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 가자· 무림맹으로(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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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침묵이 배를 집어삼켰다· 나도 사람들도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느라 머리를 팽팽 굴렸다·
그때 낯선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당신들 혹시 마두를 호송하는?”
“당신은 설마 독사?”
“그걸 어떻게?”
“이런 미친!”
“이런 씨발! ”
스릉!
“둘째 형님 저놈 지금 칼 뽑은 거 같은데요?”
“우리도 뽑아!”
스릉!
스릉!
독사와 이견과 삼견이 동시에 보법을 펼치고 움직이면서 갑판이 출렁거렸다·
당장 칼이 부딪쳐도 이상하지 않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내가 숨죽여 외쳤다·
“모두 멈춰!”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당황한 나머지 잠시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만약 저놈이 소리쳐 동료들을 부르기라도 하면 끝장이다·
“당군백 혹시라도 저 자가 소리를 지르면 그 즉시 소리가 난 방향으로 독암기를 쏘아 즉사시켜버려야 합니다· 가능하겠습니까?”
“물론이죠·”
“삼절 선배 만약 저 자가 물속으로 뛰어들면 그 즉시 소리만으로 위치를 파악해 창을 던져 즉사시켜야 합니다· 가능하겠습니까?”
“물론이지·”
대답과 함께 ‘철컹철컹’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삼견이 등에 멘 분절창을 풀어 능숙하게 조립하는 소리였다·
서호삼견은 원래 각각 도·검·창의 달인이었고 그래서 자신들을 삼절이라 불렀다·
셋째인 삼견은 창술의 달인이었다·
다만 창이 길다 보니 평상시에는 분절해 등에 멨으며 범용으로 허리에 칼도 한 자루 차고 다녔던 것이다·
몇 마디 말로 독사의 입과 발을 묶어버린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놈을 무장해제 시키고 사로잡는 일만 남았다·
“독사 내 말 듣고 있소?”
대답은커녕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십중팔구 숨을 멈춰 기척도 숨겼을 것이다·
“도망을 치기엔 이미 늦었고 당신 혼자서는 언감생심 우리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오· 순순히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시오·”
대답은 여전히 없었다· 야만의 세계에서 살아온 흑도답게 피를 보기 전에는 쉽게 꺾이지 않을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군· 이절 선배와 삼절 선배께서는 그를 찾아 쓰러뜨리십시오· 여차하면 죽여도 좋습니다· 단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최대한 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셋째야 창을 잡았느냐?”
“좌도우창입니다·”
“네 창이 기니 왼쪽에서부터 어둠 속을 게구멍 쑤시듯 슬슬 쑤시며 몰아와라· 하면 내가 오른쪽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기척이 느껴지는 즉시 목을 쳐버릴라니까·”
“생포하지 않고요?”
“우리를 죽이러 온 놈이다·”
“하긴 생포하는 게 더 어렵지·”
사사삭!
슈슈슉!
깡!
짧은 금속성을 신호로 암흑 속의 혈투가 시작되었다·
본격적으로 싸움이 시작되자 이견과 삼견도 입을 닫았다·
말소리로 자신들의 정확한 위치와 동선이 발각되는 걸 우려한 탓이다·
휙! 휙휙휙!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를 내지 말라는 내 말 때문인지 금속성은 거의 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독사의 입장에서는 조심할 이유가 없는데 소리가 나지 않을 리가 없지 않겠나·
‘설마!’
그 순간 앞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술 냄새가 확 느껴졌다·
머리끝이 쭈뼛 서며 저절로 이능력이 발동되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공력과 이능력은 비례해서 높아졌다·
또한 나의 손발은 예전의 느려터진 그 손발이 아니었다·
스윽!
나는 귀영무의 보법을 펼치며 왼쪽으로 두 걸음을 이동했다·
조금 전 내가 서 있던 곳으로 날카로운 바람이 뻗어가는 게 느껴졌다·
‘칼!’
내가 말하는 동안 소리로 위치를 파악해 두었다가 이견과 삼견이 달려드는 틈을 타 빠져 나와서는 내게로 온 모양이었다·
나를 쓰러뜨려 인질로 잡은 후 동료들을 소리쳐 부를 생각인 것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 재주를 가진 데다 머리까지 비상했다·
하지만 내가 익힌 귀영무는 귀신의 그림자가 추는 춤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그야말로 최적의 공능을 발휘한다·
나는 한 줌의 바람처럼 좌에서 우로 우에서 다시 좌로 옮겨 다녔다·
놈도 만만치 않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내가 서 있는 위치를 귀신같이 알아채서는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칼질을 해댔다·
휙! 휘익! 휙!
대여섯 번 칼을 휘두르고 피하길 반복하자 나는 칼바람을 기준으로 놈의 위치와 동선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덧붙여 시간이 느려지는 이능력을 기반으로 초식과 초식 사이의 짧은 빈틈까지도 찾아냈다·
십초박의 선팔초(先八招) 중 일초(一招)가 번개처럼 작렬했다·
퍽!
주먹 끝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타격감과 입체감·
정확히 놈의 면상에다 주먹을 꽃아 넣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왼쪽에서 칼바람이 느껴졌다·
나는 놈의 신형을 오른쪽으로 타고 돌며 선삼초를 연이어 작렬했다·
추정하는 위치는 옆머리·
퍼퍼퍽!
놈의 상체가 심하게 흔들리며 비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지독한 놈이었다· 분명 의식이 나가는 중일텐데 그 와중에도 내가 있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기어이 칼을 한 번 더 휘둘렀다·
나는 칼의 궤적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이어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는 놈의 발목을 힘차게 걷어차 버렸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신형이 허공에 뜨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약간의 시차를 두고 다시 ‘쿵!’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묵직한 것이 분명 머리부터 떨어졌을 것이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그때까지도 선수에서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던 이견과 삼견이 비로소 하던 짓을 멈추고는 후다닥 물러났다·
나는 뒤쪽을 돌아보며 외쳤다·
“사공께선 어디에 계십니까?”
“여기 있습니다·”
“돛의 밑부분이 전부 갑판에 닿도록 내릴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당장 그렇게 해주십시오·”
우리가 탄 나룻배에는 세 개의 돛이 달려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이중으로 덧댄 광목천에다 황토와 숯가루를 반죽해 넣은 물로 아홉 번 염색해 만든다·
이렇게 하면 장강의 거친 바람에도 찢어지는 법이 없고 사철 내리쬐는 햇볕에도 잘 삭지 않는다·
잠시 후 돛의 밑부분이 갑판에 닿자 당장 바람부터 차단되었다·
나는 돛과 돛 사이의 갑판에서 선등 하나를 밝혔다·
그러나 돛이 불빛을 차단하기 때문에 최소한 전방과 후방에 있는 다른 배들에게는 들킬 염려가 없었다·
불이 켜지는 순간 희끄무레하게 드러난 갑판의 상황에 사람들은 모두 아연실색했다·
우선 선수 쪽에서는 이견과 삼견이 창검을 들고 금방이라도 싸울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내 발아래에서 한 사람이 피투성이가 된 채 대(大) 자로 뻗어 있었다·
그 와중에도 한 손엔 칼을 꼭 쥔 상태였다·
“혹시 이놈이 독사?”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촤악!
일견과 이견이 떠들어 대는 와중에 나는 두레박으로 강물을 퍼다가 놈의 얼굴에 끼얹었다·
정신을 번쩍 차린 놈은 그 와중에도 벌떡 일어나 싸우려 했다·
하지만 일견이 놈의 손에 쥔 칼을 꾹 눌러 밟는 바람에 칼을 놓쳤다·
잔뜩 휘어진 칼 손잡이가 갑판을 때리면서 ‘퉁!’ 하고 울렸다·
“아직 덜 맞은 모양이군·”
말과 함께 내가 쓰윽 다가갔다·
목소리로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린 놈이 식겁을 하며 뒷걸음질 쳤다·
“자 잠깐만·”
“···?”
“그만하면 충분하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하시오· 만약 조금이라도 망설이거나 거짓말을 할 생각이라면 목숨을 걸어야 할 거요· 알아듣겠소?”
“알아들었소·”
“당신이 독사요?”
“그렇소·”
“소속 방파는?”
“그걸 말하면 나는 죽을 것이오·”
“아니면 지금 내 손에 죽고·”
“차라리 죽이시오·”
독사가 갑자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정말 죽음을 각오한 듯 눈까지 감아버렸다·
돌변한 태도에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유가 무엇이오?”
“내가 소속 방파를 발설하면 일벌백계로 삼기 위해 사흘 밤낮 고문을 하다 죽일 거요· 그러느니 차라리 지금 단칼에 죽겠소·”
독사는 유흥가 어느 골목 혹은 어느 방파에나 한두 명씩은 있는 흔한 별호였다·
그러니 별호만 가지고 탐문하여 놈의 정체를 파악하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지금은 그러고 다닐 시간도 이유도 없고·
“삼룡채(三龍普)의 수적이라는 게 무슨 그리 대단한 비밀이라고·”
“그걸 어떻게!”
“정말 삼룡채에서 나왔소?”
“알고 물어본 거 아니었소?”
“이런 쳐죽일!”
나는 하마터면 놈의 면상에 십초박의 선팔초를 모두 꽂아 넣을 뻔했다·
다행히 일견이 얼른 앞을 막아서는 바람에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수 있었다·
일견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러나?”
“천룡표국과 오랜 세월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해온 수채입니다· 족보가 없는 놈들도 아니고 나름 장강수로맹에 속해 있는 큰 수채인데 천룡표국이 개입되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조리 살인멸구 하려 했다니····”
“나는 끝까지 반대했소· 정말이오·”
“혹시 내가 천룡표국의 사공자인 건 알고 있나?”
“그 그런 말은 없었는데·”
독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로 까맣게 몰랐던 모양이다·
그래도 달라질 건 없다· 청성 점창 당문의 후예들이 호송 중임을 알면서도 살인멸구하려 한 자들이 나 하나 더 있다고 생각을 바꿨겠나·
“녹산귀도는 어떤 자이지?”
“수하 세 명과 함께 강호를 떠돌아다니는 청부업자요·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다 하는데 특히 무림인들에게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로부터 거액을 받고 복수를 대신해 주는 것으로 유명하외다· 실력은 하나같이 일류 이상이라 들었고·”
나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혹시 한 번쯤 들어 본 적이 있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모두 고개를 가로저었다·
“삼룡채에서 당신의 위치는?”
“세 번째요·”
세 번째면 언제 두령을 죽이고 채주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위치다·
졸개 나부랭이인 줄 알았다가 생각보다 거물이자 나도 사람들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혹시 호리독사(M喜毒能)를 아나?”
“수하들이 날 부르는 별호이오만·”
호리는 술독을 일컬으니 호리독사란 술독에 빠진 독사를 뜻한다·
나는 이제야 독사가 누구인지 생각났다·
본래 유명한 도둑 출신으로 은신술과 잠행술에 뛰어난 그는 사실상 삼룡채 내에서 최고의 고수였다·
하지만 허구한 날 술에 취해있다 보니 어쩌다 채주나 부채주와 자웅을 겨룰라치면 흠씬 두들겨 맞기 일쑤였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서열 싸움에서 밀려났고 세 번째가 되었다·
그 자신도 채주나 부채주가 되어 골치 아프게 삼룡채를 이끄는 것보다 술이나 실컷 마시면서 세 번째로 편안하게 지내는 것에 만족했다·
“이제 날 어떡할 겁니까?”
나는 저만치 갑판에 굴러다니는 강철닻을 가져왔다·
아마 늙은 뱃사공이 어디서 주운 물건인 것 같은데 끄트머리에는 때마침 밧줄까지 제법 길게 묶여 있었다·
나는 강철닷과 연결된 밧줄의 다른 쪽 끝을 독사의 두 발목에 묶었다·
그리고 양쪽 팔을 뒤로 꺾어 다른 가는 밧줄로 친친 묶고는 그를 번쩍 들어다 배의 난간에 세웠다·
“뭐 뭐 하는 거요?”
“당신들이 우리에게 하려던 짓·”
“솔직히 말하면 살려준다고 했잖소!”
“그래서 솔직히 말했나?”
“어쨌든 다 알게 됐잖소·”
“아깐 당당하게 죽이라고 하더니·”
“살려주시오· 제발!”
“싫어·”
나는 강철닻을 거침없이 강물 속으로 던져 버렸다·
풍덩 소리와 함께 닻이 떨어지고 뒤이어 독사가 발목부터 홱 하며 끌려 들어갔다·
머리까지 물에 빠져 자취를 감추려는 순간 나는 한 손을 뻗어 놈의 머리끄덩이를 덥석 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얼굴만 물 밖으로 내놓았다·
“내가 당신을 살려줘야 하는 이유를 한 가지만 말해봐·”
“수채가 텅 비어 있습니다· 채주가 돈을 숨겨둔 장소를 압니다· 은전이 궤짝으로 다섯 개는 될 겁니다· 최소 삼만 냥 봅니다·”
“우리는 표사지 도둑이 아니다·”
“자 잠깐만· 남직예를 가로질러 하남으로 들어가는 가장 빠르고 은밀한 길을 압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지름길이라면 나도 얼마든지 알고 있다·”
“표사들이 다니는 길과 도둑이 다니는 길은 다릅니다· 이건 소싯적에 무림인들의 추적을 피하는 과정에서 알아낸 세상에서 오직 저만 아는 길입니다·”
“···!”
한 식경 후 배는 여강촌에 도착했다·
나는 약속했던 대로 말 한 필과 마차 두 대를 배에 남겨두고 모두 내리게 했다·
쇠창살 우리 속에 갇혀있던 백발노성도 말 안장에 빨래처럼 엎어지게 널어놓은 다음 양손과 발목에 묶여 있는 쇠사슬을 밧줄로 연결해 말의 배 아래에서 하나로 묶었다·
마지막으로 나만 남았을 때 뱃사공을 보며 말했다·
“뒷일을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저희는 상류로 계속 올라갔다가 이틀 후에나 다시 내려올 생각입니다· 그 정도면 되겠습니까?”
“천룡표국은 강하방이 보여준 신의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보중하십시오·”
나까지 내리자 배는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나는 사람들을 모이게 한 후 두소부에게 지시를 내렸다·
“세분께선 호리독사와 함께 먼저 가십시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오늘은 쉬지 않고 길을 재촉하시고 내일 저녁쯤 곽산(都山) 초입에 있는 관제묘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십시다·”
“정룡 공자는 어쩌려고요?”
“우린 꼬리를 자른 후 얼른 따라겠습니다·”
***
삼룡채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새 삼경이 가까웠다·
횃불이 여기저기 밝혀진 수채를 바라보며 일견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불을 지르는 건 어떤가?”
“그럼 일이 커집니다·
“독사가 말한 은전을 찾아 볼모로 삼는건? 마침 집도 비었고·”
“우린 빈집을 털려고 온 게 아닙니다·”
“나도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네·”
“그렇다고 해도 일단 우선 수채를 차지하기는 해야겠습니다· 텅 비었다고 해도 최소한의 인원은 남아 있을 겁니다· 죽이지만 않는다면 그 어떤 욕설과 폭력도 허용합니다·”
“죽이지 않는 게 제일 어려운 일이네·”
호리독사의 말대로 수채는 텅 비어 있었다·
횃불을 들고 왔다 갔다 번을 서는 수적들이 열 명 정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돈독 오른 서호삼견을 감당하기엔 그들의 무공이 너무나 형편없었다·
열 명을 모두 쓰러뜨리고 광에 가두는 데는 불과 한 식경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놈들이 떨어뜨린 손도끼 하나를 챙긴 다음 새벽까지 늘어지게 잠을 잤다·
해가 밝아올 무렵이 되자 삼룡채의 주인인 칠척노도(七尺怒刀)가 휘하의 수적 백오십여 명을 이끌고 나타났다·
수적들의 숫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자 서호삼견의 얼굴은 대번에 흙빛이 되었다·
나도 간이 살짝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별호만큼이나 큰 체구를 자랑하는 칠척노도는 자신이 없는 사이 누군가에 의해 수채가 점령당했다는 걸 알아차리고서는 눈이 회까닥 뒤집혔다·
“네 놈들은 누구냐?”
“처음 뵙겠습니다· 백발노성의 호송을 책임진 천룡표국의 십칠각주 이정룡입니다·”
천룡표국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부터 칠척노도의 얼굴이 노래졌다·
순간 수적들 속에서 누군가 칠척노도에게 재빨리 달려가 귓속말을 전했다·
칠척노도의 얼굴이 더욱 노래졌다·
“사공자라는 말이 사실이오?”
“호리독사도 같은 반응을 보이더군요·”
“호리독사가 살아있소?”
물에 빠져 죽은 줄 알았던 모양이다·
하기사 물에 빠진 건 알았지만 올라온 흔적이 없으니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할밖에·
그러나 죽은 줄 알았던 수하가 살아 있다는 데도 칠척노도는 전혀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얼굴이 노래지다 못해 창백해졌다·
호리독사가 모든 걸 불었을테니 당연히 놀랄밖에·
그러다 갑자기 눈동자에 기광이 돌았다·
“다른 일행은···?”
“무림맹 후기지수들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백발노성과 함께 다른 곳에 있습니다· 제가 만약 살아서 돌아가지 못 한다면 천룡표국에 삼룡채를 찾아가 보라고 알려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 희망까지 사라지자 칠척노도는 모든 걸 체념한 얼굴이었다·
“원하는 게 무엇이오?”
“술이나 한 잔 얻어 먹었으면 합니다· 주인이 계시질 않아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그러면서 나는 야외에 놓여 있는 통나무 탁자의 상석 바로 왼쪽에 철썩 앉았다·
굳이 왼쪽에 앉은 것은 칠척노도가 왼손잡이 즉 좌수검(左手劍)이기 때문이다·
대화가 길어질 것을 예감한 칠척노도가 자연스럽게 상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잠시 후 술이 나오고 칠척노도와 내가 주거니 받거니 몇 잔을 마셨다·
그때까지 칠척노도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금쯤 내 의중을 파악하느라고 머릿속에서 불이 나고 있을 것이다·
“잘 마셨습니다·”
“그냥 가시려고?”
나는 대답 대신 품속에서 전낭 하나를 꺼내 식탁 위에다 쓱 밀어 놓았다·
“이게 무엇이오?”
“표물이 장강을 건넜으니 성의를 표시해야지요·”
“사공자····”
“은전 열 냥입니다· 삼룡채의 채주께서 아무래도 우리 천룡표국에 무언가 섭섭한 것이 있으신 것 같아 오늘은 좀 넉넉하게 넣었습니다·”
“어제 일은····”
“호리독사에게 모두 들었습니다· 녹산귀도의 꼬임에 빠져 천룡표국이 개입한 줄은 까맣게 모르셨다고요·”
“그 그렇소이다·”
“녹산귀도는 어디로 갔습니까?”
“밤새 기다려도 배가 나타나지 않자 다시 무양포구로 들어갔소이다· 목격자가 있는지 수소문을 해보겠다고 했소· 아무래도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았소이다·”
“채주님께선 어쩌실 겁니까?”
“삼룡채에서 사공자를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고맙습니다·”
내 말을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니 이대로 조용히 넘어가자는 뜻으로 알아들은 모양이다·
칠척노도는 비로소 굳었던 표정을 풀며 전낭을 집기 위해 탁자 위로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이건 염치불고하고····”
그 순간 나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이능력을 발동시켰다·
동시에 허리춤에 꽃아둔 손도끼를 질풍처럼 뽑아 들고는 놈의 왼손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텅!
“으아악!”
자지러지는 비명과 함께 칠척노도가 발작적으로 튀어 오르며 물러났다·
하지만 손목 아래는 전낭을 집은 채 그대로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잘린 단면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채채채채채챙!
갑작스러운 상황에 수적들이 모두 도검을 뽑아 들었다·
이에 맞서 서호삼견도 동시에 각자의 병장기를 뽑아 들고는 수적들과 대치했다·
“죽여! 모두 죽여버려!”
칠적노도가 악다구니를 썼지만 누구도 함부로 덤벼들 생각을 못 했다·
천룡표국의 사공자라는 신분이 표왕이라는 이름이 무엇보다 내가 이곳에 온 걸 무림맹 후기지수들이 안다는 사실이 두려운 것이다·
“이 새끼들 뭐 하는 거야! 어서 죽여버리라니까!”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부채주 독혈랑(獨血浪)을 바라보며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칠척노도가 더는 검을 쓸 수 없으니 이제부터 당신이 채주요· 선택을 하시오· 일을 좀 더 크게 벌려 볼 것인지 아니면 은전 열 냥을 챙기고 계속해서 천룡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것인지·”
삼룡채의 채주가 금전 오백 냥에 눈이 멀어 장강수로맹과 오랜 우호 관계였던 천룡표국의 사공자를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려 했다· 이건 맹에서도 바람막이가 되어 줄 수 없는 대형 사고였다·
맹에서는 오히려 주제넘은 일탈을 문제 삼아 수뇌부 대여섯 명 정도 목을 치는 것으로 천룡표국에 사과의 뜻을 표하려 할 지도 모른다·
부채주 정도 되는 그릇이라면 이 정도 계산은 할 것이다·
한데 독혈랑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똑똑한 인물이었다·
“청성 점창 당문의 후기지수들은 어떻게 하신답니까?”
“날더러 그들의 입까지 막아 달란 말이오?”
“이 미친 새끼·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칠척노도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 순간 독혈랑이 갑자기 들고 있던 대도로 칠척노도의 목을 뎅겅 쳐 버렸다·
쿵! 하고 목이 먼저 떨어지고 뒤이어 몸뚱어리가 털썩 넘어갔다·
시뻘건 피가 순식간에 바닥을 물들였다·
갑작스런 상황에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뜨악했다·
독혈랑이 말했다·
“모든 건 멍청한 채주가 고집을 피워서 생긴 일입니다·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 없을 것입니다· 약속드립니다· 그리고 사과드리겠습니다·”
독혈랑이 무림인들의 인사법인 포검식의 예를 취했다·
그러자 식당 안에 들어와 있던 수적들 전부가 모두가 똑같은 자세로 머리를 숙였다·
“후기지수들에게 보고 들은 대로 전하겠소·”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