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공주의 호위무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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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늦게 천룡표국으로 돌아온 나는 천무진경의 운기행공법을 통해 두 번의 일주천(一周天)을 한 후에야 비로소 잠들었다·
그리고 새벽같이 일어나 애장산 절벽을 또 두 번 오르고 내렸다·
그런 다음엔 귀영무의 보법 삼백쉰다섯 식을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수련했다·
그제야 늦은 아침을 먹고 곧장 십칠각으로 달려가 병기고에서 깡깡 망치질을 했다·
장삼이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쓸러 나왔다가 깜짝 놀라 물었다·
“공자님 여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흉갑 개조하고 있어·”
“흉갑은 왜요?”
“사람들이 이 물건의 진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려고· 혹시라도 소문이 나면 노리는 놈들이 있을까봐·”
“이게 그렇게 대단한 물건입니까?”
“딱 보면 모르겠니?”
“잘 모르겠는데요·”
“그렇다면 성공했군·”
“예?”
“설광(雪光)은 송진불에 그을려 죽였다만 가슴 한가운데 있는 이 동전만한 용 문양이 문제야· 이걸 아무리 망치로 두들겨 짓이기려고 해도 무슨 놈의 쇠로 만들었는지 생채기도 안 나네· 이럴 때 운철검이라도 있었으면····”
“언제부터 이러고 계셨습니까?”
“반 시진쯤·”
“그래서 이 겨울에 땀이 그렇게 흥건하셨군요· 누가 보면 물에 빠졌다가 나온 줄 알겠습니다· 가서 차라도 좀 내올까요?”
“그래 주면 고맙지·”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장삼이 빗자루를 홱 집어 던지더니 잰걸음으로 사라졌다·
그사이 나는 잠시 망치를 내려놓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환생을 했어도 남의 돈 먹기는 여전히 쉽지 않네·”
비노출 병기를 귀신같이 다루는 표사들은 황자충이 알아서 구해주기로 했다·
용린신갑은 정히 용 문양을 감추지 못하면 대충 역청이라도 발라서 입히면 된다·
“문제는 역용술사인데····”
인피면구로 대체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인피면구라는 것이 원래 갓 죽은 사람의 얼굴 가죽을 벗겨 만든다·
늙으면 늙은대로 젊으면 젊은대로 다 쓰임새가 다르다·
딱 맞는 걸 구하는 건 둘째 치더라도 그걸 어린 공주의 얼굴에다 씌우겠다는 말이 진왕 앞에서 차마 안 나왔다·
“그냥 인피면구라고 할걸·”
조금 더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이 후회는 되지만 노지량에게서 선불로 받은 금전 닷 냥을 생각하면 웃음이 실실 나온다·
“표사 증원한 만큼만 챙기고 봐줘야지·”
그때 차를 가지러 갔던 장삼이 돌아왔다·
한데 그의 꽁무니에 쥘부채를 든 서생 차림의 사내 하나가 붙어서 쭐레쭐레 걸어오고 있었다·
다시 그 사내의 뒤에는 별외조직인 접객당의 무사 두 명이 따라오는 중이었고·
나는 깔고 앉아 있던 거적때기로 용린신갑을 슬쩍 덮어 놓았다·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장삼이 사내를 돌아보며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고 얼른 내게로 달려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누군데?”
“북경에서 사귄 벗이라고 하는데 신분을 확인할 수가 있어야지요· 해서 접객당의 무사들과 함께 왔습니다·”
만에 하나 나를 해코지할 사람일 수도 있으니 무사들을 이끌고 왔다는 소리다·
한데 북경에서 내가 사귄 벗이 있었던가?
노잣돈이 떨어지는 바람에 어리숙한 유생들 몇 명을 구워삶아 밥과 술을 좀 얻어먹기는 했지만·
만약 그들 중 한 명이 온 것이라면 받은 것 이상으로 대접해서 돌려보내야 한다·
“일단 모셔와 봐·”
“이리 오시지요·”
사내가 쥘부채를 할랑할랑 부치며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백옥처럼 투명한 피부에 기생오라비 찜쪄먹을 정도로 잘 생긴 미공자였다·
‘무슨 남자가····’
같은 남자인 내가 봐도 가슴이 뛸 정도인데 웬만한 여자들은 눈도 똑바로 못 마주치지 싶다·
다만 한가지 흠이 있다면 귓불 아래에 똥파리처럼 붙은 점이랄까· 게다가 한겨울에 뭔 놈의 부채질을····
가만 점이라고?
“정룡 공자 오랜만일세·”
“누구시더라?”
“벌써 날 잊은 건가?”
“이름이···?”
“나 양진풍일세·”
양진풍? 풍진양?
“···!”
하 나 참 기가 막혀서· 아니 왜 또 역용을 하고 나타난 거지?
점은 또 왜 그렇게 고집을 하고· 역용의 완성을 의미하는 어떤 집착같은 건가?
아무튼 말도 못 하게 반가웠다· 여자만 아니라면 와락 끌어안고 등이라도 두들겨 주고 싶을 만큼·
그런데 예쁜 본래 얼굴을 못 봐서 좀 아쉽다· 일단 나를 골리려는 것 같으니 맞장구부터 쳐주자·
“양진풍이 누구요?”
“섭섭하군· 장원급제를 하더니 나 같은 시골 유생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이건가? 그리 안 봤는데 실망이군·”
접객당의 무사들이 슬그머니 양진풍의 뒤로 가서 섰다·
여차하면 칼을 뽑아 등을 쪼개버릴 기세다·
양진풍이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칼을 찬 무사들이 살기를 끌어 올리는데도 불구하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눈곱만큼도 없다·
당연히 그러겠지· 한주먹거리도 안될 테니까·
“무슨 뜻인지 알겠소· 벗을 볼 생각에 먼 길을 마다치 않고 달려왔는데 이리 안면박대하니 나도 빌린 물건만 돌려주고 가겠소·”
삐친 것처럼 말투도 바꾸더니 붉은색의 길쭉한 비단 주머니를 하나 내밀었다·
생긴 것만 보면 꼭 작은 붓통을 담은 주머니 같았다·
빌린 물건이라 했으니 이건 아마도 운철검을 담은 주머니일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닭이 바위 위에 올라가 있는 그림을 수놓은 걸까? 무슨 주술적인 의미라도 있는 건가?
무심코 입구의 매듭을 열던 나는 눈을 최대한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이제야 알아보시는군요· 하하·”
그제야 양진풍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밤새 내린 봄비에 목련꽃이 활짝 피는 것 같았다·
“한데 얼굴은 또 왜?”
“선비는 헤어진 지 사흘이면 마땅히 눈을 비비고 봐야 할 만큼 달라져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게 그 말이 아닐 텐데·”
“공자님?”
무사들 중 한 명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어찌할지를 묻는 것이다·
“벗이 맞습니다· 그것도 아주 절친한·”
그러면서 나는 다시 한번 양진풍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양진풍도 환하게 웃어 주었다·
그렇게 뛰어난 역용술로도 저 특유의 미소만큼은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장삼이 너는 가서 차를 좀 내오거라· 아니· 아예 식당에 들러서 소반에 술을 좀 가져와라· 가장 비싼 걸로 다가·”
장삼이 돌아서 뛰어가려는데 양진풍이 말했다·
“아닙니다· 금방 가봐야 합니다·”
“오자마자 가겠다고?”
“일이 좀 있어서요·”
“다음으로 미루면 안 되오?”
“중요한 약속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약속이기에?”
양진풍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오늘따라 웃음이 후하다·
“아쉽군· 할 수 없지·”
나는 장삼을 향해 됐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삼까지 사라지고 나자 전각엔 나와 양진풍 아니 남궁소소만 남게 되었다·
남궁소소는 선 자리에서 전각을 휘이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가 국주님께 하사받았다는 십칠각이군요· 얘기는 들었어요· 그런데 왜 표사가 한 명도 안 보이는 거죠?”
“직위와 전각만 하사받았소·”
“그렇군요· 표사와 쟁자수는 이제부터 한 명씩 채우면 되죠· 정룡 공자라면 틀림없이 잘 해낼 거예요· 늦었지만 각주가 되신 것 축하드려요·”
“고맙소·”
“뭘요·”
“그것보다 항주에는 언제 온 거요? 내상은 깨끗하게 치료한 거요? 소저의 오라버니께 대충 전해 듣기는 했소만·”
“항주에는 열흘 전에 왔어요·”
“열흘? 한데 왜 내게 연락을 안 준거요?”
“지금 이렇게 왔잖아요·”
이게 도대체 무슨 감정일까? 갑자기 가슴이 짜르르해지며 그녀가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애써 표정을 감추고 물었다·
“내상은 좀 어떻소?”
“물론 깨끗하게 나았죠·”
“다행이구려· 걱정 많이 했소·”
“거짓말·”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그냥 해본 소리예요·”
뭐지? 아까부터 왠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진다·
분명 웃고 있는데 진심이 아닌 것 같다· 기분 탓인가?
“한데 왜 역용을 한 거요?”
“운철검을 돌려드리려고요·”
“그냥 와도 될 텐데·”
“아무도 모르게 왔다 가려고 그랬죠· 안 그래도 다들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데·”
“이상한 눈초리라니? 누가 말이오?”
“할아버지 아버지 오라버니까지요· 제가 표행까지 따라간 걸 아시고는 불필요한 오해들을 하시더라고요· 정룡 공자는 안 그런가요?”
“나도 그렇소· 다들 어찌나 캐물으시는지·”
곽 숙부와 손 백부는 이참에 아주 장가를 보내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차마 그런 분위기까지 말하지 못했다·
“그것 봐요·”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백부님과 숙부님께서 남궁세가주님의 초청장을 무척 기다리고 있소이다· 소저가 그걸 갖고 올 거라고 기대하는 눈치들이시고·”
“초대를 할 거라고 저희 오라버니가 그랬나요?”
“그렇다고 들었소·”
“걱정 마세요· 초청장은 오지 않을 거예요·”
“어째서 그렇소?”
“제가 무슨 수를 써서든 막을 테니까요·”
“왜?”
“무슨 뜻이죠?”
“왜 그걸 막으려는 거요?”
“그럼 막지 말까요?”
“아니 그러니까 그걸 굳이 막으려는 이유가 있는지 묻는 거요·”
“오고 싶지 않으시잖아요?”
“누가? 내가?”
“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오고 싶으세요?”
“····?”
“····?”
나도 남궁소소도 잠시 대화를 끊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야기가 계속 겉돌고 있다·
뭔가 꼬인 게 있는 것이다· 이럴 땐 곧장 내지르는 게 상책이다·
“내게 화난 게 있구려·”
“아뇨· 없어요·”
“섭섭한 게 있던가·”
“아뇨· 없어요·”
“···?”
“네· 있어요·”
“말해 주시오·”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뭘 말이오?”
“내상 입은 여자를 혼자 동굴 안에 놔두고 갔으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한 게 인지상정 아닌가요? 알밤만 잔뜩 굴에 넣어주고 가면 끝인가요? 제가 무슨 다람쥐인가요? 집으로 무사히 돌아갔는지 궁금하지도 않던가요?”
“방금 물어봤잖소·”
“이제서요?”
“그럼 내가 어떻게 했어야 하오?”
“양주까지 찾아오는 건 바라지도 않았어요· 하지만 전서를 보내 안부라도 한 번쯤 물어봐 줄줄 알았네요· 양주에도 천룡표국 분타가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도 않았을 텐데· 뭐 제가 정룡 공자에게 그 정도의 사람이었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에요·”
“···!”
“아 이런 얘기 진짜 하기 싫었는데· 누가 보면 내가 정룡 공자를 좋아하는 줄 알 거 아니에요· 난 그냥 정말 인간적으로 너무 섭섭해서 그런 건데·”
문득 이종산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분간 항주에 오지 않을 수도 있지 않으냐? 동굴에서 홀로 남아 내상을 치료했다고 들었다· 안부도 물을 겸 네가 먼저 전서구를 보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만·”
그때 전서구를 보냈어야 했다·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 무조건 내가 잘 못 했다·
당연히 걱정이 되는 게 맞고 전서를 보내 안부도 물었어야 했다·
동굴 안에서 혼자 닷새나 운기행공을 하며 얼마나 힘들었을까?
알밤으로 주린 배를 채우며 밤마다 늑대 울음소리에 얼마나 무서웠을까?
고대하던 회시도 보지 못하고 거지꼴이 되어 혼자 세가로 돌아가는 길은 또 얼마나 쓸쓸했을까?
그것도 천룡표국의 표행에 따라나섰다가 당한 일이었는데·
반면에 나는 회시에 장원급제를 했고 마패를 받았고 역참마다 들러 말까지 타고 탱자탱자 항주로 돌아왔다·
나는 전생에서 쉰 살이 넘도록 여자를 만나지 못한 이유가 절름발이에 가난한 쟁자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나는 그냥 배려도 공감도 모르는 채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멍청한 새끼였다·
“왜 아무 말도 없으세요?”
“소저는 참 좋은 사람이오· 용모도 아름답지만 마음 씀씀이가 열 배는 더 아름답소· 본인도 아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무래도 우리가 만나는 게 오늘이 마지막일 것 같아서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이나 하려는 것이오·”
“왜 그렇게 생각하죠?”
“소저가 날 안 만나줄 것 같소·”
“왜요?”
“나라면 그랬을 것 같으니까·”
“···?”
“고마웠소· 그럼 잘 가시오·”
나는 조용히 돌아섰다· 두 발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그때 등 뒤에서 남공소소가 빽 소리쳤다·
“이럴 땐 사과를 해야 하는 거라고요!”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며 물었다·
“날 또 볼 생각이오?”
“그거야 그쪽 하기에 달렸죠·”
“내가 그런 인간 같지 않은 짓을 했는데도?”
“아유· 답답이 진짜· 정말 안 볼 생각이었다면 내가 미쳤다고 비단 주머니를 만들어 운철검을 돌려줬겠어요? 새랑 꽃이랑 수까지 놓아서?”
나는 손에 쥔 비단 주머니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게 새와 꽃이라고? 닭이 바위 위에 올라가 목을 빼고 우는 게 아니고?
“허구한 날 기녀들이랑 놀아났다고 하더니 도대체 뭘 배운 거예요? 술만 마신 거예요? 아니면 다른 짓을?”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이라니까· 소저도 그때 인정했잖소· 이제 와서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이것 보라지· 금방 또 태도가 바뀌네·”
“아니 난 그런 뜻이 아니고·”
“됐어요· 그만 갈래요·”
그러면서 홱 돌아서 가버린다· 나는 얼른 뒤쫓아가며 말했다·
“소저· 그러지 말고 주루에 가서 술이나 한잔합시다· 내가 사겠소· 그나저나 오늘따라 역용술이 유난히 감쪽같소· 그거 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오?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해줄 수 있소?”
“약속 있다고 했잖아요·”
“거짓부렁인 거 다 알고 있소·”
이정룡과 양진풍이 사라지자 두 명의 노인이 십칠각의 지붕 위에서 조용히 떨어져 내렸다·
흡사 커다란 나뭇잎 두 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래서 초청장을 갖고 왔다는 거야? 안 갖고 왔다는 거야?”
“십중팔구 남궁소소의 수중에 있을 겁니다·”
“총표두의 생각도 그렇소?”
“대장궤의 생각도 그러십니까?”
“우리만 그렇게 생각하면 무얼 하겠소· 저걸 내놓아야 일이 되는 거지· 억지로 빼앗을 수도 없고 이것 참·”
“그나저나 역용술 한번 기가 막히는군요· 이번에는 저도 감쪽같이 속았습니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더니·”
“남궁세가의 분영축골(分影縮骨術)은 그 자체로도 이미 무림일절이지· 그나저나 초청장을 어떻게 받아낸다?”
“기다리는 수밖에요· 다행히 정룡이 이제라도 정신을 차리고 뒤쫓아 갔으니 뭔가 진척이 있지 않겠습니까?”
“머리는 그렇게 비상한 놈이 어찌 여자 문제는 저리 맹하단 말인가· 왜 저런 건 제 아버지를 닮지 않았을꼬· 쯧쯧쯧·”
“이리 나오게·”
곽석산이 소리치자 전각의 뒤쪽에 있던 장삼이 잰걸음으로 달려 나와 허리를 굽실거렸다·
곽석산이 품속에서 작은 전낭 하나를 꺼내 장삼에게 건넸다·
“다음에도 사공자가 낯선 사람을 만나거든 내게 와서 보고 하게·”
“그건 좀 곤란합니다·”
“어째서?”
“오늘은 총표두님께서 어찌 아시고 절 찾아와 사공자님의 행방을 하문하셨기에 어쩔 수 없이 말씀드린 것입니다·”
“자네가 아니어도 용혈들을 찾는 손님이 오면 접객당에서 자동으로 내게 보고하도록 되어 있네· 난 다만 바깥에서의 일을 말하는 것이네·”
“죄송합니다·”
“싫다는 뜻인가?”
“죄송합니다· 총표두님·”
“그러면서 전낭은 잘도 챙기는구만·”
“이건 어차피 말씀을 드린 거라서····”
“알았으니 그만 가 보게·”
장삼이 사라지고 나자 손지백이 물었다·
“총표두의 끄나풀은 원래 가불염이 아니었소?”
“그놈이 언제부턴가 정룡의 편으로 완전히 돌아서 버렸습니다· 보고라고 하는데 허구한 날 알맹이는 쏙 빼고 말을 합니다·”
“상황판단이 빠르군·”
“애초에 성정이 박쥐 노릇과는 맞지 않는 사람입니다· 진국이죠· 거기다 아무래도 지난번에 함께 표행을 하다가 정룡에게 무언가 감복한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감복이라····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군· 총표두와 내가 국주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요· 아마·”
“정룡의 곁에 점점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장삼이야 원래 충성스러운 하인이었으니 그렇다고 치고 가불염에 이어 요즘은 전립성까지 정룡의 일을 도와주는 것 같습니다·”
“장궤 전립성을 말하는 거요?”
“그렇습니다·”
“그가 무슨 일을 도와주고 있길래?”
“회시의 포상으로 받은 땅을 팔아주려고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쓸모없는 땅이라서 고생을 좀 하는 모양이더군요·”
“사람이 사람에게 끌린다는 건 좋은 일이지·”
***
“크읍· 좋네요·”
“크으 술은 역시 낮술이지·”
“낮술이 아무리 좋아도 얻어먹는 술에 비할 바는 아니죠· 몇 병 더 시켜도 될까요?”
“무슨 술로 시키려고?”
“술 종류에 따라 되고 안 되고가 결정되나요?”
“아니오· 편안하게 시키시오·”
“됐어요· 그만 마실래요·”
“또 왜?”
“술값 아끼는 거 보고 김샜어요·”
“술값을 아끼다니· 무슨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편하게 마시라고 이렇게 우리 둘밖에 없는 별실까지 전세 냈건만·”
나는 점소이를 불러다 주루에서 제일 비싼 술로 두 병을 더 주문했다·
순간 승리감에 도취된 듯 양진풍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래 마음껏 즐기고 섭섭한 거 있으면 다 풀어라·
그리고 일어설 때는 내 부탁 좀 들어주고·
오늘 내가 은전 두 냥까지는 시원하게 쏜다·
“그런데 왜 하필 양진풍이오?”
“풍진양 거꾸로 한 거잖아요·”
“어쩐지 낯이 익더라니·”
“진짜 몰랐어요?”
“깜빡 속아 넘어갔소· 소저가 그 시간에 그런 모습으로 나타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역용도 완벽했고· 특히 점의 위치가 지난번과 달리 아주 절묘했소·”
“말 많은 거 보니 눈치챘네·”
“정말 몰랐다니까·”
“아이 또 김새려고 그러네·”
“점 때문에 잠깐 의심은 했지만 정말 몰랐소· 진짜요·”
“됐고· 그래서 얼마를 받기로 했죠?”
“뭘 말이오?”
“용린신갑을 대여해 주는 값 말이에요·”
“은전 한 냥씩 받기로 했소·”
“그건 좀 싼 거 아닌가?”
“하루에 한 냥이오·”
“그건 너무 비싼 거 아닌가?”
“물건이 물건이다 보니·”
“신분도 신분이고요·”
“물 들어왔을 때 노 젓는 법이오·”
“벼락 칠 때 콩 구워 먹고요·”
“마당 쓸고 돈 줍고·”
“나무도 하고 밤도 주워 먹고요·”
“도와주겠소?”
“싫어요·”
“···!”
잘 나가다가 딱 제동이 걸려버린다·
얼렁뚱땅 엮어보려던 나는 마침 점소이가 갖고 온 새 술을 따라주며 숨을 한번 골랐다·
“자자 한 잔 더 드시오·”
“저 그렇게 쉬운 여자 아닙니다·”
“대체 왜 안 된다는 거요?”
“역용술이라는 게 그리 간단한 게 아니에요· 오랜 시간 그대로 두면 근육이 굳어 마비가 와요· 최소 반 시진에 한 번씩은 술사가 손을 봐야 한다고요·”
“쉽게 말해 주시오·”
“잠깐 필요한 역용이라면 도와줄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 귀하가 말한 의뢰인의 경우에는 제가 계속 따라 다녀야 한다는 말이죠·”
“그럼 같이 다닙시다·”
“제가 왜요?”
“천룡표국의 임시 표사로 모시겠소· 대우는 표두급이고 추가로 용린신갑의 대여로 받은 은전을 사흘에 한 냥씩 주겠소· 참고로 은전은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것이오·”
“제가 돈이 필요한 사람처럼 보이나요?”
“회시는 이제 안 볼 거요?”
“왜 회시를 다시 볼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니까·”
“···!”
“···?”
잠시 서로의 눈을 노려보며 치열한 탐색전을 펼쳤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양진풍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보았다·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쳐요· 한데 왜 사흘에 은전 한 냥이죠?”
“두 냥은 내가 먹어야지·”
“절반으로 나눠서 귀하와 내가 매일 한 냥씩 번갈아 가져간다면 한번 생각해 볼게요· 물론 표두급으로 고용하는 비용은 따로고요·”
“좋소· 그렇게 합시다·”
“이렇게 쉽게요?”
“좀 이상하지만 사과라고 생각해 주시오·”
“····?”
“내게 소저는 엄청난 능력을 지닌 무림고수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걱정을 덜했던 것 같소· 그래선 안 되는 것인데· 정말 미안하오·”
착 가라앉은 내 목소리에서 진정성을 느낀 것일까?
양진풍이 고개를 돌리더니 가만히 술을 한잔 꺾었다·
아직 역용을 한 상태인데도 하얗고 가느다란 목덜미가 눈부시게 예쁘다·
그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도 아깐 쌀쌀맞게 굴어서 죄송했어요·”
내가 더 미안하오· 사실은 금전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