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 황하를 건너다(3) >
황토고원 속 미로와 같은 석림협곡으로 들어간 우리는 다시 말을 달렸다·
연소교는 분명 이곳을 태어나서 처음 와 본다고 했다·
한데도 가야 할 길을 귀신같이 알고는 사람들을 이끌었다·
이에 관해 설명을 해준 적은 없지만 나나 설인탁이나 석불원으로서는 절대 발견할 수 없는 어떤 표지가 있는 것 같았다·
나무라고는 단 한 그루도 보이지 않는 황토색의 기기묘묘한 협곡지대를 한 식경 정도 달려갔을 무렵이었다·
모퉁이를 돌아 갑자기 넓어진 협곡으로 순간 한 사람이 길을 막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삐를 잡아당기며 말부터 멈추었다·
이히히힝!
놀란 다섯 필의 말들이 앞발을 치켜들며 크게 울부짖었다·
은발에 칠흑처럼 시커먼 장포를 입고 검은 죽림을 쓴 노인은 나도 잘 아는 자였다·
‘“편복은왕!”
노인은 장강을 건넌 직후 야산에서 만났던 편복은왕이었다·
편복은왕이라는 말에 석불원과 설인탁의 안색이 대번에 변했다·
석불원과 설인탁은 이미 구순을 넘긴 편복은왕보다도 많게는 사십 년 이상 젊었다·
사대명표로 불릴 정도인 그들에게도 편복은왕은 까마득한 전대의 고수였던 것이다·
그것도 천마성교의 팔대호교사자 중 하나로 불릴 정도로 전설적인·
처음 편복은왕을 보았을 때 무림고수들이 메는 상여를 타고 있었다·
한데 지금은 무림고수들도 상여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어디서 땔감을 구했는지 혼자 길 한복판에 모닥불까지 피워 놓고 앉아서는 무언가를 열심히 구워대는 중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저러고 있은 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편복은왕은 괴이한 마공을 익힌 탓에 햇볕을 쬐면 살이 타들어 간다·
아니나 다를까 좌우로 높이 솟은 석벽들 때문에 이곳은 대낮에도 볕이 제대로 들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지금은 해까지 저물어 가는 중이어서 빛이라고는 동쪽 석벽의 꼭대기 일부에만 비치는 중이었다·
“읍!”
연소교가 갑자기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구역질을 했다·
편복은왕이 쇠꼬챙이에 끼워서 굽고 있는 고기 때문이다·
작은 몸통에 머리는 없고 팔다리만 달린 그것은 얼핏 보기에 서너 살 정도의 아이 같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사지의 비율이 사람은 아니었다·
“다들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나는 외람스럽게도 명표들에게 지시를 한 후 말에서 내려 앞으로 걸어갔다·
모닥불을 대여섯 장 정도 앞두고 걸음을 멈췄다· 이어 짧게 포권지례를 했다·
욕을 하며 싸울 때는 싸우더라도 안면 있는 전대의 거물을 다시 만났으니 대우는 해주어야지 않겠나·
“저녁 식사치곤 좀 이르신 것 같습니다만·”
“노정에 끼니때가 따로 있다더냐· 앉아서 쉬면 곧 끼니때인 것이지· 이런 건 나보다 네놈이 더 잘 알 터인데·”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도둑맞은 물건을 찾으러 왔느니라·”
“저희가 이리로 올 줄은 어떻게 아시고요?”
“잘 모르나 본데 나도 팔대호교사자 중 한 명이었다·”
연소교는 천마성교가 건재하던 시절 세 명의 군사와 팔대호교사자들 정도만 천마대총의 위치를 알 거라고 했다·
연소교가 아는 건 그의 사부인 백골시마가 바로 그 팔대호교사자들 중 한 명이었던 탓이다·
편복은왕 역시 바로 그 팔대호교사자 중 하나였고·
그는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천마대총임을 알고 미리 온 다음 반드시 지나갈 수밖에 없는 길목에서 기다렸던 모양이다·
솔직히 이건 예상을 못 했다·
성보를 노리는 수많은 고수들을 전부 뚫고 내가 여기까지 온다는 보장이 없었을 텐데 그는 대체 무얼 믿고 이런 파격적인 작전을 감행한 걸까?
“오늘은 상여도 상여꾼들도 보이지 않는군요·”
“상여꾼들은 어떤 젊은 표사놈과 그 일당이 죄다 때려눕혔고 상여는 상여꾼이 없어서 타고 오질 못했네· 대신 저놈을 타고 왔지·”
편복은왕이 눈짓으로 힐끗 가리키는 곳에는 보통의 말들보다 몸집이 훨씬 큰 두 필이 버섯처럼 생긴 돌기둥에 묶여 있었다·
황하 인근의 드넓은 초원에서 가끔 태어난다는 용마(龍馬)였다·
대체 저런 귀물은 또 어디서 구한 걸까?
“용케도 여기까지 타고 오셨군요·”
“낮엔 땅을 파고 들어가 자고 밤이 되면 말을 타고 해가 뜰 때까지 달렸지 덕분에 한 번은 내가 잠든 사이 말을 훔쳐 간 놈들을 쫓느라 한나절을 허비하기도 했지·”
“고생이 많으셨군요·”
“네놈이 설응을 구워삶아 버리는 바람에 위치를 알지 못해서 택한 고육지책이었느니라·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더냐?”
“저도 지금 열흘 가까이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화위복이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겠지? 회수에서는 혈영노조에게 황하에서는 칠성군에게 잡혀 네 놈을 빼앗기는 줄 알았느니라·”
그러면 그렇지· 그는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 아니었다·
다만 설응을 통해 나를 추적할 수 없게 되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을 뿐·
“선배 표사님들께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편복은왕은 고개를 들어 내 뒤쪽에 있던 설인탁과 석불원을 힐끗 바라보았다·
이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온 천지에 표사놈들이 설치고 다니는군·”
“온 강호에 마구니가 들끓는 것만 하겠습니까?”
“그 많은 마구니가 표사놈 하나를 어쩌지 못해 이러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군· 이제는 끝이 나겠지만 말이지· 클클클·”
“제 뒤에 있는 두 분 선배님들께선 이른바 사대명표라 불리시는 전설적인 표사들이십니다· 허리에 왜도를 차고 있는 족제비상의 검객은 왜국 고수이고요· 거기에 저와 천살마녀도 있습니다·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흥 구천홍염장을 믿고 큰소리치는 모양이구나· 급습이 아니었다면 아직 오성의 경지조차 밟지 못한 수준으로 나를 한걸음이라도 밀어낼 수 있었을 것 같으냐?”
“피도 뿜으셨습니다만·”
“걱정하지 마라· 오늘 하늘밖에 또 다른 하늘이 있음을 확실히 보여줄 것인즉· 하지만 함께 온 표사 나부랭이들을 지옥으로 인도해줄 저승사자들은 있어야겠지·”
투두두둥·
멀리서 갑자기 수백 개의 북이 동시에 울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소리는 난생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게다가 어디서 들려오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노련한 설인탁이 재빨리 말에서 내린 다음 땅바닥에 귀를 대고 청음을 했다·
천리지청술(千里地聽術)이다·
표사들이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다들 익히고 펼칠 수 있는 공부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먼저 익혀야할 다른 무공들이 많아 아직 제대로 배우지를 못했다·
설인탁은 금방 일어나더니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나와 편복은왕 너머의 협곡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한데 그의 표정이 어느 때 보다 굳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가 설인탁을 따라서 앞쪽의 협공을 응시했다·
소리가 점점 커지더라니 잠시 후 이백여 명의 중무장한 기마인들이 협곡을 가득 메운 채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나타났다·
그 모습이 흡사 모래폭풍이라도 불어 닥치는 것 같았다·
북소리처럼 들렸던 건 이백여 필의 말이 내는 말발굽 소리였다·
낯설게 들렸던 것은 이곳의 지형이 미로처럼 깊고 복잡한 탓에 소리들이 서로 울리고 부딪히고 증폭되면서 생긴 현상이었고·
그런가 하면 기마인들은 하나같이 검은 피풍의에 검은 초립을 쓰고 검은 수건으로 입과 코를 가리고 검은 말을 탄 상태였다·
그들은 편복은왕으로부터 십여 장 밖 뒤쪽에 이르자 선두에 선 한 사람의 손짓을 신호로 갑자기 말을 세웠다·
전속력으로 질주해 오던 이백여 기의 말이 절벽이라도 만난 것처럼 동시에 멈춰서는 모습은 신기하다 못해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그리고는 고삐를 이리저리 당겨 흥분한 말들을 진정시키는 한편 번뜩이는 눈빛으로 우리를 노려보았다·
기마술도 복장도 기세도 모두가 예사롭지 않았다·
특히 이백여 명이 마치 한 사람처럼 펼치는 상승의 기마술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처음 보는 것이었다·
“흑풍사(黑風沙)!”
석불원의 입에서 신음 같은 한마디가 나직이 흘러나왔다·
천리지청술을 펼쳐 땅의 소리를 들은 설인탁이 그렇게 굳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소리만으로도 흑풍사가 나타났다는 걸 알았던 모양이다·
더불어 피할 수 없음을 알기에 구태여 미리 경고를 해주지 않은 것이고·
흑풍사는 대형 상단이나 표행단을 상대로 약탈을 일삼는다는 전설적인 마적단이었다·
한 시대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보통의 마적단들과 달리 흑풍사는 무려 이백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한 곳에 뿌리를 내리지 않았다 뿐 숫제 무림방파나 마찬가지였다·
이곳 황토고원이 그들의 활동 무대였고·
소문에 따르면 현 흑풍사의 두령인 북두혈성(北斗血星)은 황토고원 일대에서는 적수가 없다고 알려진 초절정 고수로 도법의 달인이었다·
별호에 혈성이라는 두 글자가 붙은 것은 살인을 밥 먹듯이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장대한 체구를 지닌 자가 또각또각 말을 타고 나왔다·
앞서 손짓 한 번으로 질주하는 이백여 기의 말을 칼로 토막 치듯 멈추게 한 장본인이었다·
이윽고 편복은왕과 나란히 선 그는 초립을 살짝 들어 올리고 코와 입을 가린 수건도 당겨서 내렸다·
그러자 뜻밖에도 제법 준수한 용모를 지닌 마흔 중반의 장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사들 하지· 이쪽은····”
“오랜만이오· 풍운표검!”
편복은왕의 말이 시작되려는 순간 북두혈성이 알아서 먼저 인사를 건넸다·
한데 인사를 건넨 대상이 앞에 있는 내가 아니라 훨씬 뒤쪽에 있는 설인탁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설인탁도 건조하게 인사를 했다·
“우리가 이곳 황토고원에서 오랜 세월 마주쳤어도 얼굴을 붉힌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어떨지 모르겠구려·”
“어울리시는 인물을 보아하니 피차 웃으며 헤어지기는 어려울 듯하군요· 사정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원하는 걸 손에 넣도록 도와주면 천마대총에 있는 황금을 전부 주시겠다고 했소이다· 알다시피 우리야 돈이 된다면 정사마를 따지지 않으니까·”
“과연 아주 큰 액수군요· 무램맹주께서 일흔두 맹방에 동원령을 내린 걸 알면서도 이런 위험한 도박을 시도할 만큼 말입니다·”
“우리야 황토고원을 나갈 생각이 없으니 두려울 것도 없지· 황토고원 안에서는 더욱 그렇고 말이오·”
“세상일은 알 수가 없는 법이지요·”
“그림이 이상하기로 따지자면 그쪽도 만만치 않구려· 옆에 귀티가 좔좔 흐르는 분께선 황금장표이신 듯한데 어찌하여 귀하들은 뒤로 빠지고 저런 애송이를 앞세우는 것이오?”
북두혈성의 관심이 돌고 돌아서 결국 내게로 향했다·
처음부터 길을 들이려는 수작이었다·
새파랗게 어린 내가 만만해 보이기도 했을 것이고·
“그 애송이 하나를 잡으려고 천마성교의 전대고인께서 귀하를 끌어들이신 것 같군요· 부디 조심하십시오· 그에게 당해 패가망신한 노강호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 중엔 천마성교의 마지막 군사였던 삼뇌 뇌천자도 있고요”
북두혈성은 피식 웃더니 그제야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서 이름이 뭐라고?”
나는 북두혈성에게서 시선을 거둔 후 다시 편복은왕을 돌아보며 말했다·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그가 이름을 물은 것 같네만·”
“마적단 두령과도 일일이 인사를 나눌 필요 있겠습니까? 추후 표행단을 이끌고 황토고원을 오갈 것도 아니고요·”
“과연 호쾌한지고· 음하하하!”
편복은왕이 갑자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그대로 모욕을 돌려받은 북두혈성은 마상에서 가볍게 실소를 지으며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얼굴이 시뻘게지면서 콧김을 펑펑 뿜어댈 줄 알았는데 저 정도로 대범한 걸 보면 그도 확실히 보통 인간은 아니었다·
편복은왕이 광소를 멈춘 후 말했다·
“성보 세 개를 모두 내놓고 가게·”
“지난번과 똑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이번엔 천살마녀도 함께 살려 보내주지·”
“거절한다면요?”
“너희 다섯 명 모두 타고 있는 말들과 함께 수백 개의 고깃조각으로 도륙될 것이니라· 그편도 내 입장에선 나쁘지 않지·”
편복은왕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변했다·
동시에 흑풍사의 마적 이백여 명이 일제히 초승달처럼 굽은 만곡도(變曲刀)를 뽑아 들었다·
채채채채채채채챙!
달리는 마상에서 저 커다란 칼로 사람의 목을 치면 머리가 그대로 허공에 둥실 떠오른다는 말을 들었다·
그에 대응하여 석불원 설인탁 미나모토 연소교도 일제히 각자의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이어 석불원과 설인탁은 말을 탄 채 각자 일 장씩 앞으로 나왔다·
전면전이 벌어지면 자신들이 선두에 섬으로써 표물과 의뢰인을 보호하려는 표사의 오랜 습관이 발동된 것이다·
사실 성보도 연소교가 갖고 있었다·
나는 소맷자락을 천천히 만지작거렸다·
이번에야말로 편복은왕의 마혈에 비격쌍뇌창을 박는 한편 구천홍염장으로 뱃속의 내장을 진탕 시켜 버릴 작정이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북두혈성은 성보에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천마대총에 있다는 황금에만 눈독을 들이는 것 같다·
나는 황금을 줄 생각이 없으니 편복은왕을 인질로 잡고 북두혈성을 위협해 여길 빠져나가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백전노장인 편복은왕은 이런 내 속셈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요는 내가 먼저 편복은왕을 쓰러뜨리느냐 흑풍사가 석불원 설인탁 미나모토를 뚫고 연소교를 잡느냐 하는 것이었다·
각자의 역할이 다 중요하다·
나는 최대한 빨리 편복은왕을 쓰러뜨려야 하고 세 사람은 반대로 최대한 시간을 벌어 주어야 한다· 연소교는 연소교대로 잘 버터 주어야 하고·
어느 모로 보아도 우리 쪽이 월등히 불리했다·
다른 사람 핑계를 댈 것도 없이 일단 나부터 편복은왕을 꺾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구천홍염장이 투골음풍장의 상극이라고는 하나 편복은왕의 말처럼 아직은 완전하질 못했다·
그리고 상대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기습적인 일격을 당했던 첫 번째 격돌과는 상황이 많이 다를 것이다·
“아무래도 순순히 내놓을 생각이 없는 것 같군·”
“표사가 표물을 포기하는 법은 없다고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