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무공을 배우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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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렸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옆으로 돌아보니 내가 사온 오향장육과 검남춘이 깨끗하게 비워진 후였다·
혁방세는 삐딱하게 누워 땅바닥에서 주운 나무꼬챙이로 이를 쑤시고 있었다·
“일어났느냐?”
“그렇게 갑자기 때리시면 어떡합니까!”
“세상에 어떤 적이 ‘자 때립니다· 하나 둘 셋·’하고 때린다더냐· 싸움의 첫 번째는 상대의 어깨선을 보는 것이다· 공격의 기미가 있다면 가장 먼저 어깨 근육부터 움직인다· 그걸 볼 눈이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혹시 무공을 가르쳐 주시는 겁니까?”
“술값으로 몇 수 적선하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나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가 스승을 모시는 의식인 구배지례부터 하려고 했다·
그러자 혁방세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집어치워라· 나는 제자를 거둘 생각이 없다· 네 놈이 누구에게 맞고 오거나 죽으면 내가 힘들게 찾아가서 복수를 해줘야 할 게 아니냐· 귀찮게 그런 짓을 왜 해·”
“예에?”
십초박같은 엄청난 무공을 전수해 주면서 사승 관계를 맺지 않겠다고?
이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세상에 그런 법은 없다·
사승의 관계란 내가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거절한다고 해서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혁방세에게 무슨 사연이 있음을 직감했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흘러갈 터 굳이 지금 당장 관계를 확정 지으려 할 필요는 없다·
“십초박은 강호인들이 붙여준 것이고 내가 익힌 권법의 본래 이름은 뇌격진천연환백팔타(雷擊震天連環百八打)라고 한다·”
“이름 한번 길군요·”
“다소 과장된 것 같으나 권법을 알고서 한글자 한글자 곱씹어 보면 절묘하기 짝이 없는 이름이다· 그러나 나는 십초박이라는 이름이 더 마음에 든다· 이 무공의 본질적인 특성을 가장 간단하게 말해주니까·”
“저도 깔끔한 것이 마음에 듭니다·”
“270년 전 십초박을 창안한 조사께서는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셨다· 이후 구(九) 대를 거쳐 나에게 이르기까지 두 명의 맹인 전승자들이 더 있었다·”
“···”
“눈이 보이지 않는 관계로 긴 공방을 주고받을 수 없었던 초대 조사께서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단번에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는 단 몇 개의 절초가 필요했다·”
“····”
“해서 한계로 잡은 게 최대 십초식이었다· 그 십초식은 천하의 수많은 무공들을 연구한 끝에 죽기 직전에서야 겨우 만들어졌다·”
“···”
“십초박은 선팔초(先八招)와 후이초(後二招)로 나뉜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선팔초’ 안에 승부를 봐야 한다· 나머지 ‘후이초’는 만약에 대비해 너의 몸을 빼기 위한 동작들이다·”
“···”
“그래서 모두 십초식이다· 만약 그때까지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면 상대가 너를 희롱하고 있는 것이니 이미 죽은 목숨이다·”
“전체 십초식으로 이루어졌다면서 어찌하여 본래의 이름엔 백팔타라는 말이 붙은 것입니까?”
“격투란 언제나 일대일로만 이루어질 수는 없는 법 극성으로 익히면 최소한 백팔 번의 타격을 가할 때까지는 벼락과 천둥의 위력을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멋집니다!”
“그럼 이제부터 너에게 십초박을 수련하기 전에 필수로 익혀야 하는 삼백쉰다섯 식의 진퇴로(進退路)에 대해 가르쳐 주겠다· 이른바 귀영무(鬼影舞) 라는 보법이다·”
“예에?”
“왜 그렇게 놀라느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했다· 십초박이라도 배우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보법도 가르쳐 주겠다고?
삼백쉰다섯 식의 진퇴로라는 말에 머릿속이 뻐근해지는 것 같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십초박이 단 십초식으로 이루어지고도 무림일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귀영무라는 신비롭고 오묘한 보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귀영무가 없으면 십초박도 없다·”
“···”
“굳이 귀영무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보법은 모든 무공의 시작이자 끝이다· 가장 처음 배우는 것이지만 가장 나중까지 배워야 하는 것 또한 보법이다·”
“···”
“장담컨대 네가 이 보법을 육성까지만 익히면 손발이 제아무리 개싸움을 하고 있더라도 일류고수 소리를 들을 것이다·”
마음을 굳게 먹자· 혁방세는 북방삼성에서 맨손 격투로는 적수가 없었다는 극강의 고수다·
이런 무시무시한 거물에게 무림절학을 배우면서 수월할 생각을 했다면 그거야말로 천하의 도둑놈 심보다·
그래도 한번 물어볼 수는 있지 않을까?
“꼭 보법부터 익혀야 합니까?”
“꼭 너 같은 놈들이 있지· 눈으로 보기 전에는 믿지 않고 바늘구멍보다 작은 제 식견으로 보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아는 어리석은 녀석들 말이다·”
아니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실 것까지는 아니고요·
혁방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허리를 묶은 새끼줄을 풀어 자신이 한쪽 끝을 잡고 다른 한쪽 끝을 내게 주며 말했다·
“지금부터 이 새끼줄의 끝을 잡은 상태에서 네 마음대로 뛰어다녀도 좋다· 다만 나는 너를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사지를 주물러 줄 것이다·”
“사지를 주물러 주신다는 말씀은?”
“설마 안마를 해주겠다는 뜻이겠느냐?”
순간 나는 아까 당한 내가중수법의 한 수가 생각나 머리끝이 쭈뼛 섰다·
아직도 뱃속이 얼얼하고 팔다리가 저릿저릿하다·
“시작한다!”
뻑!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왼쪽 어깨에 묵직한 충격이 전해져 왔다·
나는 비명을 속으로 삼키며 냅다 오른쪽으로 뛰었다·
혁방세는 마치 커다란 거울 속의 나처럼 똑같이 뛰며 한 손을 부지런히 뻗어왔다·
뻐버벅!
“한꺼번에 여러 대 때리기 있습니까?”
“적과 싸울 때도 그렇게 말할 것이냐?”
뻐버버벅!
나는 왼쪽으로 꺾어 달리고 오른쪽으로 꺾어 달리고 뒤로 눕고 앞으로 엎드리고 심지어 냅다 뒤돌아 달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혁방세의 주먹질은 단 한 호흡도 쉬지 않고 이어졌다·
뻐버버벅! 뻑!뻑! 뻐버버벅!
머리부터 시작해 어깨 가슴 겨드랑이 배 옆구리 허벅지 마지막엔 사타구니 안쪽에서까지 쉬지 않고 소리가 들렸다·
그때마다 찌릿찌릿한 충격과 고통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만약 수련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쯤 온몸의 뼈가 가루로 변했을 것이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더는 참지 못하고 새끼줄을 땅바닥에 홱 집어 던졌다·
동시에 뒤통수에서는 마지막 불이 번쩍했다·
뻐억!
나는 쓰러질 것처럼 잠시 비틀거리다가 가까스로 중심을 잡았다·
약이 올라 미쳐버릴 것 같았다·
“새끼줄이 없어도 감당 못 할 지경인데 이렇게 짧은 새끼줄을 잡고 있으면 천하의 누가 선배님의 공격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건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이번엔 네가 공격해 보거라·”
“그거야말로 기만이지요· 아무리 새끼줄을 서로 잡고 놓지 않는다고는 하나 무공이라고는 일초반식도 모르는 제가 언감생심 선배님을 때릴 수나 있겠습니까?”
“때리지 않아도 좋다· 그냥 닿기만 해라·”
“그냥 닿기만 하라고요?”
그러면서 혁방세는 움막으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시퍼렇게 날 선 식칼 한 자루를 손에 들고 나왔다·
깜짝 놀란 나는 세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다·
“이걸로 날 찌르든 베든 썰든 네 마음대로 하거라· 나는 일체의 반격을 하지 않겠다· 시간도 얼마든지 주마· 네가 만약 내 옷자락이나 머리카락 한올이라도 자른다면····”
“장법(掌法)도 가르쳐 주십시오!”
“뭐?”
“주먹과 손바닥이 둘이 아니듯 권법과 장법 또한 둘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제가 만약 선배님의 옷자락이든 머리카락이든 조금이라도 자른다면 장법도 가르쳐 주십시오·”
“이거 인생을 아주 날로 먹을 놈일세·”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만약 못 하면?”
“매일 검남춘 한 병씩 갖다 바치겠습니다·”
“좋다·”
됐다· 잘만하면 권법과 보법에 이어 장법도 익힐 수 있게 됐다·
꿩 먹고 알 먹고 마당 쓸고 돈 줍고 세상에 이런 횡재가·
혁방세가 제아무리 극강의 고수라고 해도 고작 석 자도 안 되는 새끼줄을 서로 붙잡은 상태에서 온종일 피해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나는 맨손도 아니고 시퍼런 식칼을 들고 있다·
이리저리 피하다가 우연히 스치기만 해도 옷자락 정도는 충분히 잘려나갈 것이다·
나는 오히려 칼로 그를 상하게 하지나 않을까 염려되었다·
‘내게 이능력이 있음을 모르시니·’
한 번만 딱 한 번만 건드리면 된다·
“준비되셨습니까?”
“말이 많구나·”
“그럼 시작합니다!”
휙!
나는 일단 목부터 찔러갔다· 초장부터 과감한 위협으로 상대를 위축시키기 위해서였다·
다음엔 목을 옆으로 쓱 베고 가슴을 사선으로 사정없이 그었으며 배를 찌르고 옆구리를 베고 허벅지를 쭉쭉 그어 올렸다·
휙! 휙휙! 휙휙휙!
나는 칼질을 뚝 그쳤다·
생각대로 됐으면 혁방세는 지금쯤 온몸이 난자당한 채 피를 철철··· 흘리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당황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한데 그는 내게서 딱 세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새끼줄 끝을 잡은 채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아 아닙니다·”
뭔가 쎄 하다·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거 만만하게 생각했다가 손에 다 들어온 장법을 놓칠 수도 있겠다·
“기합 좀 넣어도 됩니까?”
“좋을 대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마음대로 하라니까·”
“죽엇!”
나는 다시 질풍처럼 식칼을 휘둘렀다· 왼쪽 손에 쥔 새끼줄을 힘껏 잡아당기는 한편 눈알을 쑤시고 얼굴을 베고 입을 찔렀다·
휙! 휙휙휙!
얼굴을 한차례 조진 다음에는 가슴과 배를 집중적으로 난도질했다·
휙휙! 휙휙휙!
다음에는 양손 새끼줄을 쥔 손과 다른 손을 번갈아 가며 썰고 쑤시고 그어댔다·
휙휙! 휙휙휙!
혁방세는 허리를 굽히지도 않고 뛰거나 엎드리지도 않았다·
오직 나아가고 물러나고 좌우로 꺾어 도는 보법만으로 내가 휘두른 식칼을 전부 피했다·
출렁거리며 그의 몸을 따라다니는 옷자락도 머리카락도 나를 희롱하며 식칼을 피하고 타고 넘나들었다·
처음 주먹에 얻어맞을 때와 달리 혁방세의 움직임이 훤히 보였다·
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 칼을 찌르면 그 자리에 없었다·
찌르는 것과 달리 베고 긋는 것은 살상의 반경이 훨씬 넓은데도 불구하고 마찬가지였다·
어디를 어떻게 찌르고 베고 그어도 혁방세는 딱 칼끝의 한 치밖에 항상 서 있었다·
‘이건 그냥 귀신이다!’
나는 그제야 귀영무가 얼마나 절묘한 이름인지를 깨달았다·
귀신만으로도 쫓기 어려운데 귀신의 그림자가 추는 춤이니 얼마나 허깨비 같겠나·
나는 보법의 위대함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리고 이 신비로운 무공을 익히고 싶다는 욕망이 물처럼 끓어 올랐다·
그렇다고 약이 안 오르는 건 아니다·
“에잇!”
쨍그랑!
식칼을 맞은 쇠솥이 죽겠다고 울어댔다·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멍하니 혁방세를 바라보았다·
환생을 한 이후 처음으로 내기에서 졌다· 킥킥거리며 사타구니를 긁고 있는 혁방세가 무슨 괴물처럼 보였다·
“제가 졌습니다· 헉헉·”
“이제 보법의 무서움을 알겠느냐?”
“후배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죽으라고 익히겠습니다· 존경합니다· 선배님· 헉헉·”
이 말만큼은 한점의 거짓도 없이 진심이었다· 약이 올라 얼굴이 시뻘게지기는 했지만 지금 혁방세의 신비막측한 모습은 훗날 나의 모습이다·
“온몸의 근육이 뭉쳐있는 것으로 미루어 따로 기본공을 수련하는 것 같던데·”
수련을 핑계 삼아 실컷 두들겨 팬 줄 알았더니 그새 몸 상태도 살핀 모양이다·
십중팔구 곽석산이 그랬던 것처럼 기운을 쏘아 보내 단전도 탈탈 털어 보았을 것이다·
나는 살짝 감동했다·
“숙부님께서 매일 쉬지 않고 애장산 절벽을 오르라고 시키셨습니다· 해서 부지런히 오르내리는 중입니다·”
“숙부라면”
“총표두를 맡고 계신 곽석산이라고 합니다·”
“형산도객(衡山刀客)을 말하는 모양이군·”
“저희 숙부님을 아십니까?”
“항주에 그의 이름이 진동하는데 어찌 듣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귀머거리라면 또 몰라도·”
곽석산의 별호를 다른 사람 그것도 최고 수준의 무인인 혁방세에게 들으니 느낌이 새로웠다·
“나이가 적지 않은데 왜 이제 와서 무공을 배우려는 것이냐?”
“목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목표?”
“예전에는 신기루처럼 허상에 불과했는데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꿈으로만 꾸다 가기에는 너무 억울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공할지는 모르지만요·”
“실패하더라도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무언가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멋진 삶이 아니더냐·”
“···?”
말을 하는 혁방세의 옆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때마침 지기 시작한 노을이 그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네 숙부의 가르침이 참으로 훌륭하다· 뜻을 거르지 말고 부지런히 기본공을 수련하거라· 그리고 나에 대해서는 일절 발설하지 말아라· 만약 이를 지키지 않으면 나를 다시 보지 못할 것이니라·”
“명심하겠습니다·”
“오늘은 이만하자꾸나· 매일 검남춘 한 병씩 갖다 바치는 것을 잊지 않도록· 만약 사정이 있어 오지 못할 때는 내가 사 먹을 테니 미리 돈으로 주고·”
“혹시 모르니 지금 미리····”
말을 하면서 품속을 뒤지는데 전낭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한순간 머릿속이 노래졌다·
“그럴 줄 알고 내가 한 달 치 미리 가져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