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호원표사(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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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의 이름은 연철산이라고 했다·
그는 진왕이 북경에서부터 데려온 사병들 중 절반을 이끌고 선두에서 길을 잡았다·
그 뒤를 황자충이 진왕과 함께 말을 탄 채 표사들의 밀착 호위를 받으며 따랐다·
나는 가불염과 함께 세 번째 대열에서 역시 말을 탄 채 진왕비와 공주가 탄 마차를 호위하며 가고 있었다·
진왕비는 마차 안에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공주만 아까부터 창틀에 양팔까지 척 얹고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아까 포구에서 내가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 것 때문에 불쾌해 저러나?
사실 황족을 그것도 어린 여자를 그렇게 오래 바라보는 건 불경죄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아는 사람과 닮아서 그랬다고 할까?
“희한하네·”
“···?”
“똑똑한 유생들은 하나같이 다 못생겼던데·”
지금 이거 나보고 잘 생겼다고 하는 말인 것 같은데?
하기사 이정룡이 자기 엄마를 닮아 인물 하나는 기생오라비 뺨치게 잘 생겼다·
팔다리도 시원하게 쭉쭉 잘 빠졌고·
됐다· 화가 나서 그러는 것 같진 않다·
“천룡표국주의 자제분이시라고요?”
“넷째 아들입니다· 공주마마·”
“말끝마다 공주마마라고 안 그러셔도 돼요· 무림인들이 세상의 법도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저도 알고 있어요·”
“알겠습니다· 마마·”
“마마도요·”
“알겠습니다·”
“천룡표국은 저도 좀 알아요· 절강성에서 가장 큰 표국인데다 또 부호라면서요? 황족이 부럽지 않다던데·”
“받잡기 어렵습니다·”
“거기다 회시에 장원까지 하셨다고요?”
“민망합니다·”
“아버님께서 뿌듯해 하시겠어요·”
“워낙 내색을 잘 않는 분이셔서요·”
“어떤 벼슬을 하고 싶으세요?”
난 당분간 벼슬을 할 수 없는 몸이다· 하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그런 사정을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다·
“글쎄요·”
“장원을 하면 보통 한림원으로 들어가던데 만약 그렇다면 북경에서 머물게 되시겠네요?”
“아마도요·”
“북경에 지내실 곳은 있고요?”
“아직은 없습니다·”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이거 무슨 호구조사 하는 것도 아니고 이쯤 되면 진왕비라도 나서서 만류할 듯한데 어쩐 일인지 조용히 지켜만 본다·
“스물둘입니다·”
“저보다 조금 오라버니시네요· 전 열일곱이에요·”
“그러시군요·”
“포구에서는 왜 그렇게 절 빤히 쳐다보셨어요?”
순간 나는 머리끝이 쭈뼛하고 섰다·
하필 진왕비가 듣는 데서 저걸 물어보다니·
예법에 밝은 왕비라면 얼마든지 문제 삼을 수 있다·
점수를 따도 모자랄 판에 책부터 잡히게 생겼다·
나는 제일 만만한 사람을 끌어다 붙였다·
“소생의 어미와 닮아서 그만·”
“예에?”
“조심하겠습니다·”
“힝!”
공주는 갑자기 홱 토라지더니 창문의 휘장을 거칠게 닫아버렸다·
그러자 안에서 공주를 조용히 나무라는 진왕비의 꿀물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공주 사람들에게 무례하게 굴면 안 된다고 어미가 말하지 않았더냐· 더구나 저분들은 우리를 도와주러 오신 분들이다·”
“죄송해요·”
다행이다· 진왕비는 이 일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공주는 왜 저러지? 내가 또 뭘 잘 못 했나?
하여튼 어린 계집애들은 까탈스럽기 이를 데 없다·
어느 순간 뜨뜻미지근한 시선이 느껴져서 돌아보니 마차의 건너편에서 가불염이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요?’
그때였다·
두두두두두!
길 앞쪽으로부터 지축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황급히 시선을 던져보니 집채만 한 황소떼가 이쪽을 향해 미친 듯이 질주해 오고 있었다·
숫자는 어림잡아도 사십여 마리· 말도 아니고 황소가 저렇게 달리는 법은 없다·
게다가 줄줄 흐르는 침까지 아무리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무얼 잘못 처먹고 미쳐 날뛰는 소들이다·
미친 소 사십 마리가 한꺼번에 나타난다고?
절대로 우연일 리가 없다· 자객들의 기습이 시작됐다·
한데 전생과는 장소가 크게 다르다· 황소도 예상에 없던 것이다·
천룡표국이라는 변수가 또 다른 변수를 만들어 냈다·
주변을 돌아보니 담벼락이 높게 솟은 골목으로 이미 진입한 상태라 피할 곳도 없었다·
진왕과 왕비와 공주들만 담벼락 위로 끌어 올려 황소를 피하면?
그건 오히려 세 사람을 적들에게 무방비 상태로 노출하는 짓이다·
죽으나 사나 골목 안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대방진(大防陣)을 펼쳐라!”
선두에서 연철산이 일갈을 내질렀다·
진왕의 사병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앞쪽에 있던 창병 스무 명이 대형을 좁히는 한편 사자 갈기 세우듯 장창을 일제히 쭉 뻗었다·
그다음엔 후미로부터 초승달처럼 휘어진 대월도(大月刀)를 든 도병 열 명이 날아와 진왕의 앞을 막아섰다·
마지막으로 가장 뒤쪽에 남은 열 명의 궁수가 활에 화살을 쟀다·
이 모든 것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졌다·
사병들이라 무시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칼 같은 움직임들을 보니 진왕가의 기강이 어떠한지를 알 것 같았다·
황자충도 표사들에게 명령했다·
“지금부터 황소든 사람이든 왕야가 계신 곳에서 십 장 이내로 들어오는 건 하나도 놓치지 말고 무조건 베어 버린다!”
“존명!”
그사이 연철산의 명령이 떨어졌다·
“발시!”
열 발의 화살이 뒤쪽으로부터 쏘아졌다·
화살은 단 한 발의 낭비도 없이 선두에서 달려오던 황소들의 등에 우수수 박혔다·
화살은 세 번을 더 쏘아졌고 그때마다 황소들의 등을 뚫었다·
그러나 미친 황소떼의 질주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정면에서 쏘니 목줄기의 급소를 뚫고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그 사이 거리는 삼십여 장으로 가까워졌다·
더는 화살에만 의존할 수 없게 됐다·
“창병 돌진!”
선두에 선 창병 스무 명이 질주해 오는 황소들을 향해 마주 달려나갔다·
일말의 주저함이나 두려움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푹! 푸푹! 푹!
퍽! 퍼퍽! 퍽퍽!
창이 황소의 가슴에 꽂히고 뿔이 갑옷 입은 창병들의 가슴을 들이받았다·
삽시간에 선두에서 달려오던 황소 십여 마리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고꾸라지고도 달려오던 힘 때문에 한참을 미끄러진 후에야 비로소 멈췄다·
창병 스무 명은 전부 뿔에 받혀 나가떨어지거나 뒤에서 달려오는 황소들에게 짓밟혔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그래도 갑옷과 투구 때문에 황소의 발굽이 인중을 밟아 찌그러뜨릴 정도로 아주 재수가 없지 않은 한 죽을 것 같지 않았다·
“도병 돌진!”
창병들에 이어 대월도를 든 도병 열 명이 질풍처럼 뛰쳐나갔다·
쩍! 쩍쩍! 쩍!
대가리와 목에 칼을 맞고 쓰러진 황소는 고작 다섯 마리에 불과했다·
반면 도병 열 명은 모조리 뿔에 받히거나 발굽에 깔려 나가떨어졌다·
공터였다면 황소 백 마리가 몰려와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좁은 골목이다 보니 성벽처럼 밀고 들어오는 황소떼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남은 황소는 이제 스물다섯 마리· 거리는 순식간에 이십여 장까지 좁혀졌다·
“왕야를 에워싸라!”
황자충이 일갈을 터뜨리고 달려가더니 말 안장으로부터 비호처럼 솟구쳤다·
체공 상태에서 이미 칼을 뽑아 하늘로 치켜든 그는 선두에서 달려오는 황소의 목 옆으로 떨어졌다·
쩍! 소리와 그 큰 황소의 머리가 뚝 떨어졌다·
황자충은 선 자리에서 질풍처럼 돌아서며 또 한 번 일도양단의 기세로 칼을 내리쳤다·
또 다른 황소 머리가 떨어졌다·
그사이 천룡표국의 표사 다섯 명은 둘로 나뉘었다·
세 명은 진왕을 말에서 끌어 내린 후 삼각형으로 에워싸고는 바깥을 향해 칼을 들고 섰다·
다른 두 명은 황자충과 함께 돌진해 오는 황소떼 속으로 뛰어들어 칼춤을 추었다·
연철산과 궁사들도 칼을 뽑아 들고 달려나가 황소들과 사투를 벌였다·
사정이 너무 다급했기에 나도 가불염도 앞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왼쪽 담벼락을 쓸며 달려오는 황소와 맞닥뜨렸다·
땅!
벼락처럼 칼을 휘둘러 보지만 애꿎은 뿔만 때리고 튕겨 나갔다·
“빌어먹을!”
성난 황소가 방향을 틀더니 나를 냅다 들이받았다·
찰나의 순간 본능적으로 뿔을 양손으로 덥석 잡았다·
뿔만 잡는다고 되나· 나는 황소의 정수리에 받쳐 그대로 넘어가 버렸다·
그 와중에도 이 괴수의 질주를 멈춰야 한다는 생각에 쇠뿔을 놓치지 않고 꺾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소대가리가 생각보다 쉽게 꺾였다·
쇠뿔은 땅바닥에 처박혔고 그 바람에 황소는 밀고 들어오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 그대로 공중으로 한 바퀴를 돌아버렸다·
바로 그 아래에 내가 아직도 뿔을 잡은 채 누워 있었다·
“어어!”
텅!
하늘에서 떨어지는 황소의 등에 깔려 본 사람이 있을까?
장담하건대 항주에서는 내가 최초일 것이다·
한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숨이 턱 막히고 오장육부가 무언가에 짓이겨지는 느낌이었다·
천만다행으로 내 상체는 소의 등과 머리통 사이의 부드러운 부분에 깔렸고 그 덕분에 산채로 으스러지는 것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칼 한 자루가 날아와 나를 덮친 황소의 목줄기를 꿰뚫었다·
피가 팍 터지며 얼굴과 가슴을 덮쳤다·
“공자님!”
멀리서 나를 부르는 가불염의 목소리가 들렸다·
칼을 던져 황소가 더는 나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숨통을 끊어 놓은 것도 가불염이었다·
“다른 황소는!”
일어날 사이도 없이 누운 채로 옆을 돌아보았다·
잠깐 사이에 십수 마리의 황소가 황자충을 비롯한 표사들의 칼에 맞아 쓰러져 뒹굴고 있었다·
제아무리 엄한 훈련을 받았어도 사병과 무림인의 차이가 이토록 큰 것이다·
그때 구릿빛의 시뻘건 황소 한 마리가 방어막을 뚫고 달려 나왔다·
이미 칼을 맞아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불구하고 황소는 마차를 향해 미친 듯이 질주했다·
한데 지금 마차 옆엔 아무도 없었다·
“왕비마마 공주마마 마차 밖으로 나오십시오!”
연철산이 혼전 중에도 일갈을 내질렀다·
“나오면 안 됩니다!”
나는 반대로 고함을 질렀다·
전생에서 자객들의 기습이 있었을 당시 사병들을 절반이나 쓰러뜨린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황소가 아니라 단 한 명의 궁사였다·
검은 복면을 쓴 자객 십여 명이 뛰어들어 난전을 벌이는 가운데 어디선가 비범한 실력을 지닌 궁사가 나타나 화살 한 대에 사병 한 명씩을 차곡차곡 쓰러뜨린 것이다·
지금은 복면의 자객들이 황소로 바뀌었다·
천룡표국의 표사들에게 자객 중 한 명이라도 사로잡혀 꼬리가 밟힐 것을 우려한 탓이다·
황소는 마차 안에 있는 진왕비와 공주를 밖으로 불러내기 위한 미끼였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 화살이 뚫지 못하는 철갑 마차를 끌고 왔다·
황소 뿔에 받히면 마차야 흔들리거나 뒤집히겠지만 그렇다고 안에 탄 사람이 죽지는 않는다·
그때 마차 문이 열리면서 공주가 먼저 상체를 반쯤 내밀었다·
“빌어먹을!”
극도의 긴장과 함께 이능력이 저절로 발동되었다·
나는 미칠듯한 집중력으로 사방의 허공을 훑었다·
예상이 맞았다· 저 멀리 서쪽으로 보이는 높다란 지붕 위에서 검은 인영이 활을 쏘는 자세로 서 있었다·
활이 출렁이는 게 느껴졌다· 화살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게 보이면 내 실력으로 이미 늦은 거다·
찰나의 순간 나도 모르게 지난 보름 동안 수천 번도 더 연습한 귀영무의 보법이 펼쳐졌다·
타닥 탁!
어디서 그런 힘과 움직임이 튀어나왔는지는 모른다·
나는 마차를 향해 질주해 오는 황소의 대가리를 발로 밟아 땅바닥에 처박은 후 그대로 도약하며 허공을 날았다·
저 멀리 지붕 위의 검은 인영과 마차 밖으로 상체를 내민 공주 사이의 일직선 상에 내가 놓이는 순간·
쒜애액!
귀청을 찢는 파공성과 함께 화살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사력을 다해 화살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잡아챘다·
하지만 잡히는 건 허공의 바람 한 줌뿐 화살은 내 왼쪽 가슴에 정확히 박혔다·
퍽!
“억!”
나는 화살을 가슴에 박은 채 나가 떨어졌다·
“자객이다!”
“서쪽 붉은 지붕 위다!”
“놈이 달아난다!”
마차의 뒤쪽으로 떨어진 나는 까무룩 해지는 의식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며 가슴을 더듬었다·
한데 옷에 작은 구멍만 났을 뿐 멀쩡했다·
‘용린신갑!’
죽지 않는다는 걸 아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바로 옆에 화살이 떨어져 있었다·
가슴에 박혔다고 생각한 건 순전히 내 착각이었다·
“공자님!”
가불염이 옆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내가 화살에 맞는 것을 봤으니 영락없이 사경을 헤맬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한데 눈동자를 반짝이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으십니까?”
순간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전낭 좀 줘보세요!”
“예?”
“시간 없어요· 빨리!”
가불염은 어리둥절해서 하면서도 품속에서 동전이 든 전낭을 꺼내주었다·
나는 전낭을 내 품속에 넣어 화살 구멍에 맞추고는 떨어진 화살을 오른손에 주워들었다·
“공자님 뭐 하시는····”
“쉿!”
용린신갑을 입은 줄 알면 약발이 떨어진다· 맨몸으로 아무 대책도 없이 부지불식간에 본능적으로 뛰어든 줄 알아야 한다·
나는 화살을 힘차게 찔러 넣었다· 화살은 동전 서너 개를 우습게 뚫고 들어가 박혀 버렸다·
“사공자!”
딱 맞춰 연철산과 궁수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그들은 내가 왼쪽 가슴에 박힌 화살을 잡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기겁을 했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 사이로 진왕과 왕비와 공주가 차례로 얼굴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렸다·
잠시 후 세 사람이 표사들의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나타났다·
왕비와 공주는 놀랐는지 손으로 입까지 가린 채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진왕이 내 옆에 무릎을 털썩 꿇어앉으며 말했다·
“손을 치워보라!”:
나는 그제야 가슴에 박힌 화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쑥 뽑았다·
그리고 다른 손을 품속에 넣어 화살에 꿰뚫린 전낭을 꺼내고는 조용히 읊조렸다·
“휴우 이거 아니었으면 죽을 뻔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