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무공을 배우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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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무진경의 칠십이(七十二) 구결을 완벽하게 외우고 운기행공법까지 익히는 데는 열흘 정도 걸렸다·
이제부터는 오롯이 혼자만의 외로운 싸움을 해야 한다·
아침저녁으로 운기행공을 통해 공력을 하단전에 쌓아야 하는 것이다·
동굴 속에서 화조신옹은 천년진기를 백년공력으로 바꾸어 천하십대고수의 말석을 차지하기까지 20년은 걸릴 거라고 했다·
무(無)에서 시작했다면 100년이 걸렸을 일을 20년 만에 끝내 버리니 실로 어마어마한 속도다·
물론 20년을 꽉 채우지 않고서도 어느 순간이 되면 이미 충분한 고수로 살 수 있을 것이다·
“눈 좋은 고수가 다섯이면 발 좋은 고수는 셋이고 칼 좋은 고수는 둘밖에 되지 않는다· 서둘러 칼부터 잡을 생각 말고 부지런히 공력을 쌓아 눈을 밝히거라·”
천무진경을 배우던 중 곽석산이 해준 말이었다·
눈이 가장 중요하고 신법과 보법이 그 다음이며 칼은 제일 나중이라는 뜻이다·
눈은 공력과 직결되어 있다· 공력 높은 사람이 더 빠르게 보고 더 멀리 보며 더 밝게 본다·
한데 사실 나는 이미 절정고수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백 장 밖에서 나는 새의 암수를 구별하거나 캄캄한 동굴 안에서도 대낮처럼 돌아다니지는 못한다·
대신 시간을 느리게 만드는 이능력을 통해 상대의 그 어떤 동작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상대를 압도하려면 손발을 지금보다 더 빠르고 오묘하게 만들어 줄 무공을 익혀야 했다·
천룡표국에도 가문비전의 무공은 얼마든지 있었다·
무림일절인 검법을 비롯해 권법 장법 각법 지법 암기술 등등·
하나같이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하지 않은 무공들이었다·
그러나 천룡표국의 무공들은 오랜 시간을 두고 기초부터 차근차근 익혀야 비로소 대성할 수 있는 정통의 무공들이었다·
나는 그런 우아하고 고차원적인 무공보다는 내일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실전 무공이 필요했다·
그리고 기왕이면 병장기공보다 사람을 최대한 덜 상하게 하는 권장지공을 먼저 배우고 싶었다·
그리고 딱 맞는 무공을 가르쳐 줄 은둔고수를 한 명 알고 있었다·
때때때땡그랑!
깨진 솥단지에 동전 열 냥이 떨어졌다· 월성교 다리 밑에서 늘어지게 자고 있던 늙은 거지가 움찔 놀라며 눈을 떴다·
일어나서 걸을 수나 있을까 싶을만큼 깡마르고 초췌한 노인이었다·
“뉘시오?”
“접니다·”
“접니다가 누구요?”
“저 모르시겠습니까? 최근 월성교를 지나갈 때마다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적선을 했었는데· 한 달쯤 전에는 표행을 떠나기 직전 액땜한다면서 은전 한 냥도 솥단지에 넣고 갔고요·”
“···?”
“이러면 약발이 떨어지는데· 단골손님도 기억 못 하고· 그냥 다른 걸인으로 확 바꿔 버릴까?”
“아아!”
“이제 아시겠어요?”
“한데 여긴 어쩐 일이시오?”
“다리 위로 갔더니 안 보이셔서요·”
“날씨가 추워서 하루 쉬었소·”
“부지런히 모아서 겨울날 준비하셔야죠· 더 추워지면 사람들도 밖으로 잘 안 나올 텐데 어쩌시려고요?”
“거지가 동냥을 하고 싶으면 하고 안 하고 싶으면 안 하는 거지·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하려면 왜 거지를 하겠소?”
“그것도 그렇네요·”
“한데 무슨 일로 오셨소?”
“저녁은 하셨습니까?”
“저녁이라고요?”
“무얼 좋아하실지 몰라 백선반점에서 오향장육이랑 검남춘을 한 병 사 왔습니다·”
“지금 나와 여기서 저녁을 먹겠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왜?“
”먹는 거 앞에 놓고 걸인이 무슨 계산을 하십니까? 일단은 먹고 보는 거지· 보아하니 아침부터 쫄쫄 굶으신 모양이고만· 싫으면 다른 걸인으로 알아보고요·“
“젊은 공자님 말씀이 옳소·”
노인은 벌떡 일어나서 젓가락을 잡았다· 그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제일 큰 고기 한 점을 집어 입에 넣으려는 찰나·
“권법 좀 가르쳐 주십시오·”
“···!”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북해투왕(北海鬪王) 혁방세· 맨손 격투에 관한 한 북방 삼성에서 적수를 찾아볼 수 없는 무적의 고수· 어느 날 곤륜파의 제자를 죽임 이후 곤륜파의 고수들에게 쫓겨 천하를 유랑하다 항주까지···헛!”
무언가 번쩍하더니 가슴에 묵직한 충격이 전해졌다·
이능력을 발동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흡사 번개가 관통하고 지나간 것 같은 고통에 나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노인은 손은 여전히 젓가락을 들었고 다른 손은 사타구니 사이에서 나오지 않았다·
하면 무엇이 내 가슴을 때린 걸까?
그리고 맞았으면 충격으로 나가떨어져야 하는데 왜 잠깐 흔들리기만 할 뿐 사지가 마비되면서 짜르르한 고통이 번지는 걸까?
“네놈은 누구냐?”
노인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고 금방이라도 오줌을 지릴 것처럼 무서운 목소리였다·
“이 이정룡입니다· 천룡표국의 표사이고요·”
“표왕에게 이정룡이라는 아들이 있다던데· 허구한 날 기루와 도박판을 전전하며 돈을 빼앗긴다는 호구· 설마 네가 그놈은 아니겠지?”
“지금은 회시 장원급제자로 더 유명할 겁니다·”
“그건 처음 듣는 얘긴걸·”
“더 노력하겠습니다·”
“네놈이 정말 표왕의 아들이라고?”
“그것보다 대체 지금 저한테 어떻게 하신 겁니까? 온몸의 뼈마디가 벌어지고 오장육부가 가닥가닥 끊어지는 것 같습니다·”
잠깐 사이에 고통은 더 다양해지고 강해졌다·
마음 같아선 드러누워 발버둥이라도 치고 싶은데 몸이 무슨 통나무처럼 앉은 채로 뻣뻣하게 굳어버려 그조차도 할 수 없었다·
“내 정체는 어떻게 알았느냐?”
지금으로부터 5년 후 당신은 항주 유흥가를 주름잡는 흑도방파 한 곳을 홀로 쳐들어가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몇년 동안 매일 한 냥씩 적선하고 지나가던 기녀를 죽였다는 이유로요·
워낙 큰 사건이어서 항주가 발칵 뒤집혔고 그제서야 당신의 정체가 무림인들 사이에서 크게 회자 됩니다·
천하십대 권사(拳士) 중 한 명인 북해투왕이 항주에 은둔해 있었다고요·
“제 품속을 뒤져 보십시오·”
품속으로 쑥 들어왔다가 나간 노인의 손에는 돌돌 말린 종이가 들려있었다·
종이를 펼쳐본 노인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얼마 전에 북경을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 낯선 복장의 도사들이 바로 그 용모파기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을 찾더군요· 딱 봐도 선배님을 빼다 박았지 않습니까? 아래에 적혀 있는 특징도 영락없고요·”
“그래서?”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아서 개방도들을 수소문해 물었더니 은전을 무려 한 냥이나 받고 방금 제가 말씀드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용모파기를 보고 내 정체를 알아차렸다고?”
“외람되지만 만에 하나라도 하며 한번 찔러 본 것입니다· 저도 지금 놀라서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 북해투왕 선배님이셨다니····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노인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다시 한번 용모파기를 살폈다·
아무리 살펴봐야 기절초풍할 정도로 자기를 닮았을 수밖에 없다·
화공을 불러다 이 노인을 보여주고 그리게 한 것이니까· 아래에 적혀 있는 특징들은 내가 직접 적어 넣은 것이고·
“진짜 죽일 생각이 아니시라면 저 좀 어떻게 해주십시오· 뱃속에서 칼이 돌아다니는 것 같습니다· 흑흑·”
나는 더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정말 미치도록 고통스러웠다·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이란 것이다·”
“그게 뭡니까?”
“간단히 말해 외부를 쳐서 내부를 진탕 시키는 수법이지·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심장이 터지거나 오장육부가 찢어져 죽게 만들 수도 있다·”
“꿀꺽!”
“잠깐 스치기만 했을 뿐인데 집으로 돌아간 후 밤에 자다가 급사하게 만들 수도 있고· 이런 건 내가중수법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공부로 달리 암경(暗勁)이라고도 하지·”
“그럼 저 죽는 겁니까?”
“엄살 부리지 마라· 하루 이틀 고생하다가 괜찮아질 것이다· 물론 지금 내가 너를 죽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권법 좀 가르쳐 주십시오·”
“내 말을 못 들었느냐? 나는 널 죽일 수도 있다· 아니 네놈이 내 정체를 알아차린 이상 죽여 입을 봉해야 한다· 한데 무슨 권법 타령이란 말이냐·”
“그렇게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분이 아니라는 것 잘 압니다· 곤륜파의 제자를 죽이기 전에는 협객으로 명성이 높았고· 곤륜파의 고수들을 피해 천하를 유랑하시는 것도 그들을 또 다시 죽이기 싫어서가 아니었습니까?”
“···!”
“부탁입니다· 권법 좀 가르쳐 주십시오·”
“네 아버지인 표왕은 나 못지않은 고수다· 그의 검법은 무림 일절인 데다 유려하기까지 하지· 집안에 기름기 좔좔 흐르는 쌀밥을 놔두고 왜 내게 와서 거친 보리밥을 내놓으라는 것이냐?”
“그런 우아하기만 한 무공보다 내일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실전무공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선배님의 무공이 그런 조건에 딱 들어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째서?”
“듣기로 선배님께서는 평생 수천 번을 싸웠지만 십초식 안에 모두 끝장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강호인들이 붙여준 권법의 이름도 십초박(十招搏)이고요· 십초식 정도면 최소한 다른 권법보다 빨리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무식한 놈을 봤나· 그리 쉽게 배울 수 있는 십초식이라면 어찌하여 평생을 걸려 익혔겠으며 난다긴다하는 절정고수들이 어떻게 내 손 아래에서 쓰러져갔겠느냐? 일천초 보다 변화가 더 무궁무진한 십초식이니라·”
“무궁무진한 변화는 차차 깨달아 가기로 하고 지금 당장은 뼈대가 되는 십초식만이라도 좀 가르쳐 주십시오·”
“백번 양보해서 네놈 말이 맞다고 치자· 대체 내가 왜 평생 걸려서 익힌 독문무공을 너에게 가르쳐 줘야 한단 말이더냐?”
“선배님께서도 무공의 맥을 끊어지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언젠가 후학을 두어 무맥을 이어가실 생각이라면 저는 어떻습니까?”
“어처구니없는 놈이로고·”
“한번 시험이라도 해보십··· 헛!”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인의 주먹이 날아왔다·
이번엔 초긴장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이능력이 발동되었고 동시에 주먹을 볼 수 있었다·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화조신옹을 상대할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건 궤적이고 뭐고 없었다· 그냥 번쩍하더니 가슴에서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무직한 충격이 전해져왔다·
이번에도 흡사 번개가 몸을 관통한 것 같았다· 그리고 여진처럼 이어지는 짜르르 한 고통·
“진짜 너무하시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까무러쳐 버렸다·
“무슨 이런 괴물 같은 놈이!”
혁방세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기름진 근골이나 어설픈 동작으로 미루어 보면 분명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은 똥몸이다
한데 내가중수법의 일격을 맞고도 제 할 말을 따박따박 다 한다·
난다긴다하는 절정고수들조차 눈물 콧물을 쏟아내며 살려달라고 애원했었는데 말이다·
더욱 놀라운 건 두 번째 일격을 가할 때는 놈이 심지어 눈을 감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눈을 감았다는 건 곧 자신의 주먹이 날아오는 걸 보았다는 말이 된다·
그는 평생 수많은 무림인들과 싸우고 쓰러뜨렸다·
한데 그들 중 자신의 주먹을 똑바로 본 고수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주먹이 그들의 눈보다 더 빨랐으니까·
한데 무공이라곤 일초반식도 모르고 좁쌀만 한 공력도 없는 놈이 자신의 주먹을 보고 눈을 감았다·
후일 이놈이 단전에 공력을 쌓고 무공까지 익히면 얼마나 대성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항주에 이런 무재가 있었다고?’
혁방세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놈이 가져온 검남춘을 집어다 쭈욱 들이켰다·
그리고 입을 벌린 채 나동그라져 있는 놈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제자를 여기서 줍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