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 명표를 만나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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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무림에는 수많은 무림세력들이 존재한다·
심산유곡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다 끝내는 강호를 경동시키는 마도종파들에서부터 호시탐탐 중원 정복을 노리는 새외의 세력들까지· 무림맹은 바로 이런 불순한 무리로부터 중원무림을 지키기 위해 백도무림인들이 만든 결사단체였다·
당대의 맹주는 설산신검(雪山神劍) 장초풍· 강호인들이 천하십검 중에서도 제일좌를 논할 때면 뇌검(雷劍) 남궁무룡과 함께 언제나 빠지지 않는 극초절정의 검수였다·
설산신검만이 아니었다· 일흔두 개 문파가 연합한 결사단체인 만큼 무림맹은 강호를 떨어 울리는 고수들이 우글우글했다·
“여기서 쉬시면 됩니다·”
접객당의 무사가 안내한 곳은 열 평 정도 되는 작은 방이었다·
깨끗한 침대 위에는 갈아입을 옷이 놓여 있었고 창가의 햇살이 비치는 곳에는 찾아온 사람과 담소를 나눌 수 있도록 작은 탁자와 의자도 보였다·
“마음에 드십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군요·”
“두소부 공자님께서 특별히 부탁하시어 일급 객실로 모셨습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객실에도 등급이 있습니까?”
“총 네 등급이 있습니다·”
“이 방보다 못한 곳이 세 종류나 있다고요?”
“아닙니다 가장 위에 특급의 객실이 있고 이 방은 두 번째로 좋은 곳입니다· 아래에 이급 삼급이 있는데 두세 명이 함께 쓰지요·” 두소부가 특별히 부탁을 하는 바람에 일급의 객실을 주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원래는 이급의 객실로 배정될 예정이었단 말이 된다·
문득 처음부터 일급과 특급의 객실을 배정받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궁금했다·
한데 그런 건 좀 묻기가 그렇다· 꼭 빈정이 상해서 그러는 것 같기도 하고·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일 층에 있는 붉은 문으로 들어오시어 말씀하십시오· 혹시 장원을 구경하고 싶으시다면 얼굴을 가리는 모자를 쓰시면 안 되고 반드시 침대에 놓여 있는 붉은색 적건을 쓰셔야 합니다·”
“그건 왜 그렇습니까?”
“멀리서도 맹도와 방문객의 구분을 쉽게하여 만약에 있을지 모르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금지(禁地)도 있습니까?”
“그런 곳엔 반드시 지키는 무사들이 있으니 편안하게 돌아다니셔도 됩니다· 물론 담장을 넘거나 하시면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충분히 알았습니다·”
“더 궁금한 건 없으신지요?”
“총군사님은 언제쯤 뵐 수 있는 겁니까?”
“워낙 바쁘신 분이라 정확한 시간을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일단 군사부에 알렸으니 답변이 올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접객당의 무사가 나가자 나는 여장을 풀고 간만의 휴식을 청했다·
한잠 늘어지게 자고 났더니 밤이 되어 두소부가 금전 이백 냥을 들고 찾아왔다·
번쩍번쩍 빛나는 금전을 보고 있자니 그동안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백발노성이 준 지도에 나와 있는 장소로 가면 무려 금전 일천 냥이 더 있을 것이다·
천룡표국 사공자라는 배경을 등에 업을 것도 없이 나는 이미 거부였다·
“백발노성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에게 당해 불구가 된 맹도들이 너무 많습니다· 죽지는 않겠지만 십중팔구 남은 생은 볕이 들지 않는 지하 뇌옥에서 보내야 할 겁니다·”
“그렇군요·”
“밖으로 나가서 술이나 한잔 하시겠습니까?”
“술이라고요?”
“실은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이 이 공자를 만나고 싶어 합니다·”
“저를 왜요?”
“향시와 회시에서 연달아 장원급제를 한 일이며 항주의 이화원에서 진왕과 공주를 지킨 일 그리고 이번에 백발노성을 호송한 일까지· 이 공자는 이미 화제의 인물입니다· 당연히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지 않겠습니까?”
“죄송합니다만 군사부에서 언제 사람을 보내올지 몰라서요· 뵙자고 청해놓고 자리를 비우면 그런 결례가 어딨겠습니까?”
“그럼 내일은 어떻습니까?”
“내일도 대기해야 합니다·”
“이 공자만 좋다면 총군사님을 뵙고 난 후로 시간을 미루어 두겠습니다·”
“선배님·”
“갑자기 호칭이 바뀌었군요·”
“저 보다 다섯 살이나 많으시고 무림 출도도 훨씬 빠르시니 처음부터 이렇게 불러드려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내가 좀 재수가 없었지요?”
“저도 속이 좁았던 거지요·”
“나라도 그랬을 겁니다·”
“저는 더 그랬을 겁니다·”
“예?”
“당군백 선배께 들었습니다· 황산에서 어떤 일들을 겪으셨는지· 선배님께서 백발노성을 죽이고 싶어 했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라면 아마 그 자리에서 목을 쳐 죽였을 겁니다·”
갑자기 거액을 받아서 그런지 선배님 소리가 술술 나온다·
“겪어보니 충분히 그랬을 것 같습니다·”
“제게 인맥을 쌓게 해 주시려는 뜻은 고맙습니다· 하지만 전 그런 일에 서툴고 또 관심도 없습니다· 마음만 받겠습니다·”
이번 호송건에서 두소부는 평정심을 잃고 큰 실수를 했다·
반면 나는 그가 싸지른 똥을 수습하느라 개고생을 했고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를 다른 후기지수들에게 소개해 주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아직 20대이다 보니 강호의 경험이 부족해서 그렇지 인간성은 나쁘지 않은 녀석이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하면 떠나실 때 뵙겠습니다·”
“아니오· 지금 여기서 작별 인사도 했으면 합니다· 당군백 양조광 선배께도 대신 인사를 전해 주십시오·”
한마디로 더는 귀찮게 하지 말라는 소리다·
내가 후기지수들과 사귀기를 바라고 딸려 보냈던 천룡표국의 장로들이 알면 뒷목을 잡고 쓰러질 일이었다·
두소부는 무언가 할 말이 더 있는 듯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이내 잘 쉬라는 한 마디와 함께 방을 나갔다·
그날 밤 군사부에서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사람이 온 것은 무려 나흘째 되는 날 오후였다·
나는 약이 바짝 오른 상태에서 군사부를 찾았다·
좁은 하관과 흰 수염이 흡사 늙은 염소를 연상케 하는 칠순 노인의 이름은 사마옥 강호인들이 만박노군(萬博老君)이라 부르는 백도무림의 지낭(智囊)이자 무림맹 총군사였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그의 보이지 않는 분신이 내 눈을 통해 들어와 불을 켜고 오장육부를 살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든 첫 번째 생각은 ‘함부로 거짓말을 하면 안 되겠구나·’였다·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향시와 회시에서 연달아 장원급제를 했다고?”
“부끄럽습니다·”
“표왕께서 아주 흡족해 하시겠군·”
“민망합니다·”
“그래 나를 찾아온 이유는?”
이걸로 담소는 끝?
내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단지 표왕과 유지평의 체면을 생각해 딱 필요한 만큼만 시간을 할애해 주는 듯한 인상이었다·
상관 말자· 나는 편지만 전해 주고 가면 된다·
“본 표국의 청룡당주로 계신 유지평 당주께서 총군사님을 직접 뵙고 인사를 드린 후 서신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나는 품속에서 꼬깃꼬깃해진 편지를 꺼내 공손하게 건네주었다·
사마옥은 편지를 받더니 당장 읽지 않고 옆에 있는 목함에 놓아두었다·
한데 목함에는 아직 밀봉조차 뜯지 않은 편지들이 수북했다·
족히 수십 장은 되었는데 아무리 봐도 하루 이틀 쌓인 게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전한 편지 또한 그렇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
한때 군사부에서 선후배의 사이로 지냈던 사람의 편지였다·
또한 절강성의 패자라는 천룡표국의 사공자가 직접 가져온 편지이고·
사적으로 보아도 그렇고 공적으로 보아도 그렇고 이건 예의가 아니다·
내가 무시당하는 건 참을 수 있지만 천룡표국이 무시 당하는 건 참기가 힘들었다·
나는 슬그머니 도발을 했다·
“대답을 듣고 오라셨습니다·”
“안면을 트자마자 거짓말인가?”
“무슨 말씀이신지요?”
“간단한 안부 편지를 전하면서 대답을 듣고 오랬다고 하니 거짓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물론 거짓말이긴 하지만 사마옥이 신이 아니고서야 절대 알 수가 없다·
오히려 덮어놓고 거짓말이라고 하는 그의 말이야말로 아무 근거 없는 소리다·
나는 용기를 내 조금 더 몰아붙였다·
“읽어 보시지도 않고 어떻게 아시는지요?”
“읽어보나 마나 일세·”
“중요한 내용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전서를 이용했겠지· 내가 보아야 할 중요한 편지라면 열에 아홉은 시급을 다투는 것들이라네·”
“열에 하나가 남았습니다·”
“그 하나마저도 열에 아홉은 편지를 보내는 사람에게만 중요한 청탁이라면?”
나는 그제야 사마옥이 나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지난 나흘 동안 한마디 언질도 없이 기다리게 했던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나 보다·
슬그머니 오기가 생겼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어째서?”
“천룡표국은 무림맹의 맹방이 아니고 저는 무림맹에 파견될 일이 없으니까요· 그러니 본 표국의 유지평 당주께서 소생을 통해 무림맹의 총군사님께 청탁을 드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부 편지이겠군·”
“열에 아홉을 빼면 하나가 남고 다시 그 하나가 모인 것들에서 열에 아홉을 빼면 아직 백 중 일이 남습니다· 외람되오나 맹의 대소사를 관장하시는 총군사님이시라면 천에 하나도 소상히 살피셔야 하는 게 아닐는지요·”
“나를 가르치려는 것인가?”
“소생이 어찌 감히· 다만 옛 성현들께서 예상되는 만 개의 일이 무서운 게 아니고 만에 하나가 무서운 법이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여쭌 것입니다·”
“그 무서운 만에 하나를 자네가 들고 왔을 수도 있고 말이지?”
이건 좀 너무 나간 것 같은데·
유지평이 무림맹 총군사에게 그런 중요한 볼 일이 있을 리 없고 그걸 하필 나를 통해 편지로 전할 일은 더더욱 없지 않을까?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사마옥이 갑자기 편지를 집어 휙 던졌다·
편지는 허공에서 두어 번을 뱅그르르 돌더니 정확히 내 앞에 뚝 떨어졌다·
“직접 뜯어보시게·”
“제가 이 자리에서 편지를 보는 것은 총군사님께도 본 표국의 청룡당주께도 예의가 아닌 줄 압니다·”
“그거야 중간에 훔쳐볼 때의 얘기지·”
부드러운 음성이었지만 항거할 수 없는 힘이 실려 있었다·
이건 허락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나는 밀봉을 제거하고 편지를 천천히 읽어 보았다·
그리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전날 군사부에서 함께 병법을 공부하던 날에 대한 소회와 건강을 염려하는 지극히 형식적인 안부 편지였다·
건강을 염려했으니 이것도 대답이 필요한 내용이라고 우기면 우길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러면 정말 구차해진다·
내 표정만으로도 사마옥은 이미 내용을 짐작했다·
“무림맹 전서각을 통해 하루에 도착하는 편지만 삼백여 통 정도 된다네· 거기에 인편을 통해 도착하는 것이 대략 백여 통· 도합 사백여 통의 편지들 중 군사부 책사들의 사전심사를 통해 내게 전해지는 것은 고작 열통 정도에 불과하지·”
“지난 10년 동안 이 열 통의 편지에 적힌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읽고 확인했지만 제대로 처리를 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은 5할이 채 안된다네·”
그는 지금 절차와 효율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순전히 편지를 전하기 위해 일부러 온 것도 아니고 가는 길에 덧붙여 보내는 편지는 중요할 리도 없을뿐더러 그런 일에 신경을 쓰느니 군사부에서 올려보낸 편지들을 한 번 더 보는 게 낫다라고·
“맹방은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무림문파의 문주들이 무림맹에 제자나 자식을 보낼 때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만큼 하는 일이 한 가지 있다네 · 그게 무엇인 줄 아는가?”
솔직히 알 것도 같다·
“바로 안면이 있는 맹의 고위직에게 보내는 편지를 손에 쥐여 주는 것이라네· 어떻게든 고위직과 안면을 트게 해서 자신의 인맥을 자식에게 대물림해주려는 것이지·”
나는 목함 속에 가득 쌓여 있던 그 많은 편지의 정체를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더불어 부끄러움에 그만 얼굴이 시뻘게졌다·
유지평은 사마옥의 성정과 인물 됨을 잘 알 텐데 왜 이런 헛짓거리를 해서 망신을 자초하는 것일까?
“지난 10년 동안 내게 첫인사를 하러 와서 이렇게 많은 말을 하게 한 후기지수는 자네가 두 번째일세·”
“죄송합니다· 소생이 옹졸한 마음에 주제도 모르고 그만·”
“편지를 뜯게 한 것은 처음이고·”
“예?”
“내 손으로 직접 뜯게 했으면 더욱 좋았으련만·”
“···!”
맙소사!
이 노인네 지금까지 날 시험한 모양이다·
아쉬워하는 표정을 보니 잔뜩 기대를 했던 것 같다·
아마도 향시와 회시에 연달아 장원급제한 내 경력 때문일 것이다·
“유 당주에게 가서 전하게· 물건은 잘 구경했고 과연 자랑할만하며 내가 매우 배 아파 하더라고· 그리 전하면 알 것이네·”
그러면서 사마옥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어렸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 맞은 것 같았다·
알고 보니 유지평은 나에게 인맥을 쌓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마옥에게 보여 품평을 받아보려 했던 것이다·
사마옥은 그걸 귀신같이 알고 시험을 해본 것이고·
두 사람 모두 인재를 찾고 기르고 쓰는 책사들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감대가 형성된 모양이었다·
군사부를 나온 나는 등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하늘 밖의 하늘을 본 기분이었다·
사마옥은 나를 대단하다고 추켜세워주었지만 사실은 약간의 감탄을 했을 뿐이다·
나는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한마리 잠룡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 어떤 용봉도 나만큼 돈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백발노성이 말해준 곳으로 가서 금전 천 냥을 찾을 생각 하니 다시 기분이 날아갈 것처럼 좋아졌다·
“역시 돈이 있고봐야 해·”
곧장 접객당으로 향했다· 묵었던 객실에 놓아둔 행낭과 장검을 챙겨 항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한데 아침까지만 해도 한가하던 접객당이 갑자기 객실을 배정받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림잡아도 백여 명은 될 것 같았다·
그중 일부 사람들의 손에 들린 물건들이 눈을 번쩍 뜨게 했다·
반장 길이의 대나무 작대기는 마차의 가장자리에 묶는 깃대였다·
깃대의 끝에는 나도 잘 아는 문양과 글자가 수 놓인 깃발들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저건 표기들인데·”
놀랍게도 모두 각기 다른 표국의 깃발들이었다·
숫자는 당장 보이는 것만 십여 개· 하나같이 하남성에 뿌리를 둔 표국의 깃발들이었다·
알고 보니 모두가 표사들이었던 것이다·
나는 때마침 지나가는 접객당의 무사를 붙잡고 물었다·
“갑자기 웬 표사들입니까?”
“표국들을 상대로 무림맹에서 발주하는 큰 건의 입찰이 있을 예정입니다· 그것 때문에 다들 저렇게 모인 거고요· 아마 밤이 되면 객실이 꽉 찰 겁니다·”
“큰 건이라 하면?”
“정확한 건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중요한 물건 하나를 어딘가로 운반하려는데 여기에 노련한 표국 세 곳을 뽑아 용병 자격으로 동행시키며 이런저런 조언을 들을 예정인 것으로 압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무공이 강하면 표행도 잘 할 것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무공이 강하면 유리한 것은 사실이나 반드시 표행까지 잘 할 수는 없다·
두소부 양조광 당군백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들은 청성 점창 당문이 길러낸 문일지십의 무재이자 청년 고수들이지만 표행에 관해서는 천룡표국의 1년 차 신입 표사만도 못한 등신들이었다·
표행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전문적인 분야다·
그나저나 무림맹에서 무언가 엄청난 물건을 운송하는 모양이었다·
입찰까지 해가면서 표국을 세 곳이나 고용하려는 걸 보면·
뭔지 몰라도 나도 한 다리 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꾹 참았다· 혼자서는 입찰에 참여할 수도 없거니와 빨리 백발노성이 말한 곳으로 가서 금전 천 냥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떡 벌어진 어깨에 기둥 뿌리 같은 다리를 지닌 사십 줄의 사내가 용 같고 범 같은 다섯 명의 무인들과 함께 나타났다·
등에는 장검 한 자루를 가로질러 맸는데 건장한 체격을 제외하고는 복장도 용모도 무엇 하나 특이한 것이 없었다·
한데 그가 나타나는 순간부터 장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고수로 보이는 아마도 표두로 짐작되는 사람들이 앞다투어 달려가 포권지례를 하며 인사를 해댔다·
“누군데 저러는 겁니까?”
“유성표국(流星鏡局)의 대표두입니다· 표사들 사이에서는 워낙 유명한 분이시니 어쩌면 이 공자께서도 한 번쯤 들어 보셨을지도 모르겠군요·”
“풍운표검(風雲鏡劍) 설인탁!”
“역시 아시는군요·”
알다마다· 강호인들이 중원 전역을 통틀어 단 네 명의 표사들에게만 허락한 사대명표·
그 중 한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한 거물을 명표가 되길 꿈꾸는 내가 왜 모르겠나·
나는 온몸에서 전율이 흐르는 것 같았다·
열심히 표행을 하며 강호를 주유하다 보면 언젠가 한 번쯤은 길에서 혹은 객점에서 사대명표들을 한 명쯤은 스치듯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한데 여기서 이렇게 보다니·
나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인사를 올리고 싶었다·
그리고 당신처럼 되는 것이 내 평생의 꿈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여러 표국에서 온 표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그런 표두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표사들로 가득했다·
“돈은 얼마나 줍니까?”
“예?”
“무림맹에서 표국에 지불하는 표비 말입니다·”
“글쎄요· 그것까진 잘· 그러나 무림맹에서 협조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정식으로 입찰까지 해가며 발주하는 의뢰라면 한밑천 단단히 거머쥘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발탁이 되어야겠지만 말입니다·”
“입찰 자격은 어떻게 됩니까?”
“확실한 신분에 세 명 이상의 표사만 있으면 어떤 표국이든 가능한····”
“며칠 더 묵어야겠습니다· 접객당의 일꾼들에게 제 방을 치우지 말라고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나는 쏜살같이 달렸다·
도망치듯 무림맹을 빠져나온 나는 길거리에서 맨 처음 만난 어린 거지의 바가지에 동전 열 냥을 아낌없이 던져 넣었다·
“개봉에서 가장 이름난 주루로 나를 안내해라· 누군가 타지에서 왔다면 여긴 무조건 들러야 고향으로 돌아가 개봉에 다녀왔노라 하며 자랑할 수 있는 그런 명소 같은 곳 말이다·”
“취향이 어떤 쪽이신데요?”
“취향? 무슨 취향?”
“크게는 여자 남자가 있겠고 자세하게는 도박을 겸할 수 있는 곳도 있고 배를 타며 즐길 수 있는 곳도····”
“됐고· 술만 마시는 곳으로 안내해다오·”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자고로 어디 가서 자랑을 하시려면 다른 도시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닥치고 술맛이 좋은 주루 중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안내해라· 안 그러면 돈을 전부 빼앗아 다른 거지를 알아보겠다·”
“따라 오십시오·”
천룡표국에선 열흘 만에 표행에서 돌아오면 이틀 정도는 술과 고기를 배불리 마시고 먹으며 쉰다·
보름 만에 돌아오면 사흘 한 달 만에 돌아오면 무려 엿새를 그렇게 쉰다·
그렇지 않으면 골병이 나기 때문이다·
천룡표국에서 이곳 개봉까지 오는 동안 꼬박 보름이 걸렸다·
서호삼견 역시 아직 개봉을 떠나지 않았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들이 어느 여곽에서 묵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개봉까지 왔으니 술은 가장 맛이 좋다는 곳에서 마셨을 것이다·
그런 다음엔 십중팔구 근처 여곽에서 묵었을 것이고·
우여곡절 끝에 찾아 들어간 주루에서 나는 생각보다 쉽게 반가운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뜻밖에도 호리독사가 그때까지 홀로 앉아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엇 공자님!”
“다행히 아직 아직 안 갔구료·”
“저를 찾으셨습니까?”
호리독사가 반색을 하며 되물었다· 미친놈 내가 네 놈을 왜 찾어?
“서호삼절 선배들께서는 어디에 묵었소?”
“삼층에 객방도 있습니다·”
“지금 계시오?”
“없습니다·”
“왜?”
“저도 모르겠습니다· 자고 일어나 보니 없더라고요· 행낭도 함께 없어진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저만 놔두고 새벽에 도망친 모양입니다· 인정머리 없는 영감탱이들 같으니라고·”
한순간 아찔해지며 머리가 핑 돌았다·
서호삼견만 믿고 꽁지가 빠지도록 달려왔는데· 이러면 모든 게 도로아미타불이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 같다· 나는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상태로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무언가 뜨거운 시선을 느끼고 옆을 돌아보았다·
주방과 연결된 모퉁이 너머의 구석에서 두소부 양조광 당군백 등이 전날 보았던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과 함께 앉아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맛집은 맛집인 모양입니다· 한 시진 전부터 저렇게 몰려와서는 낮술을 퍼마시고 있습니다·”
옆으로 바싹 다가온 호리독사가 귀에 대고 속삭인 말이었다·
그러나 내 신경은 온통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 속 한 여자에게 꽂혀 있었다·
당군백 외에도 여자가 세 명이나 더 있었고 하나같이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용모가 출중했다·
그러나 그녀가 함께 앉아 있는 순간 나머진 전부 예쁜 오징어일 수밖에 없었다·
반쯤 먹다 남은 닭 다리를 든 채 놀란 토끼 눈을 뜨고 있는 그녀는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었다·
‘객원표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