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화· < 황하를 건너다(4) >
퍼엉!
굉음과 함께 모닥불이 수백 개의 불덩어리로 변해 덮쳐왔다·
덕분에 나는 간발의 차이로 비격쌍뇌창을 출수할 기회를 놓쳐 버렸다·
대신 양손을 난상으로 휘두르며 재빨리 두 걸음을 물러났다·
그 순간 불덩어리들이 사라진 허공에서 편복은왕의 신형과 함께 은빛 구체가 벼락 치듯 떨어졌다·
구천홍염장을 정면으로 맞서지 않기 위한 꼼수였다·
편복은왕의 이런 임기응변은 오히려 나로 하여금 자신감을 갖게 했다·
‘그렇단 말이지!’
나는 귀영무의 보법을 펼치며 재빨리 벼락을 피했다·
살짝 스치는 것만으로도 옆구리가 하얗게 변하면서 뼛속까지 얼려버릴 정도의 한기가 전해졌다·
그때쯤엔 바깥으로 크게 휘둘러진 내 오른손이 눈앞으로 뚝 떨어진 편복은왕의 왼쪽 측두부를 향하고 있었다·
편복은왕은 노련하기 짝이 없었다·
첫 번째 일격을 피하는 순간 내가 구천홍염장으로 반격할 것을 알고는 상체를 착 가라앉히며 또다시 장력을 떨쳤다·
퍼엉!
은빛 구체의 벼락은 간발의 차이로 앞서 튀어 오른 내 발아래 허공을 헛되이 때리고 지나갔다·
그사이 나는 편복은왕의 코앞까지 날아갔다·
이어 구천홍염장을 펼치는 대신 금나수의 수법으로 편복은왕의 은발 머리카락을 덥석 잡아채는 데 성공했다·
‘이게 된다고?’
오히려 내가 더 놀랐다· 나는 몸을 바깥으로 뒤집으며 편복은왕을 무 뽑듯 땅에서 통째로 쑥 뽑아 올렸다·
대경실색한 편복은왕이 내 가슴을 향해 일지(一指)를 뻗었다·
그대로 심장을 뚫어 일격에 숨통을 끊어버리려는 것이다·
“헛!”
심장을 뚫기는커녕 옷자락도 뚫지 못하고 그의 손가락이 뚝 부러졌다·
미안하지만 나는 아직 용린신갑을 연소교에게 빌려주지 않은 상태였다·
편복은왕의 역습이 수포로 돌아가는 사이 그를 허공에 거꾸로 띄우는 것까지 성공한 나는 다시 사력을 다해 끌어당기며 땅바닥에다 메다꽂았다·
초식도 뭐도 없는 순전히 시간을 느리게 보는 이능력과 가공할 공력만을 이용한 임기응변의 일격이었다·
쿵!
편복은왕은 내게 머리채를 잡혀 자기 몸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에서도 양손을 뻗어 땅을 치는 신기를 보였다·
덕분에 개구리처럼 패대기쳐지는 수모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
나도 놀고만 있지는 않아서 오른쪽 발로 그의 엎어진 머리통을 냅다 걷어찼다·
편복은왕은 반탄력을 이용해 벌떡 일어나며 발길질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그리곤 황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나는 승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월인소야검을 뽑아 휘둘렀다·
“죽엇!”
편복은왕은 황망한 와중에도 투골음풍장으로 반격하는 노련함을 보였다·
이번에야 말로 나는 가슴에 일격을 당하고 말았다·
퍼엉!
격장의 순간 호신강기를 잔뜩 끌어 올린 데다가 용린신갑까지 입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뱃속의 내장이 통째로 얼어붙는 것 같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뼈를 뚫고 들어간다는 투골음풍장의 한기는 이미 잠에서 깨어나 폭주하고 있던 영기의 상대가 되질 않았다·
다만 내 신체가 막강한 장력을 감당하지 못해 삼 장이나 튕겨 날아갔을 뿐
그리고 그곳에 하필 북두혈성이 말을 탄 채 서 있었다· 그는 내가 반쯤 시체가 되어 날아오는 줄 알았던 것 같았다·
내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두 동강 내버릴 기세로 휘둘러 오는 그의 만곡도에는 전력이 담겨 있지 않았다·
사자가 토끼를 사냥할 때도 최선을 다하는 법이거늘·
‘한번 죽어 봐라!’
나는 체공 상태에서 다시 한번 몸을 벼락처럼 뒤집으며 그의 만곡도를 피했다·
동시에 사력을 다해 월인소야검을 깊숙이 횡으로 휘둘렀다·
핏!
예상은 했었지만 북두혈성 역시 만만한 인간이 아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는 이번에야말로 전력을 다해 고개를 꺾으며 검을 피했다·
그러나 검끝이 목덜미를 스치는 것만은 어쩌질 못했다·
새끼손가락 길이의 칼자국과 함께 붉은 피가 주르륵 쏟아져 내렸다·
놀란 그가 말과 함께 황망히 뒷걸음질 치며 손으로 자신의 목을 덮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는 손바닥 사이로 줄줄 흘러내렸다·
“이런 망할!”
북두혈성은 새파란 애송이로 보았던 내게 검을 맞았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것도 옆에서 구경을 하고 있다가 날벼락 맞듯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편복은왕이 눈동자에서 화염을 쏟아내며 나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손자뻘인 내게 머리채를 잡혀 패대기쳐질 뻔 했으니 얼마나 울화통이 터지겠나·
그나마 구천홍염장도 아닌 개싸움식 잡기에·
하지만 이건 나로서도 용린신갑이라는 기물과 운에 기댄 측면이 컸다·
‘이거 괜히 성질만 돋운 거 아냐?’
한편 내가 두 명(?)의 초절정 고수들과 싸우는 사이 흑풍사의 마적 이백여 명은 네 명을 상대로 차륜전을 펼치며 파상적인 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석불원 설인탁 미나모토 연소교는 설인탁의 주도하에 석벽을 등지고 반원 모양의 검진을 펼치며 사력을 다해 버티는 중이었다·
앞에는 벌써 대여섯 명의 마적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십중팔구 석불원 설인탁 미나모토의 솜씨일 것이다·
정말 대단한 인간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흑풍사의 마적 이백여 명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화가 정수리 끝까지 솟구친 편복은왕과 북두혈성이 나를 상대로 합공을 펼치려 했다·
체면이고 뭐고 생각할 때가 아닌 것이다·
“에라 모르겠다· 씨발!”
나는 나대로 월인소야검을 고쳐 잡았다·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었다·
그때였다·
마지막 남은 햇볕 한 줌이 비추고 있는 석벽 꼭대기로부터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흑풍사의 진영으로 뚝 떨어졌다·
뻐벅!
쇠몽둥이로 사람 머리를 치면 이런 소리가 날까?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타격음과 함께 마상에 있던 마적 두 명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뚝 떨어졌다·
그리곤 두 눈을 부릅뜬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목이 비정상적으로 꺾인 채 널브러진 것이 아무래도 즉사한 것 같았다·
도대체 무엇에 어떻게 당했기에 눈을 감을 사이도 없이 숨통이 끊어진 것일까?
흉수는 흑풍사의 진영을 돌풍처럼 휘젓고 다니며 닥치는 대로 때려눕히고 있는 작은 체구의 괴인이었다·
뻑! 뻐버벅! 뻑뻑!
“으악!”
“아악! ”
“크악!”
뻐버버벅! 뻑!뻑!뻑!
“뒤로 물러나라!”
“방원진을 펼쳐라!”
“전열을 재정비하라!”
중간 간부쯤 되는 놈들이 앞다투어 고래고래 악을 써댔다·
마적들은 말을 탄 채 우왕좌왕하면서도 진을 크게 벌려갔다·
그 와중에도 괴인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했다·
타격음이 요란하게 울릴 때마다 마적들은 낫 맞은 풀 모가지처럼 뚝뚝 떨어졌다·
잠시 후 놈들이 절벽으로부터 한참이나 멀어지고 군집의 밀도 또한 성글어지자 그제야 괴인의 정체가 드러났다·
잠깐 사이 혼자서 무려 십수 명의 말 탄 마적들을 땅바닥에 때려눕힌 후 옷자락에 묻은 먼지를 펑펑 털고 있는 괴인은 놀랍게도 늙고 빼빼 마른 거지였다·
그리고 내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사부님!”
갑작스러운 내 외침에 적아를 구분할 것 없이 모두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특히 석불원 설인탁 미나모토 연소교는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누가 네 사부님이야?”
“대체 여긴 어떻게 오신 겁니까!”
“어떤 천하의 꼴통 같은 표사놈이 온 강호를 휘젓고 다니는 바람에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곤륜산으로 가신 게 아니었습니까?”
“네 놈은 표행 중에는 잠을 안 자느냐?”
“사부님····”
“내 이래서 사승의 관계를 맺지 않으려 했거늘· 그 놈의 오향장육 때문에·”
늙은 거지는 내가 준 보은패를 들고 청해성 곤륜산으로 떠났던 북해투왕 혁방세였다·
위기의 순간 생각지도 않은 지원군을 만난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반면 여전히 그가 누군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모두가 그저 어리둥절해 할 뿐이었다·
다만 내가 사부라고 부르는 걸 보고 막강한 아군이 나타났음을 깨달은 석불원과 설인탁 연소교 미나모토의 표정이 급격하게 밝아졌다·
그때 편복은왕이 북해투왕에게 아는 체를 했다·
“풍운비룡에게 비영문의 비기를 전수해준 늙은이가 나타난 모양이로군· 별호가 북해투왕이라고 했던가?”
북해투왕이라는 말에 석불원과 설인탁이 흠칫 놀랐다·
천하십대 권사 중 한 명인 북해투왕이 나타난 것도 놀랍지만 그와 내가 사승의 관계라는 게 더욱 놀라웠을 것이다·
“노인장께서는 투골음풍장으로 유명한 은박쥐인지 금박쥐인지 하는 분이시고요·”
“대단한 무공이오만 대세를 바꿀 수는 없을 것이오· 지금이라도 저 고집불통의 제자놈을 달래보는 게 어떻겠소이까?”
“늙어서 그런지 아무래도 머리 돌아가는 게 좀 느리시군· 내가 어떻게 여길 알고서 찾아왔다고 생각하시오?”
그 순간 우리가 달려온 뒤쪽 협곡으로부터 흑풍사가 나타났을 때와 똑같은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나타난 것은 오십여 명의 중무장한 기마인들이었다·
가장 앞줄에는 장검을 등에 가로질러 멘 노인이 백마를 탄 채 위풍당당하게 달리고 있었다·
“국주님!”
흡사 산이 협곡을 밀고 들어오는 것 같은 기세의 주인공들은 이종산을 필두로 그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표왕부의 호위무사들이었다·
물론 표왕부의 호위장인 흑살객 가뢰압도 있었다·
살면서 저 저승사자같은 양반이 이렇게까지 반가웠던 적은 없었다·
북해투왕에 이어 이종산까지 나타나자 석불원과 설인탁과 연소교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특히 연소교는 그야말로 날아갈 것 같은 얼굴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미나모토는 연소교의 설명을 듣고서야 얼굴이 활짝 피었다·
“표왕!”
국주님이라는 한마디에 새로 등장한 고수의 정체를 알아차린 흑풍사의 단주 북두혈성이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편복은왕의 얼굴도 그제야 서서히 굳어갔다·
북두혈성은 아예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북해투왕의 놀라운 신위를 눈앞에서 목격한 데다가 천하십검 중 한 명이 휘하의 정예고수 오십까지 이끌고 왔으니 당혹스러울밖에·
이윽고 말들이 질주를 멈추었다· 앞서 흑풍사가 등장할 때처럼 신기막측한 기마술을 선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표왕이라는 이름만으로 이미 좌중의 공기를 묵직하게 짓눌렀다·
이종산은 천천히 사방을 둘러 보았다·
쓰러진 자들이 전부 흑풍사의 마적들임을 확인한 그가 내게 물었다·
“다친 곳은 없느냐?”
“국주님께서는또 어떻게!”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표행을 아들에게 맡기며 추적의 실마리 하나 남기지 않을 비정한 아비로 보았더냐?”
“천리추향!”
강호의 모든 표국들은 표물을 잃어버렸을 때에 대비해 자신들만의 비법으로 만든 미세한 향을 뿌려 놓는 경우가 많았다·
천룡표국에도 당연히 그런 향이 있었고 추적을 위해 향서(香鼠)도 길렀다·
다만 향도 그 향을 맡고 추적할 수 있는 향서도 귀하기 짝이 없기 때문에 중요한 표물에만 사용했다·
“제가 떠나고 난 뒤 마교도들이 천룡표국을 습격했다고 들었습니다· 다들 큰 피해는 없는지요?”
“지금은 전시다· 지나간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목전의 싸움과 똑바로 마주하거라· 누가 뭐래도 너는 이 표행을 책임진 표두다·”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꼭 다문 입술로 포권지례를 올린 후 편복은왕과 북두혈성 그리고 그가 이끄는 흑풍사의 마적단을 다시 돌아보았다·
내가 편복은왕과 못다한 승부를 벌이고 이종산이 북두혈성을 맡고 북해투왕과 표왕부의 고수 오십이 흑풍사의 마적단을 쓸어버리면 된다·
모든 면에서 불리했던 좀 전의 상황과 달리 지금은 모든 면에서 유리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북해투왕이 떨어져 내린 반대쪽 석벽 위에서 우렁우렁한 일갈이 들려왔다·
“부자간의 해후가 눈물겹군!”
섬뜩한 목소리와 함께 이십여 장 높이의 석벽으로부터 백여 개의 그림자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장소가 대범하게도 양 진영이 대치한 가운데였다·
흑풍사들은 흑풍사들대로 표왕부의 고수들은 표왕부의 고수들대로 말과 함께 십여 장씩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마침내 도검으로 중무장한 백 개의 그림자가 모두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가장 앞줄에 선 네 사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들의 면면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했다·
“당신들은!”
그들은 칠성군과 명부삼귀였다·
칠천여 명으로까지 불어났다는 병력과 함께 하루 하고도 한나절쯤은 떨어져 있을 거라 생각한 그들이 나타난 것이다·
칠천여 명 전부와 함께 오려니 너무나 느려서 본대는 혈영노조에게 맡긴 후 소수의 고수들만 이끌고 서둘러 달려온 모양이었다·
연소교는 한 번도 언급한 적 없지만 칠성군인 야율극리 역시 천마대총이 있는 장소를 얼마든지 알만한 위치였다·
칠성군을 알아본 편복은왕의 얼굴이 돌덩어리처럼 굳어졌다· 그는 나보다도 더 놀란 것 같았다·
연소교로부터 설명을 들은 석불원 설인탁 이종산 북해투왕도 얼어붙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런가 하면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북두혈성과 흑풍사의 마적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상황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 듯했다·
‘이 무슨 미친 상황이란 말인가!’
정말 난감하고 또 난감한 상황이었다·
크게 곤란할 뻔했다가 곤륜산으로 간 줄 알았던 북해투왕과 지금쯤 한창 후방지원을 하고 있을 줄 알았던 이종산의 등장에 쾌재를 불렀다·
한데 이번엔 칠성군과 명부삼귀가 일백의 마병들을 이끌고 나타날 줄이야·
이렇게 되면 세 개의 세력이 성보를 놓고 싸워야 한다·
한데 칠성군은 그럴 생각조차도 없는 듯했다·
“오랜만입니다· 장로님·”
칠성군이 편복은왕을 돌아보더니 뜻밖에도 공손히 포권지례를 올렸다·
편복은왕 역시 낭패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중에도 자신보다 삼십 년은 젊어 보이는 아율극리를 향해 마주 포권지례를 했다·
“칠성군을 뵙습니다·”
“한두 마디 말로 지난 삼십 년간의 적조(積阻)를 어떻게 메울 수 있겠습니까? 상황도 그렇고 하니 지금은 딱 두 말씀만 올리지요·”
“···?”
“성교의 재건을 위해 생사도 숨긴 채 사부님으로부터 전수받은 무공을 삼십 년간이나 홀로 외롭게 수련했습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성교를 다시 한번 이끌어 주십시오·”
그러면서 칠성군은 두 손을 포개어 쥐고 깊숙이 허리까지 숙였다·
그는 방금 편복은왕에게 태상장로의 자리를 약속했다·
편복은왕이 얼마나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낼지는 모른다·
다만 우리 쪽에 이종산과 북해투왕이라는 걸출한 두 명의 초절정 고수가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편복은왕과 그를 따르는 흑풍사가 칠성군에게는 꼭 필요했다·
편복은왕 역시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더불어 칠성군의 제안을 거절하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한때 모두 천마교주의 자리를 노렸던 혈영노조와 명부삼귀가 칠성군에게 투신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편복은왕은 자신에게 주어졌던 마지막 기회를 안타깝게도 놓쳐 버렸다·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태상장로님·”
좌중의 공기가 크게 출렁였다·
판세가 또다시 바뀌었다·
이제 오십여 명에 불과한 우리 쪽 사람들은 삼백여 명에 가까운 적들과 생사결전을 펼쳐야 했다·
그중에는 과연 하늘 아래 적수가 있을까 싶은 칠성군과 초절정고수들인 편복은왕 명부삼귀 북두혈성이 있었다·
나와 연소교가 칠성군을 이종산이 편복은왕을 북해투왕이 북두혈성을 석불원과 설인탁과 미나모토가 명부삼귀를 상대한다고 치자·
장담하건대 북해투왕은 백초식 안에 북두혈성을 때려눕힐 것이다·
반면 석불원과 설인탁과 미나모토는 안타깝지만 명부삼귀에 비해 한 수 아래라고 봐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명부삼귀 중 셋째가 지난번 편복은왕의 투골음풍장에 맞아 한쪽 팔을 못 쓴다는 사실이었다·
그걸 감안하면 동수 정도는 충분히 바라볼 수 있었다·
역시 편복은왕과 칠성군이 문제였다·
이종산과 편복은왕의 승부는 강호의 식견이 짧은 나로서는 한 치 앞을 예상할 수가 없었다·
반면 나와 연소교는 칠성군에게 확실히 질 것이다·
표왕부의 고수들 또한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오십으로 무려 삼백으로까지 늘어난 적들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흑풍사는 물론이거니와 칠성군이 이끌고 온 백여 명의 마병들 또한 고르고 고른 고수들이 분명했다·
“또 보는군·”
편복은왕이 뒤로 빠지고 칠성군이 내게 말했다·
“항상 예측을 뛰어넘으시는군요·”
“내가 자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네· 그토록 조심을 했건만 진왕의 품에서 용케도 빠져나갔더군· 덕분에 쓸데없는 곳을 뒤지느라 고생을 좀 했지·”
“말은 이미 편복은왕 선배님과 단내가 나도록 섞었으니 그만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그러면서 나는 양손으로 검파를 쥐고 허공에다 반원을 한차례 가볍게 그린 다음 두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며 섰다·
천무십검의 기수식이었다·
“나를 직접 상대하려고?”
“못다한 승부를 봐야지 않겠습니까?”
“감당할 수 있겠나?”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대상을 편복은왕에서 칠성군으로 바꾸어 기적을 기대해 보는 수밖에·
그도 인간인 이상 싸우다 보면 반드시 틈이 보이지 않겠나·
그때였다·
“귀하는 이 몸이 상대해 주겠소!”
천지가 떵떵 울리는 사자후와 함께 북해투왕이 뛰어내린 석벽 쪽에서 삼백여 개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하나같이 강궁에 화살을 재고 협곡 아래를 겨누었다·
그들 사이로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사람은 무림맹주인 설산신검 장초풍과 뇌검 남궁유룡이었다·
사자후를 내지른 사람은 목소리로 미루어 설산신검이 분명했다·
좌우에는 총군사 사마옥과 남궁세옥 그리고 잔뜩 상기된 남궁소소도 보였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