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화· < 전설의 표행(17) >
활과 창과 칼로 중무장한 삼천여 명의 군병들이 커다란 모닥불 두 개를 에워쌌다·
모닥불을 잇는 가상의 선을 경계로 이쪽엔 진왕이 여우가죽을 깐 대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진왕의 뒤쪽 좌우에는 삼천군병을 통솔하는 대장군 도지휘사와 내가 시립했다·
삼엄한 경계 아래 비무장인 채로 등장한 노인들은 놀랍게도 혈영노조와 명부삼귀였다·
‘명부삼귀가 합류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명부삼귀는 애써 태연한 척을 했다·
하지만 주름진 얼굴에 드러난 감정까지 속이진 못했다·
‘뭐지? 도살장에 끌려 온 소 같은 저 표정은·’
그리고 처음 보는 장년인이 한 명 더 있었다·
장년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어떻게 보면 산전수전 다 겪은 오십 줄의 초로인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무인으로서 한참 왕성히 활동할 서른 줄의 신진고수 처럼도 보였다·
몇 살을 먹었건 그는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잘생긴 얼굴에 온몸이 근육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리고 눈빛이 있었다·
삼천의 중무장한 군병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진왕을 마주 보면서도 주눅 든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평생을 군림해온 자다·’
이게 말이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에게서 진왕이나 오황자를 처음 보았을 때와 같은 인상을 받았다·
더욱 놀라운 건 혈영노조와 명부삼귀가 바로 그 장년인으로부터 몇 걸음 뒤쪽에서 나란히 멈춰 섰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저 장년인의 신분이 혈영노조와 명부삼귀보다도 높다는 걸 의미했다·
혈영노조와 명부삼귀는 모두 초절정의 고수들이었으며 천마교주가 되고자 각자의 방식으로 성보를 노렸던 거물들이었다·
특히 명부삼귀는 천마성교도도 아니거니와 중간에서 성보를 가로채려고까지 했었다·
그런 자들이 누군가에게 머리를 숙인다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대관절 저 장년인의 정체가 무엇이관데·
나는 재빨리 연소교에게 전음을 보냈다·
[장년인은 누구요?]
[저도 모르겠어요·]
[처음 보는 자라는 뜻이오?]
[명부삼귀와 편복은왕도 그날 처음 보았어요· 다만 용모를 보고 미루어 짐작했을 뿐· 한데 저 장년인은 도무지 짐작 가는 사람이 없어요·]
“진왕야를 뵙습니다·”
역시나 혈영노조와 명부삼귀를 제쳐두고 장년인이 진왕에게 정중히 포권지례를 올렸다·
허리까지 숙였는데도 이상하게 굴복 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내가 장년인에게서 본 걸 진왕도 본 모양이었다·
그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한참이나 수염을 쓸다가 물었다·
“귀하도 이름을 말하지 않을 것이오?”
“요동에서 온 야율극리라고 하옵니다·”
“요(達)나라 왕족의 성씨로군·”
“칠성군(七星君)!”
마지막 신음은 연소교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이었다·
가까이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순간 전부 그녀에게로 향했다·
칠성군이 누구일까를 생각하다가 나도 두 눈을 부릅뜬 채 돌덩이처럼 굳어 버렸다·
연소교가 칠성군이라고 부를 사람은 하늘 아래 한 명 밖에 없었다·
‘설마!’
삼십여 년 전 천마성교가 궤멸할 당시 천마교주에게는 일곱 명의 제자가 있었다·
그중 마지막 제자로 짐작되는 자가 나타난 것이다·
[틀림없소?]
[사부님께 들었던 칠성군의 인적사항과 동일해요·]
[천마의 제자들은 사십여 년 전 일곱 개 문파의 합공을 받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다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은 걸로 아오만·]
[무슨 기구한 속 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구태여 우리끼리 맞다 아니다를 논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러면서 연소교는 장년인의 뒤쪽에 있는 혈영노조와 명부삼귀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연소교는 인적사항을 전해 들은 것에 불과하지만 저들은 칠성군을 오랜 시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만약 가짜라면 저 무시무시한 노마두들이 머리를 숙였겠나·
‘이게 무슨!’
주변엔 도지휘사를 비롯해 포정사와 안찰사 등 늙은 고위 관리들이 많았다·
아무리 관부의 인물이라고 해도 천마교주와 그의 제자들에 대해서는 다들 알 만큼 알았다·
칠성군이라는 말에 그들 역시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진왕만큼은 시종일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그가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알고 보니 무림의 명사께서 방문하셨구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그래서 이 야심한 시각에 나를 찾아온 이유는?”
야율극리는 대답 대신 뒤를 살짝 돌아보았다·
그러자 어느새 책사로 전락(?) 해버린 혈영노조가 비단 보퉁이에 싼 작은 목함 하나를 들고 몇 걸음 앞으로 나왔다·
진왕의 호위장인 장수 연철산이 나아가 보퉁이를 받아 다시 진왕에게로 돌아왔다·
하지만 곧장 건네지 않고 서너 걸음 앞에서 멈춘 다음 보퉁이를 풀기 시작했다·
목함 속에는 푸른 이끼가 잔뜩 깔린 사이로 피처럼 붉은 두꺼비 한 쌍이 숨을 쉬며 앉아 있었다·
갑작스러운 흉물의 등장에 모두가 표정을 굳혔다·
야율극리의 설명이 이어졌다·
“곤륜산에서 잡은 적령사왕(赤靈死王)입니다· 백 종의 독물을 잡아먹고 사는 영물로 놈이 한번 들어갔다가나오면 연못 안의 모든 물고기가 죽어버릴 정도로 맹독을 지녔지요·”
“그래서요?”
“독과 약은 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맹독을 가진 적령사왕이지만 그 간을 생으로 먹으면 백독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특히 놈이 잡아 먹는 독물로부터 추출한 독에 당했을 경우에는 백발백중이지요· 이놈들이 왕야와 왕야께서 모시는 분의 목숨을 한 번은 구해줄 것입니다·”
“무엄한지고!”
강인한 인상의 도지휘사가 우렁우렁한 일갈을 터뜨리며 앞으로 나섰다·
황족과 관련해서는 함부로 죽음을 언급해선 안 된다·
특히 황태자는 장차 황제가 될 사람 야율극리는 방금 진왕과 그가 모시는 오황자에게 큰 무례를 저질렀다·
아무리 보아도 실수가 아니었다·
진왕은 침착했다· 그는 한 손을 들어 도지휘사를 만류한 다음 다시 야율극리에게 물었다·
“이렇게 귀한 영물을 내게 주려는 이유는?”
“야심한 시각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시간을 내어 주신 왕야께 드리는 예물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하면 이 야심한 시각에 나를 깨운 이유는?”
“그 전에 표사 풍운비룡과 잠시 몇 마디 나누어도 될는지요?”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향했다 진왕 역시 나를 돌아보며 가만히 시간을 끌었다·
어떻게 할 지를 묻는 것이다·
나는 진왕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래도 진왕으로부터 한 걸음 뒤쪽이었다·
황족과 함께 있을 때는 그곳이 어디든 허락이 있기 전까진 함부로 앞서선 안 된다·
이어 야율극리를 향해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태도로 포권지례를 했다·
“풍운비룡입니다·”
“도주하느라 고생이 많군·”
“늘 있는 일이라 괜찮습니다·”
“열하루 동안 눈도 거의 못 붙였다고 하던데·”
도주하는 동안 잠을 거의 못 잤다는 것 정도는 추측으로도 얼마든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확정적으로 말했고 누구에게서 들었다는 식으로 표현했다·
호리독사가 자신들에게 잡혀 있음을 일부러 내비치는 것이다·
“벽곡단밖에 먹지 못했다고는 하지 않던가요?”
“표사 노릇도 못 할 짓이군·”
“그는 무사합니까?”
“정체를 발각당하자 싸울 생각도 않고 바로 투항하더군· 하지만 부상은 피할 수 없었네· 사로잡힌 이후의 대화가 원활하지 못했거든·”
“성보와 교환할 생각이라면 그를 데려왔어야 하지 않을까요?”
“표사를 구하기 위해 표물을 그렇게 쉽게 넘기겠다는 말인가?”
“제 의지와 상관없이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것이 귀하의 능력이겠지요· 보아하니 아직 교단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하셨을 것 같은데·”
“좋은 말이군· 참고하지· 한데 성보는 고작 도둑의 목숨 따위를 놓고 함께 저울질할 물건이 아닐세· 그건 성보에 대한 모독이지·”
“평범한 도둑이 아닙니다만·”
“공령신투의 제자라고 다를 건 없네·”
“그는 천룡표국의 표사입니다·”
“그리고 내 수중에 있고·”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듣자 하니 비영문의 무학에다 백포산군의 진전까지 이었다지? 며칠 전에는 편복은왕에게 내상까지 입혔고·”
“소문은 늘 과장되기 마련이죠·”
“젊은 사람이 너무 겸손한것도 미덕이 아니라네·”
야율극리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섬뜩한 웃음이었다·
이어 그가 고개를 돌려 진왕에게 말했다·
“왕야께 청이 한 가지 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풍운비룡과 잠시 자웅을 겨루어 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아율극리는 다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를 이기면 한 식경 안에 그를 다시 볼 수 있을 걸세· 하지만 진다면 영영 돌아오지 못 하겠지· 해볼 텐가?”
“이번에야말로 성보를 달라실 줄 알았습니다만·”
“그건 때가 되면 알아서 찾아 갈 테니 염려 말게·”
이 인간 내가 지금까지 상대해 왔던 어떤 무림인이나 마두들과도 다르다·
장작을 얼마나 던져 넣었는지 일 장 높이까지 치솟는 모닥불 두 개를 양쪽에 둔 상태에서 나는 야율극리와 마주하고 섰다·
“병기는 무엇을 취하시겠습니까?”
“비영문의 무공이 성명절기라고 들었는데·”
“구태여 편의를 봐주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굳이 무기를 잡을 이유도 없다고 해두지·”
“언제까지 싸우시겠습니까?”
“시간을 정해 두어야 할 정도로 오래 싸우게 될까?”
“제가 발이 좀 빠릅니다· 진영 전체를 종횡무진 누비며 싸운다면 동이 터 오를 때까지 싸우게 될 수도 있습니다·”
“도망 다니며 시간을 끌겠다?”
“장기인 경공술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뜻입니다·”
“자부심이 대단하군·”
“백포산군 선배님을 상대로 그렇게 닷새를 버텼지요·”
그제야 야율극리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백포산군이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었다·
천마의 제자조차 놀라게 만든 것을 보면·
“검을 뽑든 독수를 펼치든 개의치 않겠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버티게 내가 십초식을 모두 펼칠 때까지도 살아 있다면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고 돌아가지·”
“십초지적이라· 저를 너무 과소평가하시는군요·”
“백초식으로 할거나?”
“그렇게까지 한가하진 않습니다·”
“삼초식을 양보하겠네·”
“그래야 마음이 편하시다면 얼마든지요·”
야율극리는 대화를 하는 중에도 두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고 뒷짐을 쥔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한데도 아름드리 고목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의 내 공력이라면 고목이라고 해도 얼마든지 쓰러뜨릴 수 있다·
크게도 필요 없다· 서너 걸음 정도의 거리를 더 좁힐 만큼의 빈틈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보이질 않았다·
오히려 함부로 들어갔다가는 일장에 나를 쳐 죽일 거라는 확신만 계속해서 들었다·
‘완벽하다!’
틈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
나는 오른쪽 발끝을 가만히 바깥으로 돌려놓았다·
이어 신발을 신은 채로 엄지와 검지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야율극리는 미동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눈동자만 살짝 굴려 내 발끝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발끝에 모아 둔 공력을 터뜨리며 솟구쳤다·
삼백 년의 공력과 부적의 이능력과 천금풍의 절초가 이 한 동작에 모두 담겼다·
나는 한 줄기 빛으로 변했다·
야율극리와의 거리는 불과 삼 장 그는 번개 같은 움직임으로 왼발을 살짝 빼며 좌장을 출수하려 했다·
충분히 예상했다·
그의 동작이 완전히 만들어지기 전에 내 우장에서 터져나간 화염이 어깨에 먼저 닿는다·
‘헛!’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분명 내 귀영무와 구천홍염장이 더 빨랐다·
한데 갑자기 눈앞에서 고리 모양의 시퍼런 벼락이 쳤다·
꽈앙!
정신이 번쩍 들었다·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좌장이 알아서 뻗어 나갔다·
붉은 화염이 다시 그를 덮쳐갔다·
세상의 모든 공격은 필연적으로 틈을 만들어 내는 법이다·
그가 좌장을 떨치는 바람에 찰나의 순간 빈틈이 생긴 오른쪽 어깨를 노린 임기응변의 한 수였다·
한데 이번에 그의 오른쪽 허공에서 또다시 벼락이 쳤다·
벼락같은 기세가 아니라 정말 고리 모양에 번갯불처럼 시퍼런 벼락이었다·
꽈앙!
또다시 터지는 굉음과 함께 손목을 타고 들어와 척추를 짜르르 울리는 반탄력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이 무슨 엄청난 인간이란 말인가!’
몸속에 이미 삼백 년의 공력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이백 년 정도의 공력만 되었어도 온몸의 뼈가 터져나갔을 것 같았다·
충격을 받았는지 단전 속에 웅크리고 있던 부적의 영기가 튀어나와 마치 청룡과 황룡이 뒤엉켜 싸우는 것처럼 기경팔맥을 타고 달렸다·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힘과 속도와 초식을 동원해 맹공을 퍼부었다·
그러나 내 주먹과 장과 발이 뻗어 나가는 그 모든 방향의 허공에서 벼락이 쳤다·
‘대체 이게 무슨 무공이지?’
번갯불은 차치하고서라도 그의 권장각은 어떤 벽을 넘어 더는 형(形)이 필요치 않은 무초의 경지에 이른 것 같았다·
초식의 오묘함으로는 당연히 나보다 한참 윗줄이었고 내공으로도 결코 내 아래가 아니었다·
문득 이 자가 만약 설산신검이나 남궁유룡이나 백포산군 등의 거물들과 싸우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이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장담하건대 개방과 하오문은 천하십대고수의 명단을 다시 써야 할 것이다·
최소한 한 명은 그에게 패할 테니까·
“본격적으로 놀아볼까?”
서늘한 일갈과 함께 그가 돌연 반격을 시작해 왔다·
한순간 허공이 고리 모양의 번개들로 가득 차 버렸다·
그때부터는 무얼 어떻게 싸웠는지도 모른다·
죽음의 공포를 느낀 나는 그야말로 무아의 경지에서 오직 본능에 의지해서만 보법을 펼치고 권장을 뻗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머리로 무언가를 계산하기 전에 그의 주먹이 주먹에 어린 강기가 닥쳐왔으니까·
나는 나를 초월했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극초절정의 고수를 맞아 나 역시도 지금까지 가보지 못한 어떤 경지에 한 발을 내디뎠음을·
그러나 거기까지가 내 한계였다·
뻐엉!
접장의 순간 나는 누적된 반탄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대여섯 장 밖으로 튕겨 날아갔다·
마치 일부러 그런 것처럼 체공 상태에서 멋지게 공중제비를 돌고는 바닥에 두 손을 찍으며 착지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서려는데 별안간 입에서 붉은 피가 쭉 뿜어져 나왔다·
격돌의 순간마다 그가 쏘아 보낸 암경 즉 내가중수법에 당한 것이다·
순간 현기증이 돌며 나도 모르게 픽 쓰러졌다·
“당주님!”
연소교가 황급히 나를 부르며 전장으로 달려 나오려고 했다·
나는 쓰러지는 동작 그대로 몸을 뒤집으며 다시 벌떡 일어났다·
이어 한 손을 뻗어 연소교를 제지했다·
그리고 까무룩해 지려는 정신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며 주변을 살폈다·
한바탕의 격돌이 지나가고 난 공터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어쩐지 주변이 깜깜해졌더라니 양쪽에 있던 모닥불이 격돌의 순간 터져 나오는 경파를 맞고 죄다 날아가 버린 상태였다·
삼천 군병들 사이로 어지럽게 떨어진 장작 조각들의 불이 아직도 꺼지지 않은 가운데 모두가 숨죽이고 나와 야율극리를 번갈아 보았다·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대단한걸·”
“열한 번째입니다· 귀하가 마지막에 펼친 초식 말입니다·”
“내가 확실히 졌군·”
“표정은 전혀 진 사람 같지가 않군요·”
“자네도 이긴 사람 같은 모습은 아니군·”
[내일 아침까지 진왕의 행렬에서 벗어나게· 그렇지 않으면 명부삼귀를 보내 진왕의 목숨을 거둘 것이네· 이미 한차례 손속을 나누었다고 하니 저들이 한때 염왕부의 암살단을 이끌던 사신들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갑자기 야율극리가 내게 전음을 보내왔다· 한데 그 내용이 너무나 광오한 것이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감히·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아십니까?]
[알고 보니 오황자에게 정적들이 많더군· 뒷일을 묻는 것이라면 내가 그들을 만나 수습할 방법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
야율극리가 그때까지 쥐고 있던 주먹을 펼쳤다·
그러자 비격쌍뇌창 한 쌍이 손바닥을 반쯤 관통한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숨 가쁘게 공방을 주고받는 사이 야율극리의 마혈을 노리고 비격쌍뇌창을 출수했었다·
팔 하나 뻗을 정도의 거리에서 벼락처럼 쏘아 보냈기 때문에 당연히 명중할 거라고 믿었다·
한데 그는 귀신같이 알아차리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도로 잡아채 버렸다·
그마저도 나의 십초박을 막아내는 와중에·
다만 완벽하지는 않아서 손바닥을 그대로 뚫렸다·
나는 내상을 입었지만 그 역시도 지금쯤 뼈가 욱신거릴 정도의 고통을 느낄 것이다·
“귀물을 손에 넣었군·”
“목숨을 여러 번 살려 주었죠·”
“암기술은 더욱 훌륭했고·”
“독을 좀 발라 둘 걸 그랬습니다·”
야율극리는 비격쌍뇌창을 뽑아 손가락으로 튕겨 보냈다·
그보다 먼저 나는 발아래 떨어져 있던 불 장작 끄트머리를 재빨리 밟아 ‘탁!’ 하고 솟구치게 했다·
이어 다른 쪽 끄트머리를 잡아채며 힘차게 휘둘렀다·
따당!
작은 불꽃들을 흩날리며 비격쌍뇌창 한 쌍이 머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숙이 박혔다·
당연히 빼앗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순순히 돌려준다·
도무지 예측을 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고강한 무예와 비상한 두뇌 그리고 감히 황족의 목숨을 도모하겠다는 광오함까지·
그제야 혈영노조와 명부삼귀가 아율극리의 수하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을 알 것 같았다·
“그럼 또 보자고·”
야율극리는 진왕에게도 포권지례를 올린 후 이제는 수하가 되어 버린 혈영노조와 명부삼귀를 이끌고 돌아서 갔다·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을 멍한 표정으로 지켜 보았다·
한 식경 후 호리독사는 초주검이 된 채 들것에 실려 돌아왔다·
막사 안에 그를 눕혀 놓고 연소교가 열심히 부상을 치료했다·
나는 옆에서 조용히 운기행공을 하며 내상을 치료했다· 다행히 상태가 심각하지는 않았다·
호리독사 역시 만신창이가 된 얼굴과 달리 생각보다 부상이 깊지 않았다·
한차례 운기행공을 끝낸 내가 물었다·
“용케도 두 군데 밖에 안 부러졌소· 머리도 멀쩡하고·”
“맞을 때 깍지 낀 두 손으로 머리를 최대한 감싼 다음 몸을 애벌레처럼 마는 것이 요령입니다·”
“놈들이 이것저것 캐물었을 텐데·”
“원하는 대로 순순히 다 부는데도 죽으라고 패더라고요·”
“잘했소·”
“죄다 불었는데도요?”
“딱히 아는 것도 없잖소·”
“그건 그렇지요·”
그때 바깥에서 인기척과 함께 당번병이 들어왔다·
“방금 자신들을 무림맹의 전령이라고 밝힌 사람들이 도착했습니다· 급히 표사님을 만나러 왔다고 합니다·”
“이 새벽에요?”
“그렇습니다·”
“지금 어딨습니까?”
“이리로 오고 있는 중입니다·”
“누군지도 모르고 막 들여 보냈단 말입니까?”
“공주마마께서 이미 신분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 순간 검은 피풍의에 죽림을 쓰고 한 손에는 도검을 든 무림인 대여섯 명이 막사 안으로 들이닥쳤다·
낯선 인물들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나도 호리독사도 연소교도 움찔 놀랐다·
호리독사는 부상도 잊은채 벌떡 일어나 앉기까지 했다·
“누구요?”
내가 따지듯 묻자 사람들이 천천히 죽림을 벗었다·
그중에 남장을 한 젊은 여자가 한 명 있었다·
믿을 수 없게도 내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남궁소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