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 가자· 무림맹으로(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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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광과 남직예의 경계를 이루며 남북으로 뻗은 대별산맥은(大別山脈) 수천 개의 봉우리와 골짜기를 거느린 강동지역 최대의 산맥이었다·
호리독사는 바로 그 대별산맥의 울창한 숲 사이로 길을 잡았다·
때로는 높은 고개를 넘고 때로는 대낮에도 볕이 들지 않을만큼 캄캄한 골짜기를 통과했다·
도저히 사람이 지나갈 수 없을 것 같은 곳도 호리독사가 앞장서면 길이 생겨났다·
그 모습이 신기했던지 고갯마루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때 삼견이 물었다·
“한두 번 와 본 솜씨가 아닌 것 같네만?”
“대저 길이란 이정표가 될만한 것들만 똑똑히 기억해 두면 나머진 선을 긋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초목이 잎을 떨어뜨린 겨울이라 여러모로 훨씬 수월하고요·”
“지금은 무엇이 이정표인가?”
“저기 저 소뿔 모양의 봉우리 두 개가 보이십니까? 우각쌍봉(牛角雙害)이라는 봉우리들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는 법이고 우린 오늘 그 골짜기를 통과할 겁니다·”
“한때 잘 나가는 양상군자였다고 들었네·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걸 보면 한 재산 모았을 텐데 왜 삼룡채에 신변을 의탁한 것인가?” “술 때문입니다·”
“술?”
“저는 술이 없으면 못 사는데 대신 술에 취하면 아무 말이나 해버립니다· 이를테면 어제 누구 집을 털었다거나 어디에다 돈을 숨겨 두었다거나·”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옆에서 듣고 있던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짐작하건대 그는 술버릇 때문에 사람들에게 쫓기고 술버릇 때문에 기껏 훔친 재물을 허구한 날 도둑맞은 것 같았다·
이견이 불쑥 물었다·
“내공으로 주독을 몰아내면 되지 않나?”
“술을 마실 때마다 그렇게 다짐을 합니다만 그래도 열 번에 한 번 정도는 저도 모르게 취해버리곤 해서요·”
“고약한 버릇이군·”
“이러다가 칼에 찔려 쥐도 새도 모르게 죽겠다 싶더군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노략질을 하며 술이나 실컷 마시다가 죽자는 생각에 삼룡채로 투신했습니다·”
“술이 그렇게 끊기 어렵나?”
“글쎄요· 시도를 안 해봐서·”
“시도를 안 해봤다고? 왜?”
“이 좋은 걸 왜 끊습니까?”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세상엔 정말 각양각색의 등신들이 있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공령신투(空證神偏)가 말년에 멍청한 제자를 얻는 바람에 아까운 절기들이 사장되게 생겼다더니 소문이 사실이었군·”
쇠사슬에 손발을 묶인 상태에서 또다시 나무에 묶여있는 백발노성이 무심코 툭 내뱉은 말이었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백발노성에게로 향했다·
일견이 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저 놈 공령신투의 제자야·”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놈이 펼친 저급한 신법이 역설적이게도 공령신투의 평생 역작인 영사신법(靈能身法)이었네·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이 길도 십중팔구 공령신투가 놈에게 물려준 길일걸·”
“그가 신법을 펼쳤다고요?”
“개울을 건널 때 바위를 뛰어넘을 때 길을 살피기 위해 나무를 기어오를 때· 무인은 자신이 익힌 무공을 어떤 형태로든 드러내기 마련이지· 적어도 내 눈앞에서는· 클클클·”
공령신투는 수많은 거부의 장원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던 전설적인 대도(大盜)들 중 한 명이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는 승려들을 아주 싫어했는데 소림사의 장경각으로 숨어 들어가 수십 권의 낯뜨거운 화첩을 꽃아 놓고 나온 일화는 아직도 강호에 유명했다·
소림사에서는 공령신투의 소행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없고 또한 도둑 맞은 물건이 없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애를 먹었다고 한다·
한데 호리독사가 그 공령신투의 제자라고? 일견이 호리독사를 돌아보며 물었다·
“사실인가?”
“부끄럽습니다·”
“허허· 공령신투의 제자가 수채로 들어가 노략질이나 하고 있었다니·”
이번엔 내가 백발노성에게 물었다·
“저 이의 신법이 그렇게 형편없었습니까?”
“형편없고말고· 지하에 있는 공령신투가 이 사실을 알면 벌떡 일어났을걸· 이런 걸 두고 죽 쒀서 개 줬다고 하는 건가·”
“장강의 배 위에서 그는 이절 선배와 삼절 선배를 속이고 제게로 다가와 칼을 휘둘렀습니다· 저는 오히려 그의 은밀한 신법에 감탄했습니다만·”
“하지만 자네에게 패했지· 그것도 오초지적으로·”
“삼초지적이었습니다·”
“오초는 펼친 것으로 아네만·”
“삼초를 펼쳤을 때 이미 제압했습니다·”
“뭐 그렇다고 치고· 영사는 하늘을 나는 신령한 뱀을 뜻하네· 공령신투의 영사신법은 은밀하고 가볍고 빠른 것이 특징이지· 하지만 저 놈의 신법은 은밀하고 가볍기는 하나 빠르지가 않아· 하기사 단전에 축기된 내공이 이제 겨우 이십 년 안짝에 불과하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두의 시선이 또다시 호리독사를 향했다·
그는 민망한 듯 씨익 웃더니 물에 불린 육포를 질겅질겅 씹었다·
***
장강을 건넌지 나흘째 되던 날까지 우리는 사람이라곤 그림자조차 보지 못 했다·
모두 호리독사 덕분이었다· 은밀하고 안전하게 길 안내를 하겠다는 약속을 그는 최소한 지금까지는 확실히 지켰다·
그러다 보니 서로에 대한 경계심이 많이 누그러졌다·
호리독사는 근성이 느껴지는 별호와 달리 천성이 매우 낙천적이었다·
그 덕분인지 언제부턴가 서호삼견과 죽이 척척 맞았다·
다만 그를 이렇게 말 잘 듣는 짐승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한 가지 꼭 필요한 것이 있었다·
“술이 떨어졌다고요?”
“절반은 귀하가 마셨소만·”
“저는 술 없으면 하루도 못 버팁니다·”
“참으시오·”
“못 참습니다·”
“못 참으면 어쩔거요?”
나는 두 눈을 치켜뜨며 호리독사를 노려 보았다·
네 놈이 나를 죽이려 왔다가 사로잡혔고 길 안내를 해주는 조건으로 살려두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표정으로 상기시켜 주기 위해서·
한데 호리독사는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혹시 십 년 묵은 죽엽청주(竹葉靑酒)를 마셔 보셨습니까?”
“갑자기 뭔 소리요?”
“안 마셔 보셨다면 오늘 밤 제가 실컷 마시게 해드리겠습니다· 공짜로요·”
생각만 해도 신이 나는지 그는 더욱더 열심히 길 안내를 했다·
나는 지금 그를 포로로 잡아 부리는 건지 아니면 객원표사로 고용한 건지 살짝 헷갈릴 지경이었다·
심지어 사흘 전 내가 채주의 손목을 찍고 부채주가 그의 목을 치는 바람에 삼룡채의 채주가 바뀌었다는 말을 전했을 때의 일이었다· 그는 ‘그것 참 큰일 났네요·’라고 한마디 하고는 서호삼견과 술을 나눠 마시기 바빴다·
그에게선 삼룡채에 대한 소속감이나 애정을 털끝만큼도 볼 수가 없었다·
저녁 무렵이 되자 우리는 우거진 숲 한가운데 있는 거대한 무덤 앞에 도착했다·
연대를 알 수 없는 석상과 비석들은 이미 쓰러져 나뒹구는 데다 관목으로 뒤덮여 주변의 자연과 동화된지 오래였다·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런 곳에 어떻게 무덤이 있지?”
“아주 오랜 옛날엔 근처에 길이 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 않습니까· 하물며 천 년도 더 지났으니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천 년이라고요?”
“한(韓)대에 인근 지역을 지배하던 왕족의 대총(大域)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처음 발견했을 때는 돈 될만한 것들은 진작에 도굴을 당해 사라지고 없었지요·”
“이런 오지에 무덤이 있는 줄 어찌 알고?”
“최초로 도굴을 당한 시기가 이미 수백 년 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시대의 선배들께서 어떤 지혜와 통찰을 지녔는지 우리로서는 알수가 없지요·”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호리독사는 굳게 닫힌 바위문을 열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퀭한 구멍과 함께 아래로 연결된 계단이 나타났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계단 저 아래로부터 불이 하나둘씩 켜지는가 싶더니 호리독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려오십시오·”
“삼절 선배께서는 여기서 번을 서십시오·”
“나만?”
“조광 너도 함께 있어라·”
“알겠습니다·”
두소부의 명령에 조광이 절도있게 대답했다·
머쓱해진 삼견이 입맛을 다셨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두소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여기저기 유등(油燈)이 밝혀진 가운데 백 명은 족히 드러눕고도 남을만큼 거대한 지하 석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석실 한가운데는 커다란 석관이 놓여 있었고 그 주변에는 연대를 알 수 없는 각종 항아리가 반쯤 깨진 채로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아마도 석관의 주인과 함께 묻힌 부장품 항아리들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깨진 항아리 주변엔 내용물은 온데간데없고 귀뚜라미만 새까맣게 기어 다녔다·
“나름의 비처인 모양인데 이렇게 공개해도 되는 것이오?”
“저도 까맣게 잊고 지내다 십여 년 만에 와보는 것입니다· 아마 앞으로도 십중팔구 그럴 것인데 아껴서 무엇하겠습니까?”
그러면서 그는 석관의 한쪽 끝을 어깨에 대고 힘차게 밀었다·
그러자 끽끽 소리와 함께 석관이 밀려 나가면서 숨겨져 있던 공간이 드러났다·
후대에 누군가 일부러 파놓은 듯한 바닥에는 사람 머리통만한 항아리 대여섯 개와 칼 한 자루 화섭자 땔감으로 쓸 솔방울 작은 약병들 그리고 갈아입을 옷가지 등이 놓여 있었다·
도주하는 와중에 들렀을 때 쓰기 위한 일종의 보급품 같았다·
작은 약병들은 십중팔구 금창약일 것이다·
호리독사는 먼지가 뿌옇게 내려앉은 항아리 하나를 골라서 꺼냈다·
이어 두껍게 붙여 놓은 밀봉을 제거하고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진한 주향이 석실 안에 가득히 퍼졌다·
향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지라 한순간 모두가 놀랐다·
“누구 호리병 가진 거 없습니까?”
“여깄네·”
이견이 얼른 허리춤에 차고 있던 호리병을 풀어 내밀었다·
호리독사가 그걸 받아 들고는 항아리를 기울여 술을 따랐다·
”자 드셔 보십시오·“
이견이 낚아채듯 호리병을 건네받고는 쭉 들이키려고 했다·
순간 내가 그의 손목을 텁석 잡았다·
“잠깐만요!”
“왜 그러나?”
나는 의심의 눈초리로 호리독사를 한번 노려본 후 당군백에게 말했다·
“독이 들어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있습니까?”
“일반적인 것들은요·”
“확인해 주십시오·”
이견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드는 모양이었다·
모두가 집중을 하는 가운데 당군백이 호리병을 받아 쥐었다·
이어 품속에서 은잔을 꺼내더니 술을 가득 따르고 변색을 살폈다·
그런 다음엔 새끼 손가락만한 옥병을 꺼내 정체 모를 액체를 한 방울 떨어뜨렸다·
“이게 무엇입니까?”
“가장 널리 사용되는 열일곱 가지 무색무취의 독을 판별할 수 있는 시약이에요·”
별다른 이상이 없는지 이제 술에 입술과 혀끝을 차례로 대보았다·
그래도 이상이 없자 입안에 조금 흘려 넣었다가 얼른 뱉은 후 남은 맛을 음미했다·
“독이 있으면 어쩌려고요?”
“백독불침까지는 아니지만 어지간한 독에는 내성이 있어요· 감당할 수 없다 싶으면 재빨리 해독하면 되고요·”
“당문에선 모두가 이런 식으로 독을 판별합니까?”
“오랜 세월 축적된 혀끝의 경험보다 나은 판별법이 없으니까요· 대신 몇 가지 절차를 거치면서 극도로 조심을 기하죠·”
당문의 독인들은 목숨을 걸고 독공을 수련한다고 들었다·
오늘 직접 보니 그 말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었다·
그때 옆에서 꿀꺽꿀꺽 하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호리독사가 항아리째 집어 들고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양껏 마신 그는 항아리를 척 내려놓으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크어 좋다!”
좌중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당황한 당군백은 얼굴이 벌게져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에라 모르겠다·”
이견이 호리독사의 손에서 항아리를 빼앗아 마시기 시작했다·
다음엔 일견이 항아리를 건네받았다·
당군백과 두소부는 서호삼견에게서도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호리병에 있는 술을 한 모금씩 나눠 마셨다· 그러고도 짧은 운기를 통해 몸속을 관조하며 독이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신중함을 보였다·
덕분에 나는 안심하고 마실 수 있었다·
술을 마시는 동안 석실 안은 술 넘기는 소리 외에는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순번이 몇 차례 돌아가고 나서야 비로소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 놓기 시작했다·
“이게 죽엽청주란 말이지·”
“이런 술은 처음 먹어 봤습니다·”
“맛있군· 맛있어·”
“첫 번째는 본래 좋은 재료로 술을 담갔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사철 차가운 무덤 속에서 무려 십 년 동안이나 묵혔기 때문이지요·” 마지막 말은 호리독사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일견과 이견의 극찬에 그는 기분이 매우 좋아진 것 같았다·
“더 마셔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다만 돌아가는 길에 다시 들러서 없어진 항아리만큼 채워 놓아야 합니다· 혹시 또 압니까? 십 년 후에 우리 중 누가 여길 지날 일이 있을지·”
“이를 말인가· 껄껄껄·”
“나도 나도 한 잔만 부탁하네·”
백발노성이 더는 참지 못하고 애원했다·
호리독사가 나를 살짝 돌아보았다·
줘도 되는지 의향을 묻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술 항아리 네 개가 바닥나는 데는 한 식경도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는 와중에도 간간이 내공을 끌어 올려 주독을 몰아내는 걸 잊지 않았다·
어느 순간 일견과 두소부가 자진해서 바깥 사람들과 교대를 하겠다며 나갔다·
잠시 후 양조광과 삼견이 돌아왔고 두 사람은 앞선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십 년 묵은 죽엽청주 맛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삼견이 아무렇지도 않게 툭 말했다·
“묘왕대총(例王大域)이 여기에 있었군·”
“무슨 말입니까?”
“대별산맥 어딘가에 있다는 공령신투의 비처 말일세· 한때 이곳에 공령신투가 엄청난 보물을 숨겨놨다는 소문이 돌아 무림인들이 찾아서 급습을 하기도 했었지· 하지만 깨진 항아리에 쥐똥만 가득했었다더니 사실이었군·”
“무림인들이 이곳을 안다고요?”
“아는 사람도 있을 거라는 뜻일세·”
“그 얘길 왜 이제 하는 겁니까?”
“그게 그리 중요한 일인가?”
“우리는 계속 호리독사만 안다고 생각한 길을 따라왔습니다· 한데 이곳의 위치를 안다면 더는 은밀한 길이 아닌 셈이지요·”
나는 얼른 호리독사를 노려보았다· 그는 반쯤 술에 취한 채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길은 저만 아는 길이 맞습니다· 다만 이곳을 아는 무림인들은 더러 있을 겁니다· 그래서 술 항아리와 보급품들을 석관 아래에 숨겨 둔 것이고요·”
“어쩐지 쉽게 공개하더라니·”
“하지만 염려 마십시오· 일부러 여길 찾아와 볼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를 추적해 오는 사람도 전혀 없었고요·”
“추적을 해오지 않고 기다렸다면?”
“예?”
“당신이 공령신투의 제자라는 걸 삼룡채에 아는 사람이 있소? 그러니까 내 말은 혹시라도 녹산귀도가 삼룡채로 돌아갔다가 당신이 살아있다는 얘길 들었을 때 당신이 사실은 공령신투의 제자라는 걸 말해줄 만한 사람이 있냐는 거요·”
“····!”
“왜 그러는 거요·”
“다 알고 있을 겁니다·”
“뭐요?”
“술만 취하면 입이 풀리는 바람에····”
“이런 미친!”
그때였다· 바깥에서 갑자기 깡깡 쇳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적이 나타나 칼싸움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모두 나가!”
내가 일갈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무기를 챙겨 들고 일어섰다·
그러나 채 다섯 걸음을 떼기도 전에 픽픽 쓰러졌다·
나 역시도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지며 옆으로 고꾸라졌다·
일어나려고 발버둥을 쳐보았지만 팔 하나 드는데 무슨 천 근짜리 쇳덩어리를 드는 것 같았다·
나도 사람들도 쓰러진 모습 그대로 바닥에 찰싹 붙어 버렸다·
당군백에게 소리쳐 물었다·
“대체 이게 뭡니까?”
“잠혼독(潛魂毒)인 것 같아요!”
“아깐 독이 없다더니!”
“잠혼독은 흡독(吸毒)의 일종이에요· 처음엔 운기에도 잘 걸리지 않다가 흥분하거나 갑자기 격하게 움직이면 발작하고요·”
“흡독이라면?”
“먹거나 피부에 닿는 게 아니라 코와 입으로 흡입하게 만드는 독을 총칭하는 말이에요· 아무리 살펴봐도 이상한 점이 없었는데· 귀뚜라미들도 자연스럽게 돌아다녔고요·”
“유등!”
석실에 들어오는 순간 누구든 유등에 불을 켤 수밖에 없다·
그 기름에 흡독의 정수를 부어 놓으면 불이 켜지는 순간부터 시작해 독기운도 서서히 퍼져 나갔을 것이다·
“맙소사!”
“해독제는 있습니까?”
“없어요·”
“내공으로 태우는 방법은?”
“내공의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두 시진 이상은 걸릴 거예요· 하지만 저렇게 계속 유등이 타오르는 한 그마저도 소용없는 일이고요·”
바깥의 칼 부딪히는 소리가 점차 격렬함을 잃어가고 있었다·
일견과 두소부 역시 석실 안에서 한참을 있다가 나갔다·
칼부림을 벌이는 순간 독이 발작했을 것이다·
“빌어먹을!”
“죄송해요·”
“소저가 왜?”
“독이라면 저의 전문분야인데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당하다니·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군요·”
“세상에 수많은 독을 소저라고 어떻게 다 알고 방비를 하겠소· 그리고 이 호송의 책임자는 나요· 문제가 있다면 모두가 내 책임····” 나는 하던 말을 멈췄다· 갑자기 하단전에서 불덩어리가 튀어나와 전신 혈도를 따라 질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온몸이 땀으로 축축해지며 조금씩 가벼워 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현상은 이화원에서 독무(毒露)에 당했을 때도 일어났었다·
그땐 단순히 몸속에 새로 생긴 내공으로 독성을 밀어낸다고만 생각했다·
한데 잠혼독까지 이렇게 빠른 속도로 밀어내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내공의 많고 적음 보다는 그 성질에 관련된 것 같다고나 할까?
‘천지령의 진기를 내공으로 바꿨기 때문에?’
만약 이 추리가 맞고 앞으로 같은 일이 또 일어난다면 나는 사실상 천지령보다 약한 독물에 대해서는 불침지체(不候之體)의 몸이 되었을 확률이 높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때였다·
수건으로 입과 코를 친친 휘감은 네 명의 장한이 석실로 들어왔다·
그중 두 명이 한여름 개처럼 축 늘어진 일견과 두소부를 어깨에 짊어지고 왔다가 바닥에 휙 던져 놓았다·
“첫째 형님 괜찮으십니까?”
“소란 떨지 마라!”
“선배?”
“무사하다·”
삼견과 양조광이 각각 일견과 두소부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급하다기보단 민망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미루어 다행히 칼을 맞거나 하진 않은 것 같았다·
하기사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했을 테니·
한 사람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수건 밖으로 드러난 눈매와 등에 멘 칼 그리고 뛰어난 근골로 미루어 전날 면양포구에서 보았던 그 사내가 틀림없다·
“천룡표국의 사공자라고?”
“당신은 녹산귀도고·”
“역시 알고 있었군·”
“솜씨가 아주 좋소·”
“피차일반이네· 솔직히 자네 때문에 이렇게까지 개고생을 하게 될 줄은 몰랐네·”
“이제 어쩔 셈이오?”
“걱정 마시게· 해칠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다만 우리 일에 방해가 되면 곤란하니 당분간 이렇게 있어 주셔야겠네·”
“언제는 살인멸구를 하려 들더니·”
“아시다시피 상황이 바뀌었네· 귀하들이 내가 누구인지를 이미 알아 버렸고 그 사실을 또 누구에게 말했는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고·”
“나는 모르겠으나 무림맹에선 당신들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오· 감당할 수 있겠소?”
“어차피 이번에 크게 한몫을 챙긴 후 오랫동안 잠적할 계획이었네· 우리가 후기지수들을 살해하지 않은 이상 무림맹에서도 전력을 쏟기에는 부담스럽겠지·”
“음하하!”
갑자기 광소가 터져 나왔다·
석실의 가장 안쪽에서 쇠사슬을 묶인 채로 쓰러져 있는 백발노성이었다·
그는 참았던 울분을 터뜨리듯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비록 면양포구에서 마차를 탄채로 물에 빠져 죽을뻔한 수모를 당했다만 결국 이렇게 이기고 말았구나!”
“그때 수장시켜 버렸어야 하는 건데·”
“하늘 밖에 하늘이 있는 줄을 이제야 알겠느냐?”
“너무 좋아하지 마시오· 무림맹에서 귀하를 잡으러 갈 테니까· 그땐 나도 반드시 시간을 내어 동참할 것이고·”
“기대하고 있겠다·”
백발노성은 가볍게 응수하고는 녹산귀도를 향해 말했다·
“거기 자네 별호가 녹산귀도라고?”
“그렇습니다·”
“이리 와서 쇠사슬을 풀어 주게· 아니 우선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게· 시원한 공기부터 좀 쐬고 나서 천천히 궁리를 해보도록 하지· 늙어서 그런가 무덤 속에 있으니 영 기분이 더럽군·”
“그건 곤란하겠습니다·”
“음?”
“우리는 노사를 구해 드리러 온 것이 아닙니다· 죽이러 왔습니다·”
“그 그게 무슨!”
“청부를 받았습니다·”
순간 잔잔하던 석실 안의 공기가 요동쳤다·
백발노성은 말을 잃었고 사람들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를 파악하느라 또 계속해서 입을 닫았다·
나는 장강의 배 위에서 독사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녹산귀도는 어떤 자이지?”
“수하 세 명과 함께 강호를 떠돌아다니는 청부업자요·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다 하는데 특히 무림인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로부터 거액을 받고 복수를 대신해 주는 것으로 유명하외다· 실력은 하나같이 일류 이상이라 들었고·”
“후후후·”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사람의 운명은 진짜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군요· 강물에 빠지는 수모까지 당해가며 현상금을 금전 오백 냥씩이나 내걸었는데 오라는 구원자들은 안 오고 저승사자들이 찾아올 줄이야·”
고개를 돌리고 있어서 백발노성의 썩어 문드러지는 표정을 볼 수 없는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대신 악에 받친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누구에게 청부를 받았느냐?”
“내일 아침쯤이면 알게 될 것입니다·”
“무슨 뜻이지?”
“청부자께서 노사의 목 치는 장면을 직접 보겠다고 하여 지금 이리로 오고 있는 중입니다· 저희 입장에서는 약간의 추가비용을 받을 수 있으니 나쁠 것이 없지요·”
“그가 얼마를 제시했든 내가 두 배를 주겠다·”
“우리가 돈을 받고 복수를 대신해 주기는 합니다만 역청부를 받지는 않습니다· 그런 삼류로 보셨다니 섭섭하군요·”
녹산귀도는 이어 수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무기를 전부 회수하고 유등에 기름을 가득 채워 놓아라· 내일 아침까지 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는 홀연히 나가 버렸다·
그의 수하 한 명이 유등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기름을 다시 채우기 시작했다·
말이 좋아 기름이지 잠혼독의 정수로 만든 독유(毒油)일 것이다·
그 사이 두 명은 쓰러진 사람들의 병장기를 챙겼다·
심지어 석관 아래에 있는 오래된 칼과 약병들까지도 모조리 챙겼다·
그들이 가장 조심하고 또 공을 들인 것은 당군백의 품속을 뒤질 때였다·
나는 놈들이 당군백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틈을 타 품속에 숨겨 둔 운철검을 조용히 꺼내 등으로 깔고 누웠다·
운철검의 손잡이에는 원래 부엉이 눈알만한 야광주가 박혀 있었다·
이놈이 밤만 되면 밝게 빛나서 두꺼운 가죽으로 씌워 놨는데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이야·
이윽고 한 놈이 와서 내 허리에 매달려 있는 검을 빼앗고 품속을 더듬기 시작했다·
혹여 용린신갑을 들킬까 염려했지만 옷을 두껍게 입은 데다 자연스럽게 구부러지는 특성 때문인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일이 끝나자 놈들이 모두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쿵!’ 소리와 함께 석실 문이 굳게 닫혔다·
석실 안에 남은 사람들은 그야말로 생매장이라도 당한 것처럼 비통한 감정에 휩싸였다·
백발노성은 꼼짝없이 죽게 된 것 때문에 비통해 했고 후기지수들은 호송을 실패하게 된 것 때문에 비통에 잠겼다·
반면 호송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큰 상관이 없는 서호삼견은 그나마 죽이지 않는 것에 크게 안도하는 눈치였다·
나는····
“골치 아프게 됐네·”
그러면서 강시처럼 벌떡 일어나 앉았다·
곳곳에서 저마다의 자세로 누워있는 사람들이 갑자기 나를 향해 눈알을 굴리며 경악스러 하는 표정을 지었다·
당군백이 물었다·
“어떻게 된 거죠?”
“독을 밀어냈소·”
“이렇게 빨리요?”
“천룡표국의 내공심법에 약간의 공능이 있소·”
“맙소사·”
일견이 내게 물었다·
“이제 어떡할 건가?”
“글쎄요·”
“싸울 건가?”
“저 혼자 네 명을 무슨 수로요·”
“하면?”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죠·”
백발노성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놈들은 자네가 잠혼독에 중독되어 옴짝달싹 못 하는 줄로 알고 있네· 그걸 역이용해 기습을 해야지·”
“싫습니다·”
“왜?”
“너무 위험합니다·”
“자네는 호송단의 수장이고 나를 무림맹까지 안전하게 호송해야 할 의무가 있네· 만약 실패한다면 자네의 경력에도 큰 오점을 남기게 될 걸세·”
“오점을 남기는 것이 죽는 것보단 낫지요·”
“자네를 죽이지 않는다고 저들 입으로 말했잖나·”
“그거야 얌전히 있을 때 얘기고요·”
“갑자기 왜 이렇게 멍청해진 건가!”
“노인장께선 갑자기 왜 생각이 바뀌셨습니까? 언제는 무림맹으로 가기 전에 자신을 빼돌려 주면 금전 오백 냥을 주겠노라고 선포까지 하시더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를 바라보는 백발노성의 눈동자에 쌍불이 들어왔다·
내 속을 꿰뚫어 보려는 것이다·
이윽고 그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원하는 게 뭔가?”
“무얼 주실 수 있습니까?”
“나를 구해주는 사람에게 주기로 했던 금전 오백 냥을 자네에게 주겠네· 조건은 단 하나 나를 무림맹까지 산 채로 안전하게 데려다주는 것일세·”
“무림맹에 잡혀가면 어떻게 주시려고요?”
“돈이 있는 곳을 알려주겠네·”
“확실합니까?”
“나는 결코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네·”
“그런데 아까 녹산귀도에게는 두 배를 제시하셨잖습니까·”
“그래서 지금 천 냥을 달라고?”
“천 냥 받고 재주도 하나 가르쳐 주십시오·”
“누가 천 냥을 준다고 했나!”
“싫으면 말고요·”
“후우····”
백발노성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느라 한차례 길게 심호흡을 했다·
“일단 돈은 그렇다 치고 재주를 가르쳐 달라는 건 또 무슨 소린가?”
“단지 보기만 하는 것으로 상대의 내공 수준을 간파하시더군요· 지난번에는 저를 며칠 전에는 호리독사를· 그 재주를 배우고 싶습니다·”
“그건 단순한 격기술(激氣術) 일세· 내가고수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자네의 아버지인 표왕도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고·”
“격기술이야 내공이 어느 경지에 이르면 누구나 하겠죠· 하지만 오로지 허공을 통해서 그것도 상대가 눈치채지 못 하도록 단전을 더듬는 것은 분명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