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 전설의 표행(18) >
남궁소소와 함께 온 사람들은 나도 잘 아는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이었다·
황보세가의 황보중악을 필두로 청성의 두소부 점창의 양조광 산동악가의 악도광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대충 인사가 끝나자 황보중악이 내게 말했다·
“고생이 많군·”
“어떻게 된 겁니까?”
“총군사님께서 급히 자네를 만나보라고 우리를 보내셨네·”
“총군사님께서요?”
아무래도 총군사 사마옥이 내게 보내는 전언을 가지고 온 모양이었다·
한데 황보중악은 선뜻 말을 하지 않고 연소교를 가만히 돌아보았다·
작년에 무림맹의 죽간을 운송하면서 생사고비를 함께 넘긴 사이여서 호리독사는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연소교는 조금 달랐다·
남궁소소를 제외하면 다른 네 명의 후기지수들은 연소교를 오늘 처음 보았다·
다만 누구의 제자인지 무슨 사정으로 나와 함께 있는 지는 충분히 알았다·
그래서 황보중악이 말을 멈추고 연소교를 바라본 것이다·
믿어도 좋을지 몰라서·
“전쟁을 막기 위해 삼뇌 뇌천자의 목을 가지고 온 사람입니다· 지금은 제 등을 지켜주는 일행이고요· 믿고 말씀하셔도 됩니다·”
내가 안심을 시켰지만 황보중악은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때 남궁소소가 연소교에게 아는 척을 했다·
“오랜만이군요·”
“오랜만이에요·”
“처음 만났을 때는 같은 편이었다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는 다시 서로에게 칼을 겨누던 적이었는데 지금은 또 일행이 되었네요· 만약 다음번에 또 만난다면 그땐 어떤 사이일지 궁금하군요·”
“사과를 원하는 건가요?”
“사과할 일을 했었나요?”
“전혀요·”
“알고 싶지 않아요·”
“이미 대답을 했는데요·”
“안 들은 걸로 하겠어요·”
“왜죠?”
“당신 생각은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나를 비롯해 남자들은 당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몰라 두 여자가 말을 할 때마다 이쪽저쪽을 번갈아 보았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지만 연소교의 표정이 조금 더 굳어지는 것으로 미루어 남궁소소가 이긴 것 같았다·
순식간에 대화를 끝내버린 남궁소소가 황보중악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는 지금 의뢰인이에요· 풍운비룡은 표행에 관한 한 고지식하기 짝이 없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의뢰인을 믿고 정보를 나누려 할 거예요· 그러니 둘을 나누는 건 의미가 없어요·”
막사 안의 모닥불이 다른 때보다 옆으로 두 배나 커졌다·
나와 연소교와 호리독사와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은 모닥불을 가운데 놓고 빙 둘러앉았다·
막사가 있고 사람이 바뀌어서 그렇지 표행을 할 때면 흔히 있는 풍경이었다·
한데도 나는 앉은 자리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왜 그런고 했더니 평소와 달리 내 옆에 남궁소소가 아니라 연소교가 앉아 있기 때문이었다·
모닥불 너머 남궁소소의 곁에는 내가 아닌 황보중악이 앉아 있었고·
“무림맹에 의해 공적으로 몰려 도망 다니던 흑도와 사파의 고수들이 대거 유입됐네· 심산에 은거해있던 마교의 전대 고수들과 악명 높은 흉신악살들도 속속들이 가세하는 중이고· 이참에 아예 불판을 갈아 치워버리자는 생각인 것 같아·”
“잘 알고 있습니다· 몇 명은 만난 적도 있고요·”
“명부삼귀와 편복은왕을 물리친 얘긴 들었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더군·”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전쟁은 자네만 하고 있는 게 아닐세· 무림맹의 모든 정보력이 동원되어 자네와 마교도들의 움직임을 들여다보고 있지·”
“천마의 제자가 나타났다는 것도 아십니까?”
“맹의 가장 뛰어난 추적자들이 은밀히 명부삼귀를 쫓고 있었는데 닷새 전 갑자기 누군가 나타나 세 명을 혼자서 한 식경만에 모두 쓰러뜨려 버렸다더군· 나중에야 그가 칠성군이었다는 게 밝혀졌지· 그 바람에 맹이 발칵 뒤집혔네·”
“그가 천마성교를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삼뇌의 서거 이후 천마성교를 이끌던 혈영노조와 명부삼귀는 그의 수하로 전락해 버렸고요·”
“당연히 그랬겠지· 제아무리 혈영노조라고 해도 천마의 진전을 이은 제자를 감당할 수는 없었을 걸세· 명분으로나 무공으로나· 한데 자네는 그런 것들을 어떻게 알았나?”
“반 시진 전 그가 다녀갔습니다·”
“이곳 진왕야께서 계신 진영을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가 왜?”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제게 도전을 해왔습니다· 자신이 십초식을 펼칠 때까지 죽지 않고 버티면 조용히 물러겠다고요·”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비겁함을 무릅쓰고 암기를 출수하지 않았거나 오초식만 더 연장했더라면 여러분은 아마 저의 조문객이 되었을 겁니다·”
“···!”
진왕과 삼천군병이 지켜보는 앞에서 칠성군과 싸웠다는 말에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은 내가 칠성군과 자웅을 겨루었다는 데서 처음 놀라고 명부삼귀도 버티지 못한 십초식을 견뎠다는 말에 두 번째로 놀라고 내상을 입는 바람에 피를 토하며 쓰러질 뻔했다는 대목에서 세 번째로 놀랐다·
누구보다 남궁소소가 놀랐다·
하지만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듯 주먹을 말아쥐고 꾹 참으며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칠성군이 진왕의 목숨을 인질로 삼고 아침까지 여길 떠나라 경고했다는 대목에선 막사 안이 발칵 뒤집혔다·
이건 호리독사와 연소교도 까맣게 몰랐던 내용인지라 두 사람 모두 눈을 부릅뜬 채 나를 돌아보았다·
“힘든 줄 알지만 부디 용기를 잃지 말게· 자네는 혼자가 아닐세· 중원 전역에 흩어져 있는 일흔두 개 문파에서 일만여 명에 달하는 정도 무림인들이 달려오고 있네·”
“어디로 말입니까?”
“그거야 당연히 자네들이 향하는 곳이지·”
“우리가 어디로 향하는 줄 알고요·”
“어디로 가든 사천여 명으로까지 늘어난 마교도들을 따라가면 자네들이 있겠지· 놈들의 숫자가 얼마까지 더 늘어나게 될지 모르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시죠?”
황보중악은 허를 찔린 사람처럼 표정을 굳혔다·
나는 황보중악과 동갑이자 그의 친구인 두소부를 돌아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
“일전에 제게 주신 보은패라도 쓸까요? 물론 지금은 갖고 있지 않지만 외상으로라도· 정녕 그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아무리 동갑이라고 해도 지금은 조(組)를 이루어 움직이는 상황· 조장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말을 할 수 없다·
두소부는 가만히 황보중악을 돌아보며 눈빛으로 허락을 구했다·
황보중악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두소부의 입이 열렸다·
“맹에서는 자네가 표행을 성공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있네· 해서 성보 세 개를 칠성군에게 빼앗기기 전에 천마성교를 칠 생각이네·”
“그건 원점으로 돌아가자는 얘기가 아닙니까? 연 소저가 수하들을 제물로 바쳐 가면서까지 삼뇌의 목을 베어 천룡표국을 찾아온 것도 제가 그녀와 함께 목숨 걸고 북쪽으로 가고 있는 것도 모두 전쟁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무림맹은 천마성교처럼 한 사람의 절대자가 모든 걸 좌지우지하는 곳이 아닐세· 십삼 개 성(省)에 기반을 둔 일흔두 맹방의 의사가 절대적이지· 지난 정마대전 당시 수많은 제자를 잃었던 기억을 가진 맹방 장문인들의 우려를 종식시킬 수가 없었네·”
“그래서 이러는 겁니다· 맹방의 장문인들께서 그런 주장을 하시는데도 맹주님과 총군사님께서는 가만히 듣고만 계셨다는 겁니까?”
“이건 총군사님께서 맹방의 장문인들께 제안한 작전일세· 최종적으로 맹주님께서 장로회의에서 재가를 하셨고·”
“그럴 리가요· 제게 무림맹이 소유하고 있던 죽간본의 내용을 필사해 주시며 함께 봉인하라고 하신 분이 바로 총군사님이십니다·”
“맹주님과 총군사님께서 왜 당주님만 믿고 무조건 기다려야 하는 거죠?”
날카로운 음성과 함께 갑자기 끼어든 사람은 남궁소소였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남궁소소는 나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을 이어갔다·
“맹주님과 총군사님께는 두 분의 입장과 의무가 있어요· 그분들께서 책임진 것들이 지금 당주님께서 어깨에 짊어지고 계신 것보다 가벼울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맹주 장초풍과 총군사 사마옥에게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발호해 강호를 피로 물들일지 모르는 마교로부터 정도무림을 지켜야 할 임무가 있다·
그들이 말하는 정도무림은 제자백가만큼이나 많은 무학의 유파들일 수도 있고 각자의 문파가 가진 신념일 수도 있고 협의를 숭상하는 가치일 수도 있고 수많은 사람의 목숨일 수도 있고 이 모든 것들일 수도 있다·
반면에 내가 지키려는 건 사람들의 목숨이었다·
나와 연소교는 단지 정마를 초월해 수천 명이 죽는 걸 막고 싶었다·
더불어 그들의 남겨진 아내와 자식들이 미망인과 고아가 되어 힘든 삶을 사는 걸 막고 싶었을 뿐이다·
내가 지키려는 것이 결코 더 작다고 할 수는 없었다·
맹주나 총군사가 지키려고 하는 것과 다르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최소한 두 사람이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책임과 의무보다 무겁지 않은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정곡을 찌르는 남궁소소의 일침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 행보를 멈출 수는 없었다·
“이제부턴 우리가 알아서 행동해야겠군요· 어차피 그동안 맹의 지원을 받은 것도 아니니 딱히 달라질 것도 없지만 말입니다·”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군· 총군사님께선 자네만 믿고 있을 수 없다고 했지 자네를 믿지 않는다고는 하지 않으셨네·”
황보중악이 다시 끼어들며 한 말이었다·
내가 그를 보며 물었다·
“무슨 뜻입니까?”
“맹방의 장문인들께선 원래 회수에서 마교도들을 치자고 강하게 주장하셨네· 한데 맹주님께서 재가를 해주지 않으셨지· 때마침 남경에 머물고 계시던 진왕야께서 삼천군병을 이끌고 회수로 향하신다는 보고를 받으셨거든·”
“그래서요?”
“총군사님께서는 자네가 이곳 부양(卓陽) 땅에 이르러 십중팔구 진왕야와 헤어질 수밖에 없을 거라고 예상하셨지· 이에 만약 자네가 진왕야의 보호를 벗어난 후 사흘이 지나도 황하를 건너지 못하면 그때 황하에서 마교도들을 치자고 맹방의 장문인들을 설득하셨네·”
“그 사이 적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늘어날 겁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저희를 미끼로 쓸 생각이시군요·”
“총군사님께서도 맹방의 장문인들을 설득할 구실이 필요하시지 않겠나· 다행히 맹의 대장로이신 남궁세가주께서 강력하게 힘을 실어 주신 덕택에 맹주님께서도 총군사님의 계획을 큰 무리 없이 관철할 수 있으셨다고 들었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그리고 천룡표국에서 후방보급을 책임져 주기로 했네·”
“우리 표국에서요?”
“그렇네·”
맹주와 총군사에게 자신들만의 책임과 의무가 있었던 것처럼 이종산에게도 천룡표국주로서 그가 해야 할 일이 있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이 되면 모든 책임을 어깨에 짊어지고 오롯이 혼자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수장들의 고독함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한데 선배님들께선 어떻게 적들의 눈을 속이고 여기까지 들어오신 겁니까? 천마성교의 척후병들이 삼천군병을 둘러싸고 이중삼중의 천라지망을 펼친 것으로 압니다만·”
“웬걸· 놈들에게 들킬 걸 뻔히 알면서 온 것이네·”
“막아서거나 공격을 하지 않던가요?”
“말을 탄 채 죽림을 뒤로 젖히고 척후병들이 숨어 있는 곳을 보란 듯이 지났네· 총군사님께서 말씀하시길 성보를 손에 넣기 전에는 저 쪽에서도 먼저 섣불리 전쟁의 불씨를 댕기지 못할 거라시더군· 그 예상이 맞았네· 아마 나갈 때도 그럴 것이고·”
“그렇군요·”
“이제 어떻게 할 셈인가?”
“달라질 건 없습니다· 가던 길을 계속 가야지요·”
“하면?”
“총군사님께 전해 주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사흘 안에 황하를 건널 테니 그때까지 개전을 최대한 막아 달라고요·”
한순간 좌중의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바깥에는 무려 사천에 달하는 마교도들이 중무장을 한 채 지키고 있다·
당장 저들을 뚫고 나가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추적을 피해 황하까지 사흘 안에 달려가야 한다·
그리고 또 황하를 건너야 하고·
회수를 건널 때의 아찔한 상황을 생각하면 이건 누가 봐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걸 알기에 누구도 섣불리 말을 하지 못했다·
어떤 말도 위로나 격려가 되지 못할 거라는 걸 아니까·
“말씀을 모두 전했으니 이제 우린 그만 날이 밝기 전에 돌아가 봐야겠네· 무림의 선배로서 이런 말은 좀 염치없지만 꼭 살아서 다시 보세·”
“살펴 가십시오·”
황보중악을 필두로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 전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황보중악이 남궁소소를 돌아보며 말했다·
“밖에서 기다리겠다·”
황보중악은 이어 연소교와 호리독사를 힐끗 바라본 후 막사 문을 들치고 나갔다·
눈치 빠른 호리독사가 얼른 연소교의 손을 잡아 끌고 후기지수들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막사 안에는 나와 남궁소소만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