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 황하를 건너다(7) >
꽝꽝꽝!
남궁유룡은 일장 높이의 허공에서 내리꽂는 그 찰나의 순간에도 새파란 번개를 무려 세 번이나 뽑아냈다·
한번은 상대의 정수리를 향해 수직으로 한번은 왼쪽 목을 향해 수평으로 마지막 한 번은 오른쪽 몸통을 향해 사선으로·
남궁세가 최강의 절기인 제왕검에 담아낸 검강(劍至)이었다·
번쩍이며 쏘아지는 검강도 검강이지만 그 속도가 눈으로 쫓기 어려울 만큼 빨랐다·
‘이것이 뇌검의 경지!’
그런가 하면 땅에서는 장초풍이 흡사 맹수가 사냥감을 덮치는 듯한 움직임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쭉 뻗은 그의 장검에서도 시퍼런 검기가 무지막지한 속도와 기세로 쏘아져 갔다·
과연 저걸 어떤 인간이 감당할 수 있을까 싶었다·
‘막상막하!’
하지만 두 사람의 가공할 검초는 붉은빛이 도는 적동곤(赤銀提) 두 자루에 번번이 가로막혀 버렸다·
두 자루의 검과 적동곤이 부딪힐 때마다 또다시 벼락이 치고 막강한 경파가 폭발하듯 터져 나가고 대기가 크게 일그러졌다·
만약 내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진작에 고막이 찢어지며 까무러쳤을 것이다·
두 자루 적동곤의 주인은 당연하게도 칠성군 야율극리였다
천하십검의 수좌를 다툰다는 두 검사와 야율극리의 생사대전은 흡사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범선의 사투를 연상케 했다·
그러나 범선은 위태롭기는커녕 능숙한 솜씨로 성난 파도를 피하거나 뚫거나 타고 넘으면서 헤쳐나가고 있었다·
천하의 남궁유룡과 장초풍을 상대하면서도 밀리지 않는 공력은 천마의 제자이니 무시무시한 마공을 익혀서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저 미친듯한 속도만큼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궁유룡과 장초풍도 믿을 수 없도록 빨랐지만 야율극리는 두 사람보다도 발은 반 보씩 적동곤은 반 초식씩 더 빨랐다·
그 약간의 차이가 혼자 두 사람을 상대할 수 있게 만들었다·
며칠 전 설인탁이 내게 말해준 시간의 틈이었다·
‘저게 어떻게 가능하지?’
천하십검의 반열에 들 정도면 이미 인체가 만들낼 수 있는 속도의 한계를 본 사람들이다·
그들이 천하십검의 수좌를 다툴 정도의 인물들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남궁유룡과 장초풍은 그렇게 되기까지 무려 팔십 년이 걸렸다·
그에 반해 야율극리는 두 사람보다도 삼십 년이나 젊은 쉰 살 남짓에 불과했다·
마공이 제아무리 상리를 벗어나 속성을 가능케 하는 방문좌도의 공부라고 해도 이게 정녕 말이 되는 그림인가·
순간 머릿속에서 번쩍하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만약 어떤 경로로든 그가 나처럼 죽간의 영기를 흡수했다면 모든 게 설명된다·
아니 그게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혜성처럼 나타나 명부삼귀와 편복은왕과 혈영노조를 차례로 무릎 꿇리고 이제는 장초풍과 남궁유룡의 협공까지 홀로 거뜬히 받아내는 괴수를 달리 어떻게 설명하겠나·
‘맙소사!’
그렇다면 대체 어떤 죽간의 영기를 흡수했을까?
일단 내 몸속에 있는 부적의 영기를 흡수한 건 아닌 것 같았다·
그건 지금으로부터 삼십 년 후에야 비로소 세상에 나타나니까·
결국 다른 죽간의 영기를 흡수했다는 말인데 이게 사실이라면 내가 세워 놓았던 가설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지금까지는 내 몸속에 화인으로 새겨진 부적의 영기가 모든 힘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몇 개나 더 있을지 모르는 나머지 죽간들은 그 힘을 쓰는 방법에 관한 기서였고·
그래서 시간을 느리게 흐르도록 보는 것 같은 이능력도 지닐 수 있었다·
한데 야율극리가 다른 죽간의 영기를 흡수하고도 나와 똑같은 능력을 가졌다면 지금까지의 가설이 무너지게 된다·
‘가만 뭔가 이상한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첫 번째 죽간도 그렇고 무림맹에서 운송하던 두 번째 죽간도 그렇고 나는 이것들을 전부 불태우면서 그 영기를 의도치 않게 흡수하고 갈무리했다·
그렇다면 전대 천마교주들은 어떻게 죽간의 마공들을 익혔을까?
그들도 나와 같은 방식이었다면 고대에 만들어진 죽간들이 지금까지 이어지며 존재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이건 언젠가 사마옥의 해준 말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논어가 유가의 성전(聖典)으로 추앙받는 것은 공자께서 직접 새겨 넣은 죽간본으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세·”
말인즉슨 죽간에 새겨진 내용 자체가 곧 핵심이요 보물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야율극리가 나처럼 죽간을 불태워 미지의 영기를 흡수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어떻게 성공했는지는 모르나 죽간에 새겨진 부적의 필사본을 손에 넣은 후 지난 수십 년간 심산유곡에서 내공심법처럼 익혔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이거다!’
충격과 함께 온몸에서 전율이 흘렀다·
야율극리는 천마성교도이자 천마교주의 제자였다·
그가 부적의 술법을 운용하는 것은 도통 아는 바가 없어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하는 나와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그 순간 사마옥의 일갈이 전음으로 들려왔다·
[어서 표행을 이어 가게!]
주저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설인탁과 석불원에게 연소교를 곁으로 데려오라는 신호를 재빨리 보냈다·
그들이 오는 동안 한참 혼전이 벌어지고 있는 전장을 둘러 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이종산과 운학진인이 명부삼귀를 상대로 건곤일척의 승부를 펼치는 중이었다·
다섯 명이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 번갈아 가며 서로를 향해 맹공을 퍼붓고 있으니 아마도 수백 초식의 공방을 이미 주고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명부삼귀의 명성이 제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장검을 든 이종산과 운학진인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세 사람은 점점 패색이 짙어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북해투왕이 편복은왕과 하나로 뒤엉켜 있었다·
두 사람은 각각 권법과 장법을 서로에게 죽으라 폭사했는데 어쩌다 감정이 격해졌는지 원색적인 욕까지 주고받으며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싸우고 있었다·
십중팔구 북해투왕이 평정심을 깰 요량으로 먼저 편복은왕을 자극했을 것이다·
백전노장인 편복은왕 또한 만만치 않아서 더 심한 욕으로 돌려 주었을 것이고·
그래서인지 감정이 잔뜩 실린 두 사람의 싸움은 마치 두 척의 전선(戰船)이 서로의 꼬리를 잡고 돌며 대포를 꽝꽝 쏘아대는 것 같았다·
그 전율과 공포가 가득한 전장의 한쪽 구석에 보통의 말보다 몸집이 훨씬 큰 두 필의 말이 돌기둥에 묶인 채 이리저리 날뛰고 있었다·
편복은왕이 번갈아 타고 온 용마였다·
근처에는 용마만큼은 아니지만 준마를 탄 흑풍사의 마적들이 천지로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용마 두 마리에 쓸만한 흑풍사의 말까지 빼앗아 타면 넷이 협곡을 달리기엔 충분했다·
나는 곁으로 다가온 온 네 사람에게 짧게 외쳤다·
“연 소저는 나를 따라오고 두 분 선배님과 미나모토는 흑풍사 놈들의 말을 한 필씩 빼앗아 타도록 하십시오!”
그리고는 곧장 용마가 있는 곳으로 신형을 쏘았다·
가는 동안 좌우에서 달려들던 마적 두 명의 허리를 번개처럼 베어 넘겼다·
잠시 후 연소교와 내가 용마를 하나씩 차지해 올라타고는 말머리를 돌려 전장을 빠져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놈들이 도망친다!”
대기가 떵떵 울리는 누군가의 일갈과 함께 나와 연소교의 도주 계획이 만천하에 까발려 졌다·
그 순간 일백 마군들 중 일부가 전장으로부터 득달같이 몸을 빼서는 무서운 속도로 달려왔다·
그들과 싸우던 정도무림 쪽 노강호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등을 노렸다·
마군들은 결국 정도무림 쪽 고수들에게 따라 잡힐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가 그들과 먼저 몇 차례 격돌을 해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그만큼 시간이 지체되고 시간이 지체될수록 전장을 빠져나가 도망치는 것도 어려워지게 된다·
그때였다·
“우리 역할은 여기까지인 것 같군!”
찰싹! 찰싹!
설인탁이 나와 연소교가 탄 용마의 궁둥짝을 손바닥으로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리고 나는듯 달려오는 마군들을 향해 마주 달려갔다·
석불원과 미나모토는 이미 한발 앞서 튀어 나가 가장 먼저 달려온 푸른 낯빛의 노마두를 향해 도검을 힘차게 뻗어가는 중이었다·
깡! 까가가강!
격렬한 다섯 합이 질풍처럼 펼쳐졌을 때는 설인탁도 뒤이어 달려오는 짐승 같은 용모의 노마두와 격돌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세 사람의 헌신적인 모습을 뒤로하고 나와 연소교는 말을 달렸다·
그리고 흑풍사의 마적들과 표왕부의 호위무사들과 정도무림 쪽 젊은 고수들이 하나로 뒤엉켜 싸우는 전장의 한복판을 가로질렀다·
내가 도주하려는 걸 알아차린 주변의 마적들이 동귀어진이라도 하려는 듯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그 바람에 나는 나대로 연소교보다 일 장 정도 앞서 달리며 길을 열어야 했다·
길을 여는 방식은 잔인하면서도 간단했다·
이종산으로부터 하사받은 월인소야검으로 한 명씩 베어 넘기며 전진하는 것이었다·
“으악!”
“아악!”
“크악!”
잠깐 사이 대여섯 명의 마적들이 허리와 어깨와 목에서 피를 뿜으며 낙마했다·
지옥도가 펼쳐지는 전장을 거의 벗어나려 할 때쯤이었다·
십여 장 앞쪽으로부터 칠척장신의 장한이 상체를 말머리에 착 붙인 채 전속력으로 마주 달려오는 게 보였다·
좌하방으로 쭉 뻗은 손에는 커다란 만곡도가 들려있었다·
그는 본래 흑풍사의 두령인 북두혈성의 곁을 지키던 자였다·
아마도 부두령쯤 되는 모양이었다·
재빨리 뒤쪽을 돌아보니 일백 마군들 중 다섯 명 정도가 전장에서 몸을 빼 맹렬한 속도로 쫓아오고 있었다·
무림맹의 노고수들이 다시 그들의 뒤를 바짝 쫓았지만 역시나 공방을 주고받느라 지체되는 게 문제였다·
저 부두령을 단숨에 베어 넘기지 않으면 전장을 빠져나가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흑풍사의 부두령을 어떻게 일검에 쓰러뜨릴 수 있겠나·
그건 남궁세옥이라도 어려울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남궁세옥은 지금 한쪽에서 두령인 북두혈성과 둘만의 생사대결을 숨가쁘게 펼치는 중이었다·
“만약 내가 멈추거나 지체하는 기미가 보이면 기다리지 말고 혼자라도 달려 가시오!”
나는 연소교에게 재빨리 지시를 내린 후 월인소야검을 오른쪽 바깥으로 뻗었다·
이어 코앞까지 달려온 흑풍사의 부두령을 향해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마상에 있는 부두령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공중제비를 돌며 벼락처럼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놈의 머리통이 어깨에서 분리되어 아래로 뚝 떨어져 버렸다·
나는 주인의 몸통만 태운 채 달리는 말과 팔 하나의 거리를 두고 빠르게 지나쳤다·
건너편 땅에는 협봉검을 뽑아든 남궁소소가 멋들어지게 착지를 한 후 나를 보고 있었다·
대부분 아래로 뛰어내리는 와중에도 그녀는 일부 궁사들과 함께 마지막까지 절벽 위에서 대기했었다·
그 바람에 안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녀가 외쳤다·
“내 걱정은 말고 앞만 보고 달려요!”
***
황하 인근의 드넓은 초원에서 가끔 태어난다는 이 커다란 말의 명칭에 용(龍)자가 붙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초반의 쏜살같은 속도도 속도지만 놈은 벌써 한 시진째 쉬지 않고 달리는 중이었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고 등에서는 전설 속 한혈보마처럼 붉은 땀을 비 오듯 흘러내리는 데도 꾀를 부리는 법이 없었다·
이러다가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져서는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숨이 꼴짝 넘어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마저 들 정도였다·
덕분에 경공을 펼치거나 말을 타고 마지막까지 따라붙는 추적자들을 확실하게 따돌릴 수 있었다·
어느 순간 미로 같던 협곡이 끝나고 거대한 산이 눈앞에 떡하니 나타났다·
그것도 황톳빛의 민둥산이 아니라 제법 숲이 울창하게 우거진 산이었다·
까마득한 꼭대기에서는 눈 덮인 설봉이 반짝이는 별들과 밤하늘을 배경으로 세상을 신령하게 굽어보고 있었다·
연소교는 산으로 곧장 올라가지 않고 비탈을 따라 길도 없는 숲속을 한참이나 달렸다·
그러다 갑자기 말을 뚝 멈추었다·
“왜 그러시오?”
“역쌍석(逆雙石)이 보이면 십리지옥이 시작된 것이니 오직 삼보(三寶)를 품은 연자만 그 문을 통과할 수 있으리라·”
그녀의 시선이 홀린 듯 향한 곳을 무심코 보았다·
그곳에 아래가 좁고 위는 오히려 두꺼운 두 개의 커다란 바위기둥이 일장 간격으로 버티고 있었다·
불현 듯 천룡표국에서 연소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천마대총은 성보를 세 개 이상 가진 자에게만 출입이 허락되며 그 시작은 무려 십 리 밖에서부터라던가?
만약 그렇지 못한 자가 함부로 발을 들여놓았다가는 제아무리 고수라도 산산조각이 난다고도 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사마옥은 소위 천마라 불린 천마성교의 전대교주들이 대대로 죽간에 새겨진 세 권의 마경기서들을 익혔다고 했다·
따라서 삼보를 품은 연자란 아무래도 천마교주를 말하는 것 같았다·
기묘한 지형이 자아내는 분위기에 압도당한 나와 연소교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말에서 내렸다·
이어 고삐를 잡아끌며 잔뜩 긴장한 채 두 개의 커다란 돌기둥 사이를 천천히 통과했다·
우려했던 그 어떤 일들도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숲은 울창했고 밤하늘은 평화로웠으며 달과 별은 아름답게 빛나고 반짝였다·
그러나 우거진 숲을 조금 벗어나 보자며 반 각 정도 비탈을 거슬러 오르자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어찌 된 영문인지 풀벌레 소리가 갑자기 뚝 끊어져서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드넓은 숲을 가득 채운 것은 귀곡성을 연상케 하는 바람 소리였다·
무언가 이질적인 기운을 느꼈는지 두 필의 용마도 갑자기 멈춰 서서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려고 했다·
“덩치는 산만한 놈들이 무슨 겁이 이렇게 많아!”
고삐를 잡고 억지로라도 한 걸음 더 옮겨 놓았을 때였다·
말발굽 아래에서 ‘빠각’하고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서둘러 아래를 살펴보니 수북하게 쌓인 낙엽들 사이로 해골바가지와 각종 뼈다귀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얼핏 보아도 해골만 백여 개는 족히 될 것 같았다·
옆에는 갖가지 모양의 병장기들도 함께 나뒹굴었다·
그중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것들이 여럿 있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뼈다귀들이며 병장기가 모두 시커멓게 그을려 있었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