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 황하를 건너다(1) >
삼경에 다다랐을 무렵 우리는 수많은 별을 거느린 하현달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어느 숲과 맞닥뜨렸다·
탑하림(塔河林)이었다·
황하로 가려면 반드시 이곳을 가로질러야 했다·
천마성교들은 회수에서 그랬던 것처럼 탑하림도 전력을 다해 봉쇄하고 있을 것이다·
한데도 석불원은 아무렇지 않게 앞장서서 숲으로 들어갔다·
심지어 다섯 명 모두 말까지 탄 상태였다·
나와 연소교만 좌불안석일 뿐 설인탁은 석불원에게 길잡이를 맡겨 놓고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미나모토는 아예 우리가 지금 어떤 자들에게 쫓기고 있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눈치였고·
나는 조금 속도를 내어 석불원과 말머리를 나란히 한 다음 작은 소리로 물었다·
“괜찮겠습니까?”
“무얼 말인가?”
“장담하건대 지금 이 숲엔 사천여 명에 달하는 마교도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우리가 숲으로 들어오기만을 눈에 불을 켜고 기다리면서요·”
“여길 와 본 적이 있나?”
“처음입니다·”
“탑하림은 이름 그대로 탑처럼 높이 솟구친 기암괴석들과 그 사이로 구불구불 흐르는 강과 끝없이 펼쳐진 전나무 숲이 한데 어우러진 곳이네·”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덕분에 대낮에도 볕이 잘 들지 않거니와 함부로 길을 벗어났다가는 천연의 미로에 갇혀 몇 날 며칠을 헤매기 십상이지· 거기다 지금은 깜깜한 밤이기까지 하군·”
광활한데다 복잡하고 어두운 만큼 적들이 우리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심지어 우리는 지금 길이 아닌 곳으로 가고 있었다·
한데도 석불원은 울창한 전나무 가지들을 뚫고 들어온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 척척 잘만 나아갔다·
그는 절정고수이니 작은 불빛만으로도 안력을 끌어 올려 웬만큼은 어둠 속을 식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이 숲을 구석구석 아주 잘 아는 것 같았다·
덕분에 우리는 한눈팔지 않고 그의 꽁무니만 따라가면 되었다·
어느 순간 석불원이 말을 멈추었다·
이어 저 멀리 더욱 짙은 어둠에 잠긴 숲속을 한참이나 뚫어지게 보았다·
지금까지는 숲의 초입에 불과했을 뿐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나는 다시 그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제안을 해보았다·
“이쯤에서 말을 버리고 잠행술을 펼치며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편이 훨씬 빠르고 안전할 것 같습니다만·”
“나는 정말 다급한 경우가 아니면 말없이 십 리 이상을 가본 적이 없네· 한데 황하까지는 앞으로도 수백 리를 가야 하지·”
“커다란 덩치는 그렇다고 쳐도 말발굽 소리가 날 겁니다· 선배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밤중에는 소리가 멀리까지 퍼지고요·”
“모두 말에 제혜(蹄輕)를 씌우도록·”
제혜란 가죽과 가죽 사이에 천을 여러 겹 덧대어 만든 것으로 편자가 박힌 말발굽에 씌우는 발싸개를 말한다·
이걸 씌우고 가면 또각또각하는 말발굽 소리를 절반으로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갑자기 제혜를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그때 석불원이 말에서 내린 다음 안장에 묶어 놓은 행낭을 뒤져 제혜를 잔뜩 꺼냈다·
이어 모두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석불원은 다섯 필의 말에 제혜를 씌우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한발 더 나아가 돌이나 바위가 없는 흙 지대를 귀신같이 찾아 내 그리로만 움직였다·
그래서인지 이따금 왼쪽으로 야트막한 강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다행히 강은 북에서 남으로 흘러서 우리가 도강을 해야 할 일은 없었다·
다만 강이 나타나면 아무리 깜깜한 밤이라고 해도 숲속과 달리 시야가 트이기 때문에 적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했다·
문제는 갑자기 나타나 앞을 막아서는 수십 장 높이의 기암괴석들이었다·
사실은 둘레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돌기둥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돌기둥을 피하려면 당연히 돌아가야 하는데 그곳엔 다른 돌기둥과의 사이에 짧게나마 협곡이 형성되어 있었다·
탑하림에는 이런 형태의 지형이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펼쳐져 있었다·
우리는 그사이를 요리조리 통과하며 지났고·
만약 이런 식으로 탑하림에 길을 낸다고 가정하면 수만 가지 경우의 수가 있을 것 같았다·
한데 저런 협곡 중 어딘가에 천마성교의 눈 밝은 척후병이 매복해 있다면?
“숫자가 사천여 명에 달하니 적 진영에도 탑하림을 손금 보듯 들여다보는 자들이 분명 여럿 있을 겁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자들이 요소요소에 척후병들을 심어 두었을 겁니다· 우리를 발견하면 곧장 본대로 연락을 취할 것이고요·”
“많이 불안한가 보군·”
“선배님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계속해서 상리를 벗어난 방식으로 움직이셔서요·”
“자네가 길잡이를 하는 게 아니다 보니 납득을 하지 못해서 일 걸세· 우린 척후병들을 하나씩 솎아내면서 놈들의 턱밑에다가 도둑 길을 만들 것이네·”
석불원이 돌연 말(馬)을 멈추고 뒤쪽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미나모토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서는 쏜살같이 달려왔다·
이어 모기만한 소리로 물었다·
“부르셨습니까? 사부님·”
“누가 네 사부야· 표사님이라 부르라고 몇 번을 말해?”
“그건 발음이 어렵스므니다·”
“갑자기 왜 서툰 척이야?”
“제자로 삼기 싫으시면 돈을 주시든가요· 표사님께선 원래 의뢰가 들어오면 최고 적임자를 찾아 돈을 아끼지 않고 고용하는 방식으로 표행을 하시잖습니까·”
“그래서 네가 최고의 적임자다?”
“저만한 칼잡이를 본 적 있으십니까?”
“표사일이 어디 칼싸움만 잘한다고 된다더냐?”
“그러면서 지금 저를 부르신 건 바로 그 칼솜씨 때문이겠지요?”
“누가 왜구 아니랄까봐 눈치는 빨라 가지고·”
“왜구와 눈치 빠른 게 무슨 상관있습니까?”
“됐고· 묘시 방향으로 오십여 장 정도 가면 황소만한 바위가 하나 있다· 협곡 전제를 조망하기에 최적의 매복 장소지· 최소 두 명 처리할 수 있겠어?”
“두 당 금전 한 냥씩 입니다·”
“죽이진 말고 기절만 시켜·”
“기절만 시키는 건 두 냥씩이고요·”
“나중에 풍운비룡에게 받아·”
미나모토가 고개를 돌려 잠시 나를 보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미나모토가 다시 석불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에게 돈을 받건 말건 알아서 하시고요· 저는 무조건 표사님께 받겠습니다· 두 명이니까 넉 냥입니다·”
“왜?”
“저 인간과는 돈으로 엮이고 싶지 않습니다·”
“약탈을 일삼던 왜구가 열 살이나 어린 표사에게 돈 받아내는 걸 두려워한다고?”
“그럼 약속하신 줄로 알겠습니다·”
미나모토가 갑자기 어둠 속을 향해 달려갔다·
한데 불과 서너 걸음도 옮기지 않아 그의 신형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인자술(忍者術)!’
인자는 요인암살과 정탐을 전문으로 하는 왜국의 살수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살수비기와 접목한 그들의 은신술은 대륙의 공부보다 한 수 위라는 말이 있을 지경이었다·
석불원의 작전은 간단했다·
어차피 놈들의 눈에 전혀 띄지 않고 탑하림을 가로질러 가는 건 불가능하다·
해서 우리가 먼저 저들의 눈이 되는 척후병들을 찾아 하나씩 제거한 후 조용히 숲을 빠져나가자는 거였다·
우리를 찾기 위해 매복해 둔 척후병들을 잇는 가상의 선이 역설적이게도 탑하림을 빠져나가는 길이 되어주는 셈이었다·
과연 이게 통할까 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통했다·
대신 미나모토와 설인탁과 내가 번갈아서 부지런히 뛰어다녀야 했다·
가끔은 세 명 모두가 동시에 출동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도화곡으로부터 천금풍과 잠백지둔 외에도 잠백비행이라는 은잠술을 전수받아 익혔다·
해서 석불원이 찍어주는 장소로 은밀히 접근한 다음 마혈을 짚어 척후병을 쓰러뜨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한데 이런 일에 관해서 만큼은 미나모토의 실력이 우리 셋 중 가장 압도적이었다·
석불원이 그를 데려온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 시진 정도를 이동한 것 같았다·
느리기 짝이 없는 속도였다·
지금은 빨리 가는 게 아니라 적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꾹 참았다·
한데 그마저도 불가능한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몇 번째인지 모를 협곡을 코앞에 두고 우리가 지나온 뒤쪽 어느 한 지점에서 갑자기 신호용 폭죽이 솟구친 것이다·
슈슈슈슉 핑!
“풍운비룡이 맡았던 곳입니다·”
“무슨 근거로 내가 맡았던 곳이라는 거요?”
“나는 실수를 했을 리 없으니까· 제대로 기절을 시키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숨통을 끊어 놓았어야지· 멍청하긴·”
미나모토와 내가 나눈 말이었다·
기껏 도와주러 온 사람에게 화를 낼 수도 없고 나는 얼굴만 시뻘게졌다·
그러자 옆에 있던 설인탁이 석불원을 보며 말했다·
“다른 척후병이 교대를 하러 왔다가 쓰러져 있는 동료들을 발견한 모양입니다·”
“아직 두 곳을 더 통과해야 하는데 생각보다 빨리 들켜 버렸군· 할 수 없지· 지금부터는 전속력으로 달린다· 모두 내게서 오 장 이상 떨어지지 않도록!”
말과 함께 석불원이 어둠 속을 향해 쏜살같이 말을 달렸다·
나와 연소교와 미나모토와 설인탁도 뒤를 이었다·
그 사이 뒤쪽에서는 우리가 지나온 협곡을 따라 계속해서 신호용 폭죽이 솟구치고 있었다·
저 폭죽을 가상의 선으로 이으면 정확히 우리가 나아가는 방향이 된다·
탑하림 어딘가에 있을 사천여 명의 천마성교도들이 저걸 보고는 벌떼처럼 달려오기 시작할 것이다·
목전에 두었던 협곡을 전속력으로 달려서 통과할 때였다·
오른쪽 석벽 아래에 형성된 작은 관목숲으로부터 세 쌍의 파란 불빛들이 보였다·
척후병들이었다·
우리가 지나치는 순간 바로 폭죽을 쏘아 올려 위치를 알릴 게 분명했다·
하지만 미처 말에서 내려 처리를 하고 갈 시간이 없었다·
그때였다·
쒝! 쒝! 쒝!
내 뒤쪽으로부터 세 번의 무시무시한 파공성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관목숲에 매복해 있던 척후병들이 몸을 뒤집으며 쓰러지는 게 보였다·
설인탁이 달리는 마상에서 활을 쏜 것이었다·
그것도 무려 세 발을 연달아·
설인탁의 기마궁술에 눈이 휘둥그레질 지경이었다·
나는 말을 배운지 일 년밖에 되질 않아 아직 고삐를 놓으면 중심을 잡기 어려웠다·
활은 뇌검 남궁유룡으로부터 패왕궁까지 하사받았지만 힘만 셀 뿐 삼십 장 밖에 있는 황소도 맞추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멀었구나·’
설인탁의 활약으로 목전의 협곡은 무사히 통과했다·
하지만 놈들이 추적해 오는 속도를 조금 늦출 수 있을 뿐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는 없었다·
만약 내가 야율극리라면 백 명씩 독자적인 작전이 가능한 별동대(別動隊)를 편성해 모두 마흔 곳에 나누어 포진시켰을 것이다·
그래야 어느 쪽에서 접근을 해오든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별동대가 출동해 발목부터 잡을 수 있을 테니까·
그사이 다른 곳에 포진해 있던 별동대들이 신호를 받고 몰려오면 된다·
그때부터는 독 안에 든 쥐를 잡은 것처럼 쉽다·
어느 순간 빽빽하던 나무가 사라지면서 다시 강변이 나타났다·
장애물이 사라지자 석불원은 더욱 속도를 높였다·
바로 그때 오른쪽의 숲으로부터 시커먼 그림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숫자는 백여 명 가장 가까이 포진해 있던 적 별동대가 마침내 출동한 것이다·
천만다행인 것은 간발의 차이로 놈들이 우리를 막아서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그 바람에 우리는 다시 도주하는 입장이 되었고 반대로 놈들은 경신공을 펼치며 추적하는 입장이 되었다·
“풍운표검!”
“말씀하십시오!”
“우리의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낼 수 있겠나?”
“물론이죠!”
조용히 도망쳐도 모자랄 판에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자고?
알 수 없는 말을 주고받더니 설인탁이 또다시 달리는 마상에서 뒤쪽의 적들을 향해 활을 쏘기 시작했다·
쒝! 쒝! 쒝!
무시무시한 파공성이 울릴 때마다 적 선두에서 달리던 말들이 화살을 맞고 픽픽 고꾸라졌다·
죄 없는 말이 쓰러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람을 쏘아 맞히었을 때 보다 효과는 훨씬 컸다·
커다란 덩치의 말이 쓰러지면서 주변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적들은 우리가 달려가는 한참 앞쪽 허공에다 쉬지 않고 폭죽을 쏘아댔다·
덕분에 강변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또 하나의 협곡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만났던 협곡들 중 가장 크고 넓었다·
왼쪽 절반은 절벽에 붙어서 흐르는 강이었는데 나머지 절반인 오른 쪽 강변에 중무장한 수백 명의 적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정신 바짝 차리도록!”
석불원은 일갈을 내지른 후 더욱 속도를 냈다·
아예 그대로 돌진하기라도 할 기세였다·
나는 한순간 그가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발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협곡을 막아선 적들이 일제히 도검을 뽑아 들었다·
계속해서 터져대는 폭죽 아래에서 번쩍이는 수백 자루의 도검은 살벌함을 넘어 비현실적이게까지 느껴졌다·
협곡을 이십여 장 정도 앞두고 석불원이 방향을 꺾더니 예고도 없이 오른쪽 숲속으로 뛰어들었다·
‘이건 또 뭐지?’
나도 연소교도 미나모토도 그리고 설인탁도 줄줄이 그의 뒤를 따랐다·
“놈들을 쫓아라!”
“폭죽을 쏴라!”
당황한 수백 명의 적들이 서둘러 숲으로 달려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머리 위 까마득한 허공에서는 계속 폭죽이 터졌다·
그러나 빽빽하게까지 자란 전나무 때문에 우리는 폭죽을 볼 수 있어도 뒤따라 오는 적들은 우리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덕분에 지금 당장은 놈들과 맞닥뜨리는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가면 숲을 벗어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깊이 들어가게 된다·
내가 가장 우려한 미로에 갇힌 물고기가 우왕좌왕하다가 더 깊은 그물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계획이 다 있으신 거죠?”
“전속력으로 도망친다!”
“그게 계획입니까?”
“다른 더 좋은 계획이 있나?”
그때 앞쪽 저 멀리 어둠 속으로부터 수백 개의 횃불이 나타났다·
횃불은 숲을 대낮처럼 밝히며 우리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 중이었다·
앞과 뒤 모두에서 수백의 적들이 달려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석불원이 지금까지와 달리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모두 행낭과 무기를 챙기도록!”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줄도 모르고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이윽고 준비를 마쳤을 때 석불원이 갑자기 달리는 마상에서 뛰어내리더니 왼쪽 숲으로 냅다 도망쳤다·
‘말없이 십 리 이상을 가지 않느니 어쩌니 하더니만!’
나와 연소교와 미나모토와 설인탁도 재빨리 뒤를 따랐다·
그 바람에 주인 잃은 다섯 필의 말만 어두운 숲속을 질주했다·
뒤에서 추적해 오던 수백의 적들은 그 소리를 듣고 당분간 빈 말을 쫓아갈 것이다·
그사이 우리는 계속해서 왼쪽 숲으로 도망쳤다·
한참을 달리자 눈앞에 백여 장 높이로 우뚝 솟은 절벽이 나타났다·
조금 전 수백의 적들이 포진하고 있던 협곡 오른쪽 절벽의 연장인 것 같았다·
석불원은 그 절벽의 갈라진 틈으로 쏙 들어갔다·
절벽 안쪽은 좁은 입구와 달리 점점 넓어지더니 마침내 마차 한 대가 달릴 수 있을 정도까지 되었다·
그 위치에 이르러 석불원이 도주를 멈추고 말했다·
“절벽 전체가 폐산암(微散廢)으로 이루어져 있네· 때문에 중간에 멈춰서 무언가를 잡으려 하면 그대로 곤두박질치고 말지· 무조건 한 번에 쉬지 않고 올라가야 한다는 걸 명심하도록!”
페산암은 말 그대로 깨지고 부서져 내리는 바위를 말한다·
말이 좋아 바위지 굵은 모래와 돌조각들이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 단단하게 뭉쳐진 것이라고 보면 된다·
당연히 벽호공을 펼쳐서 올라갈 수가 없다·
보기에는 뭐가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는 것 같아도 발끝이나 손가락에 몸무게를 싣는 순간 우수수 부서져 버리기 때문이다·
“여길 올라간다고요?”
“그렇네·”
“돌기둥 꼭대기로 올라가서 수성전을 펼치려는 건 아니시겠지요?”
“이건 지금까지 보았던 것같은 돌기둥이 아닐세· 꼭대기가 다른 땅과 연결되는 진짜 절벽이지·”
석불원은 까마득한 절벽 넘어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한번 힐끗 보더니 갑자기 왼쪽 석벽으로 뛰어올랐다·
이어 두어 걸음을 타다닥 하고 오르다가 다시 석벽을 박차며 오른쪽 석벽으로 옮겨 탔다·
거기서 다시 두 걸음을 오른 후 왼쪽 석벽으로 다시 오른쪽 석벽으로·
그가 원숭이처럼 석벽을 이쪽저쪽으로 박차고 오를 때마다 돌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속도는 벽호공을 펼치는 것보다 훨씬 빨라서 잠깐 사이에 십여 장이나 올라갔다·
“이런 건 처음 봐요·”
연소교가 넋 나간 표정으로 석불원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제야 나는 이 모든 게 처음부터 석불원의 머릿속에 들어있던 계획이라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불리함을 감수하면서까지 말을 타고 숲으로 들어온 이유까지도·
설인탁이 나를 재촉하며 말했다·
“서두르게· 지금쯤이면 놈들이 빈 말임을 알아차리고 주변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을 걸세· 길어야 반 각이네·”
“반 각이라고요?”
“빈틈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에도 있는 법이지· 반 각이면 천마성교도들을 피해 탑하림을 벗어나기에 충분히 큰 빈틈이고·”
말과 함께 설인탁도 앞서 석불원과 똑같은 방법으로 신법인지 벽호공인지 모를 기예를 펼치며 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