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운철검을 손에 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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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저놈이 내게 맞선 거 맞지?”
“그렇게 보였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말없이 서 있던 오십 줄의 장년인이 말했다·
장대한 체구에 험상궂은 인상의 그는 총표두 곽석산이었다·
“허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더니·”
“예전의 정룡을 생각하면 큰 변화입니다·”
“고작 한 번 반항한 걸로 무슨 큰 변화씩이나· 달달 떨고 있는 두 다리를 못 봐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겐가?”
솔직히 말하면 곽석산도 이정룡이 마루에 오줌을 지릴 줄 알고 조마조마했다· 한데 마지막 순간에 그렇게 빠져나갈 줄이야·
“아까운 운철검만 빼앗겼군·”
“아들에게 갔으니 아주 잃은 것은 아니지요·”
“그거야 놈이 잘 간수했을 때 얘기고· 노름방에서 돈 대신 잡혔다가 물건의 진짜 가치를 알아본 자들에게 빼앗기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회수를··· 할까요?”
“훔치기라도 하려고?”
“물건이 물건이다 보니·”
“그냥 놔둬· 빼앗기면 제 놈 복이 그것 뿐인게지·”
천만의 말씀이다· 운철검이 어떤 물건인데 표왕이 쉽게 포기할까·
만약 누군가 빼앗아 가더라도 세상 끝까지 찾아가 도로 빼앗아 올 위인이다· 천룡표국의 정보력을 이용하면 일도 아니었다·
“한데 내가 지난 20년 동안 놈에게 아무것도 준 게 없다는 말이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한 번도?”
“그렇습니다·”
“단호하군·”
“사실이니까요·”
“다른 아이들에게는?”
“수시로 좋은 말과 보검을 하사하셨지요·”
“그건 놈이 허구한 날 기루와 도박장을 들락거리며 재물을 탕진했기 때문이야· 그동안 제 형들은 땀 흘려 일하며 돈을 벌었어· 상벌이 분명해야 가풍이 바로 서는 법· 벌을 주지 않은 것만으로도 크게 봐 준 것임을 알아야지·”
표왕의 목소리가 살짝 격앙되었다· 그럴수록 곽석산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열 손가락 길이가 어찌 다 똑같을 수 있겠습니까? 저마다 길고 짧은 차이가 나는 것은 제각각의 쓰임새가 있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어째 자네마저 나를 힐난하는 것처럼 들릴까?”
“정룡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힘이 되어주는 외가가 없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 잠시 무공을 가르쳐 준 정으로 속하가 이럴 때 한입 보태어 주는 것이니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힐난하는 게 맞군·”
“정룡에게도 기회를 한번 줘 보시지요· 이를테면 표국일들 중 사소한 것들을 맡겨본다거나 하는 것 말입니다·”
“표국일에 사소한 것이 있었던가?”
돌연 표왕의 눈동자에 사나운 불꽃이 일었다· 자네마저 나를 힐난하냐고 따질 때에도 보이지 않았던 모습· 곽석산은 얼른 두 손을 맞잡고 고개 숙였다·
“속하가 실언을 했습니다·”
그제야 표왕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사라졌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네· 그러나 남이 쥐여주는 기회는 기회가 아니야· 간절한 욕심이 일어 스스로 움켜쥐어야 비로소 진짜 내 것이 되는 게지·”
“명심하겠습니다·”
“총표두가 그렇게까지 나오니 기회는 아니지만 가르침을 하나 내려 볼꺼나? 전당에 일러 앞으로 일 년 동안은 놈에게 단 한 냥도 내어주지 말라고 이르게· 제 놈이 그동안 누구 덕에 호의호식하며 살았는지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도록 말이야·”
지금까지 이정룡이 수없이 눈 밖에 나는 짓을 했어도 돈줄을 끊은 적은 없다·
오히려 화수분이 따로 없을 만큼 철저하게 방치했었다·
얼핏 벌을 주는 것 같지만 이건 시험이다· 손발을 묶은 다음 그 반응을 지켜보려는 시험· 그래서 이건 기회다·
표왕은 못난 행동만 일삼던 넷째 아들에게서 무언가 변화의 기운을 읽은 것이 틀림없다·
“명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수향문(水鄕門)에서 다시 매파를 보내왔습니다· 약혼이라도 해두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입니다· 병룡이와 청양 부인께서도 진작 마음을 정하신 것 같고 이제는 정식으로 답을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수향문은 이병룡과 딸을 혼인시켜주고 싶다며 매파를 보내온 바로 그 문제의 문파다· 그 후 이정룡이 서호에 몸을 던지는 바람에 잠시 이야기가 미루어졌었다·
“수향문주가 몸이 달았군·”
“수향문 정도면 그리 나쁜 혼처는 아닙니다· 문주는 인품이 고매하여 흠모하는 무림인들이 많고 여식 또한 현숙한 데다 용모까지 빼어나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인품이 고매한 것은 돈이 되지 않으며 흠모하는 무림인들이 많은 것은 돈 나갈 일이 많다는 뜻이지· 그리고 처의 미모는 크게 해로운 법일세·”
재력이 있고 나서야 가문도 있다는 것이 평소 표왕의 지론이기는 했다·
그래서 천룡표국은 부(富)와 무(武) 중에서 항상 부에 비중을 두고 성장해 왔다·
하지만 지금의 대답은 어딘지 모르게 궁색하게 느껴졌다·
천룡표국의 재산이 얼마인데 찾아오는 무림인들에게 돈 쓰는 것을 아까워할까·
“혹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 때문에 그러십니까?”
“천하인들이 태산을 말하지만 태산은 조금도 닳는 법이 없네· 사람들이 뭐라고 지껄이든 내가 신경이나 쓸 것 같은가?”
“하면·······”
“묶어 놓는다고 다 부부가 되나· 당장 급한 일도 아니니 좀 더 지켜보자고 답신을 보내게·”
“수향문주는 거절을 당했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날더러 그 늙은이의 눈치라도 보라고?”
“최대한 예를 갖춰 답신을 보내겠습니다·”
곽석산은 사사롭게는 의형제까지 맺으며 30년 넘게 표왕을 보필했다·
이제는 눈빛만 보고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표왕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전부 다른 어머니를 두었지만 사공자 이정룡의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정식으로 맞이한 부인들이었다·
각자 다른 어머니 힘 있는 외가들 엄청난 표국의 재산·······
세 명의 형제들은 처음부터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
운명대로 삼형제 모두 언젠가 치러야 할 전쟁을 위해 열심히 입지를 다져가고 있었다·
첫째와 둘째는 벌써부터 표국 내에서 자신들을 주군으로 여기는 세력도 만들었다·
셋째는 무림의 친구들을 사귀는 데 많은 힘을 쏟았다· 언젠가 그가 비상하려 할 때 무림의 친구들은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한데 넷째는 기루와 도박장을 전전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여자 때문에 목숨까지 끊으려 했다·
그것도 형과 혼담이 오가는 여자 때문에· 이러니 아비로서 어찌 화가 나지 않겠는가·
그러나 단지 화가 나기만 한다면 아비라 할 수 있을까? 부모란 그런 것이 아니다·
‘어찌 다친 손가락을 다시 깨물랴·’
***
“아까부터 왜 자꾸 왔다 갔다 하십니까? 신발은 또 왜 그렇게 쳐다보시는 거고요· 똥이라도 묻었습니까?”
장삼이 마당을 쓸다 말고 내게 물었다·
왜 여기까지 와서 하인 노릇을 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풍채가 좋은 그는 생긴 것과 달리 천성이 순하고 정이 많았다·
“신발이 아니라 다리를 보는 거야·”
“다리는 왜요?”
“나 걷는 거 이상하지 않아?”
“어떻게 말입니까?
“한쪽으로 기우뚱거리지 않냐는 거지·”
“평소와 똑같습니다·”
“평소와?”
“평소처럼 거만해 보입니다·”
“그렇군· 평소와 같군· 흐흐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실실 흘러나온다· 무려 52년을 절룩거리며 걸었다·
그 불편함과 따가운 시선과 서러움을 보통 사람들은 절대로 알 수가 없다·
빗자루를 든 채 나를 게슴츠레 바라보는 장삼의 이마 위에 ‘저 인간이 미쳤나?’라고 떠 오른 글씨가 보이는 듯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났고 꽃다운 젊음에 멀쩡한 두 다리도 가졌으니 나는 이제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오늘이 며칠이냐?”
“시월 열이틀 날입니다·”
“가을 날씨답게 청명하군·”
“날씨도 풍광도 년 중 가장 좋을 때죠·”
“한 바퀴 할까?”
“또 도박장에 가시려고요?”
장삼이 가자미눈을 떴다· 이정룡이 이 자식이 어떻게 살았는지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는 대답이었다·
이런 인식들을 하나씩 바꾸어 갈 일이 까마득했다·
“그러지 말고 당분간은 외출을 삼가시죠· 며칠 전 일도 있으려니와 이제는 돈 나올 곳도 없잖습니까?”
“무슨 말이야?”
“조금 전 전당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앞으로 사공자님께는 표국내 식당에서 하루 세끼 공짜로 제공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지원도 없애라는 국주님의 엄명이 계셨답니다·”
천룡표국 사람들은 표왕의 직계 혈족을 일컬어 용혈(龍血)이라 불렀다·
대표적으로 갑·을·병·정의 천간 순서를 따서 이름 지은 이갑룡 이을룡 이병룡 이정룡의 네 아들이 있었다·
전당은 이들 용혈이 입고 먹고 쓰는 등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경제적 지원을 해주고 관리하는 곳이었다·
한데 그걸 표왕이 막아버린 것이다·
“노인네가 생각보다 쪼잔한 데가 있군·”
“이제 어떻게 사실 겁니까?”
“왜 전당의 지원이 끊어졌다고 굶어 죽기라도 할까 봐?”
“공자님의 미래에 관해 말씀드리는 겁니다· 주제넘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실 순 없지 않겠습니까?”
“염려 마· 곧 표국 일을 시작할거야·”
“진심입니까?”
“네 말대로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순 없잖아·”
장삼이 반색하더니 빗자루까지 내팽개치고는 후다닥 달려왔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시려고요?”
“표사·”
“예에?”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천룡표국의 표사가 되려면 아무리 하급표사라고 해도 무공이 최소 이류급은 되어야 하는데 공자님은 무공을 전혀 모르시지 않습니까?”
“내가 그 정도냐?”
“솔직히 말씀드려도 됩니까?”
“해봐·”
“저도 공자님과 싸워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
“···!”
“···!”
“휴우 누굴 탓하겠니· 수련을 게을리 한 내가 등신이지· 아무튼 천룡표국의 표사라고 전부 무공을 익혀야 하는 건 아냐· 예외도 있어·”
“혹시 사공자라는 신분을 이용해 한자리 꿰찰 생각입니까? 국주님께서 절대 허락하지 않으실걸요·”
“허락하실 걸· 오랜 관례니까· 거인 표사라고 들어 봤어?”
거인(擧人)이란 향시에 합격한 유생들을 일컫는 말이다· 오래전부터 천룡표국은 가난한 유생들을 후원한다는 명목하에 거인들을 고용하고 표사의 직급을 주었다·
이들은 무공을 몰랐기에 실제로 표행에 동참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신 짬짬이 장궤(회계) 일을 돕거나 까막눈의 쟁자수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등의 소일을 하면서 글공부에 매진했다·
그러다 훗날 운 좋게도 상급시험인 회시에 합격하여 지방 수령으로 발령이 나기라도 한다면 항상 관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표국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든든한 뒷배가 생기는 것이다·
“설마··· 향시를 볼 생각입니까?”
“당연하지·”
“언제요?”
“시월 열이틀 날·”
“오늘이잖아요·”
“냉큼 채비해· 다른 유생들보다 좋은 자리를 잡으려면 오전 중에 도착해야 하니까· 그 전에 잠시 들를 곳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