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화· < 전설의 표행(5) >
다른 건 몰라도 전쟁이 끝난 후 패전국의 왕을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것은 병법과 통치술의 기본이었다·
고금을 막론하고 역사 속 대부분의 전쟁이 실제로도 그렇게 끝났다·
“삼뇌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사라지면서 천라지망을 펼쳐 마교도들을 일망타진하겠다는 우리의 계획도 그만 물거품이 되어 버렸군·”
그거야말로 연소교가 바란 것들 중 하나였다·
사마옥의 말대로라면 최소한 그녀가 의도했던 일의 절반은 해결이 된 셈이었다·
“나로서는 한 명의 전략가만 상대하면 되는 상황에서 통제되지 않는 수많은 괴물들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으로 변한 것이고·”
“삼뇌군사의 수급을 벤 것은 저인데 그들이 무림맹을 상대로 복수를 할 거라 생각하시는 건 지나친 비약이 아닌가요?”
연소교의 말투가 다소 공격적으로 변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마교도들을 척살해야 하는 대상으로만 여기는 사마옥의 말투가 불편하기도 할 것이다·
“열흘 전에 거사를 치렀다고 했소?”
“그렇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줄곧 항주를 향해 도망쳤고?”
“그렇습니다·”
“항주에 풍운비룡 말고도 아는 사람이 있소이까? 가령 목숨이 위험하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 찾아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가요?”
“어느 시점에 이르러 그들도 소저의 목적지가 천룡표국임을 알아차렸을 것이오· 한데 공교롭게도 소저가 도착한 지금 천룡표국엔 무림맹 총군사인 내가 와서 머물고 있소·”
“···!”
“그들은 아마도 소저의 배후에 무림맹이 있다고 믿을 것이오· 나와 모종의 거래를 했다고도 생각하겠지· 그게 아니면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수 없으니까·”
“···!”
“혹시 삼뇌가 가지고 있던 성보들도 모두 빼돌렸소?”
“···!”
“빼도 박도 못 하겠군·”
어느 순간부터 제대로 된 대답도 못 하고 눈만 끔벅거리던 연소교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굳어졌다·
나는 나대로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듣고 보니 과연 그럴 듯하지 않은가·
무림맹 총군사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종산 역시 천룡표국의 국주이자 노강호답게 처음부터 사마옥과 똑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사마옥의 말이 이어졌다·
“진짜 무서운 존재들은 따로 있소·”
“그들은 또 누구죠?”
“마교분파의 시대로부터 이어져 온 칠마교와 그들의 무맥을 이은 거마(巨魔)들이 아직도 심산유곡에 은거하고 있음을 잘 알 것이오· 세 개의 성보가 강호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그들이 은거를 깨고 나올 수도 있소·”
그렇지 않아도 굳어 있던 연소교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일 년 전 무림맹의 의뢰로 죽간을 호송하던 중 사마옥이 나와 남궁소소에게 해 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지금은 맥이 끊어졌지만 여러 이적들을 행한 것으로 알려진 천마성교의 전대 교주들이 세 권의 비경기서들을 대대로 익혔다고 하네· 수많은 마교절학들의 뿌리 또한 비경기서들이고·”
거꾸로 말하면 세 개의 성보들을 모두 익히면 다른 마교의 고수들을 압도하는 천마가 탄생하는 것이다·
삼뇌가 왜 그토록 죽간들을 손에 넣으려 했는지 이제야 확실히 이해가 됐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새로운 천마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천마성교를 부활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거라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확인을 하고 나니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세상에 천마라니!’
한편 칠마교의 무맥을 이은 거마들이라 함은 연소교의 사부인 백골시마와 같은 고수들을 말하는 것 같았다·
사마옥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 놀랍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겁란을 막을 방법은 정녕 없는 건가요?”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하지· 하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오· 무엇보다 소저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게 무엇인가요?”
“화근을 제거하는 것이오·”
“설마 성보를 전부 없애자는 말씀인가요?”
“그렇소·”
연소교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내가 찾아 준 칠마총의 죽간은 연소교가 속해 있던 음양쌍교의 성보였다·
또한 그녀는 사부였던 백골시마의 유지를 받들어 음양쌍교의 재건을 위해 지금까지 노력해 왔다·
한데 어떻게 자신의 손으로 성보를 없앨 수 있겠나·
“그건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지금 성보들을 불태워 없애버리면 총군사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림맹도 공범으로 간주해 전면전이 불가피할 거예요·”
“무언가 오해를 했군· 내가 화근을 없애자고 한 것은 사람들이 감히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곳으로 옮겨서 봉인을 하자는 뜻이었소·”
“그게 어디죠?”
“천마대총(天魔大域)·”
모두가 깜짝 놀란 나머지 한동안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천마대총에 대해서는 나도 조금 들은 바가 있었다·
천마성교 역대 교주들의 유해가 묻혀 있다는 전설상의 장소였다·
인근 십 리에 발을 들여놓기만 해도 죽음에 이른다는 절대 사지이자 마교의 모든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곳·
하지만 아직까지 천마대총을 찾으러 갔다가 죽은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었다·
그게 어디에 있는지 아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천마대총의 위치를 아시나요?”
“그건 천마성교의 군사들이 알고 있었소·”
“하지만 마지막 군사였던 이가 이미 죽었어요·”
“천마성교의 팔대호교사자들도 알고 있었고·”
역설적이게도 연소교의 사부인 백골시마가 바로 천마성교의 마지막 팔대호교사자 중 한 명이었다·
사마옥은 백골시마가 죽으면서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제자인 연소교에게 천마대총의 위치를 가르쳐 주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모르시는 게 없군요·”
“중원 전역에 무림맹의 눈과 귀가 있지·”
“하지만 천마대총은 성보를 세 개 이상 지니고 있는 자에게만 출입이 허락된다고 들었어요· 만약 그렇지 못한 자가 함부로 발을 들여 놓았다가는 제아무리 고수라도 온몸이 산산조각 난다고·”
“무림맹도 성보를 하나 내놓겠소·”
“무림맹에 있는 건 진본이 아닌 것으로 압니다만·”
“모르는 게 없으시군·”
“중원 전역에 천마성교의 눈과 귀가 있죠·”
“내 짐작이 틀리지 않는다면 죽간은 그저 최초의 기록에 사용된 도구일 뿐 공능을 발휘하는 건 그곳에 새겨진 암호와도 같은 주문과 경문들일 것이오·”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연소교에게로 향했다·
이번에야말로 그녀가 확실한 대답을 주어야 할 차례였다·
불태워 세상에서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과 달리 천마대총에 봉인하는 거라면 타협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
사마옥의 말처럼 죽간이 기록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면 그곳에 적힌 내용을 필사하거나 외워둘 수도 있는 노릇이고·
연소교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말했다·
“천마대총은 아주 먼 곳에 있어요·”
“어딘지를 알아야 계획을 세울 수 있소·”
“정확한 위치는 교맥을 잇는 자들에게만 전해지는 기밀이어서 외부인에게 가르쳐 줄 수 없어요· 다만 황하를 넘어 북쪽에 있다는 정도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남만의 십만대산 속 어느 곳이 아니고?”
“천마성교의 고귀한 영혼이 죽으면 북쪽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된다는 말이 있어요· 고귀한 영혼은 당연히 교주를 말하는 것이고요· 해서 고래로 북쪽 하늘과 가까운 곳에 교주들의 무덤을 썼다고 들었습니다·”
천마대총의 대략적인 위치를 말해주는 것으로 연소교는 동참을 확인해 주었다·
이제 그곳까지 어떻게 죽간을 가져가서 봉인하느냐의 문제가 남아 있었다·
“이제부터는 국주님의 지혜를 빌려야 할 것 같습니다·”
사마옥이 이종산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종산은 고민을 하는 듯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무림맹이 아무리 많은 병력을 동원해 호송해도 마교도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간을 탈취하려 들 것입니다· 하면 결국 봉인을 위한 여정 자체가 정마대전의 도화선이 되어 버리겠지요·”
“쉽지 않을 줄은 압니다·”
“무엇보다 적들의 행보가 생각보다 빠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종산이 총표두 곽석산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곽석산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저녁 무렵부터 천룡표국 주변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습니다· 인근 여곽과 주루 등에는 범상치 않은 기도를 풍기는 자들로 이미 만원이고요·”
“벌써!”
“그런가 하면 표행을 의뢰하겠다며 천룡표국을 찾아와 경내에 머물고 있는 의뢰인들의 숫자가 평소보다 두 배나 많습니다· 절반은 처음 보는 사람들입니다·”
이거야말로 깜짝 놀랄 일이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표국 주변에 갑자기 이상한 자들이 꼬이기 시작하자 곽석산이 표사들을 풀어 상황을 파악하게 한 모양이었다·
내가 비룡당으로 불러 연소교와 삼뇌의 수급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그들이 누구인지 모른 채 뒤를 캐고 있었을 것이다·
의도치 않게 무림맹을 끌어들인 데다 마교도들까지 잔뜩 끌고 온 것이 되어버린 연소교는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사마옥이 다시 이종산에게 물었다·
“저들의 전력은 어느 정도나 됩니까?”
“한 식경 전까지 천룡표국을 중심으로 십 리 안에 대략 오백여 명 정도가 머물고 있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숫자는 지금도 계속해서 늘어나는 중이고요·”
“오히려 우리가 천라지망에 갇혀버렸군요·”
“지금 속도라면 내일 아침쯤에는 천여 명에 육박할 겁니다· 그땐 저들도 무작정 기다리고만 있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연 소저와 죽간을 지킬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는 거라면 물론입니다· 하지만 천룡표국의 경내 곳곳에는 마교도와 표사들의 시체가 산이 되어 쌓이겠지요·”
“서둘러 죽간을 옮기는 수밖에 없겠군요·”
“세 개의 죽간이 천마대총으로 향한다는 걸 저들이 알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전면전으로 확산되는 것은 피해야 하고요· 그러려면 강호인들의 눈에 띄지 않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은밀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연소교에게로 모아졌다·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제가 벌인 일이니 제가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염치없지만 몇 가지 약재들과 함께 천라지망을 뚫고 나갈 수 있도록만 도와주세요· 그 다음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종산이 연소교에게 말했다·
“진짜 문제는 천라지망을 뚫은 다음이오· 소저 혼자서는 무리오· 황하를 넘기는 커녕 절강성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사로잡힐 것이오·”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내가 불쑥 끼어들며 한 말이었다·
깜짝 놀란 사람들이 이번엔 일제히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꼭 다문 입술과 부리부리하게 뜬 눈으로 결의를 표현했다·
수하들을 전부 잃고 부상까지 당해 도망쳐 온 연소교에게 그 무거운 짐을 전부 떠맡길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나 역시도 그녀만큼이나 전쟁의 발발을 막고 싶었다·
그래야 남궁소소도 전쟁터로 끌려가지 않을 테니까·
죽어가던 연소교의 눈동자에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달리 방도가 없어 혼자 하겠다고는 했지만 그녀도 속으로는 말할 수 없을만큼 무서웠을 것이다·
사마옥이 놀라서 물었다·
“자네가 왜?”
“운송과 호송은 원래 표사의 일이니까요· 그리고 지금 이곳은 제가 당주로 있는 비룡당의 집무실입니다· 특별 의뢰와 암표는 보통 여기서 진행되지요· 바로 지금처럼 말입니다·”
“둘이 간다고 달라질 것 같은가?”
“한 명 더 있습니다·”
나는 저만치 구석에서 아직도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는 호리독사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좋은 말로 타일렀다·
“이 방에서 귀하가 깨어났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그러니 죽은 척 그만하고 어서 일어나 앉으시오·”
호리독사가 슬그머니 일어나 앉았다·
이어 겸연쩍은 듯 머리통을 벅벅 긁으면서 읊조렸다·
“딱 한 병만 마셔 보려고····”
“함께 가주겠소?”
“예?”
“대충 들었잖소·”
“제가 딱히 쓸모가 있을까요?”
“귀하는 내가 아는 최고의 객원표사요·”
비용대비라는 말은 차마 못 했다·
호리독사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나를 보았다·
이게 뭐라고 모두가 숨죽이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호리독사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럼 그럴까요?”
“고맙소이다·”
“별 말씀을요 ”
다시 사마옥을 돌아보며 말했다·
“표행단이 꾸려진 것 같습니다·”
“경솔하게 굴지 말게· 자네의 능력이 비범한 줄은 알겠으나 이건 지금까지 해왔던 표행들과는 차원이 다르네·”
“표행비는 부르는 대로 주겠다는 말씀으로 듣겠습니다· 물론 의뢰인은 무림맹입니다· 보시다시피 연 소저는 직접 운송하는 것으로 제 몫을 하니까요·”
“내가 말려도 가겠느냐?”
이종산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나와 이종산을 지켜보았다·
“삼십 년 전 국주님께서는 총표두님과 단둘이서 다섯 개 흑도 문파에게 쫓기던 일가족 네 명을 광동성에서부터 호위해 대설산을 넘으신 바 있습니다· 저는 하 표사와 함께 연 소저를 호위해 황하를 건너겠습니다·”
“그때보다 훨씬 고되고 위험한 표행이 될 것이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저는 그때의 국주님이나 총표두님보다 조금 더 강합니다· 지켜야 할 사람도 적고요·”
“총군사님과 함께 도울 방법을 강구해 보마·”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총표두!”
“하명하십시오·”
“월인소야검을 가져오게·”
“복명·”
일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일단 표국에 상주하는 최고 의원이 내 집무실로 와서 사마옥과 함께 연소교의 상태부터 살폈다·
다행히 오랜 도주 생활로 말미암아 진기가 쇠했을 뿐 내상과 외상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종산은 가문비전의 영약들을 아끼지 않았다·
사람들이 연소교의 상태를 살피는 동안 나는 이미 잠자리에 든 가불염과 전립성 그리고 용소백을 호출해 뒷일을 부탁했다·
갑작스러운 표행 소식에 세 사람은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가불염이 함께 가게 해 달라고 몇 번이나 청했지만 이 표행은 최대한 사람의 시선을 끌지 않아야 한다는 말에 고개를 떨구었다·
이윽고 모든 준비를 마쳤을 때는 창밖이 어슴푸레 밝아오고 있었다·
머지 않아 동이 터 오를 것 같았다·
지금쯤 남궁소소는 오라버니와 함께 다선초당에서 양주로 떠날 채비를 열심히 하고 있을 것이다·
예쁘게 차려입고 기다릴 테니 나도 멋지게 차려입고 오라던 그녀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