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오지산 천지령(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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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어떻게 된 거지?
죽을 것처럼 아프던 배가 왜 갑자기 잠잠한 걸까?
나는 숨을 죽인 채 모든 신경을 뱃속으로 집중했다·
마치 무림 고수들이 기운을 돌려 몸속을 더듬는 것처럼·
그리고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독을 제멋대로 뿜어내던 천지령이 무슨 이유에선가 바짝 움츠러들었다는 걸·
무심코 들어간 동굴 저 깊은 곳에서 한 마리 맹수가 웅크리고 있는 걸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무슨 일이예요?”
“나도 모르겠소·”
“지금이라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행공을···”
그때였다· 갑자기 뱃속 저 깊은 하단전으로부터 뭐라 말할 수 없이 뜨거운 기운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창자가 빠르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배꼽 윗쪽에 있던 천지령이 갑자기 윗배를 지나 중단전으로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열기는 순식간에 윗배를 지나 중단전까지 덮쳐 버렸다·
뱃속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뜨거웠다·
“으아아악!”
하필 동굴 안에 모닥불까지 피워 놓은 상태였다·
열기를 참지 못한 나는 미친놈처럼 밖으로 뛰쳐 나갔다·
동굴 밖 숲으로 나와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는데도 열기는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열기는 천지령이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 중단전에서 더 맹렬하게 끓어 올랐다·
급기야 중단전 어림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났다·
연기는 작은 불로 변하더니 잠깐 사이 옷에 주먹만한 구멍을 내며 타올랐다·
“으아아악!”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재빨리 윗옷을 벗어 던져 버렸다·
그러자 훤히 드러난 문양이 빛으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전날 백선객점에서 이병룡과 싸우고 난 후에 나타난 바로 그 고대 죽간본의 부적이었다·
예전엔 불이 났어도 뜨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한데 지금은 부뚜막에 들어간 돼지가 된 기분이었다·
빛은 내 몸 전체를 야광주처럼 하얗게 밝히다가 다시 중단전으로 점점 모여들었다·
그러면서 맹렬한 섬광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부정한 무언가를 에워싸고 그대로 태워서 죽이려는 듯·
나는 천지령을 두려움에 떨게 한 것이 부적의 기운임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천지령도 만만치 않았다· 놈은 본능적으로 죽음의 위기를 느꼈는지 더욱더 강렬한 한기를 뿜어내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더니 지금 내가 딱 그 짝이었다·
모조리 태워버릴 것 같은 화기와 모조리 얼려버릴 것 같은 한기가 내 뱃속에서 용과 호랑이처럼 뒤엉켜 싸웠다·
“이 씨발것들이 왜 남의 뱃속에서!”
급기야 숨이 턱턱 막히고 심장 박동이 무슨 질주하는 말발굽 소리처럼 뛰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는 천둥 소리가 꽝꽝 울려댔다· 지금 내 뱃속은 한마디로 전쟁터였다·
“으아아아악!”
나는 동굴 안에 있는 화조신옹이 운기행공을 하다 깜짝 놀라 주화입마에 걸릴 만큼 크게 비명을 지른 후 까무러쳐 버렸다·
밤새 냉탕과 열탕을 오가고 다시 깨어났다가 까무러치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까무러쳤다가 다시 깨어나 보니 어느새 여명이 밝았다·
나는 비 그친 숲속 한가운데 웃통을 깐 채 오들오들 떨면서 자고 있었다·
이 와중에 청명한 숲의 공기가 너무나 상쾌하게 느껴진다·
오장육부를 굽고 얼리기를 반복하던 두 개의 기운도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누가 이겼지?
부적?
천지령?
아니면 양패구상?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화조신옹의 엄포와 달리 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게 중요했다·
순간 머릿속을 번쩍하고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남궁소소!”
벌떡 일어난 나는 황급히 동굴 안으로 달려갔다·
화조신옹은 밤새 반쪽이 된 몸으로 등신불처럼 굽은 채 죽어있었다·
주변은 그가 토해낸 것으로 짐작되는 검은 핏덩어리들이 한 말이었다·
마치 시골 장터에서 돼지를 잡고 난 흔적 같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남궁소소가 엎드려 있었다·
한데 그녀의 얼굴이 이상했다· 새파랗게 질려있는 것이 그녀 역시 꼭 죽은 사람 같았다·
“소저!”
황급히 뛰어가 그녀를 끌어안고 흔들었다·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코에 귀를 대보니 실낱같은 숨소리가 들린다
마혈을 짚힌 상태에서 추운 날씨에 너무나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나는 황급히 나뭇잎을 쓸어모아 모닥불 자리에 올렸다·
작대기를 찾을 사이도 없이 손가락으로 재를 휘저었다·
천만다행으로 아직 깨알 같은 불씨가 남아 있었다·
“훅! 훅!”
잠시 후 불이 붙자 남궁소소를 모닥불가로 끌어다 눕혔다·
그리고 남녀유별을 따질 겨를도 없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쉬지 않고 주물러댔다·
“제발·”
“으으····”
“소저 정신 차리시오!”
얼른 콧구멍에 귀를 대보니 숨소리가 훨씬 선명해졌다·
손과 볼을 만져보니 온기도 느껴지고 얼굴도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됐다· 아직 의식까지 완전히 돌아오진 않았지만 저승길에서는 확실히 발걸음을 돌린 것 같았다·
30년 쟁자수 경험으로 미루어 추위에 정신을 잃었을 때는 따뜻한 물로 오장육부를 덥히는 것이 가장 효과가 빠르다·
나는 구석에서 뒹굴고 있는 솥을 주워들었다·
밖으로 나가 깨끗한 냇물에 박박 씻은 다음 물을 끓여 먹일 생각이었다·
동굴을 나가기 직전 걸음을 뚝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화조신옹을 바라보았다· 그는 좀 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밤새 반쪽이 된 몸 등신불처럼 구부정한 자세 주변의 피바다 그리고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목내이(木乃伊-미라) 같은 얼굴·
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살아 있었어·”
한 방울이면 코끼리도 쓰러뜨린다고 했던 곤산곤독을 열 방울이나 처먹고도 그는 살아 있었다·
그 흉악한 독을 해독제도 없이 혼자서 하룻밤 사이에 전부 태우고 게워낸 것이다·
“이런 미친!”
나는 거침없이 다가가 들고 있던 쇠솥으로 그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하지만 쇠솥은 그가 내지른 일장에 맞아 튕겨 날아가 버렸다·
텅! 쨍그랑!
그때 화조신옹이 눈을 번쩍 떴다·
내가 화조신옹이 살아있음을 알고 놀란만큼이나 화조신옹 역시 나를 보고 놀란 얼굴이었다·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미친 누가 할 소릴!”
“대체 어떻게··· 왜····”
“덕분에 한 끼 잘 먹었소·”
“이노옴!”
동굴이 쩡쩡 울리는 사자후와 함께 화조신옹이 내 목을 덥석 잡으며 일어났다·
순식간에 나는 허공으로 번쩍 들어 올려졌다·
“컥! 컥!”
숨이 턱 막히는 충격에 본능적으로 화조신옹의 손목을 붙잡고 버둥거렸다·
화조신옹은 코를 내 입에 대고 킁킁 냄새 맡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천지령이 녹아 없어져 버렸군·”
“컥! 컥!”
“더욱 잘 되었다· 독성은 사라지고 약성만 고스란히 녹아있을 터· 네 놈의 피를 전부 빨아 먹어야겠다·”
순간 나는 손가락 두 개로 화조신옹의 눈을 벼락처럼 찔러갔다·
전광석화 같은 화조신옹의 손은 불과 한 자도 안 되는 거리에서 죽기 살기로 뻗은 내 손을 귀찮은 파리 치우듯 ‘탁’ 쳐내 버렸다·
“아이야· 발버둥 쳐도 소용없단다· 저항하면 고통만 가중될 뿐· 최대한 빨리 끝내줄 테니 얌전히 있거라·”
그러면서 왼쪽 목덜미의 경동맥이 지나가는 살점을 찝어 쭈욱 잡아 당겼다·
여기에 이빨로 구멍을 뚫어 피를 쪽쪽 빨아먹을 생각인 것 같았다·
나는 화조신옹의 손목을 덥석 잡은 다음 괴성을 지르며 밀어냈다·
“으아악!”
그런데··· 이게 됐다!
놀랍게도 화조신옹의 손이 밀리고 있었다·
심지어 그렇게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낼 필요도 없었다· 괴성을 지른 게 민망할 정도였다·
“···!”
“···!”
나도 화조신옹도 놀라움에 눈을 부릅떴다·
화조신옹의 손은 점점 밀려나 그의 얼굴 앞까지 갔다·
순간 나는 늘어난 간격만큼의 공간을 이용해 팔꿈치로 화조신옹의 턱주가리를 사정없이 까버렸다·
뻑!
찰진 소리와 함께 화조신옹이 고개가 팩 돌아갔다·
고도의 집중력과 함께 다시 시간이 느려졌다·
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 예전보다 조금 더 느리게 흘렀다·
예전엔 두 배 정도 느렸다면 지금은 세 배 정도 느렸다고나 할까·
나는 찰나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화조신옹이 당황한 틈을 타 다시 한번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두 눈을 찔렀다·
퍼퍽!
“헙!”
성공했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화조신옹은 발작적으로 나를 던져버리고 물러났다·
이어 양손으로 제 눈을 감싸며 괴로워했다·
“조공(爪功)이란 이렇게 쓰는 것이오!”
“죽여버리겠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화조신옹이 소리만 듣고도 나를 덮쳐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다 돌멩이에 걸려 털썩 넘어졌다·
콰곽!
날 대신해 조공을 맞은 동굴 석벽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백골추명조!’
오늘의 화조신옹을 있게해준 철판을 찢고 바위를 쪼개버린다는 바로 그 무공이다·
화조신옹이 이번엔 내가 넘어져 있는 아래로 손가락을 휘둘러 왔다·
나는 벌레처럼 데구르르 굴러서 피했다· 미친 이게 피해지다니·
콰콱!
돌바닥이 무슨 밭고랑처럼 뜯겨 나갔다·
“쥐새끼 같은 놈!”
분기탱천한 화조신옹은 주변을 닥치는 대로 휘저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내가 멀리 도망치기 전에 잡아 찢으려는 것이다·
뒷걸음을 치던 내 발에 강시가 걸렸다·
망자의 존엄이고 뭐고 나는 강시를 번쩍 들어 화조신옹에게 던졌다·
강시가 가볍다고 해도 시체인데 무슨 허수아비처럼 느껴졌다·
순간 바람 소리를 들은 화조신옹이 달려들며 양손을 질풍처럼 휘둘렀다·
처처처척!
눈 깜짝할 사이에 몇 번이나 휘둘렀는지 강시는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이미 걸레가 되어 버렸다·
그 틈을 타 나는 대여섯 걸음을 후다닥 물러나며 외쳤다·
“잠깐만!”
“누구 마음대로!”
“어차피 숨소리 때문에 어디 있는지 다 알잖소!”
“····!”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내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화조신옹의 손목을 잡아 밀어낼 때도 그렇고 강시를 집어 던질 때도 그렇고 무언가 몸에 큰 변화가 있었다·
마치 내가 엄청난 장사라도 된 것 같았다·
혹시나 싶어 바닥에 있는 돌멩이 두 개를 주워 손바닥 안에 넣고 힘을 주어 보았다·
‘퍼석’ 하는 소리와 함께 단단한 돌멩이가 호두처럼 부서졌다·
나는 충격으로 말을 잊지 못했다· 화조신옹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천지령의 힘이다·”
“내가 100년 공력을 가졌다고요?”
“정확히 말하면 천지령의 천년진기를 흡수한 상태지· 공력으로 바꾸려면 내공심법을 통해 꾸준히 운기행공을 해야 한다· 하면 네 놈이 무슨 무공을 익히든 20년 안에 천하십대고수의 말석 정도는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전 무공이라곤 일초반식도 모릅니다·”
“그래서 20년이라는 거다· 네 놈이 일류 정도만 되었어도 10년이 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20년 후면 마흔두 살쯤이다· 불과 마흔두 살에 천하십대고수의 말석을 차지할 수 있을 거라니 이게 무슨 엄청난 소리란 말인가·
“만약 공력으로 바꾸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네 놈의 뱃속에 길들지 않은 야생 황소 백 마리가 뛰어 다니는 것과 같다· 다스려서 필요한 때에 끌어낼 수 없는 힘은 온전히 너의 힘이 아니니라·”
“어쨌든 제가 엄청난 힘을 가졌다는 말 아닙니까? 황소 백 마리에 버금가는 힘을 이 뱃속에요·”
“기운이 세다고 황소가 호랑이를 이긴다더냐· 지금 당장도 너는 천지령의 천년진기를 취했지만 노련한 일류고수를 상대하기도 벅찰 것이니라·”
“제가 상승의 내공심법을 익히고 무림일절로 불리는 권장지공을 죽으라고 수련하면 그럼 혹시 10년 안에라도 천하십대고수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겁니까?”
“미안하지만 그런 고민은 더 할 필요가 없느니라· 너는 오늘 이 동굴 안에서 살아나가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그러면서 화조신옹이 한걸음 성큼 다가왔다· 나는 두 걸음을 물러나면서 말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
“어쩐지 노선배께서도 이제 호랑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성질 더러운 살쾡이 정도라면 모를까·”
“···!”
나는 두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린 다음 비스듬히 서서 무릎을 살짝 굽혔다·
이어 주먹을 손가락 끝에서부터 천천히 말아쥐고는 말했다·
“들어오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