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화· < 종장(2) >
온 세상이 캄캄한 새벽 나는 호리독사와 함께 서쌍교방으로 가고 있었다·
한참 연설 중에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호리독사는 아직까지 입이 근지러운지 쉴 새 없이 혀를 놀렸다·
“···그래서 도둑질에도 도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 담장을 넘는 것은 용(勇)이고 물러날 때 동료들을 먼저 보낸 후 마지막까지 남아 망을 살피는 건 의(義)입니다· 훔친 물건의 좋고 나쁨을 판별하는 것은 지(知)이며 그 물건을 공평하게 나누어 갖는 것은 인(仁)입니다· 이렇게 용의지인의 네 가지 도를 갖추지 못하면 큰 도둑이 될 수 없지요· 그런데 훔치시려는 게 뭐라고요?”
“사람이오·”
“그건 납치 아닙니까?”
그때쯤엔 서쌍교방의 장원 앞에 도착했다·
나는 달빛을 피해 호리독사와 함께 높다란 담장의 그늘로 숨어들며 말했다·
“납치든 절도든 들고나는 동안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되오· 만에 하나 들키더라도 정체가 발각되어선 더더욱 안 되고·”
품속에서 얼굴을 통째로 가려주는 복면 두 개를 꺼내 하나를 호리독사에게 내밀었다·
호리독사가 복면을 받아든 후 다시 물었다·
“이제 어디로 모실까요?”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있소?”
“서쌍교방의 장원 아닙니까?”
“혹시 여기도 털었소?”
“아닙니다·”
“그런데 어디가 어딘 줄 어떻게 알고 날 데려다 주겠다는 거요?”
“흑도방파들의 장원 구조는 다 거기서 거깁니다· 담장 위에 올라가 한번 쓰윽 훑어보면 어디에 뭐가 있는지 대충 감이 옵니다·”
“그럼 일단 반역자를 잡아 가둬둘만 곳으로 갑시다·”
“따라오시죠·”
복면을 얼굴에 뒤집어쓴 호리독사는 담장에 두 손을 착 붙이는가 싶더니 그대로 그림자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어디가 어딘 줄도 모르고 무작정 호리독사의 꽁무니만 따라갔다·
밤새 칼부림이 벌어졌음을 증명하듯 장원 곳곳엔 핏자국과 함께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사람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전투의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다들 휴식을 취하거나 치료를 받는 중일 것이다·
반역자들을 진압했으니 더는 엄격하게 경계를 설 필요도 없었고·
덕분에 우리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도 빠른 시간 안에 제법 깊숙한 곳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창고 비슷한 건물이 저만치 바라다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입구는 커다란 자물통으로 잠겨 있었는데 험상궂은 인상의 칼잡이 두 명이 횃불을 밝힌 채 지키는 중이었다·
“저깁니다·”
“확실하오?”
“아니면 또 다른 데를 찾아봐 드리겠습니다·”
“그럴거면 내게 어디로 모실까냐고 물은 의미가 없잖소·”
“그래도 전체적인 방향성은 알아야 하니까요·”
맞는 말 같기도 하고 틀린 말 같기도 하다·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기감을 잔뜩 끌어 올렸다·
건물 안에서는 대충 십여 명의 사람이 감지되었다·
건물의 규모가 작지 않더라니 아무래도 반역에 가담했다가 죽지 않고 살아남은 수괴급 고수들을 관리하게 좋게 한곳에 모아둔 것 같았다·
물론 호리독사가 제대로 찍었다면 말이다·
‘들어가 보면 알겠지·’
소맷자락에 꽂아둔 비격쌍뇌창을 천천히 뽑아 손가락으로 휙 튕겼다·
공력이 실린 지법에 선천오법술의 염동력이 더해지면서 두 개의 바늘은 정확히 칼잡이들의 마혈을 뚫고 들어가 박혔다·
두 사람은 비명을 지를 사이도 없이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어서는 앞으로 서서히 넘어갔다·
그때쯤엔 나와 호리독사가 쏜살처럼 튀어 나가 쓰러지기 직전의 두 사람을 한 명씩 맡아서 붙잡았다·
두 명을 바닥에 눕혀 놓고 황급히 품속을 뒤졌지만 자물쇠가 나오질 않았다·
혹시나 해서 바지 안쪽으로도 손을 넣고 휘저어 보았는데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잠깐만 비켜 보십시오·”
내가 물러서자 호리독사가 어른 주먹만한 자물통을 한 손으로 딱 잡더니 자신의 귓뒤에서 작은 쇠꼬챙이를 꺼내어 푹 쑤셨다·
그리고 두어 번 깔짝대자 철컥하면서 그 커다란 자물통이 열렸다·
“들어 가시죠·”
호리독사는 마치 제 집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쓰러진 두 사람의 멱살을 양손에 하나씩 잡고는 재빨리 안으로 끌고 들어가며 말했다·
“밖에서 망을 보고 있으시오·”
“알겠습니다·”
창고 안을 둘러보는 순간 나는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서호삼견을 비롯한 십여 명이 인당 하나씩 모두 열 개의 쇠기둥과 연결된 쇠사슬에 손발을 묶인 채 앉아 있었다·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하나같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서호삼견의 상태가 심각했다·
머리카락은 풀어 헤쳐져 산발이 따로 없고 얼마나 얻어 맞았는지 얼굴 전체가 퉁퉁 부어 있었다·
갑자기 복면인이 나타나자 모두가 놀란 눈을 치켜뜨고 나를 보았다·
삼견이 경계심 가득한 음성으로 말했다·
“누구냐?”
퍽! 퍼퍼퍼퍼퍽!
나는 서호삼견을 제외한 일곱 명의 마혈을 번개처럼 짚었다·
마혈 중에서도 정신을 잃게 만드는 혼혈(昏穴)이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복면을 벗으며 말했다·
“접니다·”
나를 알아본 서호삼견의 얼굴이 급격하게 밝아졌다·
특히 이견과 삼견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 와중에도 일견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며 물었다·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구해드리러 왔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된 줄은 어떻게 알고?”
“어젯밤 선배님들께서 거사를 도모했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있어야죠· 밤새 보고를 받으며 돌아가는 상황을 예의주시하다가 실패했다는 소릴 듣고 호리독사와 함께 부리나케 달려오는 길입니다·”
세 사람은 촉촉하게 젖은 눈을 한 채 입술을 오물거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 모양이었다·
“자네가 구하러 올 줄은 생각지도 못 했네·”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요· 몰랐으면 모를까 알았다면 당연히 와야죠·”
“고맙네·”
“천만에요·”
“한데 나머지 사람들은 왜 기절을 시킨 건가?”
“제가 누군지 알아차리면 곤란하니까요·”
“우리만 구해주겠다고?”
“모두 구해드릴 순 없습니다· 그리고 서쌍교방의 사정에 정통한 사람을 통해 알아봤더니 선배님들 세 분만 처형하고 나머지는 곤장질로 때울 거라고 하더군요· 동호교방(東湖蘇常)과의 전쟁 앞두고 한 명이 아쉬운 판국이라면서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대화를 하는 중에도 나는 세 사람의 쇠사슬을 살폈다·
역시나 앞서 입구에서와 똑같은 자물통이 채여 있었다·
볼 것도 없이 다시 문을 열어 호리독사를 불러들였다·
호리독사가 쇠꼬챙이로 열심히 자물통을 쑤셔댔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아까와 달리 금방 열리지가 않았다·
“이게 왜 이러지?”
“왜 그러시오?”
“쇠꼬챙이가 안들어갑니다··”
지켜 보고 있던 삼견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걸로는 어림도 없네·”
“왜요?”
“다른 사람들은 그냥 놔두고 하필 우리 세 사람에게만 자물통을 채운 후 자물쇠 구멍에다 쇳물을 끓여서 부어 넣었거든·”
“아니 왜요?”
“만에 하나 일어날지 모르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겠지· 둘째 형님이 그쪽 방면으로도 조예가 좀 있으시다네· 하필이면 그게 오늘 발 목을 잡을 줄이야·”
“그래서 이게 지금 내 탓이란 말이냐?”
이견이 삼견을 노려보며 말했다·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나의 그 재주 때문에 다 같이 사로잡혀 죽을 뻔했다가 무사히 탈출한 게 한두 번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지·”
“딱 두 번이었습니다·”
“세 번 아니고?”
“두 번이었습니다·”
“세 번 같은데?”
“두 번 맞습니다·”
“다투지들 마십시오· 제가 누굽니까? 조금 번거롭지만 운철검으로 쇠사슬들을 잘라버리면 금방 해결될 겁니다· 잠깐만요·”
그러면서 나는 얼른 품속을 뒤져 운철검을 찾았다·
한데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운철검이 없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삼견이 물었다·
“왜 그러나?”
“집에 두고 온 것 같습니다·”
“이런!”
“망할!”
서호삼견의 낯빛이 동시에 노래졌다·
운철검이 없어도 지금 내 수준의 공력이라면 이 정도 굵기의 쇠사슬은 반 각 안에 죄다 끊을 수 있다·
다만 쇠사슬이 터지면서 나는 소리가 크고 너무 대놓고 진신무공을 드러내는 게 걸리긴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쩔 수 없었다·
일견의 쇠사슬부터 추려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밖에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황급히 문 쪽으로 달려가 나무 판자 틈으로 바깥을 살폈다·
저만치에서 도검으로 중무장한 오십여 명의 흑도들이 횃불을 대낮처럼 밝힌 채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작업도 하기 전에 저것들이 벌써 나타나면 안 되는데·’
이상한 낌새를 느낀 삼견이 다시 물었다·
“또 왜 그러나?”
“아무래도 포위를 당한 것 같습니다·”
“자네들이 올 줄 어떻게 알고?”
“그게 아니라 보초를 서던 자들이 보이지 않으니까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죄다 몰려온 것 같습니다·”
그때쯤에는 호리독사도 곁으로 다가와 다른 판자 틈으로 바깥을 살피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말했다·
“그게 아닌 것 같은데요·”
“그게 아니면?”
“저기 망나니처럼 생긴 자가 들고 있는 톱날 달린 칼이 보이십니까?”
“거치도(鋸齒刀) 말이오?”
“흑도들이 배신자의 목을 칠 때 주로 쓰는 칼입니다· 저걸로 목을 치면 상처가 지저분해지면서 출혈이 많고 죽은 후에도 처참한 모습이 되거든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요?”
“아무래도 처형식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
“동이 트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왜!”
“지금부터 처형장으로 끌고 가서 무릎을 꿇려 놓고 본보기로 삼으려는 거죠·”
잠시 판자 틈에서 눈을 떼고 뒤를 돌아보니 서호삼견의 얼굴이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노래져 있었다·
잠깐 사이에 황달이라도 온 것 같았다·
서쌍교방의 방도들은 어느새 십여 장 앞까지 도착했다·
보초병이 없어진 걸 뒤늦게 알아차리고는 어떻게 된 거냐며 호들갑을 뜨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저런 고성들이 오고 가길 잠시 누군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장원을 봉쇄하고 뇌옥을 포위하라!”
삑삑 소리와 함께 호각이 울리면서 서쌍교방의 새벽을 깨웠다·
혹시라도 뇌옥을 탈출했을 경우를 대비해 전 방도들을 깨우는 것이다·
오십여 명은 시퍼런 도검을 뽑아 들고선 부챗살처럼 검진을 펼치며 뇌옥의 입구를 막아섰다·
“어떻게 하죠?”
호리독사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일견을 돌아보며 서둘러 말했다·
“정면으로 부딪쳤다간 저의 정체를 발각당할 수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럼 천룡표국의 입장이 매우 곤란해집니다·”
일견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견과 삼견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삼견이 불쑥 물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일단 여길 빠져나간 후 다른 방법을 강구해보겠습니다· 힘드시더라도 그때까지만 참고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다 동이라도 트면?”
“최대한 시간을 끌어주십시오·”
“확실히 오는 거지?”
“알았네·”
삼견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려는 찰나 일견이 중간에서 가로챘다·
말로 하는 약속은 공허하다는 걸 인생의 경험으로 아는 것이다·
나는 일견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문 앞에 섰다·
문을 박차고 나간 다음 걸리는 대로 몇 명 때려눕힌 후 검진을 뚫을 생각이었다·
누군가 나나 호리독사의 무공을 알아보는 것이 두렵지 저들을 뚫고 나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내 생각을 눈치챈 호리독사가 말했다·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뭐요?”
“잠시 천장의 대들보 위에 숨어 기다리는 겁니다· 그리고 선발대가 들이닥치는 순간 모든 시선이 뇌옥 안쪽에 쏠리는 틈을 타 재빨리
통풍구로 빠져나가는 거죠· 그런 다음엔 잠행술을 펼쳐 지붕 위로 사라지고요· 일단 지붕까지만 가면 도주는 쉽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호리독사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나는 호리독사를 따라 굵은 대들보 위로 올라갔다·
이어 은신술을 펼쳐 최대한 몸을 감추었다·
잠시 후 호리독사의 말대로 문이 벌컥 열리면서 십여 명의 칼잡이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틈을 타 나와 호리독사는 대들보를 타고 통풍구 쪽으로 빠르게 기어갔다·
그 순간 이견이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정룡 진짜 가려고?”
“···!”
“···!”
나도 호리독사도 중간에서 뚝 멈췄다·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보니 십여 명의 흑도들이 이견을 따라 전부 위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뭐 이정룡?”
“천룡표국의 이정룡?”
“이정룡이 나타났다고?”
“어디에? 어디에?”
“저기 대들보 위에 있다!”
밖에 있던 다른 흑도들까지 우르르 들어와서는 역시나 뻣뻣하게 굳어있는 나와 호리독사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름을 말해버렸으니 이대로 도망을 칠 수가 없었다·
갈 때 가더라도 일단 해명은 하고 가야 천룡표국에 피해가 가지 않는다·
“하하하· 이것 참 난감하게 됐군· 평소 안면이 있는 서호삼절 선배님들께서 처형을 당할 거라는 소식을 듣고 작별인사나 하러 왔더니만·”
그러면서 나는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흑도들이 도검을 꼬나 쥔 채로 죄다 한두 걸음씩 물러났다·
신분이 신분인 만큼 함부로 나를 공격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뒤늦게 떨어진 호리독사와 함께 복면을 쓰윽 벗었다·
주변의 공기가 크게 출렁였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는 가운데 한 사람이 다섯 칼잡이들의 호위를 받으며 뇌옥 안으로 들어섰다·
반백의 머리카락에 눈매가 칼끝처럼 날카롭게 뻗은 노인이었다·
‘귀도무정(鬼刀無情)!’
예순 가량의 노인은 서쌍교방의 방주인 귀도무정 방철산이었다·
이십여 년 전 홀연히 항주에 나타나 귀신 대가리가 조각된 칼 한 자루로 서호의 서쪽을 평정한 도법의 달인·
옆에 있는 다섯 명의 장년인들은 방철산의 심복들로 서호삼견과 지금은 보이지 않는 두 명을 더해 서쌍교방의 십대고수라고 불렸다·
나는 방철산을 향해 허리까지 깊숙이 숙여가며 할 수 있는 가장 공손한 태도로 포권지례를 올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천룡표국에서 비룡당을 이끌고 있는 이정룡입니다·”
“방철산이오·”
“말씀을 편하게 하십시오· 무림의 까마득한 후배입니다·”
“무림에 명성이 자자한 표왕의 아들에게 그럴 수야 있나· 그 보다 이 시각에 귀하를 왜 여기서 만날 수 있는지나 알아듣게 설명해주겠소?”
“야심한 시각에 허락도 없이 서쌍교방을 방문하게 된 점 깊이 사죄드립니다· 저는 다만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남의 장원에 허락도 없이 들어오는 걸 보통은 침입이라고 하지· 그리고 서쌍교방은 침입자들에게 자비를 베푼 적이 없소이다·”
“서호삼절 선배님들께서 몇 차례 비룡당의 객표로 고용되었던 건 방주님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당주로서 잠깐 작별인사나 나누려고 들린다는 것이 그만·”
“거짓말 마라! 조금 전까지 분명 우리를 구해주러 온 거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다가 안 되자 호리독사를 시켜 쇠꼬챙이로 자물통도 쑤셔보게 했고·”
이견이 눈치도 없이 또 끼어들었다·
아니 눈치가 오히려 너무 빨라서라고 해야 하나?
그는 물귀신처럼 나를 끌고 들어가려고 했다·
“오는 게 아니었는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은 알겠습니다만 이렇게 사람을 모함하시면 곤란합니다· 선배님들·”
“웃기지 마라! 네 말대로 고작 인사만 하고 갈 요량이었다면 저 사람들은 왜 마혈을 짚어 쓰러뜨렸느냐? 네가 다녀갔다고 방주가 천룡표국으로 찾아가 복수라도 할까 봐?”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참다못한 내가 빽 소리를 질렀다·
“지금 가면 너는 우리를 구해주고 싶어도 구해줄 수가 없을 것이다· 천룡표국의 표사들을 전부 이끌고 와서 서쌍교방과 전쟁이라도 벌일 게 아니라면·”
“···!”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말하고 더는 구차하게 굴지 않겠다· 풍운비룡 이정룡 지난날의 정리를 생각해서라도 우리를 모른 척 하지 말아다오·”
“이미 손발을 다 묶어놓고 저더러 뭘 어쩌라고요?”
“우리가 너를 한두 번 겪어보았느냐?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너라면 분명히 묘수가 있을 것이다· 분명히·”
이견과 내가 기 싸움을 하듯 서로를 뚫어지게 보았다·
잠시 쥐죽은 듯한 침묵이 흐른 후 내가 말했다·
“구해드리면 제게는 무얼 해주실 건데요?”
일견과 삼견의 눈이 동그래졌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호리독사와 방철산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흑도들도 모두 놀란 표정이 되었다·
이견이 다시 물었다·
“무얼 해주길 바라느냐?”
“무얼 해주실 수 있는데요?”
“헷갈리게 하지 말고 그냥 시원하게 말해!”
나는 품속에서 괴황지 석 장과 휴대용 필묵을 꺼내 세 사람의 앞으로 가져다가 놓았다·
이견이 나와 괴황지를 번갈아 보고선 다시 물었다·
“이게 뭐냐?”
“계약서입니다·”
“아무것도 안 씌어 있는데?”
“백지계약서입니다·”
“그게 뭐지?”
“선배님들께선 그냥 간단하게 수결만 하시면 됩니다· 내용은 제가 나중에 알아서 써넣을 테니까요· 원래는 일이 끝난 후 받으려고 했는데 딴소리를 하실지 모르니 역시 지금 받는 게 좋겠습니다·”
“우리의 생살여탈권을 쥐겠다?”
“생살여탈권을 무기로 자유분방한 선배님들을 통제하겠다는 뜻입니다· 게으름을 피운다거나 다른 표사들을 두들겨 팬다거나· 주루나 기루를 협박해 돈을 갈취한다거나 하면 강력한 제재를 가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나 할까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자세한 얘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빨리 결정을 하십시오· 서쌍교방 선배님들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른 것 같습니다·”
흑도들은 아까부터 칼 쥔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무슨 생각에선지 방주가 가만히 지켜보기에 자기들도 참고는 있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이다·
서호삼절은 쇠사슬에 손발을 묶여 있는 상황에서도 갖가지 방식으로 몸을 비틀어서는 번개처럼 수결을 했다·
나는 흡족한 표정이 되어 괴황지 석 장을 품속에 잘 갈무리했다·
그리고 방철산을 돌아보며 다시 한번 정중하게 포권을 쥐고 말했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하와 서호삼절의 관계는 나도 잘 알고 있소·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서쌍교방의 일· 더이상 참견하면 아무리 천룡표국의 사공자라고 해도 그냥 넘어갈 수 없소이다·”
“이를 말씀입니까· 저도 남의 방파일에 함부로 끼어들 생각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그것도 항주 사대 흑도방파 중 한 곳의 반역에 관한 일을·”
“하면 저들을 어떻게 구해내겠다는 뜻이오?”
방철산은 처음부터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신분을 들킨 이상 무력으로는 저들을 데려가지 못할 거라는 걸·
그래서 내가 서호삼견과 무슨 짓을 하든 참고 기다려 준 것이다·
마지막 승자는 결국 자신이 될 테니까·
“서호삼절 선배님들께서 진왕가의 공주마마를 지켜드리기 위해 백백곡의 살수들과 싸운 일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지금도 만날 때마다 공주마마께서 세 분의 안부를 제게 물어보곤 하시죠· 올겨울에도 항주로 오실 텐데 세 분께서 잔혹하게 처형당해 죽은 줄 알면 많이 섭섭해하시겠군요·”
“···!”
“두 당 금전 백 냥씩 모두 삼백 냥 드리겠습니다· 그 돈 받고 넘기려면 넘기시고 아니면 마십시오· 제가 드릴 말씀은 이게 끝입니다·”
공주는 방철산에게 수하들 앞에서 한발 물러날 명분을 주기 위한 것일 뿐 내가 진짜로 휘두른 칼은 금전 삼백 냥이었다·
금전 삼백 냥은 서쌍교방의 일 년 치 총수입과 맞먹는 거액이었다·
동호교방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다면 그 돈은 피같은 전쟁자금이 될 것이다·
방철산과 서호삼견을 비롯해 뇌옥 안에 있는 흑도들 전부가 쩌정쩡 얼어붙어 버렸다·
승부는 그걸로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