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 가자· 무림맹으로(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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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석실 한가운데 주저 앉은 나와 안쪽 구석진 곳에 있는 녹산귀도 일당을 번갈아 보았다·
녹산귀도 일당은 깨끗한데 나만 핏물을 흠뻑 뒤집어쓴 것이 이상한 모양이었다·
그러다 당군백이 후다닥 다가와 물었다·
“혹시 다치셨나요?”
“내 피가 아닙니다·”
당군백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사람들의 의문은 더욱 커졌다·
이견이 목구멍을 쥐어짰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녹산귀도가 대답했다·
“사공자가 이르길 우린 싸움에 나서지 말고 백발노성의 앞을 지켜달라고만 했습니다· 그리고 혼자 저들을 모두 해치웠지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그러다 점점 수긍하는 듯한 기색으로 바뀌었다·
나는 저들이 나를 이미 자신들과 동등한 혹은 그 이상의 고수로 인정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백발노성의 묵직한음성이 석실에 울려 퍼졌다·
그는 또 말했다·
“그의 목을 잘라라·”
괴노인은 이미 목이 길게 그여 숨통이 끊어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발노성이 저렇게 집착하는 것은 이번에도 다시 살아날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었다·
“저는 표물을 호송하는 표사지 복수를 대신해 주는 청부업자가 아닙니다· 그것도 이미 죽은 사람을 상대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맑은 공기를 쐬기 위해 밖으로 걸어갔다·
이대로 있다가는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그때 뒤에서 녹산귀도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우리가 해드리죠·”
뒤이어 척척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녹산귀도의 수하들이 돌아다니며 쓰러져 뒹구는 자들의 목을 치는 소리였다·
살육이 끝나자 녹산귀도 일당은 짐승들이 특히 멧돼지가 냄새를 맡고 들어가지 못하도록 입구의 석문을 굳게 닫았다·
백발노성은 남은 술이 있으면 달라더니 갑자기 합장이 되어버린 고대 왕족의 무덤에 술을 뿌렸다·
애도는 그걸로 끝이었다·
그때쯤엔 동쪽 하늘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녹산귀도가 내게 말했다·
“소문이 빠르게 퍼지고 있네· 어쩌면 우리는 시작에 불과할 뿐 더 무서운 자들이 찾아올지도 모르니 각오하는 게 좋을 걸세·”
“백발노성이 내걸었던 현상금을 없던 일로 하겠다면 좀 낫지 않을까요? 당사자의 입을 통해서 말입니다·”
“협박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할걸· 자네가 백발노성이 탄 마차를 통째로 장강에 처넣고 수장시키려 한 일도 벌써 유명해졌다네·”
“소문이 퍼지게 만든 장본인들께서 그렇게 남의 집 불구경하듯 얘기하셔도 되는 겁니까?”
“혹시 우리가 아직도 적인가?”
“그건 지금부터 계산을 해봐야 알겠지요·”
“그렇지· 우리 사이의 계산이 남아있었지·”
“귀하는 우리를 두 번이나 죽일 뻔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반대로 귀하와 수하들의 목숨을 살려주었고요· 인정하십니까?”
“모두 인정하는 바이네·”
“제가 목숨을 살려준 대가는 귀하 역시 석실 안에서 백발노성을 지켜 주었으니 그걸로 갈음하겠습니다·”
“고맙네·”
“하지만 우리를 두 번이나 죽이려 한 것에 대해서는 계산을 받아내야겠습니다· 안 그러면 강호인들이 저를 무서워서 복수도 못 하는 겁쟁이 녀석이라고 손가락질하지 않겠습니까?”
“전혀 그럴 것 같지는 않네만·”
“귀하의 의견을 물은 게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나?”
“호송단의 일원이 되어 무림맹까지 함께 가 줄 것을 요구합니다· 제가 귀하를 부리는 모습을 보면 강호인들도 저를 손가락질하지 못 할 것입니다·”
“농담이겠지?”
“목소리 들어보면 아실 텐데요·”
“우리가 백발노성을 가로채면 어쩌려고?”
“역청부는 받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만· 혹시 하룻밤 사이에 가치관이 바뀐 건 아니겠지요?”
지난 밤 백발노성이 얼마를 받았든 그 두 배를 주겠다고 했을 때 녹산귀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내가 본 녹산귀도는 살인을 예사로 하는 떠돌이 청부업자이지만 자신이 한 말에는 반드시 책임을 지는 자였다·
“싫다면?”
“우리를 죽이려 했던 삼룡채의 채주는 손목을 바쳤습니다· 물론 부채주가 그의 목을 쳐버리는 바람에 숨통이 끊어지긴 했지만요· 잘 아시다시피·”
손목을 내놓으라는 말에 녹산귀도의 수하들이 일제히 살기를 끌어 올리며 칼을 잡았다·
그에 반응해 서호삼견과 후기지수들도 각자의 병장기를 잡아갔다·
“허세 부리지 말게· 지금은 깜깜한 석실 안과 다르고 다른 사람들은 아직 잠혼독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해 도울 형편이 못 됨을 알고 있네· 자네 혼자서는 우리 넷을 감당할 수 없네·”
“오히려 반대일 겁니다·”
“무슨···?”
“운기를 해보시지요·”
녹산귀를 필두로 그의 수하들까지 전부 선 자리에서 단전의 기운을 끌어 올려 전신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다 약간의 시간 차이를 두고 모두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대체 언제!”
“사천당문의 사람과는 항상 열 걸음 이상 거리를 두라는 강호의 격언이 있지요·”
“독과 암기는 모두 빼앗았을 텐데·”
“공령신투의 제자가 우리 쪽에 있습니다·”
저만치에서 녹산귀도의 수하 하나가 품속을 더듬다 말고 얼굴이 하얘졌다·
녹산귀도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슨 독인가?”
“흔한 산공독으로 약하게 대접했다고 들었습니다· 반 시진 정도 내공을 끌어 올리지 못할 뿐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빚을 받아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죠·”
“이번 청부는 여러모로 꼬이는군·”
“그건 대답이 아닙니다만·”
“휴우· 어쩔 수 없군·”
후기지수들과 서호삼견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내가 녹산귀도 일당을 중독시켜야 한다는 말을 할 때만 해도 놈들의 기습에 대비해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데 한발 더 나아가 호송단으로 끌어들여 버렸으니 황당하고 어처구니없을밖에·
나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다시 제가 길을 잡겠습니다·”
동선이 발각되는 바람에 산길을 가는 건 이제 더는 의미가 없다·
오히려 찾아오는 적들에게 기습에 유리한 지리적 여건만 조성해 줄 뿐이었다·
나는 곧장 하산을 감행했다· 그리고 천룡표국의 표사들이 하남행을 할 때 사용하는 큰길을 따라 이동했다·
객점이 나오면 들러서 식사를 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도 개의치 않았다·
호송을 하는 고수가 나를 포함해 열두 명이나 있다 보니 잔챙이들은 아예 접근조차 못 했다·
그러나 조석으로 예사롭지 않은 기세를 풍기는 자들이 나타나 도전을 해왔다·
하지만 녹산귀도와 서호삼견 그리고 후기지수들이라는 삼중의 벽을 뚫고 나에게까지 다가온 자들은 없었다·
그제야 서호삼견과 후기지수들은 녹산귀도 일당을 끌어들인 내 판단이 신의 한 수였음을 인정했다·
그렇게 날마다 치른 크고 작은 싸움이 무려 일곱 차례였다·
사람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지쳐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커다란 강 회수(推水)를 만났다·
나는 번잡함을 무릅쓰고 포구촌의 식당이 딸린 작은 여곽을 잡아 투숙했다·
“객점 주변에 수상한 자들이 속속 모여드는 중이네· 병장기를 든 자들은 전부 적이라고 봤을 때 어림잡아도 오십 명은 될 것 같네·”
“수일 전부터 우리를 추적해오며 지치길 기다렸던 대여섯 개의 무리가 연합한 것 같네· 그 아래 떠돌이 낭인들이 콩고물이라도 얻어 먹을 욕심에 붙은 것 같고·”
“회수를 건너기 전에 거사를 치르려는 것입니다· 그 말은 곧 오늘 밤 어떻게든 객점으로 쳐들어와 끝장을 보겠다는 뜻이고요·”
녹산귀도 일견 두소부가 각각 자신들이 이끄는 조를 대표해 한마디씩 했다·
지난 닷새 동안 함께 생사를 넘나들다 보니 이들 세 개 조는 좋든 싫든 합이 잘 맞을 수밖에 없었다·
“호리독사· 금전 한 냥을 줄 테니 여곽을 통째로 빌리시오· 먼저 투숙한 사람들에게는 은전 한 냥씩 쥐여줘서 내보내고· 그들도 보는 눈이 있을 테니 도망치듯 뛰쳐나갈 거외다·”
“알겠습니다·”
“당 소저 독과 암기는 얼마나 남았습니까?”
“오늘 아침에 있었던 싸움에서 바닥났어요· 그래도 적들에게서 빼앗은 비도 세 자루와 장검 한 자루가 있으니 제 몫을 할 자신이 있어요·”
“모두 잘 들으십시오· 오늘 밤은 여곽을 요새처럼 삼아 싸울 겁니다· 단 여러 층으로 분산되지 말고 일 층에 전부 집결해 있어야 합니다· 작전은 늘 하던 방식대로 하되 그때그때 제가 지휘를 하겠습니다·”
“화살이라도 넉넉히 있으면 좋으련만·”
이견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요새전은 소수가 자신들의 몸을 숨긴 상태에서 공격해 오는 다수를 상대하는 일종의 수성전이다·
이때는 원거리 무기인 활과 화살이 승패를 좌우할 만큼 필수적이었다·
나는 원래 표국을 나설 때 충분한 활과 화살을 준비했었다·
그러나 지난 닷새 동안의 전투에서 모조리 소모해버린 상태였다·
“식사나 든든히 챙겨 드십시오· 싸움이 시작되면 밤새 아무것도 입에 넣을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끝까지 강한 척을 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나도 심장이 벌렁거리고 있었다·
그나마 전생에서 표두들이 하는 걸 30년 넘게 지켜본 경험이 보배였다·
시간은 흘러 삼경이 깊었다· 그야말로 피로와 졸음이 극에 달했을 무렵 모두를 아연실색게 한 사건이 벌어졌다·
갑자기 제 삼(三)의 세력이 나타난 것이다·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나타난 기마인들은 모두 삼십여 명·
하나같이 용 같고 범 같은 기세에 허리에는 칼을 차고 등에는 단궁과 백여 발의 화살이 든 전통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산적들인가?”
“마적들 같은데요?”
“젠장할· 온갖 것들이 다 꼬이는군·”
창밖을 살피며 일견과 이견이 나눈 대화였다·
잠시 후 한 사람이 두 명의 수하를 거느리고 당당하게 여곽 안으로 들어섰다·
녹산귀도 일당이 칼을 뽑아 들고는 쓰윽 앞을 막아섰다·
마흔 살이나 되었을까?
흡사 장비를 연상케 하는 기골에 부리부리한 눈매를 가진 사내는 좌중을 돌아보며 물었다·
“수장이 누구외까?”
“접니다만·”
“천룡표국의 젊은 표사가 호송단을 이끈다고 들었소만·”
“제가 바로 그 표사입니다·”
“자네가 이정룡인가?”
“그렇습니다·”
“소문과 달리 국주님을 전혀 닮지 않았는데·”
“귀하는 소문대로 장비를 빼다 박았군요·”
“나를 아시는가?”
“천룡표국 십칠각주 이정룡· 합비 분타의 방초산 타주님을 뵙습니다· 먼 길을 달려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순간 좌중의 공기가 크게 출렁였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나와 새로 등장한 장비를 번갈아 보았다·
“혹시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나?”
“기대는 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알고?”
“면양포구를 떠나기 전 항주로 사람을 통해 소식을 보냈습니다· 사정이 바뀌어 제가 호송단을 이끌게 되었다고요· 천룡표국에선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저의 행보를 예의 주시했을 것이고 가장 가까운 합비 분타에 지원을 요청했다면 오늘쯤 이곳에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소문으로 듣던 것과는 많이 다르군· 아니 이제는 소문으로 듣던 것처럼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하하하·”
방초산은 한차례 호탕하게 웃더니 말했다·
“아무튼 무사해서 다행이네· 그리고 이제 걱정하지 말게· 남은 여정은 우리가 함께할 것인즉·”
“감사드립니다·”
천룡표국의 합비 분타에서 지원대가 왔다는 말에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탄성을 터뜨렸다·
특히 산적이니 마적이니 하며 입방아를 찧어댔던 이견과 삼견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불과 서른 명이 합류했지만 감히 덤비는 자들은 없었다·
서른 명의 기세도 기세거니와 충분한 활과 화살이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우리는 모처럼 번을 서지 않고 숙면을 취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녹산귀도 일행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고 없었다·
더는 자신들이 필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데 회수를 건너자마자 방초산이 이끌고 온 합비 분타의 지원대도 필요가 없게 되었다·
무림맹에서 별동대의 무인 오십이 마중을 나왔기 때문이었다·
천룡표국을 떠난 지 정확히 보름째 되던 날 호송단은 장안과 낙양에 이어 중원 삼대 고도(古都)로 일컬어지는 개봉에 도착했다·
십삼 개 성(省)의 일흔두 개 문파가 맹방으로 참여한 무림맹 총타는 그 이름에 걸맞게 거대한 성을 방불케 했다·
저 멀리 무림맹이라는 간판이 보이기 시작하자 그때부터 주변은 길이라기보다 청석을 깔아 놓은 넓은 공터에 가까웠다·
그 공터의 좌우에는 소식을 듣고 몰려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온갖 말들이 들려왔다·
“저 노인이 백발노성이군·”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이 잡았다지?”
“잡기는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이 잡았어도 여기까지 무사히 호송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천룡표국의 젊은 표사 때문이라던데·”
“그 표사가 바로 표왕의 넷째 아들이라더군·”
“이름이 이정룡이라고 하던걸·”
“저들 중 누가 이정룡인가?”
“앞에서 말을 타고 가는 헌헌장부인가?”
“그건 청성파의 두소부일세·”
“그럼 두 번째 말 타고 가는 사내?”
“그건 점창파의 양조광이고·”
“한데 맨 뒤에 가는 저 세 명의 중 늙은이들 말이야· 항주에서 제법 이름깨나 날린다는 흑도라는 소문이 있던데·”
“그 얘긴 나도 들었지· 서호삼견이라던가?”
“흑도들이 왜 저기에 끼어있는 거지?”
“이정룡이 객원표사로 고용했다던 걸·”
“흑도들을 왜?”
“그거야 나도 모르지·”
“대체 이정룡이 누구인가?”
이윽고 정문 앞에 도착했을 때 정수리가 고봉밥처럼 솟은 쉰 살가량의 장년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같은 복장을 한 십여 명의 무인들이 대기 중이었고·
두소부 양조광 당군백이 걸음을 멈추고는 일제히 말에서 내려 장년인을 향해 포권지례를 올렸다·
아무래도 무림맹의 높은 인사인 것 같았다·
나도 한 박자 늦게 내려서는 알아주든 말든 일단 포권지례부터 올렸다·
두소부가 장년인과 몇 마디 주고받더니 내게로 와서 말했다·
“호법당의 당주님이십니다·”
“그 말씀은?”
“백발노성을 넘겨야 합니다·”
“전 무림맹이 아니라 두소부 공자에게 의뢰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두소부 공자께서 표주이시니 표행이 완전하게 이루어졌음도 확인해 주시면 인계해 드리겠습니다·”
“표행은 완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덕분에 여러 고비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잠시 시간을 줄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나는 백발노성에게 다가갔다·
손과 발을 쇠사슬에 묶인 채 옆으로 말을 탄 그는 생각보다 담담한 모습이었다·
“여기서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결국 성공했군· 축하하네·”
“혹시라도 오는 동안 제가 무례하게 군 것이 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있으면이 아니라 있었지·”
“그게 꼭 제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지요·”
“사과를 하려는 게 맞는가?”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어젯밤 내가 그려준 장보도는 잘 갖고 있겠지?”
나는 깜짝 놀라서 얼른 전음을 보냈다·
[그런 얘기를 대놓고 하시면 어떡합니까?]
[난 또 자네가 말로 하기에 괜찮은 줄 알았지·]
[그리고 그게 왜 장보도입니까?]
[지도에 표시된 장소로 가면 금전 외에도 내가 쓰던 물건들이 몇 가지 있을 걸세· 나는 살아서 그곳으로 다시 갈 일이 없을 듯하니 자네가 쓰든지 태워 버리든지 알아서 하시게·]
[쓰던 물건이라고요?]
[가보면 알 걸세·]
[그건 그렇고 망혼소를 가르쳐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말 안장에 잘 앉아왔네·]
나는 마지막으로 포권지례를 올렸다·
비록 마두이고 내 손으로 끌고 온 처지이지만 그래도 무공을 사사한 것에 대한 예의였다·
집법당의 무사들이 다가와 말 안장에 앉아 있는 백발노성을 끌어 내렸다·
그리고 무림맹 안으로 거칠게 끌고 들어갔다·
한편 공터의 한쪽에는 아까부터 하나같이 출중한 용모를 지닌 젊은 남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숫자는 대략 삼십여 명· 그들은 두소부 양조광 당군백이 다가가자 포권을 쥐거나 어깨를 두드려 주며 그동안의 안부를 묻기 바빴다· 일견이 내게로 와서 말했다·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인 모양이군·”
“그런 것 같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 텐가?”
“맹으로 들어가서 총군사님을 뵈어야 합니다·”
“그런 거물은 왜?”
“전해드릴 물건이 있어서요·”
천룡표국을 떠나기 직전 청룡당주인 유지평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는 무림맹으로 가거든 총군사를 만나 전해 달라며 편지를 한 장 써주었다·
“우리는 여기서 그만 헤어져야겠네·”
“함께 들어가지 않고요?”
“농담이지?”
항주의 흑도들이 무림맹으로 들어가는 것도 우습긴 하다·
게다가 표물을 인수인계하는 바람에 임무가 끝났으니 이제 엄격히 말하면 천룡표국의 객원표사도 아니었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항주로 가야지· 지금은 자네도 돈이 없을 테니 계산은 그때 받도록 하겠네·”
“그럼 한나절만 기다리십시오· 총군사님께 편지를 전달하고 두소부에게 돈만 받아서 얼른 나오겠습니다· 오늘 밤은 코가 삐뚤어지도록 함께 술이나 마시다가 내일부터 탱자탱자 놀면서 항주로 돌아가시죠·”
“퍽이나 사람들이 자네를 놓아주겠군·”
“예?”
나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수많은 사람이 전부 나를 바라보며 ‘저 친구가 이정룡이구만’이라고 수군대는 중이었다·
세 명의 후기지수들이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과 어울리면서 20대 초반의 젊은 사람이라곤 나만 남게 되자 자연스럽게 신분이 밝혀져버린 것이다·
심지어 두소부 등과 인사를 끝낸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조차 나를 힐끗거리고 있었다·
특히 무슨 이유에선지 당군백 주변에 있는 여자들의 시선이 더욱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내게로 향하고 머물렀다·
“무림의 선배로서 충고 하나 해줄까?”
“···?”
“만약 자네의 아버지께서 천룡표국을 나온 다음 항주에다가 새로운 표국을 차린다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예?”
“단언컨대 천룡표국을 찾는 표주들 칠 할은 표왕이 차린 새로운 표국으로 발길을 옮길 걸세· 표주들이 천룡표국을 찾는 건 그곳에 표왕이 있기 때문이네· 표왕은 표행에 관한 한 신뢰 그 자체이지·”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동안 여러 가지 의뢰를 성공시키면서 자네에겐 다른 형제들이 일찍이 가져보지 못한 강호인들의 신뢰가 생기기 시작했네· 신뢰는 이번 호송건으로 또 한 걸음 더 나아가겠지· 힘 있는 자들과의 인맥은 그런 신뢰를 더욱 증폭시켜 줄 것이네·”
“비상한 친구이니 내 말을 충분히 알아들었을 것이라 믿네· 그럼 항주에서 보세· 술은 그때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시도록 하지· 물론 자네가 사야 하고·”
일견은 말머리를 돌려 그대로 걸음을 재촉했다·
이견과 삼견이 뒤를 따랐다· 여기까지 왜 따라왔는지 모를 호리독사도 덩달아 말머리를 돌려 세 사람을 따라갔다·
그때였다·
“잠깐만요!”
갑작스러운 외침과 함께 양조광이 세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두소부와 당군백도 뒤늦게 상황을 알아차리고는 달려갔다·
서호삼견은 다시 말을 멈추고 슬그머니 말머리를 옆으로 돌렸다·
항상 두소부에게 무엇이든 양보하던 양조광이 이번엔 앞으로 나서더니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선배님들 덕분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항주로 돌아가시는 길은 부디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는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두소부와 당군백도 뒤따라 포권지례를 올렸다·
천룡표국에서부터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세 사람을 선배라고 부른 적 없는 후기지수들이었다·
심지어 양조광과 이견은 표행의 초기 그 문제로 한번 붙을 뻔 하기도 했다·
양조광의 갑작스러운 호칭에 그리고 흑도들을 향해 마치 무림맹의 고위직을 뵙는 것만큼이나 예를 갖추는 세 사람의 행동에 주변이 잠시 소란스러워졌다·
“흥 우리가 무슨 그리 친한 사이였다고·”
이견의 말이었다·
그리고는 홀연히 길을 재촉해 버렸다·
일견과 삼견과 호리독사가 그 뒤를 따랐다·
후기지수들의 입장을 고려해 일부러 저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