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 죽은 자들의 땅(1) >
백골들을 본 연소교는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나도 간이 쪼그라들었다·
저들에게 닥친 일들이 곧 우리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일단 서로 싸워서 이렇게 된 건 확실히 아니오· 무기가 사방에 나뒹구는 걸로 보아 싸움이 벌어졌다면 부러지거나 잘려나간 뼈들이 많을 텐데 용마가 밟아서 깨진 해골바가지를 제외하면 모두 멀쩡하오·”
“과연 그렇군요·”
“결정적으로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조금씩 백골이 되어가고 있소· 일부 나무 그늘을 피해 볕이 뇌리 쬐거나 비바람에 오래 노출된 것들은 완전히 백골화가 되었고·”
“그 말씀은?”
“내 짐작이 맞다면 이들은 살아서 서로를 본 적이 없을 것이오· 몇 달 혹은 몇 년에 걸쳐 긴 시간을 두고 한 명씩 들어왔다가 무언가에 의해 죽었다는 뜻이지·”
“천마대총 안에 있는 물건들을 노리고 들어온 자들이군요·”
천마대총의 위치는 천마성교 내에서도 일급비밀이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연소교까지 아는 걸 보면 완벽한 비밀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에 수백 년의 세월이 더해지면 저 많은 백골들의 존재도 설명이 된다·
삼(三) 년에 한 명씩만 위치를 알아내 찾아와도 삼백 년이면 딱 백 명이 된다·
“대체 천마대총 안에 뭐가 있는 거요?”
“전설에 따르면 아무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이 있어요· 하지만 소문에는 일성을 사고도 남을 황금과 천하를 오시할 마경기서들이 있다고 했고요·”
“전설과 소문은 같은 말 아니오?”
“전설은 성전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말하는 거예요· 제가 여기까지 길잡이 역할을 하며 올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고요· 그리고 소문은····”
“오랜 세월 마교도들 사이에서 떠돌며 전해진 얘기들을 말하는 것이로군·”
“맞아요·”
연소교가 갑자기 품속에서 보퉁이를 꺼내더니 내게 내밀었다·
세 개의 성보가 든 바로 그 보퉁이였다·
“어쩌라는 거요?”
“저보다는 당주님께서 갖고 계시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만약 불가항력적인 일이 발생하면 살 확률이 조금이라도 높은 사람이 갖고 있어야죠·”
“내가 이걸 들고 중간에 에라 모르겠다하고 도망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런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진작에 저를 죽이고 달아났겠죠·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악인의 수중에 떨어지느니 차라리 그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고요·”
“천마대총이 코 앞인데 갑자기 무슨 나약한 소리를 하는 거요?”
“만약 우리가 천마대총까지 가지 못하고 죽어 저들처럼 백골이 된다면 훗날 이곳을 찾아온 누군가의 손에 성보가 발견될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리고 그 누군가는 분명 좋은 사람이 아닐 거예요·”
“우리가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요?”
“천마대총은 역대 교주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무덤이에요· 과거 이곳으로 들어온 당대의 교주들은 모두 죽을 장소를 찾아온 것이고요·”
“그래서?”
“거듭 말하지만 이곳은 죽은 자들을 위한 땅· 들어오는 길은 있어도 나가는 길은 없을지도 몰라요· 침입자들이 아니라면 애초부터 나갈 생각으로 설계된 장소가 아니니까요·”
연소교는 열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부여된 어떤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왔다·
마침내 성공을 목전에 둔 지금 그녀는 무언가 크게 허탈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역설적인 것이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겁에 질려 있었다·
“소저는 내가 본 무림인들 중에 가장 강하고 용감한 사람이오· 강호인들은 내가 성보를 운송 중이라고 하지만 사적인 복수심과 욕심을 버리고 전쟁을 막으려 한 소저의 강단과 용기가 없었다면 애초부터 시작도 되지 않았을 일이지·”
그러면서 나는 보퉁이 안에 든 성보들 중 필사본만 따로 챙겨 품속에 갈무리했다·
이어 죽간본 두 개가 든 보퉁이는 그대로 연소교에게 돌려주었다·
“소저의 말대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하나씩 나누어 가지고 있는 게 좋겠소· 한 명이 죽더라도 운이 좋아 한 명이 살아서 여길 빠져 나간다면 최소한 악인에게 한 시대에 성보 세 개가 전부 전해지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더욱 당주님께서····”
“내 무공이 더 강해서라면 살아서 여길 빠져나가는 한 명은 오히려 소저가 될 것이오· 의뢰인이 도망치는 일은 있어도 표사가 의뢰인을 사지에 홀로 남겨두고 도망치는 법은 없소· 특히 천룡표국의 표사는·”
연소교는 잠시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마침내 결심한 듯 꼭 다문 입술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보퉁이를 받아 품속에 야무지게 갈무리 하며 말했다·
“당주님은 제가 본 무림인들 중에 가장 바보 같아요· 어떤 때 보면 미친 것도 같고요· 하지만 같은 편에 서서 누군가와 전쟁을 해야 한다면 전 꼭 당주님의 동료가 될래요·”
“그러다 죽기라도 하면?”
“죽는 건 슬프지만 외롭거나 억울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거면 됐어요·”
“설표 산노 우숙 야차곤도 그런 심정으로 소저의 곁을 지켰을 것이오· 마지막엔 똑같은 생각으로 눈을 감았을 것이고·”
“···!”
“이제 어디로 가야 하오?”
나는 주변을 살피며 화제를 돌렸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울음이라도 삼키는지 연소교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대답했다·
“몰라요·”
“이제 와서 갑자기?”
“저도 처음이잖아요·”
“앞서 말한 것처럼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나 암호라도 들은 거 없소?”
“한 가지 있긴 한데 무슨 뜻인지를 잘 모르겠어요·”
“일단 말해 보시오·”
[불멸의 무궁(無窮)으로 나아가는 길은 따로 없으니 연자의 족적이 곧 길이 될 것이다· 다만 그 길은 여덟 지옥 사이로 난 길이며 훗날과 같지 않으리라·]
“저 백골의 주인들이 역쌍석을 통과한지 채 일 각도 되지 않아 모조리 죽어버린 이유를 어쩌면 알 것도 같소· 생각보다 난해한 암호 같지는 않은데·”
“그런가요?”
“일단 천마대총을 중심으로 방원 십 리에 틀림없이 거대한 기문진이 펼쳐져 있을 것이오· 역쌍석은 그 기문진 속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었고·”
“그건 너무 당연한 얘기 같은데·”
“지금부터 말하는 게 진짜요· 일단 석문을 통과하면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곳이 절대 사지일 것이오· 애초 길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았던 거지·”
“저도 그것까지는 이미 생각을 했어요·”
“다만 세 개의 성보나 그것들을 익힌 존재가 나타나면 기문진이 감응을 하면서 모든 위험한 술법적인 장치들이 해제되는 거요· 그때부턴 가는 곳마다 다 길이 되는 거고·”
“그 말이 사실이라면 세 개의 성보 속 무공을 익힌 교주들에게는 더없이 쉬운 길이었겠군요· 경치를 구경하며 천마대총을 향해 걷기만 하면 되니까·”
“반면에 불순한 목적으로 침투한 자들에게는 옮겨 딛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팔대지옥이 펼쳐졌을 것이오· 저 백골의 주인들은 첫 번째 지옥인 초열지옥(焦熱地獄)에 갇혀 죽은 것이고·”
“수백 년 동안 백여 명이 침투하고도 첫 번째 관문조차 뚫지 못했다니·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군요·”
“어차피 우리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니 그만 서두르기나 합시다·”
“알겠어요·”
그러면서 연소교와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한층 씩씩해진 연소교가 용마의 고삐를 잡고 다시 앞장섰다·
비밀을 알고 나니 두려움도 어느 정도 사라진 모양이었다·
고작 대여섯 장 정도를 걸어갔을 때였다·
“조심해!”
가공할 살기를 느낀 나는 연소교의 등을 힘껏 밀어 앞으로 던지듯 보냈다·
이어 발검과 동시에 질풍처럼 돌아서며 앞쪽 허공을 향해 휘둘렀다·
살기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이미 직감했기에 삼백 년의 공력은 물론이거니와 젖먹던 힘까지 쥐어짰다·
찰나의 순간 눈앞에서 검은 그림자와 붉은 벼락이 나를 향해 뚝 떨어지는 게 보였다·
꽈앙!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엄청난 경력이 검신을 타고 전해져왔다·
아래쪽에서는 급격하게 커지는 손바닥으로부터 구형의 번갯불이 터져 나왔다·
뻐엉!
요강단지만한 대포알에 가슴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았다·
무지막지한 힘을 감당하지 못한 나는 그대로 튕겨 날아갔다·
‘성보로부터 떨어지면 죽는다!’
통제력을 잃고 허공으로 솟구친 몸이 거꾸로 뒤집히는 순간 나는 사력을 다해 손을 뻗었다·
이어 때마침 옆에 있던 나무 둥치를 잡아채는 데 성공했다·
활처럼 휘어진 나무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덕분에 성보를 떠나 하염없이 튕겨 날아가는 걸 면할 수 있었다·
대신 한순간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 역시 호신강기를 본능적으로 끌어 올린 데다가 용린신갑까지 입고 있어서 크게 내상을 입지는 않을 것 같았다·
진짜 문제는 그다음에 일어났다·
내가 고삐를 놓치는 바람에 자유로워진 용마가 깜짝 놀라서는 숲으로 질주를 시작한 것이다·
“멈춰!”
다급한 마음에 소리를 질러보지만 짐승이 말귀를 알아들을 리 없었다·
놈이 성보로부터 불과 대여섯 장을 벗어났을 때였다·
갑자기 땅밑에서 커다란 불길이 솟구쳐 용마를 집어삼켜 버렸다·
불길은 용마가 달리는 길을 따라 쉬지 않고 솟구쳤다·
그 바람에 용마는 계속해서 불덩어리에 휩싸여 있게 되었다·
이제야말로 진짜 놀란 용마가 질주를 멈추고는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버티질 못하고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쓰러진 후에도 불길은 조금도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흡사 누군가 말을 산채로 화장해버릴 생각에 기름을 열 말쯤 부어놓고 불을 지른 것 같았다·
어느 순간 용마의 마지막 발버둥마저 멈췄지만 불길은 여전히 맹렬했다·
그때쯤 나를 기습했던 그림자는 이미 앞쪽으로 삼 장쯤 날아가 착지를 한 상태였다·
적동곤 한 자루는 허리에 꽂고 다른 한 자루는 손에 쥔 채 오연하게 서 있는 그는 칠성군 야율극리였다·
쭉 뻗은 그의 다른 손아귀에는 연소교가 목을 잡힌 채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검신은 어딜 가고 손잡이만 덩그러니 남은 협봉검이 들려 있었다·
부러진 검신은 발아래서 나뒹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협봉검을 뽑아 베려다가 오히려 적동곤에 당한 모양이었다·
“괜찮으시오?”
“당주님은요?”
“보시다시피·”
한 명은 단 두 초식만에 튕겨 날아가다 나무를 붙잡아 겨우 살아남았고 다른 한 명은 단 일초식에 검이 부러지고 목까지 잡혀 인질이 되었다·
그런 처지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굴이 붉어졌다·
순간 나는 야율극리의 왼쪽 팔에 새겨진 세 개의 검흔과 함께 피로 흥건한 소맷자락을 발견했다·
상태를 보아하니 숨 쉴 틈도 없이 달려오느라 혈도를 눌러 지혈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 말은 곧 남궁유룡과 장초풍을 베어 넘기고 온 게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
“못 보던 검흔이 생겼군요·”
“노인네들의 검초가 제법 매섭더군·”
“이제 어쩔 셈이십니까?”
“우선 자네들을 죽여야겠지· 그런 다음 성보를 챙겨 최대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이네· 이제부터 할 일이 아주 많거든·”
“여기까지 온 김에 천마대총을 찾아가 사조님들의 영전에 향이라도 한 대 살라드린 후 가실 줄 알았습니다만·”
“천마대총은 영면을 위한 장소이지 참배를 위한 장소가 아닐세·”
“천마교주가 되면 무얼 하실 겁니까?”
“노인네들이 구해주러 올 때까지 시간을 끌려는 건가? 그럴 일은 없을 테니 희망 따윈 갖지 말게· 내가 역쌍석 하나를 무너뜨려 진문(陣門)을 없애 버렸거든·”
“굉음을 전혀 듣지 못했는데·”
“저승에선 이승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법이지· 그래도 궁금한 점은 해결해 주겠네· 나는 천마성교의 교주가 되려고 이런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게 아닐세· 그보다 더 높고 존귀한 자리에서 세상을 굽어볼 생각이네·”
“천하대광명종!”
오래전 연소교에게 납치되어 남만으로 끌려가던 중 조영영으로부터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오백 년 전 대설산을 본산으로 삼고 천하무림을 발아래로 굽어보았던 초거대 마도 세력이에요· 황제조차도 두려워했던 천하대광명종은 전란을 방불케 하는 내분에 휩싸여 여덟 개의 종파로 쪼개졌는데 그중 한 곳이 바로 천마성교의 전신인 천성교(天星敎)였죠·”
야율극리는 천마성교의 재건이라는 대역사를 바로 그 천하대광명종의 시대로까지 끌어 올려 스스로 대종사가 되려는 것이다·
‘이런 미친 인간을 봤나·’
그는 갑자기 왜 이런 엄청난 생각을 하는 걸까?
사마옥의 말에 따르면 여러 이적들을 행한 전대의 천마교주들은 대대로 세 권의 마경기서들을 익혔다·
여기서 말하는 마경기서는 곧 성보라고 일컬어지는 죽간의 무학들이었다·
한데 지금 야율극리는 이미 근원이 되는 무학을 익힌 상태였다·
그러고도 무려 세 개의 성보가 세상에 나타났다·
그것들을 전부 손에 넣기만 하면 그는 전대 천마교주들을 넘어선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나이도 상대적으로 젊었다·
전대 천마교주들이 칠팔십 세가 되어야 비로소 지존의 자리에 올랐던 것과 달리 그의 나이 이제 쉰 살 남짓이었다·
백 살까지만 산다고 가정해도 앞으로 오십 년이나 더 천하제일인으로서 세상을 호령할 수 있었다·
오십 년이면 천하의 주인을 몇 번이고 바꿔치울 만큼 긴 세월이었다·
야율극리의 계획대로라면 앞으로 수십 년간 전쟁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고작 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게 될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절대로 그렇게 되도록 놔둬선 안 된다·
일단 연소교를 밖으로 내보낸 후 어떻게든 그를 천마대총으로 끌고 들어가야 한다·
그런 다음에 상황을 보며 성보를 봉인할 방법을 찾는 거다·
이번에야말로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만약 이 상태에서 그가 밖으로 나가버리면 그나마 성보를 봉인할 마지막 기회조차 영영 놓쳐버리게 될 테니까·
나는 갑자기 품속에 넣어둔 필사본을 꺼내어 머리 위로 높이 들었다·
필사본을 본 야율극리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뭔지 아시는군요·”
야율극리가 연소교의 겉옷 자락을 강제로 찢었다·
그러자 품속에 감춰져 있던 보퉁이가 뚝 떨어졌다·
야율극리는 떨어지는 보퉁이를 허공에서 낚아챈 후 서둘러 내용물을 확인했다·
당연하게도 죽간본 두 개만 나왔다·
“둘이서 나눠 가졌군·”
“무슨 일이 닥칠지 몰라 미리 준비를 좀 해두었습니다·”
“어쩔 셈이지?”
“천살마녀를 놓아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삼매진화(三味眞火)를 일으켜 필사본을 태워 없애버리겠습니다· 제 몸속에 엄청난 공력이 있다는 걸 이미 아시리라 믿습니다·”
“공력만 깊다고 진화가 일어난다더냐?”
나를 대하는 야율극리의 말투가 어느새 바뀌었다·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죽간까지는 아니어도 종이 정도는 충분히 태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어차피 저도 궁금한데 한번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필사본을 태우면 이 여자는 죽는다·”
야율극리가 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고는 연소교를 번쩍 들어 올렸다·
숨이 막힌 데다 피까지 쏠리면서 연소교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본능적으로 두 손을 뻗어 야율극리의 손가락을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써보지만 호랑이에게라도 물린 듯 꿈쩍을 하질 않았다·
그렇다고 섣불리 반격할 수도 없었다·
저 상태에서 야율극리가 손가락에 일 푼의 힘만 주어도 연소교는 목이 꺾이며 즉사할 것이다·
“진정하십시오· 우리의 목적은 같습니다· 저는 천살마녀를 살리고 싶어 하고 칠성군께서는 필사본을 일순위로 원하시고· 아닙니까?”
야율극리는 잠시 나를 뚫어지게 보다가 연소교를 툭 놓아 주었다·
땅으로 떨어진 연소교는 막혔던 숨을 토해내면서 얼른 삼 장 밖으로 도망쳤다·
“나가는 문은 알고 있소?”
“찾아볼게요·”
“어서 가시오·”
“당주님은요?”
“말했잖소· 둘 중 한 명만 살아서 나간다면 그건 표사가 아니라 의뢰인일 거라고· 잘 모르는 모양인데 나 이래 봬도 명표라 불리는 사람이오·”
“하지만!”
“어서 가시오!”
나는 정색하고 소리를 질렀다·
연소교는 나와 야율극리를 잠시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결심을 한 듯 나를 향해 어느 때 보다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맹주님을 만나 다시 들어오는 방법을 반드시 찾아내겠어요· 약속해요· 그때까지 조금만 버티고 계세요· 그럼 이만·”
말을 끝낸 연소교는 남은 용마에 올라타서는 왔던 길을 쏜살처럼 되돌아갔다·
성보를 가진 야율극리로부터 대여섯 장 정도 멀어지자 또다시 불길이 솟구쳐 그녀와 용마를 집어 삼켰다·
하지만 백골들이 널브러진 곳을 지나면서 불길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둘만 남자 야율극리가 본색을 드러냈다·
“이제 우리 계산을 해볼까?”
“물론이죠·”
나는 모든 내공을 손끝으로 모은 다음 사력을 다해 삼매진화를 피워 올렸다·
하지만 손끝 주변의 대기만 홍시처럼 발갛게 잠시 달아오를 뿐 불씨가 일어날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나는 다시 한번 내공을 손끝에 모으고 열기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야율극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이어 내게로 벼락같이 신형을 쏘았다·
갈갈이 찢어 버리기 전에 필사본을 빼앗으려는 것이다·
나는 천금풍의 경공을 펼치며 숲 쪽으로 달아났다·
대여섯 장 정도 달렸을 때 불길이 확 솟구치며 온몸을 덮쳐왔다·
불 속에 필사본을 던져 넣은 후 재빨리 진각을 밟아 솟구쳤다·
그리곤 야율극리와 삼 장 정도 떨어진 위치에 착지를 했다·
마지막으로 옷자락에 옮겨붙은 불을 탁탁 털어서 껐다·
야율극리는 본래 내가 있던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필사본은 눈 깜짝할 사이에 불길 속에서 한 줌의 재로 변해버린 후였다·
상황을 인식한 야율극리의 얼굴이 악귀로 변했다·
“죽여버리겠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야율극리가 사자후를 터뜨리며 또다시 신형을 쏘아왔다·
머리 위로 치켜든 그의 오른손에는 붉은빛이 도는 적동곤이 쥐어져 있었다·
저 물건에 한 방 맞으면 그대로 머리통이 터져 나가리라·
나는 도망치기는커녕 그 자리에 꼿꼿이 선 채 야율극리를 노려보며 재빨리 말했다·
“천지간에 만물이 있으니 염(念)을 심고 공(空)으로 불러낸 다음 진기를 나눠 주어라! 하면 살아서 너의 뜻을 따르리라!”
예상했던 대로 적동곤이 머리 위 한 치 앞에서 뚝 그쳤다·
야율극리의 신형도 멈췄다·
그의 숨길이며 땀 냄새가 훅 풍겨왔다·
“선천오법술!”
“역시 알아보시는군요·”
“네놈이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긴· 이미 내가 익혔으니까 알지·
정확하게는 내 몸속에 어떤 기운의 형태로 갈무리 되었지만·
장담하건대 전대의 천마교주들도 그리고 눈앞에서 나를 노려보는 저 야율극리도 고대의 죽간 속 마공을 익히는 또 다른 방법이 있음은 모를 것이다·
알았다면 진작에 누군가가 흡수를 해버려서 죽간본의 형태로 지금까지 남아있지도 않았을 테니까·
“선천오법술의 필사본은 본래 사마옥 총군사님께서 천살마녀의 죽간본과 함께 천마대총으로 가져가 봉인하라며 제게 맡기신 겁니다· 천살마녀의 것이 아니라는 얘기죠·”
“훔쳐보았더냐?”
“비슷합니다·”
“이제 보니 무림맹에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겼군· 그래서 얼마나 외우고 있지?”
“전부 다요·”
“고작 스무날 남짓한 시간 동안 그 많은 구결들을 모두 외웠다고?”
“그렇습니다·”
“무엇으로 증명할 테냐?”
“저에 대해 뒷조사를 안 해보셨습니까? 해보셨다면 향시와 회시에서 연달아 장원급제한 기재라는 걸 아실 텐데요·”
야율극리의 눈동자가 한순간 크게 흔들렸다·
구태여 뒷조사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나에 대한 소문은 강호에 이미 파다했고 마교도들이라고 모르지는 않을 테니까·
“네 놈을 죽이면 선천오법술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습니다·”
“이건 어떻느냐? 지금 당장 구술하지 않으면 네 놈의 목을 비틀어 죽일 것이다·”
“지금 당장 지필묵도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걸 다 구술하고 칠성군께서 암기하시기 전에 사람들이 저를 구하러 올 겁니다· 사마옥 총군사님과 정도무림의 저력을 얕보지 마십시오·”
“그들이 올 수 있는 건 백골들이 쌓인 곳까지만이다· 일 년이 걸려도 팔대지옥을 뚫고 천마대총까지 들어 올 순 없지·”
“잠깐만요· 천마대총이라뇨!”
“이렇게 된 이상 천마대총으로 들어가 성보의 무학들을 모두 익힌 다음 세상으로 나가야겠다· 따라와라·”
말과 함께 야율극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 버렸다·
그와 대여섯 장 정도 멀어지는 순간 내가 딛고 선 아래로부터 불길이 화르륵 치솟았다·
화들짝 놀란 나는 얼른 경공술을 펼쳐 야율극리의 꽁무니를 따라가며 외쳤다·
“갑자기 가버리시면 어떡합니까? 제가 죽으면 필사본도 끝장이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