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 황하를 건너다(5) >
무림맹주를 비롯한 정도무림인들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말미암아 석림협곡엔 또다시 한줄기 광풍이 휘몰아쳤다·
정도무림인들 중에는 중장년인들은 물론이거니와 머리가 하얗게 센 노강호들도 적지 않았다·
맹의 타격대뿐만 아니라 각파의 최고수들이 대거 동원되었다는 걸 의미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구대문파의 장문인들까지 여럿 보였다·
이는 칠성군 야율극리가 이끌고 온 일백의 마교쪽 고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공을 익히면 다 저렇게 되는지 온갖 기괴한 용모와 복장을 한 노마두들 천지였다·
장담하건대 은거를 깨고 나타나는 것만으로도 강호를 떨어 울릴 대마두가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머릿수로나 고수들의 숫자로나 위치로나 우리와 무림맹 쪽의 우세가 확실해 보였다·
“서문룡 남궁세옥·”
“하명 하십시오!”
“하명 하십시오!”
“한 명이라도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그 즉시 강전을 쏟아붓도록·”
“존명!”
“존명!”
설산신검 장초풍의 명령에 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서문룡과 남궁세옥이었다·
서문룡은 원래 무림맹 최강 타격대 중 하나인 묵혼귀갑대의 대주였다·
그의 친구인 남궁세옥은 용봉지회의 수장 출신으로 옛 실력을 살려 후기지수들이 포함된 별동대를 임시로 맡은 모양이었다·
장초풍은 이어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이 포함된 십수 명의 수뇌부와 함께 이십여 장 높이의 절벽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던졌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감이 남다르다 보니 흡사 하늘에서 무슨 유성우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특히 천하십검의 수좌를 다투는 장초풍과 남궁유룡은 등에 장검을 한 자루씩 가로질러 메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더할 나위 없이 든든했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젊은 시절 두 사람이 강호를 종횡할 때도 저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싶었다·
한편 서문룡과 남궁세옥이 이끄는 타격대와 그들을 중심으로 한 나머지 병력은 명령에 따라 모두 절벽 위에서 아래를 향해 강궁을 겨눈 채 대기했다·
그 바람에 편복은왕이 이끌고 온 흑풍사의 마적 이백과 야율극리가 이끌고 온 마군 일백은 순식간에 발이 묶여 버렸다·
이윽고 우리 쪽 진영 바로 앞으로 떨어진 장초풍 등은 내가 야율극리와 대치한 곳으로 다가와서 섰다·
나는 황망한 얼굴이 되어 포권지례부터 올렸다·
“표사 이정룡 맹주님과 여러 노선배님들을 뵙습니다·”
“고생이 많군·”
“대체 여긴 어떻게 아시고····”
“나야 총군사께서 하자시는 대로 했을 뿐이네·”
장초풍은 공(功)은 사마옥에게 넘기고 자신은 낮추었다·
몰론 나는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다만 사마옥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전쟁을 시작할 때는 마지막 결전의 순간을 염두에 두고 작은 계획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야 한다네· 그래야 돌발상황이 발생해도 길을 잃지 않고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 수 있지·”
“혹시 저희를 미끼로 천마성교의 최고수들만 따로 유인해 낸 것입니까?”
“그 역시 계획 속에 있었네· 다만 자네들이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제 역할을 해줄 줄은 몰랐지· 덕분에 일이 아주 수월해졌고·”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이해해 줘서 고맙네·”
나는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다·
남궁소소가 말한 것처럼 사마옥에게는 무림맹 총군사로서 그가 해야할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 일은 애초부터 누가 등 떠밀어 시작한 게 아니었다·
순전히 내가 자원한 일이었다·
사마옥은 단지 그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고자 이중삼중으로 이용했을 뿐·
“사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저와 천살마녀가 한 일이라곤 별로 없습니다· 회수를 앞두고는 진왕야의 신세를 졌고 탑하림과 황하를 지날때는 두 분의 선배 표사님들께서 찾아와 이끌어 주셨고요·”
“진왕야와 명표들께서 위험을 무릅쓰고 나선 것 역시 지난날 자네가 했던 일들이 초래한 결과일세· 지나치게 겸양할 필요 없네·”
“그거야말로 너무나 민망한 말씀입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닐세· 다만 명성이 자자한 북해투왕을 여기서 뵙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네· 더욱이 그가 자네의 사부님이셨을 줄은·”
그러면서 사마옥은 북해투왕 혁방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어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묵례까지 보냈다·
혁방세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와중에도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답례를 했다·
‘왜 하필 지금 저런 얘길!’
내가 혁방세의 제자라는 건 밝혀져도 아무 상관이 없다·
하지만 적들과 대치한 상황에서 혁방세의 존재가 부각되는 건 조금 다른 문제였다·
공교롭게도 지금 이 자리에는 곤륜파의 장문인인 운학진인도 와 있었다·
그리고 무림 사정에 밝은 이들은 모두가 곤륜파와 혁방세 사이의 은원을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오랜 세월 강호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장내에 있던 사람들 전부가 혁방세와 운학진인을 번갈아 보았다·
불공대천지수(不共載天之響)· 옛말에 이르길 부모를 죽인 원수와는 한 하늘 아래 살지 않는다고 했다·
무림문파에서는 사부가 곧 부모다· 제자는 사부에게 자식과도 같고·
만약 어느 부모가 자식을 죽인 원수를 오랜 세월 찾아다니다가 생각지도 않은 장소에서 갑자기 맞닥뜨린다면 어떻게 할까?
전해 들은 바에 따르면 혁방세의 손에 죽은 곤륜파의 도사는 운학진인이 직접 데려다 키우고 가르친 다섯 번째 제자였다·
혁방세가 사형을 죽이자 충격에 빠진 나머지 동굴로 들어가 십 년간이나 면벽수련을 한 여도사는 운학진인의 여섯 번째 제자였고· 과연 운학진인이 어떻게 나올지 나 역시도 초조하기 짝이 없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물론 지금 혁방세에게는 내가 준 보은패가 들려 있기는 했다·
당연히 그건 옛날 곤륜파의 장로가 해남파에 준 것이었고·
한편 우연히 눈에 들어온 남궁유룡의 눈동자가 다른 누구보다 더 반짝거리는 게 보였다·
혁방세가 내게 사부라면 남궁유룡에게는 의제였다·
나 못지않게 그도 혁방세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 남궁유룡은 사마옥이 혁방세를 걸고넘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의아해하거나 화가 난 표정이 아니었다·
순간 머릿속에서 번쩍하고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전날 무림맹에서 해남파의 소년 장문인은 내게 술을 가르쳐 달라며 그 대가로 곤륜파의 보은패를 주었다·
술자리에서 왜 하필 곤륜파의 보은패를 주는 것이냐고 물었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공교로웠으니까·
하지만 소년 장문인은 무슨 이유에선지 절대 가르쳐 주지 않았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제야 대충 알 것 같았다·
소년 장문인은 짝사랑하던 남궁소소를 찾아가 내게 감사 인사를 표하고 싶다며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조언을 구했을 것이다·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된 남궁유룡은 이때다 싶어 곤륜파의 보은패를 제시 하도록 했다·
곤륜파의 보은패가 내 수중으로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혁방세에게 전해질 것을 짐작했고·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 사마옥이 갑자기 혁방세를 걸고 넘어지는 건 그때의 일이 초래한 결과였다·
정도무림의 모든 정보를 다루는 무림맹 총군사 답게 그는 남궁유룡과 혁방세의 관계를 진작부터 눈치챘을 것이다·
그리고 혁방세가 나의 사부라는 것까지 알게 된 지금 전쟁을 앞두고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내분의 불씨를 확실하게 매듭짓고 가려는 것이다·
만약 운학진인이 연대의식이 강한 구대문파의 장문인들과 함께 혁방세를 징치 하려 하고 이에 대응하여 나와 남궁유룡과 이종산이 공동전선을 펼치는 불상사가 벌어지면 안 되니까·
설사 지금 당장 격돌하지 않더라도 서로를 완전히 신뢰하고 그로 말미암아 전력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일 수도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각자의 시각으로 상황을 지켜보는 가운데 혁방세가 먼저 운학진인을 향해 포권지례를 올렸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못 본 사이 많이 초췌해지셨구려·”
“장문진인께선 그때보다 더 늙으셨고요·”
서로의 변한 모습을 말하는데 공격적이라기보다는 어쩐지 세월의 무상함을 말하는 노인들의 애처로움이 느껴졌다·
“새로운 인연도 많이 쌓으신 것 같고·”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아무래도 저의 노력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무량수불· 인연이란 본디 전생에 다 정해진 것· 억지로 구한다고 구해지는 것도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도 아니외다· 오늘 귀하와 내가 이렇게 만난 것처럼 말이오·”
“그때 일은····”
“혹시 청해성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소이까?”
“그걸 어찌?”
“그렇다면 시간을 내어 본파에도 한번 들러 주시겠소?”
“예?”
“오래전 서녕에서 비명횡사한 제자의 영전에 향불이 꺼진 지 오래라오· 귀하가 찾아와 한 대 사라주시면 감사하겠소이다·”
비명횡사란 뜻밖의 재앙이나 사고로 말미암아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간 죽음을 이르는 말이었다·
운학진인은 방금 제자의 죽음을 살해 당한 것이 아니라 사고라고 말한 것이다·
향을 사라 달라는 건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죽은 혼령을 위로해 달라는 뜻이고·
생각지도 못한 운학진인의 반응에 혁방세는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지켜보는 사람들 모두가 그와 똑같았다·
혁방세도 혁방세지만 나는 운학진인 역시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한데 운학진인은 혁방세가 청해성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곤륜파의 오래된 물건 하나가 귀하의 제자인 풍운비룡의 손에 들어갔음을 알고 있소이다· 풍운비룡이 무림맹을 떠나기 전날 밤 해남파의 소년 장문인께서 나를 찾아와 양해를 구하시더군· 이미 결정한 일이지만 말씀을 드리는 것이 도리일 것 같다고·”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혁방세에게 보은패가 있다는 걸 운학진인이 진작부터 알았다고?
이건 사마옥과 남궁유룡은 물론이거니와 구대문파의 다른 장문인들도 까맣게 몰랐던 눈치였다·
더불어 나는 소년 장문인의 사려 깊음에 한편으로는 놀라고 한편으로는 부끄러웠다·
그는 보은패를 내게 그냥 넘길 수도 있으나 기왕이면 본래의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어쨌거나 운학진인은 혁방세를 곤륜파로 초대하면서 그와 지난날의 은원에 대해 더는 따질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사마옥의 고심 어린 질문에 자신의 방식으로 대답을 해준 것이다·
사마옥과 남궁유룡은 어려운 결단을 내려준 운학진인에게 말없이 묵례를 보내는 것으로 감사 인사를 대신했다·
잠깐 눈이 마주치는 틈을 타 나와 이종산도 묵례를 올렸다·
혁방세는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복받치는 감정을 억누르는 중임을 모를 사람은 없었다·
한편 볼일을 끝낸 운학진인은 맹주 장초풍을 향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초풍은 그제야 야율극리와 그가 이끌고 온 일백 마군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귀하가 그 유명한 칠성군이시로군·”
“저를 아시는지요?”
“적룡마제(赤龍魔帝)의 일곱 제자들 중에 요나라 왕족 출신이 있다는 얘긴 들었소· 다만 그들은 지난 정마대전 당시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다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은 걸로 알았는데 한 명이 용케도 살아 있을 줄이야·”
천마는 무림맹주처럼 천마성교주로서의 직책을 말하는 것이다·
천마에게도 교주이기 이전에 강호인으로서의 별호가 있었다· 그게 적룡마제였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의 본래 이름은 강호에 알려진 바가 없었다·
“타인의 판단에 내 운명을 맡기면 우물에서 나와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수가 있지요· 위기일수록 상식을 의심하는 것이 저의 방식입니다·”
“일곱 제자들 중엔 어린 칠성군이 가장 용맹하고 지혜롭다는 소문이 돌더니만 과연 명불허전이었나 보구려·”
“맹주께서도 여전하시군요·”
“우리가 만난 적이 있소이까?”
“설산신검 아니 그 시절엔 설산검객으로 불렸지요· 명성이야 천둥소리 듣듯 익히 들었었고 실제로 뵌 적도 있습니다·”
“이 몸은 기억에 없소만·”
“사부님께서 천하십대고수들 중 정도무림 쪽의 여섯 고인들과 일왕봉(一王峰)에서 홀로 생사대전을 치르실 때 멀리서 지켜보던 설산 검객의 모습이 떠오르는군요·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아래로 늘어뜨렸는데 그야말로 사신을 보는 듯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나이가 지금의 저와 비슷하셨겠군요· 평생을 독보강호 하는 협객으로만 사실 줄 알았는데 이렇게 무림맹주가 되어 정도무림을 호령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귀하가 그 자리에 있었단 말이오?”
장초풍은 진심으로 놀란 것 같았다·
눈치를 보아하니 야율극리는 어딘가에 숨어서 천마의 마지막 싸움을 지켜본 모양이었다·
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자정 무렵부터 시작된 생사대전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비로소 끝났지요· 홀로 다섯 고인을 쓰러뜨린 후 당신께서도 치명상을 입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시던 사부님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천마의 죽음에 관해 수많은 설이 존재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었다·
전생에서도 무림 사정에 정통한 표사들에게 수없이 물어보았으나 누구도 정확히 알지 못 했다·
한데 그가 일왕봉이라 불리는 어느 산봉우리에서 혼자 천하십대고수들 중 정도무림 쪽의 여섯 명과 생사대전을 치렀다고?
다른 건 전부 제쳐두고서라도 혼자 천하십대고수들 중 여섯 명의 협공을 받으면서 그중 다섯을 쓰러뜨렸다니·
그런 압도적인 격차가 현실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게 잘 믿어지지 않았다·
그게 정녕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경지란 말인가·
무림맹이 왜 그토록 천마성교의 발호를 두려워하는지 명부삼귀 편복은왕 혈영노조 칠성군 등이 왜 죽음을 무릅쓰고 성보를 노리는지 마도천하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그제야 확실히 이해가 되었다·
한편 야율극리가 말한 천하십대고수들은 지금은 모두 죽어서 전설이 되어버린 전 시대의 인물들이었다·
천마와 전대 천하십대고수들의 죽음에 얽힌 비사가 야율극리의 입을 통해 밝혀지자 사람들은 적아를 막론하고 모두가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삼십여 년 후 또 다른 전설로 불리게 될 생사대전이 황토고원 속 어느 석림협곡에서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그 전설 속에는 나도 등장하게 된다·
또한 삼십 년 후 강호무림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나에 대한 평가는 달라진다·
만약 마도천하라면 나는 배교자와 함께 성보를 훔쳐 달아나다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표사 출신의 도적으로 기록될 것이다·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천만다행으로 든든한 지원군들이 대거 달려와 준 덕분에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한데 낭패한 기색이 역력한 흑풍사의 두령 북두혈성과 달리 야율극리는 무슨 이유에선지 전혀 초조한 기색이 아니었다·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