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반점에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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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벌써 나오십니까?”
“답문지를 낸 사람은 나가도 된다고 하더라고·”
“벌써 쓰고 내셨다고요?”
“그렇다니까·”
“너무 빠른 거 아닙니까?”
“오래 앉아 있는다고 없는 수가 생기나·”
“그건 그렇죠· 보퉁이 이리 주십시오·”
장삼은 알만하다는 듯 더 묻지 않았다·
“양군벽은 찾았어?”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찾았습니다·”
“시키는 대로 했고?”
“했죠·”
“그랬더니 뭐래?”
“살다 살다 그렇게 희한하고 창의적인 욕은 처음 들어봤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말로 시작해 별의별 짐승을 다 소환하더니 꽁지가 빠지라 달려가더군요·”
“수고했다·”
“이래도 괜찮은 겁니까?”
“뭐가?”
“그거 순 거짓말이잖아요·”
“거짓말 안 하고 사는 사람도 있어?”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공자님과 제가 멀쩡한 한 가정을 파탄 낸 것이라면····”
“후후· 염려 마라· 오늘 거짓말 한 번에 네가 구한 목숨이 앞으로 30년 동안 서른 명은 될 테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절 하나를 짓는 것보다 낫다고 하셨다· 너는 성불 할 거야·”
“당최 무슨 말씀이신지”
장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물었다·
“그나저나 시험은 정말 잘 보셨습니까? 포쾌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올해는 유생들이 유난히 많아서 고사장을 일곱 군데로 나눠서 치렀다고 합니다·”
“잘 보면 뭐해· 잘 써야지·”
나는 장원급제자의 답문을 가로채진 않았다· 대신 미리 알고 있는 시제를 토대로 나만의 논리를 펼쳤다·
물론 전생에서 필사를 할적에 생각했던 답문을 지난 밤새 정교하게 다듬고 또 다듬은 것이었다·
장원급제는 바라지도 않는다· 시제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이미 공정함은 물 건너갔지만 그래도 평소의 내 생각과 문장으로 평가받고 싶었다·
“안 가고 뭐 하십니까?”
“잠깐만 기다려 봐·”
“왜요?”
“보면 알아·”
얼마나 기다렸을까?
시험을 끝낸 유생들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그중 작고 가냘픈 체구에 허여멀건 한 얼굴의 유생이 있었다·
왼쪽 콧잔등에 콩자반만 한 점이 있었는데 그것만 없었다면 어딜 가서도 미공자 소릴 들을 만큼 잘 생긴 유생이었다·
나는 얼른 그의 앞을 막아섰다·
“시험은 잘 보셨소?”
“누구시죠?”
“이거 은인의 얼굴도 몰라보고·”
“아!”
뒤늦게 나를 알아본 콩자반이 보퉁이에서 얼른 대나무 붓통을 꺼내 공손히 건네주며 말했다·
“아깐 고마웠습니다·”
“별말씀을·”
“그럼 이만·”
“바쁘시오?”
“왜 그러시죠?”
“보아하니 양주에서 온 유생인 듯한데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가까운 반점에 가서 따뜻한 고기국수라도 한 그릇씩 하고 헤어집시다· 나는 항주 토박이라서 잘 하는 반점들을 꿰고 있소·”
“제가 양주에서 온 줄은 어떻게 아시죠?”
콩자반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마치 중요한 무언가를 들킨 사람 것처럼·
“말투가 딱 그런데 뭘·”
“남직예의 말투는 대부분 비슷한데 그중에서도 양주라고 딱 꼬집어 생각한 이유라도 있나요? 혹시 전에 우리가 보았다거나····”
“머리에 쓰고 있는 그 유건 말이오· 아무래도 양주의 특산물인 감포초(紺布草)로 염색한 것 같은데 아니오?”
“그걸 어떻게 아시죠?”
어떻게 알긴· 전생에서 쟁자수 시절 숱하게 지고 날라봤으니 알지·
감포초는 양주 강가에 많이 자라는 풀로 한 다발씩 피는 붉은 꽃을 따다 천을 염색하면 희한하게도 감색으로 변한다· 해서 이름도 감포초다·
같은 감색이라도 감포초로 염색한 천은 색이 깊고 광택이 나서 매우 비싼 값에 거래된다·
다만 한 가지 감포초에는 독특한 성질이 하나 있었다· 그건 이성 경험이 없는 남녀가 감포초로 염색한 모자를 쓰면 백 명에 한 명꼴로 독성 반응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대단한 건 아니고 양쪽 귓불에 빨간 점이 생기면서 약간 가렵다· 지금 눈앞에 저 유생도 그랬다· 말을 하면서 이따금 손가락으로 제 귓불을 긁었다·
쯧쯧쯧· 저 나이에 아직도 경험이 없다니·
“눈썰미가 대단하시네요·”
“바로 그런 눈썰미로 찾아낸 반점이 하나 있소· 암소 뒷다릿살로 밤새 끓인 육수에 탱탱한 면을 말아주는데 그 맛이 기가막히·······”
“죄송하지만 선약이 있어서요· 만약 다음에 또 만나게 되면 그때 같이 먹기로 해요· 그럼 이만·”
유생은 가볍게 웃더니 쌩하고 사라져 버린다· 붙잡고 말고 할 사이도 없었다·
“쩝 한 그릇 얻어먹으려고 했더니만·”
“콧잔등의 점이 매우 인상적인 유생이군요· 처음엔 똥파리가 붙은 줄 알았습니다· 한데 아는 유생입니까?”
“오늘 처음 봐·”
“그런데 어찌?”
“저것도 미친놈이야· 과거를 보러 왔다면서 붓 대신 판관필(判官笔)을 가지고 왔더라고·”
“판관필이라고요?”
“거 왜 무림인들이 갖고 다니다가 사람들 혈도 찍을 때 쓸려고 붓처럼 위장해서 만든 쇠꼬챙이 있잖아·”
“아니 그걸 왜?”
“헷갈렸던 모양이지· 대나무 붓통에 들어있으면 꺼내보기 전에는 잘 모르니까· 그래서 어쩔 줄을 몰라 하기에 내 붓을 빌려줬지· 난 이미 쓰고 나오는 길이었으니까·”
“무공을 익힌 유생인가 보군요·”
“판관필 통과 붓통을 헷갈릴 정도라면 둘 다 평소에 잘 쓰지 않았다는 뜻인데 그런 자가 글을 알면 얼마나 알 것이고 무공을 알면 또 얼마나 알겠어? 안 그래?”
“저도 그런 사람을 한 명 압니다·”
“혹시 나니?”
“헛!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 자식이 진짜 보자보자 하니까·”
“언제는 솔직히 말 하라시면서요·”
“너도 참 답답하다· 그런 눈치로 그동안 어떻게 종질을 했냐? 너도 크게 되긴 애저녁에 글렀다· 쯧쯧쯧·”
그때였다· 장삼이 바지 속에 손을 한번 쓱 넣었다가 꺼내는데 손가락 사이로 은전 두 개가 떡 하니 끼어 있었다·
그러자 깜짝 놀라 얼른 한 개를 다시 감추고는 나머지 한 개를 내 눈앞에서 방정맞게 흔들어 보였다·
“공자님께 지원되는 돈은 끊어졌지만 소인은 일 년치 새경을 매달 나누어 받습죠· 어떻게 날도 쌀쌀한데 뜨끈한 고기국수나 한 그릇씩 때리고 갈깝쇼?”
“만두는?”
“그건 기본으로 깔고 가는 거죠·”
“이런 크게 될 놈을 봤나· 얼른 가자·”
***
백선반점은 서호 주변에서 가장 큰 음식점 중 하나로 저렴한 것부터 비싼 것까지 무려 백 가지의 음식을 판다고 해서 이름도 백선반점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백선반점은 이미 유생들로 바글바글했다· 날이 날인만큼 오늘 하루 서호 주변의 반점들은 전부 유생들로 가득 찰 것이다·
“공자님 나오셨습니까?
점소이가 수건에 손을 닦으며 달려왔다· 이정룡이 생전에 이곳을 꽤 자주 드나든 모양이었다· 하긴 백선반점은 이곳에서 보는 서호의 낙조가 그림처럼 아름다워 예전부터 항주의 명소로 통했다·
”1층은 이미 만석이네·“
”예 오늘 향시가 있는 날이어서요·“
“2층으로 안내해줘·”
“2층도 꽉 찼습니다·”
“2층까지?”
“그게 실은····”
“왜 실실 눈치를 봐?”
점소이는 몇 번을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 병룡 공자님께서 십여 명의 친우분들과 함께 조용히 식사를 하고 싶다 시며 3층을 통째로 전세 내셨습니다· 그 바람에 보통 때라면 3층에 앉았을 손님들까지 전부 1 2층으로 분산되었습니다·”
“고작 열 명이서? 누군지 엄청 부잣집 자식인가 보군·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렇지· 오늘 같은 날 한 층을 통째로 전세 내면 쓰나· 없는 사람들은 밥도 먹지 말란 얘기야 뭐야·”
무심코 뱉은 내 말에 점소이와 장삼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순간 나는 점소이가 말한 병룡 공자가 바로 나의 셋째 형 이병룡임을 깨닫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혹시 거기 조영영도 있냐?”
“예·”
조영영은 죽은 이정룡이 짝사랑했던 수향문의 영애다· 점소이가 필요 이상으로 망설이기에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인데 예측이 맞았다·
“장삼아 딴 데 가서 먹자·”
그러고는 얼른 돌아서 나가려는데 엄청난 떡대를 자랑하는 무사 하나가 앞을 막아서더니 꾸뻑 허리를 숙였다·
이게 사람이야 탑이야 싶을 만큼 거대한 그는 이병룡의 최측근 무사이자 천룡표국의 표두였다· 한 자루 철검을 귀신같이 휘둘러서 별호가 철탑(鐵塔)이었던가·
“삼공자님께서 3층으로 모시랍니다·”
“내가 온 줄 어찌 아시고?”
철탑이 저만치 있는 어린 점소이 하나를 눈으로 가리켰다· 저 녀석이 그새 쪼르르 올라가 일러바친 모양이었다· 그 대가로 동전 열 한 냥쯤 받았을 것이다·
“내가 지금 약속이 있어서·”
나는 쟁자수 생활 30년에 얻은 개코를 통해 이번 만남이 결코 아름답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언젠가는 부딪히겠지만 오늘은 피하고 싶었다·
“무례를 범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뭐?”
나는 찢어 죽일 듯한 눈으로 철탑을 노려보았다· 철탑도 피하지 않았다· 그는 고요한 방 안의 촛불처럼 가만히 나를 노려 보았다·
한데도 나는 오히려 가슴이 벌렁거렸다· 고수들의 눈빛에는 부드러운 가운데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위압감 같은 것이 있었다·
아침에 상대했던 고중태와는 확실히 급이 다르다·
“눈 깔아·”
“···?”
“먹물을 쪽 뽑아버릴까 보다·”
“···!”
“앞장 서·”
칼싸움은 져도 기싸움은 지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