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 전설의 표행(16) >
진왕은 육가촌 강나루에 있는 반점 열 곳을 오늘 하루 동안 전세 냈다·
그런 다음 회수를 건너려고 왔다가 발이 묶였던 양민들 전부가 공짜로 먹으며 차례를 기다릴 수 있도록 했다·
삼천여 명에 달하는 군관병들이 회수를 건너려면 동이 튼 지금부터 시작해도 한나절은 걸리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마교도들에 이어 삼천의 병력 때문에 또다시 도강이 지체되었지만 단 한 명의 양민조차 몰래라도 불평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마교도들을 쫓아주고 밥까지 제공해 주는 진왕을 어진 황족이라며 칭송하기에 바빴다·
세상의 어느 황족이 자신 때문에 백성들이 불편함을 겪는다며 밥을 사주겠냐면서·
진왕의 이런 조치는 혈영노조라는 무시무시한 무림고수를 퇴치한 이야기와 함께 미담으로 크게 부풀려질 것이다·
소문은 고스란히 그가 모시는 황태자를 향한 신망으로 바뀔 것이고·
하지만 내가 아는 진왕은 그렇게 너그럽고 따뜻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매사에 냉철하고 계산이 빠르며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를 향한 황실 종친들과 한림원 학사들의 지지는 덕(德)이 아니라 비상한 두뇌와 한번 입 밖으로 낸 말은 반드시 지키고야 마는 품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그는 평생을 믿고 따를만한 사람인 것이다·
덕이 높지만 무능력한 사람보다 냉정하지만 논공행상이 분명하고 능력 있는 지도자가 백배 나은 법이니까·
진왕은 지금 수많은 군중이 모인 때를 이용해 정치를 하고 있었다·
나는 진왕에게서 그동안 만났던 무림의 명숙들과는 또 다른 경지에 이른 어떤 거인을 보았다·
“자네는 만날 때마다 수월한 표행을 하고 있는 법이 없군·”
이른 아침 회수를 건너는 나룻배 위에서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맞은 편에 앉은 진왕이 내게 한 말이었다·
배 안에는 진왕과 왕비와 공주와 내 일행과 호위를 위한 오십여 명의 사병들 외에는 아무도 타지 않았다·
대신 군관병들을 새까맣게 태운 삼십여 척의 배들이 우리가 탄 배를 전후좌우에서 겹겹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왕야께 큰 빚을 졌습니다·”
“항주에서 자네가 나와 공주의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한 보답일세·”
“그때는 표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어도 자네처럼 사명감을 가지고 목숨까지 걸면서 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 내가 황실의 관리였다면 진작에 자네를 데려다 중용했을 것이네·”
“과찬의 말씀입니다·”
“지금이라도 함께 가자면 한번 고려해 볼 텐가? 자네 가문의 선조들 누구도 가져보지 못한 부와 권세를 누릴 수 있도록 해주겠네·”
“제가 어찌 감히·”
“그냥 해보는 말이 아닐세· 얼마 전 오황자께서 황태자로 책봉되셨네· 황태자께는 자네처럼 뛰어난 통찰력과 강한 충성심과 불굴의 의지를 지닌 인재들이 많이 필요하네·”
“감축드립니다· 전하·”
“자네가 다녀간 이후로 황태자께서도 몇 번이나 자네의 안부를 내게 물으셨지· 풍운비룡이라는 젊은 표사는 지금도 표행을 다니느냐고”
나는 왜국에 볼모로 사로잡혀 있던 황태자비의 어린 동생을 목숨 걸고 구출해 주었고 귀국을 해서는 괴질에 시달리던 황태자에게 납 중독의 징후가 보인다며 경고를 해 준 바 있다·
황태자의 입장에서 나는 진왕의 말처럼 뛰어난 통찰력과 깊은 충성심과 불굴의 의지를 가진 인재처럼 보였을 것이다·
진왕도 그 얘기를 다시 한번 자세히 하고 싶었지만 연소교와 호리독사를 비롯해 듣는 귀들이 있다 보니 일부러 자제하는 것 같았다·
한편 연소교와 호리독사는 내 일행이라는 이유로 얼떨결에 황족들과의 차담(茶談)에 동석한 상태였다·
하지만 언감생심 한마디도 끼어들지 못한 채 숨 쉬는 것조차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해서 새근새근 쉬고 있었다·
그러다 자신과 함께 가자는 진왕의 권유를 듣고는 그만 입이 떡 벌어졌다·
놀라기는 나 역시도 매한가지였다·
황태자는 말 그대로 장차 황제가 되어 구주만리를 다스릴 지고한 존재였다·
그의 총애를 얻고 실력을 발휘한다면 확실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 돈은 지금도 평생 다 쓰지 못할 만큼 많았고 권세는 애초부터 관심 밖이었다·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무례하지 않게 거절할 말을 고민하는 것 같군·”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일개 표사에 불과한 제겐 분에 넘치는 제안입니다· 전하·”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나 크게 다르지 않다네· 기왕이면 더 넓은 세상에서 자네의 재주와 뜻을 마음껏 펼치는 게 낫지 않겠나?”
그때였다·
여태 진왕의 곁에서 남편과 나의 대화를 말없이 듣고만 있던 왕비가 꽃송이 같은 두 눈을 깜빡거리며 옆을 돌아보았다·
이어 새가 지저귀는 듯한 음성으로 조용히 진왕을 나무랐다·
“전하 무를 좋아해도 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법입니다· 좋은 권유도 전하께서 거듭하시면 젊은 표사에게는 부담이 될 것입니다·”
공주도 한입 보탰다·
“어머니 말씀이 맞습니다· 아바마마· 이제 표사님 그만 괴롭히시고 배가 뭍에 닿기 전에 어서 맛있는 만두를 나눠 먹도록 하시어요·”
“갑자기 무슨 만두를 먹자는 것이냐?”
“하 표사님께 들으니 지난 열하루 동안 먹은 거라고는 벽곡단 밖에 없었다더라고요· 해서 배를 기다리는 동안 소녀가 서둘러 만두를 좀 빚어 보았습니다·”
공주가 손수 빚은 만두라는 말에 호리독사와 연소교가 깜짝 놀라며 군침을 꿀꺽 삼켰다·
배도 고프지만 훗날 사람들에게 공주가 직접 빚어준 만두를 먹어 보았다고 자랑할 생각에 한껏 들뜬 것이다·
하지만 나와 진왕과 왕비는 빠르게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앞선 두 사람과는 다른 의미로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진왕은 내게 무얼 운송 중인지 어떤 자들에게 쫓기고 있는지 어디로 향하는지 등에 관해 일절 묻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가 원한다면 그리고 방향이 비슷하다면 필요한 만큼 자신과 함께 여행을 해도 좋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한발 더 나아가 회수를 건넌 직후 진왕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왕야께 피해가 가지 않게 최대한 빨리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당분간은 밤마다 여곽에 머물지 말고 노숙을 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자네가 이렇게 부탁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혹여라도 양민들이 피해를 볼 수도 있거니와 정탐을 노리고 접근하는 적들을 구별하기도 어려워서 그렇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겠네· 그렇게 하세·”
“왕비마마와 공주마마께서 많이 불편하실 겁니다·”
“자네의 부탁이었다고 하면 기꺼이 감수할 테니 아무 염려 말게·”
“감사합니다· 전하·”
덕분에 우리는 진왕과 삼천 군병의 보호 아래 당분간 말을 타고 편안하게 남직예성을 가로질러 갈 수 있게 되었다·
노숙이라고는 해도 황족의 노숙은 모닥불 옆에서 나뭇잎을 깔고 털가죽을 덮은 다음 대충 하룻밤을 보내는 표사들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일단 해가 한 뼘 정도 남으면 이동을 멈추고 군관병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수십 개의 간이 막사를 세운다·
그중 세 개를 각각 진왕과 왕비와 공주가 하나씩 차지하고 썼다·
이를 두고 호리독사와 연소교는 진왕이 왜 왕비와 각방을 쓰는지 부부가 각방을 쓴다면 공주는 왜 왕비와 함께 자지 않는지 등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였다·
이게 갑론을박을 벌일 정도의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사실 이유는 간단했다·
귀족들은 부부 사이일지라도 함께 방을 쓰는 법이 없었다·
천룡표국의 이종산도 특별한 날이 아니고서는 세 명의 부인들 누구와도 같은 방을 쓰지 않았다·
이는 귀족들에겐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몸에 벤 습관이었다·
하물며 귀족 중의 귀족인 황족은 어떻겠나·
그런가 하면 세 사람의 막사에는 추위를 막기 위해 숯불을 피운 청동화로도 있었다·
진왕은 밤마다 나를 비롯해 관리들이나 장수들을 불러다 차와 술을 내리며 격려했다·
때문에 막사도 커서 청동화로가 세 개나 들어갔다·
제아무리 따뜻한 막사에서 잔다고 해도 큰 침상이 있고 외풍이 들지 않는 여곽보다 나을 수는 없었다·
이런 불편함을 참아주는 진왕과 그의 일족이 나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진왕은 우리에게도 막사 하나를 따로 내주었다·
군관병들과 부딪히지 않고 우리끼리 편안하게 지내라는 배려였다·
우리는 화로 대신 평소 노숙하던 습관대로 돌덩이를 주워다가 둥그렇게 돌리고 모닥불을 피웠다·
그 불에다 군병들이 나눠 준 온갖 것들을 삶고 끓이고 지져 먹으며 바닥난 체력을 보충했다·
그리고 밤이 깊으면 모닥불 주변에 어느 젊은 장수가 하사한 털가죽 깔고 厶(모)자 모양으로 누워 밀린 잠을 잤다·
당연하게도 천마성교도들은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며 따랐다·
우리는 우리대로 천마성교도들의 동향을 열심히 살피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일단은 이동 중 높은 언덕이나 산 정상을 오를 때 십리경으로 놈들의 진영을 살피는 일이 기본이었다·
그 정도만으로도 적들의 동향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밤만 되면 은신술과 잠행술의 달인인 호리독사가 변복에 역용을 하고는 척후를 살피러 나갔다·
처음에는 척후 살피는 일을 검해 천마성교의 진영으로 들어가 술을 훔쳐 왔다·
그러다 점차 그들과 함께 모닥불 곁에서 술을 마시거나 밥까지 얻어먹고 돌아왔다·
한데도 호리독사가 들고 나는 걸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밤은 그야말로 호리독사의 세상이었다·
그렇게 놈들이 하는 얘기를 열심히 엿들어 두었다가 돌아와서는 내게 보고했다·
대충 이런 내용들이었다·
“적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 바람에 이제는 자기편들끼리도 전부 알아보기 힘들 지경이 되었습니다·”
“무림 공적으로 몰려 도망 다니던 흑도와 사파의 고수들이 지남철에 쇳가루 달라붙듯 대거 천마성교도에 투신하고 있습니다·”
“천마성교도들의 숫자가 이제 삼천에 육박합니다· 못 보던 노괴들이 돌아다니더라니 생사를 알 수 없던 전대 고수들의 이름이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혈영노조에 대해 이런저런 뒷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애초 천룡표국에서 우리를 놓친 것부터 시작해 표왕과의 전쟁에서 지고 육가촌에서 진왕야께 무릎을 꿇은 것까지· 따지고 보면 결정적인 순간마다 실수를 한다고요·”
나흘째 되던 날 호리독사가 엿들은 정보를 가져 왔을 때 대번에 든 생각은 누군가 천마성교 내부에서 공작을 펼치고 있는 것 같다였다·
숫자가 늘어나는 건 좋지만 하나의 산에 여러 마리의 호랑이가 찾아드니 골짜기가 슬슬 시끄러워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탄생하는 산중의 진짜 제왕은 더욱 무시무시할 힘을 지니게 될 것이다·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야영지 인근의 산봉우리에 올라가 십리경으로 적진을 살피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이제는 사천여 명으로까지 늘어난 적들이 동그랗게 둘러 서 있는 것이었다·
커다란 원 안에는 도검을 든 수십 명이 들어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한바탕 살벌한 혈투가 벌어지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금방 날이 저물어 버려 아무리 안력을 끌어 올려도 더는 볼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적진으로 척후를 살피러 갔던 호리독사가 무슨 이유에선지 삼경이 깊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이 시각이 되면 적들도 경계병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잠들기 때문에 제아무리 호리독사라고 해도 함부로 돌아다닐 수가 없다·
마교도들이 삼삼오오 떠들어 대질 않으니 구태여 적진을 돌아다닐 이유도 없고·
그러니 진작에 돌아왔어야 했다·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한 나는 연소교에게 상황을 설명해 준 다음 곧장 천마성교도의 진영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때 삼천 군병이 머무는 진영의 입구가 살짝 시끌벅적했다·
우리 막사의 당번을 맡은 군관이 서둘러 달려와 상황을 전해 주었다·
“한 무리의 천마성교도들이 찾아왔습니다· 하나같이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로 왔답니까?”
“그게 대범하게도 진왕 전하를 뵙겠답니다· 경계를 책임진 백호장께서 야심한 시각에 이 무슨 수상한 짓거리냐며 당장 돌아가지 않으면 벌집을 만들어 버리겠다며 엄포를 놓는 중입니다·”
“전하께서는 지금 무얼 하고 계십니까?”
“초저녁부터 젊은 장수들을 불러다 술을 나누시더니 한 시진 전에 피곤하다 시며 모두 물리고 침소에 드셨습니다·”
“불경스러운 일인 줄 압니다만 전하를 잠시 깨워 주십시오·”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아무래도 제 일행 중 하나가 저들에게 잡혀 있는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 만나주지 않으시면 그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침소에 드신 전하를 깨우는 건 언감생심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일단 십호장께 보고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군문의 명령체계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엄격하다·
잘 훈련되고 기강이 바로 선 곳일수록 더욱 그렇다·
십호장에게 보고를 하면 십호장이 백호장에게 보고를 하고 백호장이 천호장에게 보고를 하고 천호장이 첨사에게 첨사가 동지에게 동지가 도지휘사에게 보고를 올릴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도지휘사의 허락이 떨어져야 오늘 밤 막사의 호위를 책임진 백호장이 진왕을 깨울 수 있다·
모든 사람을 깨우고 상황을 설명하고 보고가 막사와 막사를 옮겨 다닐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날이 꼬박 샐 것이다·
그 전에 놈들이 포기하고 돌아가 버릴 수도 있고·
“시간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절차가 있다 보니 저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대신 십호장께 상황의 다급함을 최대한 설명해 올리겠습니다·”
말과 함께 당번병이 쏜살처럼 사라졌다·
나와 연소교는 막막한 상황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당번병이 사라진 곳으로부터 십여 명의 호위무사들과 함께 공주가 나타났다·
얼른 포권지례부터 하며 고개를 숙였다·
“공주마마를 뵙습니다·”
“공주마마를 뵙습니다·”
“볼 때마다 하루에도 몇 번이고 그렇게 깍듯이 인사를 하실 거예요?”
“당연히 그래야지요·”
“하여간 쓸데없이 고지식하시다니까·”
“공주마마께선 어쩐 일로 아직까지 침소에 들지 않으셨는지요?”
“초저녁에 차를 너무 많이 마셨는지 아무리 누워 있어도 정신이 말똥말똥하지 뭐예요· 그래서 잠시 달구경을 나왔다가 소란이 이는 걸 듣고 표사님께 한번 와 봤어요·”
“저 때문에 일어난 소란이라는 걸 아셨군요· 여러 가지로 번거롭게 해드려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게 아니에요· 혹시 아바마마를 급히 깨워야 하는데 방법이 없어 곤란해하고 있지 않으신가 해서 와 본 거라고요·”
“예?”
“제가 깨워 드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