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화· < 황하를 건너다(2) >
탑하림을 지나서부터는 석불원은 뒤로 빠지고 줄곧 후미를 맡았던 설인탁이 선두에 서서 길을 잡았다·
그는 곧장 경공술을 펼치며 절벽과 연결된 산속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한밤중 달과 별을 머리에 이고 가파른 산길을 한식경쯤 달리다 보니 공력의 고하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미나모토의 숨소리가 가장 먼저 그리고 빠르게 거칠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중원의 무림인들에게 지기 싫었는지 개처럼 헐떡대면서도 죽으라고 달렸다·
미나모토만큼은 아니어도 연소교 역시 매우 힘들어했다·
어딜 가서도 고수 소리를 듣는 그녀였지만 삼백 년 공력을 가진 나와 절정고수인 두 명표들 사이에서는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곰처럼 크고 뚱뚱한 체구 탓에 다른 사람들보다 체력 소모가 극심한 석불원은 생각보다 잘 버티었다·
말(馬) 없이는 십 리 이상을 가지 않는다고 투덜댔던 것과 달리 상황이 닥치자 잘만 달렸다·
역시 본신 실력은 어딜 가지 않는 법이다·
설인탁은 한 줄기 바람 그 자체였다·
깜깜한 데다 길도 없는 산속을 달리면서도 그는 한 번도 머뭇거리거나 주저하는 법이 없었다·
그가 발을 딛고 달려간 곳 자체가 뒤를 따르는 사람들에겐 그대로 길이 되었다·
그 모습이 신기했던지 연소교가 전음으로 내게 물었다·
[앞서 탑하림에서 황금장표께서도 그렇고 길도 없는 숲길을 어떻게 저토록 빨리 달릴 수 있는 거죠?]
[숲에는 길이 없어도 저분들의 머릿속에는 대로가 뚫려 있을 것이오·]
산능선 세 개를 쉬지 않고 넘은 후 다시 어느 평지의 좁디좁은 외길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갑자기 앞쪽에서 한 무리의 무림인들이 또각또각 말을 타고 나타났다·
숫자는 모두 다섯 달빛에 비친 그림자의 형태로 미루어 죽림을 썼고 등에는 행낭과 도검을 한 자루씩 가로질러 멘 상태였다·
삼경을 넘긴 밤중에 이런 오지의 산길에서 말 탄 무림인들을 만나는 건 아무리 양보해도 우연일 수가 없었다·
‘숨돌릴 틈을 안 주는 군!’
등에 멘 월인소야검을 언제라도 뽑을 수 있도록 비스듬히 눕혀 놓았다·
고작 다섯 명이 성보를 노리고 왔다면 엄청난 고수들일 게 분명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바짝 긴장됐다·
연소교도 나를 따라서 협봉검의 검파를 가만히 쥐었다·
성질급한 미나모토는 왜도를 이미 반쯤 뽑은 채로 놈들을 죽일 듯이 노려 보며 기다렸다·
한데 석불원과 설인탁은 전혀 긴장한 기색이 아니었다·
“딱 맞춰서 오는 군·”
“우리가 맞춰 온 것이지요·”
잠시 후 기마인들이 코앞에까지 이르렀다·
그러자 시비를 걸어 오기는 커녕 말을 멈추고 모두 훌쩍 뛰어내리더니 설인탁에게 포권지례를 올렸다·
“대표두님을 뵙습니다·”
“고생들이 많군·”
“천만의 말씀을요·”
“길은?”
“방산협로(防山映路)로 가십시오·”
“식수와 건량은?”
“안장 옆 행낭에 충분히 넣어 두었습니다·”
“뒷일을 부탁하네·”
“염려 마십시오·”
대답을 꼬박꼬박하던 자가 고삐를 설인탁에게 넘겼다·
나머지 네 명은 각각 나와 연소교와 미나모토와 석불원에게 넘겼고·
냉큼 고삐를 받아쥐는 석불원과 달리 어리둥절해 하는 나와 연소교와 미나모토에게 설인탁이 말했다·
“내 동료들이니 안심하시게·”
아무래도 유성표국(流星鏡局)의 표사들인 것 같았다·
유성표국은 하남성에서 가장 큰 표국이자 풍운표검 설인탁이 대표두로 있는 곳이었다·
단순히 연중 운송하는 물동량이나 거느리는 표사들의 숫자로만 보자면 일 년 전의 천룡표국보다도 훨씬 컸다·
구태여 ‘일 년 전’이라고 단서를 다는 것은 내가 장강에 범선 일곱 척을 띄우고 운행하면서부터 판도가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다·
물동량으로도 그렇고 거느리고 있는 표사와 쟁자수들의 숫자로도 그렇고·
이제 대륙에서 천룡표국보다 크거나 어깨를 견줄만한 표국은 단 두 곳밖에 없었다·
하나는 황궁이 있는 북경에 자리 잡은 경원표국(京元鏡局)이었고 다른 하나는 고대의 교역로가 시작되는 천년고도 장안에 뿌리내린 북성표국(北星鏡局)이었다·
“다들 서두릅시다!”
설인탁의 재촉에 석불원은 깃털처럼 가벼운 동작으로 말에 올라 탔다·
나는 유성표국의 이름 모를 표사들을 향해 포권지례부터 했다·
“알고 보니 유성표국의 선배님들이셨군요· 오늘 일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의뢰를 따낼 때는 치열하게 경쟁해도 길 위에서 만나면 모두 형제가 되는 것이 표사들의 오랜 전통 아니겠습니까? 부디 표행에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덕분에 우리는 다시 말을 타고 편하게 달릴 수 있었다·
아직 탑하림를 뒤지고 있을 사천여 천마성교도들 보다 한 걸음 빠른 행보였다·
한데 설인탁의 안배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오십여 리를 쉬지 않고 달려 어느 산기슭 아래로 난 길에 다다랐을 때였다·
이번에도 다섯 명의 무림인들이 젊고 건강한 말 다섯 필을 탄 채 맞은편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게 보였다·
우리를 발견하자 그들은 길을 막아선 채 말머리를 돌려세운 다음 훌쩍 뛰어내렸다·
그들의 앞에 이르러 설인탁이 말에서 내리자 자연스럽게 대화가 시작되었다·
“대표두님을 뵙습니다·”
“고생들이 많군·”
“천만의 말씀을요·”
“길은?”
“형강고도(造江古道)로 가십시오·”
“뒷일을 부탁하네·”
“염려 마십시오·”
대화를 끝낸 설인탁은 땀을 비 오듯 흘리는 말을 사내에게 건네고 그가 끌고 온 새로운 말에 올라탔다·
그런 다음 이번에는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혼자서 그냥 내빼버렸다·
진작부터 말에 타고 있던 석불원과 그를 따라서 역시나 말에 타고 있던 미나모토가 뒤를 따랐다·
나는 짧게라도 표사들에게 인사를 한 후에야 말에 올랐다·
“고맙습니다· 신세는 꼭 갚겠습니다!”
“건승을 빕니다!”
새 말로 갈아타고 일각쯤 달렸을 때였다·
강변을 오른쪽에 끼고 광활하게 펼쳐진 갈대숲이 나타났다·
설인탁이 갈대숲 속으로 뛰어 들어가자 놀랍게도 없던 길이 생겨났다·
그렇게 오십여 리를 달려 어느 작은 마을 어귀에 이르렀을 쯤이었다·
이번에도 맞은 편에서 오고 있는 다섯 명의 기마인들과 맞닥뜨렸다·
설인탁은 똑같은 방식으로 말을 갈아탔고 그중 한 명과 똑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길은?”
“죽평암로(竹平暗路)로 가십시오·”
“뒷일을 부탁하네·”
“염려 마십시오·”
나도 얼른 끼어들었다·
“고맙습니다· 신세는 꼭 갚겠습니다!”
“건승을 빕니다!”
설인탁은 표사들에게 다시 묻거나 무언가를 추가로 묻는 법 따원 없었다·
설인탁을 기다린 표사들 역시 일절 무언가를 묻지 않았다·
마치 한마디면 충분하다는 듯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철저히 믿었다·
표사들은 정확히 오십 리마다 한 번씩 다섯 필의 말과 함께 나타났고 그때마다 가장 안전한 길을 알려 주었다·
내게도 천룡표국에서 쓰는 하남성의 지도가 있어서 이따금 꺼내 살펴보았다·
하지만 유성표국의 표사들이 말한 이름을 가진 길은 없었다·
심지어 실제로 우리가 말을 달려간 길도 천룡표국의 지도상에는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았다·
짐작하건대 유성표국 하고도 설인탁과 그가 이끄는 직속 수하들끼리만 아는 길인 것 같았다·
이 모든 걸 준비한 설인탁의 안배가 실로 놀라울 뿐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동이 트고 다시 해가 질 때까지 꼬박 하루나 말을 달렸지만 단 한 번도 무림인들과 마주치지 않았다·
그렇게 이틀을 더 달린 끝에 마침내 누런 황톳빛의 거대한 강과 맞닥뜨렸다·
그건 장강과 더불어 대륙에서 가장 큰 두 개의 강 중 하나인 대황하(大黃河)였다·
안개에 잠겨 묵직하게 흐르는 황하는 마치 바다를 보는 듯했다·
대자연의 장엄한 풍경을 감상할 사이도 없이 설인탁은 황하로 흘러드는 어느 샛강변 소나무 숲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그곳에서도 다섯 명의 유성표국 표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그들이 준비한 것은 말이 아니라 길고 뾰족한 비조선이었다·
설인탁도 간단한 인사가 끝나자 처음으로 평소와 다른 걸 물었다·
“언제 출발하면 되겠나?”
“반 시진 후 해가 지면 도하를 하십시오· 섭가촌 옆 송림에 닿으시면 말 다섯 필이 준비되어 있을 것입니다·”
“적들은 어디쯤 오고 있지?”
“정오 무렵 탕산(攝山)을 지났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사흘 동안 밤잠을 설쳐가며 쉬지 않고 달렸는데도 고작 하루 정도밖에 거리를 벌리지 못 했단 말이지·”
나와 연소교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눈치를 보아하니 칠성군이 이끄는 천마성교의 본대가 오늘 정오 무렵 탕산이라는 지역을 지난 모양이었다·
그들과 맞닥뜨리지 않고 황하를 건너게 된 것도 기적 같은 일인데 설인탁은 하루의 거리밖에 벌리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우리가 황하를 건너는 순간 거리는 더욱 벌어질 것이다·
진왕이 삼천군병들을 이끌고 회수를 건널 때도 그랬지만 사천여 명이나 되는 인원이 전부 황하를 건너려면 배를 징발하는 일부터 시작해 한나절은 꼬박 걸릴 테니까·
“그래서 천마성교도들의 숫자는 얼마나 불었나?”
“오늘을 기점으로 칠천에 육박한 것을 확인했습니다·”
순간 모두가 깜짝 놀라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누구보다 놀란 나는 얼른 중년의 표사에게 다시 물었다·
“무언가 잘 못된 보고를 받으신 게 아닙니까?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만해도 사천여 명이었던 병력이 고작 사흘 만에 칠천으로까지 불어났을 리가 없습니다·”
“사황련(邪皇聯) 흑수회(黑手會) 사자맹(獨子盟) 등을 비롯해 북무림의 흑도와 사파 연합세력 다섯 곳이 천마성교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대체 그들이 왜!”
“신뢰할만한 소식통에 따르면 마도천하 이후 각 성(省)에 대한 패권을 보장받았다고 합니다·”
“마도천하라고요?”
“그렇습니다·”
표사의 입에서 예고도 없이 튀어나온 한마디에 좌중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맙소사· 마도천하라니·
“칠성군의 솜씨로군요·”
“혈영노조라는 그 늙은이가 열심히 뛰어다녔을 것이고·”
놀라서 입이 쩍 벌어진 나와 연소교를 뒤로하고 설인탁과 석불원이 번갈아 나눈 말이었다·
환생을 한 이후 수많은 노강호들을 만났고 때로는 싸우기까지 했다·
한데 칠성군 야율극리처럼 막막하게 느껴지는 인간은 처음이었다·
마지막 천마의 진전을 이었다는 그 무시무시한 무공뿐만이 아니라 천하를 그리는 눈과 용병술까지·
지금도 과연 상대할만한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인데 성보를 손에 넣어 천마교주까지 된다면 정말로 세상을 마도천하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짙은 송림에서 유성표국의 표사들이 준비한 술과 돼지고기를 나눠 먹으며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비조선을 타고 샛강으로 나갔다·
삿대를 찍으며 샛강을 따라 내려가길 한 식경 넘실대는 물소리부터 다른 황하가 나타났다·
그때부턴 모두가 양노를 저으면서 나아갔다·
파도가 높고 물살이 거셀수록 노를 빨리 저어야 온전히 배를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설인탁과 석불원은 말 한마디 섞지 않고도 손발이 척척 맞았다·
그리고 다시 한 식경 후 우리는 마침내 황하를 무사히 건넜다·
항주를 떠난 지 열아흐레째 되는 날 밤의 일이었다·
배를 타기 직전 나는 유성표국의 표사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었다·
지금쯤 일만의 정도무림들인과 함께 달려오고 있을 총군사 사마옥을 찾아간 다음 성보가 무사히 황하를 건넜음을 알려 달라는 것이었다·
이로써 최소한 지금 당장은 정마대전이 발발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
탑하림에서는 석불원이 황하까지는 설인탁이 길을 잡았다면 황하를 건넌 이후로는 연소교가 선두에 섰다·
천마대총의 위치는 오직 연소교만 알기 때문이었다·
다만 설인탁과 석불원이 이따금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다·
아무리 최종 목적지를 연소교만 안다고 해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주변의 지형과 지리에 대해서는 이곳으로의 표행 경험이 풍부한 두 명표보다 나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황하를 넘어서부터는 우리가 어디로 향할지 몰랐기 때문에 유성표국으로부터의 지원도 더는 없었다·
해서 한 시진마다 일각 정도 말을 쉬게 해주어야 했다·
그렇게 서북으로 말을 타고 달리길 사흘째 되던 날 오후였다·
나는 전생에서조차 본 적 없는 거대하고 기이한 경관과 맞닥뜨렸다·
황토가 굳어서 만들어진 것 처럼 보이는 누런 석벽들 사이로 수만 마리의 용이 구불구불 지나간 것 같은 대협곡지대였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황토고원이었다·
해 질 무렵 광활한 협곡이 내려다보이는 어느 석벽의 꼭대기에서 대자연의 경이로움을 다시 한번 느꼈다·
미나모토도 놀랐는지 입이 떡 벌어져서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설인탁은 이런 지형이 무려 두 개 성(省)에 걸쳐 끝도 없이 펼쳐진다고 했다·
북무림의 표사들은 이런 곳들을 가로지르며 표행을 다닐 게 아닌가·
상상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그런가 하면 연소교는 아까부터 저 멀리 보이는 어느 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십 리 정도나 될까?
황토고원 한가운데서 홀로 우뚝 솟아오른 산은 꼭대기가 하얀 눈으로 덮여 있어 어딘지 모르게 신령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목적지가 멀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오?”
“만약 표행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정마대전도 막아낸다면 이후에 표사님은 무얼 하실 건가요?”
“또 다른 의뢰를 찾아서 표행을 시작해야지· 이제부터는 제발 돈 되는 걸로다가· 그러는 소저는 무얼 할 거요?”
“잘 모르겠어요· 무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이 일을 끝내고 나면 나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질 것만 같아요· 이미 사라져 버렸는지도 모르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