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학살해도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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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의 아름다운 풍광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커다란 탁자가 놓여 있고 그 주위를 십여 명의 후기지수들이 앉아 있었다·
나보다 세 살이 많은 그러니까 이정룡의 바로 윗 형인 삼공자 이병룡과 그의 잘난 친구들이었다·
항주에서 내로라하는 무림문파의 후기지수들인 그들은 사실 이병룡이 먼 훗날 있을 형들과의 전쟁에 대비해 관리하는 우군들이었다·
일행 중에는 어디서 저런 애들만 모았을까 싶을 정도로 아리따운 용모의 여자가 셋이나 있었다·
그중에 문제의 조영영도 있었다· 이정룡이 오매불망 짝사랑했던 수향문주의 무남독녀 외동딸 조영영·
솜씨 좋은 장인이 밀가루로 빚어 만든 것처럼 하얗고 깨끗한 얼굴이 침이 꼴깍 넘어갈 정도로 아름다웠다·
‘항주 삼대 미인이라더니····’
그나저나 불과 열흘 전 저 여자 때문에 죽으려 했는데 여기서 이렇게 맞닥뜨렸으니 나도 저 여자도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뭐 솔직히 말하면 나는 진짜 이정룡이 아니었기에 그렇게까지 난감하진 않았다·
“지나는 길에 셋째 형님과 친우분들이 계시다고 해서 인사차 잠시 들렀습니다· 식사는 맛있게들 하셨는지요?”
“도망치려는 걸 철탑이 붙잡은 건 아니고?”
“그럴 리가요·”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는데 인사나 하지그래·”
제 어미를 닮아 삼족두꺼비같이 생긴 이병룡이 나와 조영영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그녀와 이정룡이 오래전 예당서원(禮堂書院)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라는 걸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었다·
이정룡이 조영영을 마음에 담게 된 것도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뽀얗고 귀여웠을 텐데 나라도 빠져들었을 것 같다·
“정룡 오라버니 오랜만이네요·”
어색함을 깨기 위해서인지 조영영이 먼저 밝게 아는 체를 해왔다·
살짝 웃는데 꼭 눈앞에서 목련 꽃이 피는 것 같았다· 새가 지저귀는 것 같은 저 목소리는 또 어떻고·
“그러게···· 오랜만이네·”
“영영이 오라버니라 부른다고 너까지 반말을 하면 안 되지· 나랑 영영 사이에 혼담이 오가고 있는 거 몰라?”
이병룡이 두 눈을 치켜떴다·
“죄송합니다·”
“한심한 녀석·”
“다음부턴 조심하겠습니다·”
“다음은 무슨 다음· 허구한 날 기루에다 도박판이나 전전하고· 무공을 익히길 하나 그렇다고 글공부를 하나· 천한 피는 못 속인다더니 어쩌다 너 같은 놈이 우리 집안에 태어나서는····”
이거 강도가 너무 센데? 아무리 죽마고우들 앞이라고는 하나 이렇게까지 심하게 말할 필요가 있을까? 이복동생일망정 결국엔 제 얼굴 깎아내리는 짓일 텐데·
조영영 때문이다· 이병룡은 평소 자신의 못생긴 얼굴에 자격지심이 있었다· 특히 동생인 이정룡과 비교되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이병룡은 지금 나와 소문이 있었던 조영영 앞에서 나를 쓰레기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자신을 선택한 게 백번 잘한 거다라는 걸 보여 주려는 속셈이다·
‘고작 이 정도 그릇이었어?’
나는 다른 사람들과도 모두 인사를 나누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일방적으로 인사를 했고 한두 살씩 많은 그들이 윗사람으로서 인사를 받는 식이었다·
남자들은 이병룡을 만나러 천룡표국에도 수시로 드나들던 사람이라 모두 아는 얼굴에 이름들이었다·
여자도 조영영과 한 명은 알겠는데 나머지 한 명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조영영만큼이나 예쁜 그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더 우아하고 더 정숙한 느낌을 주는· 그런데 왠지 어디서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잠시 눈길이 머물자 그녀가 살며시 시선을 피했다· 실수를 깨달은 나는 얼른 돌아서며 사람들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럼 전 이만····”
“정룡 공자 식사하러 온 것 아니었어요?”
돌아서 가려는 나를 조영영의 옆에 앉은 여자가 붙잡았다· 새치름하게 웃는 모습이 귀여운 그녀는 항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무관인 용무관(勇武關)의 외동딸 진금봉이었다·
“그러지 말고 이리 와서 우리와 함께 먹어요· 어차피 다른 반점으로 가봐야 오늘 하루는 모두 유생들로 만석일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귀한 시간을 제가 방해하면 쓰나요·”
말을 하면서 나는 탁자 위를 빠르게 훑었다· 이름도 모르고 구경도 못 해본 온갖 화려한 요리들이 탁자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병룡 오라버니 그래도 괜찮죠?”
진금봉이 이병룡에게 코맹맹이 소리로 허락을 구했다· 얼굴엔 살짝 보조개까지 팼다·
말하지 않아도 알만했다· 진금봉은 지금 조영영에게 질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만약 혼담이 성공하면 조영영은 절강성에서 가장 큰 부호이자 무림세가인 천룡표국의 셋째 며느리가 된다·
게다가 항주 삼대 미녀라는 조영영에 비하면 진금봉은 예쁘기는 해도 한참이나 모자랐다·
친구랍시고 함께 어울려 다니지만 모든 남자들이 조영영만 좋아하다 보니 그간 쌓인 질투가 폭발하는 모양이었다·
다른 남자들도 한 입씩 보탰다·
“그렇게 하지· 아까부터 음식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걸 보니 끼니도 거르고 다니는 모양인데· 하하·”
“저녁때가 한참 지났는데 정룡 아우는 어딜 그렇게 바삐 돌아다니신겐가? 좋은 곳이면 혼자만 알고 있지 말고 이 형님들에게도 좀 가르쳐 주시게· 하하하”
아침부터 기루랑 도박판을 전전하느라 밥도 못 얻어먹었느냐고 나를 조롱하는 것이다·
두 사람의 말에 왁자지껄 웃음보가 터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웃은 놈이 이병룡이었다· 놈은 눈곱만큼도 나를 동생으로 여기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이 순간 그는 웃을 게 아니라 눈알을 까뒤집고 화를 냈어야 한다·
하나도 웃지 않은 사람은 조영영과 오늘 처음 보는 의문의 여자뿐이었다·
조영영은 나와 함께 있는 것 자체가 불편한지 시선도 피한 채 계속 물만 들이켜고 있었다·
의문의 여자는 그냥 덤덤하게 구경했다· 이병룡이 말했다·
“먹다 남은 음식이라도 괜찮다면야····”
“그럼 염치불고하고 한 젓가락 해볼까요? 장삼아 너도 대충 다른 탁자에 자리 잡고 앉아라· 내가 남는 거 몇 개 건네 줄게·”
나는 얼른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내가 정말로 앉을 줄은 몰랐는지 모두 당황한 얼굴이 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닭 다리부터 턱 하니 잡아갔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사흘 굶어 훔치지 않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도적이 늘어난 것은 양민들이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산으로 들어간 탓입니다· 한데 어찌 관군을 앞세워 토벌을 하는 것만이 해법이라고 하겠습니까?”
“법가에 이르길 절벽이 가파르면 짐승이 두려워 오질 않으니 떨어져 죽는 일 또한 없다고 했네· 통치도 이와 같아 법이 엄하면 저절로 다스려지는 법이네·”
이병룡과 꼬붕들은 오늘 있었던 향시의 ‘시제’에 대한 답문을 놓고 치열하게 갑론을박하는 중이었다·
시제는 ‘화북지방에 흉년이 들어 도적 떼가 들끓으니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논하라·’였다·
알고 보니 오늘 모인 남자들 전부가 나와는 다른 고사장에서 향시를 본 모양이었다·
무림세가의 후기지수들이 무과나 볼 것이지 왜 문과를 보고 지랄일까? 다 이유가 있다·
첫째 이들은 무관이 될 생각이 없었다· 둘째 무림세가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대법으로 몸을 만들고 무공을 수련한 이들에게 향시의 무과는 아이들 장난 같은 수준이었다·
그래서 무과에 합격을 해도 누구 하나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문과는 다르다· 몇만 명 중에서 겨우 200명만 뽑는 문과에 급제하기만 하면 평생토록 ‘학문에도 대단한 조예를 지닌 무인’이라는 평가가 따라 다닌다·
이게 무림의 후기지수들이 너도나도 향시의 문과에 도전하는 이유다·
그러나 유생들과 달리 무공도 함께 수련해야 하는 이들은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해서 경학을 기초부터 공부하기보다 권위 있는 경전이나 옛 성현들의 말씀을 인용해 만든 틀에 박힌 답문 속칭 팔고문(八股文)이라는 일종의 모범답안 위주로 암기식 공부를 한다·
그러다 보니 사고가 다소 경직되고 편협한 편이었다· 지금도 출제자의 의도는 온데간데없고 도적들을 토벌하느냐 설득하느냐 하는 지극히 이분법적인 사고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놀라운 일은 저런 정도의 식견과 통찰로도 나의 형인 이병룡이 200명을 뽑는 이번 향시에서 비록 끄트머리일망정 급제 즉 합격을 한다는 점이다·
논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문제는 근본적인 해결이지요· 한비자께서 말씀하시길 혼란이 일어나는 원인을 제거해야지만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주저리주저리·”
“그거야말로 원론적인 얘기지· 천재지변으로 인한 흉년을 누가 막을 것인가· 순자께서 말씀하시길 호랑이가 개를 복종시킬 수 있는 것은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 때문이라고 했네···· 주저리주저리·”
여자들 앞이라서 그런지 남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성현들의 이름과 어려운 말들을 앞다투어 해댔다· 마치 나는 이런 글까지도 읽어 봤다고 자랑하려는 듯·
“정룡 공자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진금봉이 돌연 내게 물었다·
닭 한 마리와 민물자라 두 마리를 게눈 감추듯 먹어치운 후 ‘잉어오향찜’에 막 손을 가져가던 나는 귀찮은 기색을 애써 감추고 말했다·
“저는 그런 거 잘 모릅니다·”
“어머 겸손도 하셔라· 호호·”
진금봉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가늘고 하얀 손으로 내 어깨를 툭 쳤다·
코맹맹이 소리에 이어지는 부드러운 손길 그리고 교태로운 웃음까지·
수컷들의 경쟁심과 질투심을 자극하려는 것이다· 멍청한 수컷들이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래· 편하게 얘기해봐· 정룡 아우도 어려서 글공부를 꽤 했으니 생각이 있을 것 아닌가·”
“그러고 보니 정룡 아우야말로 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녹림의 도적들에 대해 우리보다 더 많이 알고 있겠군·”
“듣고 보니 정말 그런걸·”
내가 진짜 몰라서 모른다고 한 게 아니었다· 단지 쓸데없는 대화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을 뿐·
한데 이 어린 노무 새끼들은 여자들 앞에서 나를 망신 줄 생각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솔직히 말해도 됩니까?”
“당연하지·”
“아닙니다· 안 할랍니다·”
“글쎄 편하게 말해보라니까·”
“정말이죠?“
”그렇다니까·“
장삼이 앉아 있는 옆 탁자를 보니 닭 한 마리가 이쑤시개만한 뼈다귀 한 줌으로 변해 있었다·
음식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이것들 싹 학살하고 가버려? 에라 모르겠다· 나는 손가락을 쪽쪽 빨고는 말했다·
“순자가 아니라 한비자입니다·”
“뭐?”
“호랑이 발톱이 어쩌고 그거요· 순자가 아니라 한비자께서 한 말이라고요·”
“하하하· 정룡 아우가 무언가 착각을 했나보군· 아무래도 아직은 배움이 많이 모자란 탓이겠지· 괜찮네· 이해하네·”
“못 믿겠으면 일 층에 평생 글공부만 한 유생 200명이 모여 있으니 아무나 데리고 와서 한번 물어보세요· 술 한 병 사준다고 하면 좋다고 올라와 서책까지 펼쳐 확인해 줄 겁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당사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자기도 확신을 못 하는 것이다· 내친김에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인용도 모두 되짚어 주었다·
“혼란이 일어나는 원인을 알아야 한다고 한 건 한비자가 아니라 묵자이고 법이 지나치게 엄하면 백성들이 떠난다고 한 건 오자가 아니라 ‘좌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공자께서 인용해서 한 말씀이고요· 그리고 또····”
나는 계속해서 남자들이 했던 말을 하나씩 고쳐 주었다· 한 식경 동안 열 명이 치열하게 논쟁을 했지만 출전이나 인용 혹은 내용이 하나라도 틀리지 않은 사람은 겨우 세 명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내가 글을 알면 얼마나 알 것이냐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거침없는 태도와 사소한 내용까지 바로잡아 주는 치밀함 그리고 일 층에서 유생을 데려와 확인해 보자는 나의 자신감에 그만 기세가 꺾여 버렸다·
이쯤 되자 그야말로 다들 똥물이라도 뒤집어쓴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입술을 부들부들 떠는 자 어금니를 꽉 깨무는 자 두 주먹을 불끈 쥐는 자····
방식은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의 눈동자는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저 똥 멍청이가 어떻게···!’
일이 이렇게 전개될 줄 몰랐던 진금봉은 울상을 지으며 조영영의 눈치를 보았다·
조영영은 저 사람이 과연 자기가 아는 그 이정룡이 맞나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방점을 찍었다·
“사서오경만 서책이 아닙니다· 팔고문만이 문장도 아니고요· 다른 책들도 골고루 좀 읽으세요· 병룡 형님의 친우분들은 인용하는 책들이 너무 빈약합니다·”
“풉!”
갑작스럽게 웃음을 뿜은 사람은 여태 말없이 대화를 지켜만 보고 있던 의문의 여자였다·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가리기는 했지만 그녀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어쩌지 못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데 여전히 어깨가 꿈틀꿈틀했다·
한데도 누구 하나 그녀에게 싫은 내색을 하지 못 했다· 오히려 부끄러움에 얼굴만 더 빨개졌을 뿐·
그제야 나는 남자들이 잘 보이려고 한 대상이 여자들 중에서도 특히 저 의문의 여자임을 깨달았다· 심지어 이병룡조차도····
‘대체 누구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