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 종장(3) >
장원 곳곳에서 온갖 봄꽃 향기가 진동하는 밤이었다·
표왕부에서는 이종산을 필두로 총표두와 대장궤는 물론 칠당의 당주들 전부가 참석하는 장로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언제나 그렇듯이 손지백의 현황보고를 겸한 안건상정으로 시작되었다·
한데 오늘은 작년의 상황들을 먼저 총체적으로 보고하느라 내용이 좀 길었다·
정리를 하자면 작년에 비룡당주가 세운 개봉 분타와 의빈분타 그리고 강룡당주가 세운 백양분타와 복룡당주가 세운 남평분타로 말미암아 천룡표국은 이제 대륙 전역에 스물한 곳의 분타를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내가 강호를 돌아다니며 온갖 위험한 표행들을 하는 동안 이갑룡과 이을룡도 탱자탱자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들도 나름대로 치열하게 자신들의 역할을 했다· 호광성 남쪽의 백양분타와 복건성 북쪽의 남평분타가 그 결과였다·
다만 두 곳 모두 외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세웠다며 이런저런 뒷말이 좀 들리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표국의 세를 확장하는 일이라는 게 어차피 인맥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보니 그 노력마저 깎아내릴 건 아니었다·
당장 나부터도 도화곡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었더라면 사천성 의빈에 분타를 세울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분타를 세우기는커녕 마교에 납치당했다가 가까스로 구출되기나 했던 이병룡은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그러나 가장 괄목할만한 건 역시 장강에 일곱 척의 대형 범선을 띄운 일일 것입니다· 지난 반년 동안의 실적을 보면 범선 한 척이 능히 분타 하나와 맞먹는 운송량과 수입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천룡표국은 동서 물류운송의 획기적인 전환을 맞았으며 명실공히 천하삼대표국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천룡표국 앞에는 두 가지의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표왕 이종산이 국주로 있는 곳이라는 말과 절강성 제일의 표국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사실 절강성은 대륙을 통틀어 가장 작은 성(省)에 불과했다·
대륙의 한 가운데 있는 호광성은 절강성보다 무려 네 배나 컸고 가까운 남직예성도 두 배 이상 컸다·
다만 절강성은 경향대운하의 출발지이자 강남북 교류의 주요 거점인 항주를 품었다는 것이 큰 축복이었다·
그런 절강성을 대표하던 천룡표국이 천하삼대표국의 반열에까지 올랐다는 말에 너나 할 것 없이 잠시 숙연해졌다·
“하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지금도 몰려드는 의뢰와 가을철 미곡운송에 대비하려면 표사와 쟁자수들을 대폭으로 늘려야 합니다·”
“어느 정도나 늘려야 할 것 같습니까?”
손지백의 긴 설명에 이은 이종산의 첫 번째 질문이었다·
사람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손지백의 입을 바라보았다·
표사와 쟁자수들의 증원은 진작부터 모두가 공감하고 또 요청을 해오던 바였다·
이에 이종산의 특명을 받은 곽석산과 손지백이 밤마다 각 당의 장계들을 불러다 열심히 주판을 튕겼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오랜 시간 검토한 결과 일차로 표사 삼백 명과 쟁자수 오백 명을 더 증원해야 한다는 게 저와 총표두의 판단입니다·”
조용한 가운데 모두가 당혹스러운 표정들을 지었다·
평소의 증원과 다를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이 정도로 많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작년에 한차례 제법 큰 규모로 증원을 했던 터라 더욱 그랬다·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손지백의 말이 괜한 구호가 아니었다·
“이 정도 숫자를 기존의 일곱 개 당이 감당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여 새로운 당을 하나 더 만들자는 게 오늘의 가장 중요한 안건입니다·”
이병룡과 내가 이끌고 있던 두 개의 각이 당으로 승격을 한 게 불과 작년이었다·
한데 또 하나의 당을 더 만들면 팔당이 된다·
그 말은 곧 지금처럼 표왕부에서 수시로 열리는 장로회의에 또 한 명의 새로운 인물이 참석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또한 주도권을 놓고 벌이는 당주들 간의 특히 사형제 간의 치열한 경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부쩍 심화된 인적자원의 편중으로 말미암아 새 당주는 기존의 당주들이 거느리고 있는 표두나 각주들 중에서 선발될 수밖에 없다·
각 당의 당주들은 자기 휘하에 있던 표두나 각주를 여덟 번째 당의 당주로 밀기 위해 치열한 눈치 싸움을 벌일 것이다·
“적당한 인물이 있으면 추천들 해보세요·”
이종산이 사람들을 쓰윽 훑어보며 말했다·
예상했던 대로 모두가 서로의 눈치만 볼뿐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이종산이 웃으며 말했다·
“눈치 보지들 말고 편안하게 말씀해 보세요·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할 것도 아니거니와 어차피 후보들의 면면은 상관들이 가장 잘 알지 않겠습니까?”
“국주님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염치 불고하고 제가 먼저 휘하에 데리고 있는 일각주를 천거해 보겠습니다·”
“황룡당의 일각주라면 옥수검(玉手劍) 소광정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무공도 출중하거니와 지도력과 포용력 또한 뛰어납니다· 무엇보다 천룡표국을 향한 충성심이 남다르지요·”
“옥수검의 실력과 충정이야 두말할 것도 없지요· 서른 살 무렵 표사로 들어와 지금에 이르기까지 저도 이십 년을 지켜보았습니다·”
이종산의 후한 평가에 곽석산과 손지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옥수검은 나도 잘 아는 인물로 이종산의 말처럼 충분히 훌륭한 각주이자 표두였다·
황자충을 시작으로 양진각 유지평 이갑룡 이을룡 이병룡이 차례로 각자의 수하들 중 가장 빼어나다 싶은 인물들을 추천했다·
한 명 한 명의 이름과 천거하는 이유가 당주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올 때마다 이종산과 곽석산과 손지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다·
“너는 누구를 천거하겠느냐?”
내 차례가 되어도 말을 않자 이종산이 먼저 물어왔다·
나는 잠시 사람들을 둘러 본 후 천천히 말했다·
“실력과 충성심 모두 출중하여 어떤 분을 당주로 모셔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구태여 한 명을 고르자면··· 복룡당의 장량기 표두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누구를 당주로 임명하느냐 하는 문제를 판별함에 있어서 나만큼 정확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방금 여섯 당주들이 말한 표두들의 미래를 전부 알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군가는 천룡표국을 위해 큰일을 하고 누군가는 표행 중 목숨을 잃으며 누군가는 배신을 하고 떠난다·
장량기는 전자였다·
하지만 그런 얘기들을 일일이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놀란 표정들을 지었다·
내가 비룡당의 인물이 아닌 가장 앙숙 관계에 있는 이을룡 휘하의 표두를 추천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연유로 이을룡이 누구보다 어리둥절해 했다·
이종산이 다시 물었다·
“어찌하여?”
“저는 첫 번째 표행을 장량기 표두와 함께 했습니다· 그때 화조신옹의 갑작스러운 출현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죽을 위기에 처했었죠· 위기의 순간 그가 보여준 침착한 지도력과 표행을 책임진 표두로서 마지막까지 표물을 포기하지 않으려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 인물이라면 새로운 당을 충분히 잘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네가 데리고 있는 인물을 천거할 줄 알았더니만· 사실은 총표두께서도 비룡당의 가불염 표두를 천거하셨느니라·”
모두가 눈동자를 빛냈다· 가불염은 수년 전 곽석산이 외부에서 데려온 표두였다·
천룡표국에 뿌리내린 세월도 짧거니와 나이 또한 너무나 젊었다·
복룡당의 장량기도 마흔 초반으로 다른 당주들이 추천한 표두들에 비해 훨씬 젊었는데 가불염은 그런 장량기 보다도 열 살이나 젊었다·
그러나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내가 외부의 단발성 표행들을 하고 다니는 동안 가불염이 사실상 비룡당을 이끌었는데 그때 그가 보여준 실력이 워낙 출중했기 때문이다·
특히 공물운송과 장강의 범선을 통한 운송이라는 두 개의 엄청난 물동량이 갑자기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비룡당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내 그 모든 것들을 전부 소화하는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오죽하면 곽석산이 다른 표국에서 일하는 그를 설득해 데려왔겠나·
“그는 다른 자리에 추천하고 싶습니다·”
“어떤 자리를 말하느냐?”
“비룡당의 새로운 당주입니다·”
고요하던 장내에 한줄기 태풍이 몰아쳤다·
이종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곽석산과 손지백을 비롯한 육당의 당주들까지 전부 굳은 표정이 되어 나를 보았다·
나는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종산을 향해 한차례 포권지례를 한 후 오랫동안 준비해온 말을 꺼냈다·
“천룡표국을 떠나 독립을 할까 합니다· 대부분의 표사와 쟁자수들이 동참을 약속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로한 부모님들 때문에 천룡표국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표사와 쟁자수들이 백여 명 정도 됩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난데없이 이병룡이 갑자기 내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이종산의 면전이라 최대한 자제했지만 목소리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나는 무시하고 조용히 하던 말을 이어갔다·
“가불염 표두는 처음부터 저와 함께 비룡당을 만들고 키운 사람입니다· 비룡당의 일과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지요· 부디 그에게 비룡당을 맡겨 남은 사람들을 잘 돌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갑자기 왜 이러는 거냐!”
이병룡이 다시 한번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놀라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여서 모두가 두 눈이 빠질 것처럼 튀어 나왔다·
특히 나를 경쟁자로 여기며 치열하게 싸움을 걸어 온 이갑룡 을룡 병룡은 날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표행들을 성공적으로 이끌며 비룡당을 천룡표국 제일의 당으로 키워냈다·
네 명 형제들 중 이종산의 뒤를 이어 유일하게 사대명표 중 한 명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유력한 외가가 없는 대신 무림맹과 남궁세가의 강력한 지지도 얻었다·
그 바람에 천룡표국의 표사와 쟁자수들은 물론이거니와 강호의 모든 사람들조차 장차 내가 천룡표국을 물려받게 될 거라고 했다·
한데 탄탄대로를 눈앞에 두고 갑자기 독립을 선언했으니 다들 놀라 나자빠질밖에·
그러나 누구보다 놀란 사람들은 이종산과 곽석산과 손지백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종산의 얼굴은 뭐라 설명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놀란 가운데에도 한줄기 담담해 하는 빛이 엿보였다·
아무래도 비룡당에서 도는 소문을 듣고 어느 정도 짐작을 했던 것 같다·
열흘쯤 전 나는 전립성과 가불염과 용소백과 삼각의 각주들을 모아 놓고 천룡표국을 떠나 독립을 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예상했던 대로 발칵 뒤집혔다·
절대 안 된다며 나를 설득하는 그들을 나 역시도 밤새 설득했다·
그리고 새벽이 되어 정 그렇다면 자신들도 주변을 정리한 후 함께 가겠다는 가불염과 용소백을 설득하느라 또 몇 날 며칠을 보냈다·
가불염에게는 비룡당의 남은 표사들을 지켜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말로 설득했고· 용소백에게는 조부 때부터 천룡표국을 지켜온 터줏대감이시니 여기서 생을 마쳐 달라는 말로 설득했다·
어딘가를 가서 새로운 출발을 하기에 용소백은 나이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며칠 전부터는 삼각의 각주들을 통해 표사와 쟁자수들에게 나와 함께 갈 것인지 천룡표국에 남을 것인지를 묻도록 했다·
절대 비밀로 하라고는 했지만 질문의 내용이 워낙 충격적이다 보니 완벽하게 지켜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천룡표국엔 훌륭한 인재와 좋은 표사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제가 아니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반면 제가 있어도 딱히 더 나아질 것이 없습니다·”
“너 머리가 어떻게 된 거냐?”
당황한 와중에도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게 보이는 이갑룡이나 이을룡과 달리 이병룡은 머릿속의 생각을 여과없이 그대로 내뱉었다·
그는 나의 독립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환생을 했을 당시에는 나를 가장 괴롭혔던 인간이 지금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의 부재를 애석하게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 왠지 마음이 뿌듯했다·
특히 이 몸의 원래 주인인 진짜 이정룡에게 무언가 빚을 조금은 갚은 기분이었다·
나는 이갑룡 이을룡 이병룡이 앉아 있는 왼쪽과 황자충 양진각 유지평이 앉아 있는 오른쪽을 향해 번갈아 허리를 숙이며 포권지례를 올렸다·
“천룡표국에 남아있을 표사와 쟁자수들을 잘 부탁드립니다· 비록 당은 다를지언정 위기의 순간엔 모두가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동료들임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집어치워! 사람 약을 바짝 올려놓고 그냥 가버리면 어쩌자는 거냐? 때가 되면 우리 네 형제들 중 세 명은 어차피 천룡표국을 떠나야 한다· 그러니 남아서 마지막까지 자웅을 겨루고 가라· 너와 실력으로 멋지게 한번 붙고 싶단 말이다!”
더는 참지 못한 이병룡이 자리에서까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그러자 바로 옆에 앉아 있던 이을룡이 그를 조용히 나무랐다·
“자중해라!”
“왜요? 눈엣가시 같은 녀석이 독립한다니까 옳다구나 싶습니까?”
“이병룡!”
이갑룡이 짧고 긁은 목소리로 이병룡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큰형답게 낮지만 묵직한 목소리로 나무랐다·
“지금은 국주님과 여러 선배 당주들을 모시고 장로회의를 하고 있는 중이다· 정룡이도 비룡당주로서 보고를 올리는 것이고· 우리끼리 자리를 만들 테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때 실컷 해라·”
지극히 옳으면서 합당한 말이었다·
이병룡은 사람들을 슬쩍 보더니 더는 대꾸를 못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콧김을 펑펑 뿜어댔다·
나는 마지막으로 이병룡을 한번 골려 주고 싶은 마음에 기름을 확 부어 보았다·
“셋째 형님은 다 나쁜데 특히 일단 저지르고 보는 그 성질머리가 제일 나쁩니다· 그러니 마교 놈들에게 납치나 당하지요· 큰 형님과 둘째 형님을 꺾고 천룡표국을 물려받으시려면 그 버릇 꼭 고치십시오·”
“저 자식이 근데!”
“오늘 장로회의는 이것으로 끝내도록 하지·”
마지막 말은 이종산의 입에서 나직하게 흘러나온 것이었다·
축객령이었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는 그때 이종산이 나를 붙잡았다·
“비룡당주는 남으라·”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시비가 다가와 다기들을 가져가고 대신 술을 내왔다·
술 한 병이 다 비어가도록 이종산은 말이 없었다· 격정으로 끓어오르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조용히 때가 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이종산의 입이 다시 열렸다·
“접어라·”
“안됩니다·”
“아비가 명령하는데도?”
“제 인생입니다·”
“왜 떠나려고 하는지 알고 있다· 천룡표국은 모두를 위해 가장 강하고 유능한 사람이 이끌어야 하고 골육상쟁은 우리 가문 남자들의 숙명이다· 너도 그만 받아들여라·”
“싫습니다·”
“못난 놈!”
이종산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도 지지 않고 이종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차피 이 싸움은 내가 이길 수밖에 없다·
다만 나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종산의 마음을 확실하게 꺾어 놓아야 한다·
그래야 그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한참이 지나자 이종산의 눈빛이 다시 부드러워졌다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였다는 걸·
다만 먼 길을 가려는 아들의 각오가 얼마나 단단한지를 확인하고 싶었을 뿐·
“갈 곳은 정했더냐?”
“장안으로 갈 생각입니다·”
장안은 서안(西安)의 옛 지명으로 대륙의 중앙을 가로질러 항주와 정확히 반대쪽에 위치한 천년고도였다·
항주가 강남의 풍부한 물자를 강북으로 운송하는 주요 거점이라면 장안은 서역으로 이어지는 고대 무역로의 출발지이자 종착지로 이국의 온갖 물건들이 중원으로 들어오는 거점이었다·
항주의 물동량과 비교하면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거의 막상막하라는 게 세간의 평가였다·
그러나 고대의 무역로가 점점 확장되고 대상(大商)들이 많아지면서 유례가 없는 전성기를 맞는 중이었다·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천룡표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삼대표국 중 하나가 바로 장안에 뿌리내린 북성표국이었다·
“쉽지 않을 것이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언제쯤 떠날 생각이더냐?”
“가불염 표두가 비룡당을 맡게 되면 따로 인수인계할 필요가 없으니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습니다·”
“설마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작정 짐을 꾸리겠다는 건 아닐테지?”
“오래전부터 준비를 해왔습니다· 장안의 적당한 장소에 이미 장원도 마련해 두었고요· 보름쯤 전에 완공을 코앞에 두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장원까지 지었다고?”
“전각들은 아직 몇 개 되지 않지만 대신 장원부지가 매우 넓습니다· 작게 시작해 크게 키우겠습니다·”
“대체 누가 그 많은 것들을 준비해 주었더냐?”
“비룡전장의 장주입니다·”
“마총의 보물을 처리한 돈이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만 그리로 들어가서 엉뚱한 일을 꾸미고 있었군·”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항주부를 통한 공물운송은 그렇다고 쳐도 장강의 범선들은 어떻게 할 것이냐? 그것들이야말로 연중 쉬지 않고 돈이 쏟아져 나오는 화수분인 것을·”
“그래서 말씀인데 앞으로 십 년 동안 장강의 범선들이 벌어들일 돈의 절반을 제가 미리 챙겨가면 어떻겠습니까?”
“계산이 아주 철저하구나·”
“신뢰와 친애가 지속되려면 부자간에도 계산이 정확해야 한다는 상계의 격언이 있습니다·”
“나는 처음 들어 보는데?”
“앞으로 유명해질 겁니다·”
나의 농담에 이종산도 피식 웃고 말았다·
“장강의 범선들은 오롯이 네가 만들고 띄운 너의 작품이다· 아비는 그 배들이 천룡표국의 깃발을 달고 운행하는 것만으로 족하다· 원하는 대로 해주마·”
“감사합니다·”
“한데 소소는 어떻게 할 생각이더냐? 너도 남궁세가주께서 너를 손녀 사윗감으로 진작에 점찍어 두었음을 모르지 않겠지? 만약 그분을 실망시키면 너와 우리 집안엔 재앙이 되실 것이다·”
“며느릿감으로는 어떠신지요?”
“사람들은 천하의 누가 남궁유룡의 손녀를 며느리로 거절하겠느냐고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남궁유룡이라는 이름을 앞세우지 않아도 소소는 이미 너의 배필로 과분하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일 내로 예물을 준비해 남궁세가에 정식으로 매파를 보내마· 그 전에 소소에게 청혼을 하려면 하거라·”
“매파를 보내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요?”
“이런 답답한 녀석이 대체 어디가 좋다고 정을 준 건지 원·”
“···?”
“내일 당장 다선초당으로 가서 소소에게 청혼부터 하거라· 네가 하는 양을 보면 거절당할지도 모르니 매파는 결과를 본 연후에 보내야겠구나·”
“혹시 좋은 방법이라도 있을까요?”
“요령에 기대지 말고 진심을 보여 주거라· 여자나이 스물다섯이면 반쯤은 요괴라서 사람 속을 훤히 꿰뚫어 보는 법이니라·”
“알겠습니다·”
“그만 가보거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만히 포권지례를 올리고 돌아섰다·
아마 장로회의에 참석하는 일도 표왕부를 찾는 일도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다·
몇 걸음을 옮겨 문을 나서려는 순간 등 뒤로부터 이종산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나의 자부심이었다·”
“돌아보지 말고 나가거라·”
나는 그가 바라는 대로 돌아서지 않았다·
대신 걸음을 마저 옮기기 전에 나도 항상 마음에 품고 있던 말을 했다·
“저는 다만 매 순간 아버지를 조금이라도 더 닮고자 노력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