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화· < 죽은 자들의 땅(4) >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좌우에서 청동화로가 뜨거운 불길을 활활 뿜어내는 중이었다·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펴보니 놀랍게도 나는 제단에 누워 있었다·
“깨어났군·”
저만치 앞쪽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야율극리가 말했다·
그는 그때까지도 땅바닥에 앉아 죽간의 구결을 살피는 중이었다·
야율극리는 분명 내가 쓰러져 정신을 잃은 연유에 대해 캐물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오히려 질문을 하는 것으로 선수를 쳤다·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천부교활교경을 아나?”
속으로 뜨끔했지만 다시 한번 시치미를 뗐다·
다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덮어놓고 오리발부터 내밀진 않았다·
“그렇습니다·”
“어떻게 알지?”
“저 석벽에 적혀 있더군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예언과 함께·”
그제야 야율극리가 죽간에서 시선을 거두고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흡사 그의 영체가 내 눈을 통해 몸속으로 들어와 불을 켜고는 오장육부를 들여다보는 듯했다·
하지만 이는 격기의 일종으로 신체 반응을 통해 거짓말을 하는지 여부를 살피려는 수작에 불과했다·
맞설 공력은 얼마든지 있으니 뻔뻔하기만 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나는 평정심을 끝까지 유지하며 야율극리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이윽고 몸 안에서 무언가가 스르륵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천부교활교경은 아득한 옛 시절 지상에 강림한 신의 말씀을 담은 경전이다· 단 한 글자로 이루어져 있으되 세상의 모든 섭리를 말해 주는 절대마경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천부교활교경이 얼마나 무서운 물건인지는 내가 야율극리보다 훨씬 잘 알 것이다·
“내가 바로 그걸 익혔다· 나는 오늘 이곳 죽은 자들의 세상에서 너를 제물로 바치고 부활할 것이다· 그런 다음 산 자들의 세상으로 나가 수많은 이적을 행하며 천하를 발아래 둘 것이다·”
석관에 새겨져 있는 동방신행의 마지막 예언을 야율극리도 본 모양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예언에서 말하는 사부의 현신이 제자인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살아서 이곳으로 들어오는 자 반드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입구의 경고도 있고 하니 만약 여기서 나간다면 정말 죽음에서 부활한 자가 되는 셈이었다·
게다가 야율극리는 천부교활교경까지 익혔다·
심지어 그 마경에 대한 이해는 나보다도 훨씬 깊을 것이다·
모든 것이 너무나 그럴듯해서 나는 한순간 혼란에 빠졌다·
‘차라리 그의 말이 맞았으면·’
그때였다· 어둡고 거대한 공동의 천장 한가운데에서 난데없이 구멍이 뻥 뚫렸다·
동시에 한줄기 기다란 빛이 쏟아져 내려와 그때까지도 제단에 앉아 있는 나를 비추었다·
‘서광(暗光)?’
구멍이 뚫린 게 아니라 원래 뚫려 있던 구멍으로부터 햇빛이 들어 온 모양이었다·
마침내 동이 터 오른 것이다·
“약속한 시각이 되었군·”
야율극리는 그때까지 펼쳐 읽고 있던 죽간을 천천히 말아 품속에 집어넣었다·
이어 자리에서 쓰윽 일어나 내게로 거침없이 걸어왔다·
화들짝 놀란 나는 얼른 제단에서 내려온 다음 황급히 두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잠깐만요! 아시다시피 제가 졸도를 하는 바람에 구결을 새기고 말고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안 하려고 한 게 아니라고요·”
야율극리의 신형이 쭉 늘어나는가 싶더니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고리 모양을 한두 개의 시퍼런 벼락이 덮쳐왔다·
무얼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일단 구천홍염장으로 맞섰다·
뻥! 뻐버벙! 뻥! 뻥!
격렬한 접장의 순간마다 굉음과 함께 막강한 경파가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한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야율극리와 처음 싸울 때처럼 손목을 타고 들어와 척추를 짜르르 울리고 뼈마디를 터뜨려 버릴 것 같은 고통이 이번엔 느껴지지 않았다·
충격은 여전히 강렬했으되 충분히 견딜만했다·
뿐만 아니라 내 몸 전체에서 무언가 주체할 수 없는 활력이 솟구쳤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남만에서 마총의 석실로 들어갔을 때 부적의 영기가 폭주한 후 모든 감각이 각성을 한 것처럼 밝아지며 용력 또한 솟구쳤다·
잠깐 사이에 이십여 초식이 훌쩍 지나갔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르군!”
야율극리가 맹공을 퍼붓는 와중에도 눈동자를 날카롭게 반짝이며 물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나는 가까스로 야율극리의 강기공들을 받아낼 정도는 되었으나 판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십초박과 구천홍염장 모두를 번갈아 사력을 다해 펼쳐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문제가 아니라 야율극리가 비정상적으로 강한 탓이었다·
보법을 어지럽게 펼치며 권장으로 연달아 벼락을 뽑아내면서도 그는 숨소리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만만했다·
나를 여전히 그리고 조금도 자신의 상대로 인정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한데 이건 내게 전혀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기회는 한 번이다·’
지금까지 익힌 모든 무공들 중에서 가장 빠르고 손에 익은 초식으로 단 한 번에 승부를 보아야 한다·
야율극리는 바보가 아니니 어떤 이유에서든 내가 자신의 전권을 파고드는 순간 본능적으로 경계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신경을 끌 가짜 공격과 상처를 입힐 진짜 공격을 동시에 준비해야 한다·
“잠깐 제 말을 좀!”
뻐뻥!
접장의 순간 나는 반탄력을 이용해 재빨리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야율극리는 공세를 고삐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나는 옆에 있는 청동화로의 볼록한 배를 향해 일장을 거세게 날렸다·
떠엉!
쇳소리와 함께 육중한 청동화로가 야율극리를 향해 날아갔다·
야율극리는 귀찮다는 듯 손으로 허공을 가볍게 휘저으며 청동화로를 후려쳤다·
떠엉!
청동화로가 불타는 장작들을 사방으로 쏟아내며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청동화로의 뒤를 바짝 따라가던 나는 왼 주먹으로 활짝 열린 야율극리의 명치를 벼락처럼 노려갔다·
귀영무의 보법에 이은 십초박의 한 수였다·
“죽엇!”
“어딜!”
상대와의 거리가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장법을 펼칠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야율극리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장법을 펼치려던 오른손으로 내 주먹을 가볍게 말아쥐어 버렸다·
동시에 매 발톱처럼 구부린 왼손을 어깨 쪽으로 벼락처럼 뻗어왔다·
손에 잡히는 순간 견골이 통째로 뜯겨 나가며 무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이건 내가 의도한 상황이었다·
‘걸려들었다!’
야율극리의 두 팔을 모두 뻗게 만드는 데 성공한 나는 그의 왼팔을 쳐내는 척하며 오른손에 뽑아 쥐고 있던 흑요석 칼로 손목을 벼락처럼 그어 갔다·
“이거나 먹엇!”
하지만 웬걸 무언가 칼끝에 걸리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칼을 쥔 내 손목만 호랑이에게라도 물린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절체절명의 순간 야율극리가 어깨를 노리고 뻗어오던 조공마저 금나수로 변환시켜 내 손목을 움켜쥐어 버린 것이다·
왼 주먹은 그의 오른손에 잡아 먹혔고 흑요석 칼을 쥔 오른 손목은 그의 왼손에 물린 형국이었다·
양팔 모두 완벽하게 붙잡히고 제압당한 상황·
“이것도 먹엇!”
나는 같이 죽자는 심정으로 사력을 다해 그의 양팔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동시에 이마로는 냅다 얼굴을 들이받았다·
부지불식간에 나온 임기응변의 한 수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허공을 격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야율극리의 분노만 더욱 부채질했다·
“이런 뻔뻔한!”
천마의 제자로 한평생 멋진 승부만을 펼쳐 온 야율극리에게 개싸움은 나려타곤을 펼치는 것만큼이나 낯뜨거운 짓이었다·
상대가 자신에게 그런 식으로 공격을 해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분기탱천한 야율극리는 내 왼 주먹을 아래로 힘차게 던져버렸다·
반대로 내 오른손은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그 역시 족보에도 없는 임기응변의 동작을 펼친 듯했다·
한데 얼마나 강하고 빠른지 나는 무릎팍으로 그의 가랑이 사이를 찍어 올리다 말고 쭉 딸려갔다·
야율극리는 자신의 어깨로 툭 쳐서 나를 허공에 거꾸로 띄운 후 땅바닥에다 사정없이 메다꽂아 버렸다·
뻐억!
등짝부터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나는 사력을 다해 호신강기를 끌어 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골이 짜르르 울리는 고통과 함께 숨이 턱 막혔다·
“이제 시작이다!”
그대로 빠져나가 버리려는 혼백을 가까스로 붙잡으려는 찰나였다·
야율극리는 아직 놓지 않은 내 오른 손목을 뽑아 올려 반대쪽 땅바닥에다 다시 패대기쳤다·
뻐억! 뻐억!
그렇게 두 번을 더 왔다 갔다 해서 모두 네 번을 패대기치더니 그제야 화가 조금 풀리는지 한쪽으로 냅다 던져버렸다·
흐물흐물해진 나는 대여섯 장을 날아간 다음 석벽에 거꾸로 부딪힌 후 머리를 땅바닥에 ‘쿵!’ 찧으며 떨어졌다·
“쿨럭! 쿨럭! 쿨럭!”
흡사 내장이 진탕 당하는 듯한 고통에 나도 모르게 몸을 벌레처럼 웅크리고 검은 피를 연거푸 토해냈다·
차라리 피를 토했더니 숨쉬기가 좀 편해졌다·
대신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극통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엄습해왔다·
거대한 짐승이 나를 잘근잘근 씹다가 맛이 없어서 ‘퉤!’ 하고 뱉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바닥이 돌로 된 천 길 낭떠러지에서 한 열 번 쯤 떨어진 것도 같았다·
한데 희한하게도 정신은 멀쩡했다·
게다가 어디 하나 부러진 곳도 없었다·
뼈가 멀쩡한 것은 공력이 비정상적으로 심후한 덕분이었다·
정신이 멀쩡한 것은 어느새 상단전까지 올라가 자리 잡은 천부교활교경의 영기가 나를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 좀 고분고분해졌으려나?”
“미친 내가 처음부터 순순히 구결을 준다고 했잖소!”
“흑요석 칼을 요대에 숨기고서 말이지?”
“그건 귀하가 이렇게 나올 것 같아 준비한 거요·”
“아니면 순순히 주었고?”
“물론 아니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고·”
그러면서 나는 품속에서 돌돌 말린 죽간 뭉치 하나를 꺼냈다·
두 눈이 화등장만하게 커진 야율극리가 재빨리 자신의 품속을 뒤졌다·
하지만 손에 쥐어져 나오는 죽간은 하나뿐이었다·
“언제!”
“분기탱천한 귀하가 나를 네 번이나 땅바닥에 패대기친 후 던질 때· 그러게 왜 한 손만 잡고 던지셨습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힘센 손에 의해 몸이 허공으로 쭉 끌려 올라가는 순간 자유로운 왼손으로 가슴을 슬쩍 훑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데다 고개를 앞쪽으로 돌리고 있었던 탓에 야율극리는 풀어 헤쳐진 자신의 옷자락 사이로 죽간이 빠져나가는 걸 까맣게 몰랐다·
“어쩔 셈이냐?”
“나를 순순히 살려 보내주지 않으면 선천오법술의 구결을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 죽간을 엮은 가죽끈도 모두 뜯어버려 구결의 순서를 알 수 없게 하겠소· 하면 아주 골치 아파질 거요·”
“얼마든지·”
“내가 못 할 것 같소?”
“하라니까 뭘 망설이는 거지?”
“···?”
“···”
“그렇군· 하필이면 이미 읽은 죽간을 훔쳤···· 가만 내가 까무러쳐 있는 동안 이걸 다 외웠다는 겁니까?”
“나는 요나라의 왕족이자 마지막 천마교주였던 동방신행의 칠 제자 야율극리다· 세상이 넓고 하늘이 높은 줄을 이제야 알겠느냐· 음하하!”
야율극리가 갑자기 고개까지 젖히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따르면 죽간에 기록된 마공을 세 가지만 익히면 압도적인 무공으로 말미암아 천마교주가 된다고 했다·
그는 천부교활교경에 이어 하나의 죽간 구결을 모두 머릿속에 암기한 데다가 아직 하나가 더 품속에 남아 있었다·
삼십 년 고행의 결실이 눈앞에 있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것인가·
그러던 어느 순간 야율극리의 웃음이 뚝 그쳤다·
내 손에서 삼매진화가 일어나 삽시간에 죽간을 불태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건 구결이라고 하지만 죽간은 그 자체로도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천마성교의 보물이었다·
“저도 이제 삼매진화를 피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멈춰라!”
“싫습니다·”
“이놈!”
분기탱천한 야율극리가 또다시 벼락처럼 신형을 쏘아왔다·
나는 그보다 한발 앞서 천금풍의 경신공을 펼치며 도망쳤다·
제단으로 뛰어오른 후 두어 걸음을 뛰다 도약하자 단숨에 전대교주들의 석관이 놓여 있는 곳에까지 이르렀다·
야율극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손을 뻗으면 닿을 법한 거리까지 접근했다·
나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석관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동시에 다시 한번 도약한 다음 수직 절벽을 수평으로 타고 질풍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차마 나처럼 불경을 저지르지는 못한 야율극리의 천둥벼락 같은 장력이 엉덩이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콰앙!
나를 대신해 벼락을 맞은 석벽의 한쪽이 굉음을 내고는 돌덩어리들을 우수수 쏟아냈다·
장력의 출수는 그 반동으로 말미암아 야율극리를 한 걸음 더 멀어지게 했다·
급한 마음에 일단 나를 때려잡고 보려다 오히려 손해를 본 것이다·
잠깐 사이 나는 수직 절벽을 여전히 타고 달리며 공동을 한 바퀴나 돌아 버렸다·
이윽고 제단 위로 다시 삭 떨어져 내렸을 때는 손안에 있던 죽간이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지고 난 후였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서는 죽간에 새겨져 있던 구결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빛나며 화인처럼 각인되고 있었다·
놀랍게도 이 죽간에 새겨진 마경 혹은 마공의 이름은 선천오법술과 비슷한 선천사법술(先天四法術)이었다·
모든 죽간들의 왕이랄 수 있는 천부교활교경의 영기가 선천사법술의 영능(靈能)을 흡수해버린 것이다·
이는 무림맹에서 소유하고 있던 선천오법술의 죽간이 불탔을 때와 똑같은 현상이었다·
그리고 이미 내가 노린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