낭일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걸 던져 넣은 이유는 전낭이 없어진 걸 후기지수들이 곧 알게 될 텐데 그러면 호리독사를 의심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해서 어떻게든 이번 일과 엮어 처리를 해버리려 했다·
과연 사마옥은 이런 허술한 수에 속아 넘어갈까?
“도둑을 막기 위해 표사들을 불렀더니 진짜 도둑들이 왔군· 그나마 이렇게 잡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나로선 천만다행이다· 일단은 넘어간 것 같다·
사마옥은 이어 남궁소소를 돌아보며 물었다·
“네가 이럴 줄은 몰랐구나·”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무슨 벌을 내릴 줄 알고·”
“···!”
“···!”
“···!”
별다른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사마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설인탁과 집법당의 무사들이 뒤를 따랐다·
“너무 염려 마시오· 이렇게 뇌옥까지 찾아와 심사를 하시는 걸 보면 덮어놓고 죄를 물을 생각은 아닌 것 같소·”
“심사라고요? 심문이 아니고요?”
“여긴 무림맹의 집법당에서 관리하는 뇌옥이오· 심문을 할 생각이었다면 외부인인 설인탁 대협까지 대동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오·”
“하지만 설 대협께선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잖아요·”
“그게 나도 좀 걸리긴 하는데····”
“뭐예요·”
“그건 그렇고· 이제 수십 장 밖에서 호리독사를 옴짝달싹 못 하게 했다는 그 정체불명의 은발 노인이 누군지 말해 주시오·”
***
늦은 밤 맹주부로 불려온 사람은 모두 세 명이었다·
왼쪽부터 총군사 사마옥 집법당주 좌공문 그리고 용문표국의 대표두 설인탁까지·
“면목이 없습니다·”
“모두 속하의 책임입니다·”
사마옥과 작공문이 차례로 머리를 조아렸다·
“어처구니없는 녀석들 때문에 다들 체면이 말이 아니게 생겼습니다· 빈노도 그렇고 말입니다· 껄껄껄·”
은발의 머리카락이 흡사 햇살에 비친 설봉처럼 신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노인이 말했다·
올해 여든 살을 바라보는 이 노인이 바로 뇌검 남궁무룡과 함께 천하십검의 수작 자리를 다툰다는 설산신검 장초풍이었다·
그리고 현 무림맹의 맹주였다·
“일벌백계로 다스리겠습니다·”
“우리가 흑도도 아닌데 기분 나쁘다고 아무 벌이나 내릴 수야 있나요· 집법당주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적용할 맹법이 마땅치가 않습니다· 훔친 게 없으니 절도죄를 물을 수도 없고 비고로 들어가지 않았으니 침입죄를 물을 수도 없고 누굴 때려 다치게 하지 않았으니 상해죄를 물을 수도 없습니다· 하다못해 비고가 있는 경내까지 들어온 것도 경계무사들의 검문을 거쳤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치밀한 놈들이 있을 줄이야· 껄껄껄· 그래도 뭐라도 벌은 주어야지 않겠습니까?”
“단지 자신들의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 접근이 금지된 비고의 지붕을 올랐으니 무림맹을 능욕한 죄를 물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저나 총군사님 혹은 맹주님께서 임의로 징벌의 수위를 정하실 수가 있습니다·”
“공령신투가 소림사의 장경각으로 들어가 낯 뜨거운 화첩을 꽂아놓고 나온 걸 알았을 때 방장 대사의 심정이 어땠을지 이제야 좀 이해가가는군요·”
장초풍은 다시 사마옥을 돌아보며 물었다·
“놈의 자질은 어땠습니까? 듣자 하니 향시와 회시에 연달아 장원급제를 한 기재라고 하던데·”
“위맹관을 직접 항주로 보내 표왕에게 편지를 한 통 전할 생각입니다· 그에게는 자식이 많으니 한 명쯤은 무림맹으로 보내 대의에 동참하시고 강호의 경험도 쌓게 하는 것이 어떻냐고요· 만약 표왕이 순순히 내준다면 군사부에서 쓰고 싶습니다·”
“어지간히도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비상한 머리에 무공이 뛰어난 후기지수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대범하기까지 한 놈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요· 언젠가 큰 일을 낼 녀석입니다·”
“하면 호송하는 일에도 제법 쓸모가 있겠군요?”
“그건 풍운표검에게 하문하시는 것이 어떨는지요· 그는 맹도가 아니니 우리와 달리 오로지 실력으로만 평가할 수 있을 겁니다·”
장초풍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설인탁에게로 향했다·
설인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표물을 노리는 비적이나 도적들의 생각을 읽는 것은 마치 관천망기를 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변화무쌍할 뿐더러 아무리 표행 경험이 많아도 평소 하늘을 보던 습관과 눈이 없으면 알 수가 없지요·”
“그 말씀은?”
“소생에게 서른다섯 개 표국 중 두 곳을 꼽으라시면 용문표국과 천룡표국을 꼽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만 꼽으려면 단연코 천룡표국입니다·”
“그 정도입니까?”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장기를 가졌습니다· 더 기가막힌 건 천룡표국의 젊은 표두가 그걸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는 점이고요·”
“더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맹주의 권한으로 감히 무림맹을 욕보인 후기지수들에게 곤장 스무 대씩의 징벌을 내리겠습니다· 단 집행은 호송이 끝난 후로 미루도록 하지요·”
“존명!”
“존명!”
“존명!”
“그리고 군사부주께서는 저의 편지도 함께 표왕에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시절도 점점 수상해지고 표왕에게 다시 한번 입맹을 권유해보아야겠습니다·”
“그는 이미 맹주님의 권유를 두 차례나 거절했습니다· 이제 와서 과연 입맹을 할까요?”
“유비도 삼고초려 끝에 제갈량을 얻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는 편지만 보낼 뿐이니 표왕의 마음을 얻지는 못하겠지만 대신 미안한 마음이 들게하면 총군사의 편지가 조금이라도 더 힘을 발휘하지 않을까요?”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