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 전설의 표행(14) >
주변을 겹겹이 둘러싼 백여 척의 작은 배들 사이로 커다란 배 한 척이 나타났다·
앞이 뾰족한 보통의 배와 달리 사각형의 넓은 뱃머리에다 박쥐 날개 모양의 쌍돛까지 박은 대형 나룻배였다·
배에는 큼지막한 도끼 두 자루를 어깨에 가로질러 멘 장년인이 타고 있었다·
연소교가 재빨리 전음을 보내왔다·
[혈부투귀예요· 천마성교의 광동지부를 책임진 당주고요· 아마도 본 기억이 있을 거예요·]
기억이 있다마다·
남만으로 갔을 때 줄곧 삼뇌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자였다·
공교롭지만 녹림맹에도 똑같은 별호를 쓰는 자가 있었다·
이래서 별호는 쓸데없이 위협적이고 과장되기만 한 것보다 독특한 것 위주로 지어야 한다·
그러나 저자의 별호는 흔한 것일지언정 결코 쓸데없이 과장되지 않았다·
혈부투귀는 한참 높은 나룻배의 뱃머리에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 새벽에 어딜 그렇게 바삐 가시나?”
“전혀 바쁘지 않았습니다만·”
“남자 둘에 여자가 하나라·”
“다 남자로 보일 텐데요·”
“설마 시치미를 떼려고?”
“그러기엔 너무 늦은 것 같군요·”
“삼경이 되길 기다렸다가 역용을 한 채 수면과 맞닿은 쪽배를 타고 나타날 거라더니· 이 모든 걸 내다보신 좌호법의 신안(神眼)이 놀랍기 그지없군· 진작에 이랬어야 하는 건데· 후후·”
“덕분에 열하루 동안이나 밤잠을 설쳤습니다· 피곤하게시리 자꾸 말 걸지 말고 어서 귀하가 모시는 수장에게 안내나 하시지요·”
“시건방진 건 여전하군·”
“얌전히 군다고 풀어 줄 것도 아닌데 기왕이면 당당해야죠·”
“끌고 가자!”
밧줄 달린 작살 한 대가 날아와 쪽배의 뱃머리에 ‘쾅!’ 소리를 내며 박혔다·
그 상태에서 우리는 쪽배와 함께 통째로 끌려갔다·
강나루는 이른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대낮처럼 밝았다·
수백 개의 횃불은 물론이거니와 사공들이 언 몸을 녹이기 위해 곳곳에 가져다 놓은 모닥불까지 모조리 불타올랐기 때문이다·
쪽배가 뭍에 닿자 도검을 패용한 마교도들이 사방에서 개미떼처럼 에워쌌다·
그러나 섣불리 다가와 무장을 해제하려 들지는 않았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나나 연소교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도 하거니와 이제는 그물 속에 든 물고기여서 놈들의 입장에선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다만 한 방향으로 가도록 길만 열어 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간 곳에 여덟 명의 노인들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같이 기괴한 용모에 불그죽죽한 피부색 그리고 기광이 번뜩이는 눈동자를 지닌 노인들이었다·
이런 경우엔 일반적으로 가운데 있는 자가 수장이다·
황금빛 비단 장포을 입은데다 살집까지 넉넉한 것이 흡사 부호처럼 보이는 노인·
아니나 다를까 연소교가 또 전음을 보내왔다·
[가운데 황금장포를 입은 노인이 혈영노조예요·]
[살벌한 별호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구려·]
[저렇게 온화한 모습을 하고 있어도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순식간에 주변을 피로 물들이는 초절정 고수예요·]
[머리만 비상한 자가 아니다?]
[머리까지 비상한 자죠·]
[좌우에 있는 일곱 명의 노인들은 누구요?]
[아무래도 교를 재건하고 새로운 교주를 옹립하기 위해 뭉친 팔대호교사자들 같아요· 삼뇌군사가 죽자 위기의식을 느낀 천마성교 내 각 파벌의 수장격들이 혈영노조를 중심으로 모인 거죠·]
[그 반대일 수도 있소·]
[반대라면?]
[각 파벌의 수장들이 혈영노조를 중심으로 뭉친 게 아니라 혈영노조가 각 파벌의 수장들을 하나로 모은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오·]
[···!]
[그건 그렇고 성보가 든 보퉁이를 잠시 내게 맡길 수 있겠소?]
그게 그거인 것 같아도 사실은 큰 차이가 있었다·
전자가 연합 또는 연맹의 형태라면 후자는 모양만 그럴싸할 뿐 상명하복의 독재체제일 가능성이 크다·
쉽게 말해 후자일 경우 혈영노조 그 자신이 천마교주로 등극하려 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진작 이랬어야 했다는 혈부투귀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혈영노조는 삼뇌가 몇 번이나 시도하고서도 실패했던 나를 포획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지도자의 자질을 입증했다·
더불어 삼뇌가 잃어버린 성보를 전부 회수하고 마지막으로 연소교를 죽여 삼뇌의 복수까지 하면 명분마저 얻게 된다·
결정적으로 그는 삼뇌보다 스무 살이나 젊었다·
그래도 일흔 살이 넘었지만 사분오열된 천마성교를 하나로 뭉치고 반석 위에 올려놓기에는 충분한 나이였다·
“자네가 풍운비룡이군·”
역시 가운데 있는 노인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오늘내일하는 것처럼 보이던 삼뇌와 달리 목소리도 생기로 넘쳤다·
그리고 기품이 있었다·
나이 어린 사람이라고 해서 함부로 ‘너 네’ 하며 하대를 하지 않는 여유와 귀족다움이 그에겐 있었다·
“혈영노조 선배님을 뵙습니다·”
“이미 내 얘기를 들었나 보군·”
그러면서 혈영노조가 바짝 얼어붙은 채로 내 옆에 서 있는 연소교를 잠시 돌아보았다·
연소교는 지금 남장에 역용까지 완벽하게 한 상태였다·
하지만 혈영노조에게는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천룡표국의 습격을 주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일로 우리가 더 큰 손해를 봤으니 억울해할 것 없네· 만박노군의 지원을 등에 업은 표왕의 저항이 제법 매섭더군·”
“총군사께서 계시지 않았더라면 더 매서웠을 겁니다· 무림맹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으니 전면전도 불사하셨을 테니까요·”
“부자 사이의 신뢰가 깊군·”
“무슨 말씀이신지요?”
“마지막 담판을 짓기 위해 표왕을 다시 만났을 때 내게 그러시더군· ‘당신들이 어떤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내 아들을 잡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지만 이렇게 잡았다·
그것도 무려 회수를 건너기도 전에·
혈영노조는 지금 이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종산과 나를 비웃듯 곳곳에서 웃음보가 왁자지껄하게 터졌다·
혈영노조는 천마성교의 교도들이 지금의 상황을 선명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충분히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기를 기다렸다가 내게 말했다·
“이제 슬슬 정리해볼까?”
“그래야겠지요·”
“세 개의 성보와 천살마녀를 넘기게· 하면 천룡표국에 끼친 손해를 배상하는 차원에서라도 자네와 공령신투의 제자는 보내주도록 하지·”
공령신투라는 말에 옆에서 호리독사가 움찔 놀랐다·
딱히 비밀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크게 떠벌리고 다닌 적도 없는 탓이다·
“모르시는 게 없군요·”
“항주에서 며칠 머무르다 보니 찾아오는 입들이 많더군·”
“천살마녀도 함께 보내주십시오·”
“그건 불가하네·”
“그럼 계산이 안 맞습니다·”
“그녀는 삼뇌 군사부주를 시해한 배교자일세· 군사부주께서는 마지막 천마교주를 모셨던 교맥의 전승자· 내 손으로 반드시 이 자리에서 숨통을 끊어 놓아 일벌백계로 삼아야겠네·”
“와아아!”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혈영노조의 한마디가 천마성교의 교도들 가슴에 불을 지른 탓이다·
‘비상한 두뇌에다 선동을 하는 수완까지·’
잠깐 살펴본 것에 불과하지만 삼뇌가 자신에 대한 공포심으로 천마성교도들을 이끌었다면 혈영노조는 교도들로 하여금 스스로 충성을 바치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뛰어난 머리에 야망까지 있는 자가 왜 그동안 두드러지지 않았을까?
아닌가?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며 수면 아래에 숨어 있었던 건가?
그때쯤엔 강 곳곳에 포진해 있던 자들까지 모조리 올라오면서 넓은 나루터가 이천여 명에 달하는 천마성교도들로 가득 찼다·
그들의 뒤쪽 야트막한 언덕에도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일천여 명의 구경꾼들이 반쯤은 그림자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마교도들이 나루터를 장악한 다음 배를 전부 징발해 버리자 도강을 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사람들이 태반일 것이다·
어깨며 옆구리로 삐죽삐죽 튀어나온 그림자들로 미루어 병장기를 지닌 무림인들도 적지 않았다·
무림인들은 정사마를 초월해 중간에서 성보를 가로챌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찾아온 자들이 틀림없었다·
아직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 않지만 지난 엿새 동안 우리를 추적해 왔던 명부삼귀와 편복은왕도 저 무림인들 틈에 섞여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천마성교도들에 이어 저들 모두를 뚫고 여길 빠져나가기란 이제 불가능해졌다·
“뭣들 하느냐!”
채채채채채채채채챙!
혈부투귀의 일성에 가장 앞줄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마교도 백여 명이 일제히 도검을 뽑아 들었다·
채챙!
호리독사와 연소교도 반사적으로 도검을 뽑았다·
앞서 웅장하게까지 느껴지던 쇳소리들에 비하면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혈영노조에게 다시 물었다·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씀해 보시게·”
“제가 걸려들 줄 어떻게 아셨습니까?”
“쫓기는 자들의 심리란 사실 아주 간단하지· 최대한 빨리 그리고 멀리까지 달아난다· 그러다 굶주리는 시간이 길어지고 피로가 누적되면 점차 판단력이 흐려지면서 평소엔 쉽게 보던 것들조차 놓치기 마련이고·”
호리독사와 연소교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떨구었다·
호리독사는 자신이 거짓 정보를 물어 왔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연소교는 내가 자신을 걱정해서 무리한 결정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순전히 내 잘못이다·
거짓 정보와 조원들의 나쁜 몸상태는 언제나 돌발변수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기에 내가 더 냉철했어야 했다·
“한 수 크게 배웠습니다·”
나는 진심 어린 마음으로 혈영노조를 향해 포권을 쥐어 보였다·
“듣던 것과 달리 담백하군·”
“어떻게 들으셨는지요?”
“군사부주께서 자네에 대해 말씀하시길 세 치 혀를 장어 꼬리처럼 놀리고 온갖 술수에도 능하기 때문에 멱을 틀어쥐기 전까지는 안심하지 말라시더군·”
“구관이 명관이군요!”
말과 함께 나는 혈부투귀를 향해 날아갔다·
공력을 발끝에 집중해 두었다가 폭발하듯 펼친 질주에 주변을 둘러싼 마교도 대부분의 시선이 내 신형조차 따라오지 못했다·
그러나 혈부투귀는 달랐다·
어깨 뒤로 넘겼다가 앞으로 힘차게 당기며 뻗는 그의 양손에 시퍼렇게 날 선 두 자루 대부가 들려 있었다·
내가 달려가는 속도에 그가 대부를 내려치는 속도가 더해지면서 흡사 산이라도 쪼갤듯한 기세가 닥쳐왔다·
순간 나는 다시 한번 발끝으로 땅을 박차며 일 장이나 솟구쳤다·
솟구치며 몸을 빠르게 뒤집었다·
대부 두 자루의 시퍼런 날이 아슬아슬하게 내 어깨를 비껴갔다·
반면 나는 공중제비를 돌며 겹겹이 둘러싼 마교도들 머리 위를 무려 오 장이나 날아갔다·
갑자기 공력을 터뜨리며 벼락처럼 질주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오 장도 안 되는 짧은 공간을 달려 마교도들이 감히 반격하지 못할 만큼의 빠른 속도와 비행거리를 만들기 위해서·
포위망을 벗어나 마교도들 너머로 날아간 나는 천근추의 수법을 펼치며 뚝 떨어졌다·
이어 품속에 있던 보퉁이를 꺼내 들고는 바로 내 발 앞에서 어깨높이까지 활활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 위로 쑥 밀어 넣었다·
“모두 멈춰!”
천둥 같은 대갈일성에 좌중의 공기가 크게 출렁였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일신에 지닌 공력을 숨기지 않았다·
적들을 압도해야 내가 상황을 주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상은 적중해서 마교도들이 공격을 해오던 동작 그대로 우뚝 멈추었다·
‘결국 또 이렇게 됐군·’
문득 전생에서의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도 나는 죽간을 운송하던 중 그것을 탈취하려던 괴인들과 맞닥뜨렸었다·
‘대체 그놈들은 또 누구였을까?’
그걸 알려면 앞으로 삼십 년 가까이 더 살아야 한다·
그때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벼락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웅성대는 마교도들을 헤치고 혈영노조가 나타났다·
그러자 나를 중심으로 또 다른 형태의 대치가 이루어졌다·
덕분에 수백 명의 마교도들을 가운데 두고 연소교와 호리독사 그리고 내가 따로 떨어져 마주 보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솜씨가 좋군·”
“뭐라도 해봐야죠·”
쟁자수였던 전생에선 입만 열면 쌍욕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지금은 나름 신분 상승을 해서인지 차마 그렇게는 되지 않았다·
“동료들의 목숨이 내 수중에 있네·”
“제게는 성보가 있고요·”
“자네 입장에서는 확실히 아까보다 나아졌군·”
“이제 다시 계산을 해볼까요?”
“그 전에 성보를 불 속에 던질 수는 있고?”
“못할 것 같습니까?”
“처음부터 천룡표국에서 없애질 않고 이 고생을 하며 북쪽의 성지로 옮겨 봉인하려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텐데·”
“저와 무림맹의 목적이 아무리 간절한들 이것들을 손에 넣으려는 천마성교도들만 하겠습니까? 특히 선배님께서요·”
“군사부주의 말씀대로 혀를 잘 놀리는군·”
“절 더러 미친놈이라고는 안 하시던가요?”
그러면서 나는 들고 있던 보퉁이를 불 속에 확 던져 넣어 버렸다·
주변을 둘러싼 마교도들 전부 대경실색해서는 얼굴이 노래졌다·
“놈을 죽이고 성보를 꺼내라!”
“반 각 안에 나를 죽이고 성보를 꺼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
혈부투귀의 다급한 일성에 나 역시 대갈일성으로 응수하며 이종산으로부터 하사받은 월인소야검을 뽑아 들었다·
놈들이 얼마나 덤벼들던지 반 각은 거뜬히 버틸 자신이 있었다·
그때쯤이면 저 보퉁이 안에 든 물건들은 한 줌의 재로 변해버릴 것이다·
예상대로 마교도들은 함부로 달려들지 못했다·
모두가 발을 동동 구르며 혈영노조만 바라보았다·
혈영노조는 오히려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고·
이건 배짱 싸움이다·
역설적이게도 내가 이기면 목숨을 잃고 혈영노조가 이기면 성보를 잃는다·
혈영노조는 어떤 선택을 할까?
“다시 계산하지!”
결국 혈영노조가 고집을 꺾었다·
나는 재빨리 손을 뻗어 반쯤 타버린 보퉁이를 꺼냈다·
이어 발아래 놓고 탁탁 밟아가며 보퉁이에 붙은 불을 껐다·
제법 지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죽간은 가장자리만 살짝 그을렸을 뿐 전체적으로 멀쩡했다·
연소교로부터 보퉁이를 건네 받을 적에 물에 한번 슬쩍 담갔다가 꺼낸 덕분이었다·
“이제 시작해 볼까요?”
“그 전에 한 가지 확실히 해두지· 방금 자네는 살아서 여길 빠져나갈 기회를 놓쳤네· 이제 원하는 걸 들어 볼까?”
“첫수에 장군부터 불러놓고 새 장기를 두자고요?”
“자네가 지켜야 할 게 그것만은 아닐 텐데?”
“두 사람을 배에 태워서 보내주십시오· 회수를 무사히 건넌 후 공령신투의 제자가 폭죽을 쏘아 무사하다는 신호를 보내오면 그때 두 번째 요구조건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주님!”
연소교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큰 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만 사지에 남겨두고 혼자 떠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어째 전생과 하나도 다르지 않게 전개되는군·’
이러다가 정말 죽간들을 불태우고 나도 놈들에게 온몸을 난자당해 죽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환생을 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손에 든 죽간들은 시간을 통제하거나 비트는 공능을 지닌 것들이 아닐 테니까·
“이렇게까지 하면서 저 아이를 구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표사가 목숨 걸고 의뢰인을 지키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습니까·”
“표행이라· 그렇군·”
“수용하신 걸로 알면 되겠습니까?”
“미안하지만 그럴 순 없네·”
그때였다·
내 왼쪽에 포진한 마교도들의 뒤쪽에서 두 개의 시커먼 그림자가 벼락처럼 튀어 나왔다·
칼 등에 세 개의 고리가 달린 환도(環治)와 쇠봉에 초승달 모양의 칼날이 달린 월아산(月牙鏟)을 든 노인들이었다·
이름이나 별호는 모른다·
다만 좀 전까지 혈영노조와 함께 나란히 서 있다가 내가 자리를 옮긴 이후부터 보이지 않던 세 명의 노인들 중 두 명이라는 건 안다·
경시하는 마음이 싹 가신 나는 왼손에 죽간을 움켜쥔 상태에서 오른손에 든 월인소야검으로 두 노인을 상대해갔다·
땅! 따다다다당!
세 개의 병기가 격돌하면서 새파란 불꽃이 튀고 쇳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와 동시에 오른쪽으로부터 또 하나의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그는 맨손이었고 나를 공격하는 대신 모닥불을 향해 쌍장을 떨쳤다·
명부삼귀의 장법 못지 않게 엄청난 장력이 분출되었다·
퍼엉!
장력을 정통으로 맞은 모닥불은 수십 개의 조각으로 흩어지며 나와 두 명의 노인들 그리고 뒤쪽에 있던 마교도들을 덮쳤다·
갑자기 불벼락을 맞은 마교도들이 화들짝 놀라서는 뒤로 물러났다·
죽일 것처럼 달려들던 두 노인도 언제 그랬냐는 듯 떨어져 나갔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눈앞에서 활활 타오르던 모닥불만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상태였다·
나는 불씨만 남아 반짝거리는 땅바닥과 사방으로 흩어져 타오르는 장작들을 번갈아 보았다·
한 명의 노고수가 더 공격해 올 거라는 것까지는 예상을 했다·
하지만 그 대상이 모닥불일 줄은 몰랐다·
이것 역시 혈영노조가 금방 생각해서 장로들에게 지시한 작전일 것이다·
그와의 두뇌 싸움에서 연달아 두 번이나 패한 나는 한순간 맥이 탁 풀렸다·
반면 이천여 마교도들은 잔뜩 고무되었다·
하늘 밖에 하늘이 있다는 말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기껏 고생해서 혈영노조만 추켜세워 준 꼴이 되었다·
“믿는 구석이 사라졌군·”
“아직 검이 한 자루 남았습니다만·”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양손으로 검파를 쥐고 허공에다 반원을 한차례 가볍게 그린 다음 두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며 섰다·
표왕 이종산을 천하십검의 반열에 올려놓은 천무십검의 기수식이었다·
혈영노조는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나를 죽이겠다고 공언했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라도 그는 반드시 나를 죽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 역시도 마지막으로 처절한 피의 살육전을 펼치는 수밖에 없었다·
“건투를 비네·”
말과 함께 혈영노조와 노장로들이 뒤로 빠졌다·
그러자 혈부투귀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셋다 죽여라!”
주변을 둘러싼 마교도 전부가 뻔쩍이는 도검을 앞세웠다·
그때였다·
저 멀리 동쪽 하늘에서 불화살 한 대가 긴 꼬리를 날리며 솟구쳤다·
‘저건 또 뭐지?’
불화살은 어둠을 가르며 무려 이백여 장을 날아온 다음 나와 마교도들이 대치한 강나루 한 가운데로 뚝 떨어졌다·
꿩깃을 묶은 평범한 신호용 불화살이었다·
강나루에 모여든 사람들은 전부가 고개를 돌려 불화살이 날아온 쪽을 보았다·
그러자 잠시 후 둥둥 북소리와 함께 때마침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한 동쪽 하늘을 배경으로 수천 기의 기마인들이 관도를 따라 전속력으로 질주해 오는 게 보였다·
선두는 장대 끝에 매단 깃발을 든 기수들의 차지였는데 깃발의 크기나 생김새로 보아 표국의 것은 확실히 아니었다·
표국의 깃발들보다 훨씬 크고 웅장하고 다채로웠으며 개수 또한 많았다·
허공을 울리는 북소리와 지축을 흔드는 말발굽 소리와 갑옷과 도검창궁으로 중무장한 기마인들의 기물 부딪히는 소리가 오금을 저릴 정도로 위압적이었다·
마교도들이 포진한 뒤쪽 구경꾼들 틈에서 동쪽 관도를 살피고 있던 누군가가 눈에서 십리경을 떼고는 세상이 떠나가라 외쳤다·
“교룡기(交龍旗)다!”
교룡기는 왕의 행차를 알리는 깃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