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 곳곳에 고수가 있다(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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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들께서 오셨단 말 못 들었느냐? 옷이라도 갈아입고 올 것이지· 이게 무슨 무례냐?”
이병룡이 면박을 주면서도 손님들 앞이라 그런지 목소리를 평소와 달리 부드럽게 했다·
지금 내 옷차림은 흑시에서 입고 싸웠던 그대로였다·
바깥에선 깜깜해서 깨끗한 줄 알았는데 대황촉을 환하게 밝힌 방 안으로 들어오고 보니 곳곳에 피가 조금 튄 상태였다·
“죄송합니다· 서둘러 오느라 그만·”
“표국의 일에는 밤낮이 따로 없고 무림인의 옷이 더러운 것이야 항상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정룡 공자께서는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뒷눈썹이 꼭 칼 두 자루를 붙여 놓은 것처럼 생긴 사내의 말이었다·
준수한 용모도 용모지만 말투며 표정에서 강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청성 제자 두소부입니다·”
“점창 제자 양조광입니다·”
“당문에서 온 당군백입니다·”
칼자루 눈썹을 시작으로 세 명이 앉은 자리에서 나를 향해 가볍게 포권을 취해왔다·
나도 똑같은 자세로 응수했다·
“천룡표국 십칠각주 이정룡입니다·”
명문대파의 후기지수들일 거라고 짐작은 했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구대문파와 그 유명한 사천 당문의 제자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청성과 당문은 사천성에 있고 점창은 장강을 경계로 마주 보고 있는 운남성에 위치했다·
모두 이곳 항주에서는 만리밖의 문파들이었다·
워낙 멀어서 내가 잘 모르는 것일 뿐 풍기는 기도를 보면 십중팔구 인근에서는 유명한 후기지수들일 것이다·
특히 당군백이라는 저 당문의 여자는 남자 같은 이름과 달리 대단한 미인이었다·
그때 이병룡이 또 말했다·
“세 분은 현재 무림맹 용봉지회(龍嚴之會)에서 활약 중이시다· 지금은 모종의 임무를 띠고 황산으로 왔다가 맹으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들른 것이고·”
무림맹은 백도무림 최대의 연맹세력으로 청룡당 당주인 유지평이 한때 몸담았던 곳이다·
한데 무림맹에서 후기지수들이 왜 왔을까? 나는 이미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두소부가 말했다·
“정룡 공자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제게 무슨 명성이랄 것이 있다고요·”
“천하가 아무리 넓다지만 강호무림의 소식통은 보통 사람들의 그것보다 훨씬 빠른 법이지요· 늦었지만 회시에 장원급제하신 것 축하드립니다·”
“민망합니다·”
칭찬을 하기는 하는데 왠지 모르게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당군백은 몰라도 두소부와 양조광은 나를 별로 대단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
사실 구대문파의 제자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기재들 중에서도 기재라 불리는 자들만이 구대문파의 제자가 될 수 있다·
거기다 무림맹 용봉지회에서 활약할 정도라면 각자의 사문에서도 고르고 고른 인재를 파견했을 것이다·
이들은 전부 어려서부터 신동이니 천재니 하는 소리를 귀가 따갑도록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그러니 웬만한 인물은 눈에 찰 리가 없다·
부모를 잘 만나 저절로 한 자리씩 꿰찬 천룡표국의 이씨 사형제들 같은 경우는 더 그럴 것이다·
나는 거기다 무공도 아니고 회시에 장원급제한 것으로 알려졌으니 어쩌면 글만 아는 약골이 표사가 되겠답시고 뛰어다니는 것처럼 보일지도·
두소부가 이종산에게 말했다·
“저희는 이제 그만 일어나야겠습니다· 늦은 시간에 국주님과 여러 선배님들께 큰 폐를 끼쳤습니다·”
“나가면 쉴 곳을 마련해 줄 것이네·”
“아닙니다· 저희는 오늘 밤 다른 곳에서 묵을 것 같습니다· 해서 말씀인데 물건을 하룻밤만 맡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다선초당으로 갈 셈인가?”
“기왕 황주로 온 김에 남궁세옥 선배를 만나고 가려 합니다· 아시겠지만 남궁 선배는 용봉지회의 전대 회주이셨습니다·”
“알겠네· 그리 하시게·”
“그럼 다시 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
세사람은 이종산을 비롯해 장로들 전부에게 일일이 포권지례를 올린 후에야 비로소 방을 나갔다·
곽석산이 늦게 도착한 나를 위해 저간의 사정을 짧게 설명해 주었다·
요지는 크게 네 가지였다·
첫째 용봉지회 후기지수들이 황산에서 악명 높은 마두를 하나 잡은 후 무림맹으로 호송 중이다·
둘째 어찌 된 영문인지 이들은 무림맹주로부터 직접 받은 동패를 내밀며 천룡표국에서 말과 마차와 교대로 번을 서줄 표사 대여섯 명 정도를 지원해 줄 것을 부탁했다·
셋째 다행히 그 마두에게는 따르는 무리도 구해줄 친구도 없으니 크게 위험한 일은 없을 것 같다·
넷째 천룡표국은 어디까지나 조력자로서 호송을 하는 동안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하여 두소부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전생에서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그때도 표사들로만 구성된 표행단이 꾸려졌다·
일개 쟁자수 신분이었던 나는 당연히 참여하지 못했다·
그래도 대충의 상황은 안다· 결론만 말하면 이 호송은 중간에 마두가 기발한 방법으로 도망치는 바람에 깨끗하게 실패하고 만다· 다잡은 마두를 놓친 무림맹의 후기지수들은 크게 망신을 당하고 호송에 동참한 천룡표국 특히 표두의 이력에도 큰 오점을 남겼다· 그 표두는 이병룡이었다·
“표행단이 꾸려지면 표사들을 이끌 임시 표두를 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무림맹의 무인들이라고 해도 천룡표국의 표두에게 함부로 명령을 내리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신중한 이갑룡이 평소와 달리 먼저 포문을 열었다·
무림맹 후기지수들의 오만이라면 오만이랄 수 있는 요구에 대해 같은 항렬로서 어떤 책임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이을룡이 덧붙였다·
“저도 형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표행을 하는 동안에는 표두가 곧 천룡표국을 대표합니다· 천룡표국을 대표하는 사람이 타문파 후기지수의 명령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이 의뢰는 아무런 실익이 없습니다· 성공하면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이 모든 공을 가져갈 것이고 실패하면 그 책임을 싫든 좋든 천룡표국이 나눠서 져야 합니다·”
“거기다 표비도 받을 수 없고요·”
“그건 저들 역시 마찬가지다· 마두를 잡아다 무림맹에 내다 팔려고 호송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야지·”
이종산이 이을룡의 경솔한 언사를 나지막하게 나무랐다·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이을룡이 한순간 고개를 숙였다·
천룡표국은 무림맹의 맹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림맹에서 협조를 요청하면 웬만한 일들은 돈을 받지 않고 도와줘 왔다· 일단 그들이 하는 일 자체가 강호의 안녕과 질서를 위한다는 공익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강호를 무대로 밥을 먹는 표국으로서는 남의 일인 것마냥 냉정하게 굴 수가 없는 노릇이다·
“두 당주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마두의 호송에 관한 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길을 잡거나 어디서 쉬고 출발할지 하는 것들까지 명령을 받는 것은 좀 그렇지요· 충분히 나쁜 선례가 될 수 있습니다·”
유지평이 말했다· 그로서는 입장이 곤란할 터인데도 불구하고 확실하게 천룡표국의 편에서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러자 이번엔 황자충이 유지평의 입장에서 조금 얘기를 해주었다·
“사적인 일로 명령을 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무조건 천룡표국의 체면만 고집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리고 아무나 보내서도 안 됩니다· 무림맹주의 동패를 보고도 소홀하게 대했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차라리 안 도와준 것만 못하게 됩니다·”
사실 이 일은 도움은 주되 여정에 관련된 일은 모두 우리가 결정하겠다고 선을 그어버리면 그만이다·
다만 두소부가 하필 무림맹주로부터 직접 받은 동패를 쥐고서 저리 정중하게 부탁을 하니 대놓고 묵살을 하지 못할 뿐이다·
두소부가 저리 나오는 이유는 뻔하다·
호송을 하는 중에 말썽이 생겨 천룡표국이 작은 활약이라도 했다간 자칫 자신들의 공이 희석될까 두려운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생각에 잠겼다·
하나같이 도움을 주기는 주어야겠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떠오르지 않는 얼굴들이었다·
그러다 이종산이 손지백에게 불쑥 물었다·
“대장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 말입니까?”
“배표(配鏡)는 원래 대장궤의 일이고 전문분야이지 않습니까? 지금쯤이면 당연히 생각을 내놓으셔야 할 것같습니다만·”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남궁세가는 언제 가실 겁니까? 초청장을 받은 지가 언제인데 하세월만 보내고 계시니 솔직히 답답합니다·”
“뇌검께서 곧 팔순을 맞으신다고 하니 봄소식처럼 갈 생각입니다· 남궁세가에도 그렇게 전달을 해서 좋다는 답신까지 받았고요·”
“그때까지 제가 살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그 얘기는 왜 하시는 겁니까?”
“무림맹까지 갔다 오려면 한 달은 족히 걸릴 텐데 혹시라도 그 안에 남궁세가행이 결정되면 차질이 있을까 봐서 그랬습니다· 다행히 그럴 것 같진 않군요·”
“대장궤께서 가시려고요?”
“그럴 리가요·”
“하면요?”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타문파 후기지수들의 명령을 듣는다고 하여 천룡표국의 체면이 크게 상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무림맹의 체면도 살려줄 정도의 중량감 있는 인물을 앞세워 표행단을 꾸려 주면 됩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십칠각주이지요·”
모든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로 쓸렸다·
그리고 답답해하던 얼굴에 그제야 하나둘씩 안도의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손지백의 설명이 이어졌다·
“십칠각주는 천룡표국의 사공자이니 우리로서는 충분히 성의를 표시한 겁니다· 그러나 사실상 무림초출에 나이도 대여섯 살 정도 어리니 선배격인 두소부의 명령을 받아도 크게 체면을 상하지 않는 일이지요·”
유지평이 덧붙였다·
“무림맹 후기지수들과 천룡표국이라는 등가를 선배와 후배로 바꿔 버리자는 말씀이로군요· 과연 탁월한 생각이십니다·”
곽석산도 보탰다·
“만약 호송에 실패해도 무림초출인 십칠각주와 책임을 나눠서 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랬다간 두소부의 그릇이 작음만 인정하는 꼴이 될 테니까요· 고로 천룡표국 역시 크게 체면을 상할 염려가 없고 말입니다·”
저기요· 그런 말들은 당사자 면전에서 하기는 좀 그런 것 아닌가요?
나는 입맛을 쓰게 다셨다·
내가 화조신옹을 죽인 건 아무도 모르니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백백곡의 살수들로부터 진왕과 공주까지 지켜냈다· 마지막엔 백백곡주와 살수들도 전부 사로잡았다·
이 정도면 나도 표사로서 제대로 신고식을 한 것 같은데 저들에겐 여전히 신출내기로 보이는 모양이다·
역시 무공이 강해야 한다· 강한 적을 무공으로 꺾어야만 비로소 한 사람의 무인으로 그리고 당당한 표사로 인정받을 수 있다·
기가 막힌 작전이라고 생각했는지 이 일을 맡아선 안 된다고 극구 주장했던 이갑룡과 을룡도 조용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종산이 내게 물었다·
“무림맹의 일이고 대의가 있는 일이다· 다른 의뢰처럼 계약을 할 수도 없고 돈을 받을 수도 없다· 그래도 하겠느냐?”
“거절해도 됩니까?”
“대신 앞으로 일 년 동안 십칠각에 배정되는 의뢰는 없을 것이다· 너는 오로지 혼자 힘으로 십칠각을 꾸려가야 한다·”
“지금도 지명의뢰가 넘쳐납니다만·”
“자만하지 마라· 여기 있는 당주들에게는 그런 시절이 없었을 것 같으냐? 메뚜기도 한철이라는 말이 있음을 명심해라·”
하지만 그들은 그 한철에 잔뜩 재미를 보았겠지·
나는 이렇게 모두를 대신해 무료봉사를 하러 가야 하고·
어차피 갈 거 시원하게 가자·
“알겠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오늘 회의는 이만 끝내도록 하지·”
이종산이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둘이서만 할 얘기가 있으니 모두 자리를 비켜 달라는 소리다·
잠시 후 방안엔 나와 이종산만 남게 되었다·
“표사와 쟁자수는 왜 증원을 않는 것이냐? 표사가 되겠다며 십칠각의 문을 두드리는 무사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안다만·”
“열심히 고르고 있습니다·”
“문턱이 지나치게 높으면 제아무리 싹이 좋은 표사라도 넘기가 어려운 법이다·”
“좋은 표사는 필요 없습니다· 최고의 표사들만 필요합니다·”
“그리 엄격한 이유라도 있느냐?”
“아버지께서 성공하실 수 있었던 건 휘하에 표사들이 많아서가 아니라 곽 숙부님과 손 백부님 그리고 삼당의 당주님 같은 분들이 계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내게 최고의 표사들이 있었던 건 사실이나 그들은 모두 많은 표사들 중에서 스스로 두각을 나타내어 내 눈에 띈 사람들이다·”
“현실적으로 일각이 거느릴 수 있는 표사는 많아야 열 명에 불과합니다· 최소한 그 자리만이라도 가장 뛰어난 표사들로만 꽉 채우고 싶습니다·”
“더 많은 표사를 거느린 각도 있다· 규모가 커지면 여섯 번째 당(黨)이 될 수도 있고· 물론 그 전에 네가 그들 모두를 먹여 살릴 수 있어야겠지·”
내가 아는 한 천룡표국 역사상 여섯 번째 당이 존재했던 적은 없었다·
나는 그제야 이종산이 십칠각의 표사 증원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를 알았다·
그는 자신의 대에서 처음 향시와 회시 급제자에 이어 여섯 번째 당까지 만들고 싶은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통해서· 이건 그만큼 내게 기대를 건다는 뜻이다·
내가 가능성과 희망을 주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다·
일 당이 거느린 표사들의 숫자는 대략 오십여 명 여기에 쟁자수까지 거느리면 작게는 백 명에서 많게는 이백 명에 가까운 식솔이 늘어나는 셈이다·
말이 좋아 당이지 작은 표국에 버금간다·
“가장 뛰어난 표사들로 규모를 늘리겠습니다·”
“덩치를 불리는 것보다 내공부터 키우겠다?”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표사는 어떻게 충당할 생각이더냐?”
“생각이 있습니다·”
“흑도들과 가깝게 지낸다고 들었다·”
“사실입니다·”
“흑도에 몸담았으나 제법 의기 있는 사람도 있고 백도인을 자처하나 흑도인보다 더 비열한 사람도 있음을 안다· 어느 쪽이든 네가 그들을 부린다면 그들에 대한 평판이 곧 너와 천룡표국의 평판이 될 것임을 잊어선 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혹시 네게 이 일을 맡겨 서운하느냐?”
“아닙니다·”
“대장궤께서는 너를 위해 일부러 꾀를 내신 것이다· 총관과 청룡당주는 그걸 알면서도 맞장구를 쳐 준 것이고·”
“무림맹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은 20년 후 각자의 사문을 지탱할 동량지재들이다·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든든한 외가가 없는 너에게는 그들과의 인연이 훗날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너는 병룡이 항주무림의 후기지수들에게 적지 않은 공을 들이고 있음을 알고 있겠지?”
솔직히 이것까지는 생각 못 했다· 나는 저들과의 인맥에 기대어 무언가를 해볼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감사합니다·”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사람들이 심지어 무림맹의 후기지수들조차 까맣게 모르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이번 표행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고되고 어려워 질 것이다·
세상에 고되고 어려운 일 중에 돈이 안되는 일이란 없다·
그리고 나는 한달이나 무료봉사를 할 생각이 없었다·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 녀석들의 명령까지 들어가면서·
‘용린신갑을 챙겨야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