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 전설의 표행(4) >
남궁소소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나는 얼른 침상으로 달려갔다·
이어 일부러 살짝 늘어뜨려 놓았던 이불을 젖힌 후 아래로 손을 쑥 넣었다·
대충 그녀가 있을 만한 곳을 더듬었더니 차디차게 식은 발목이 만져졌다·
급한 마음에 양쪽 발목을 잡고 쭉 잡아당겼다·
한데 침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연소교가 아니라 근육질의 시커먼 남자였다·
“허억!”
화들짝 놀란 나는 두 발을 집어 던지며 세 걸음이나 후다닥 물러났다·
침상 아래에서 끌려 나온 인간은 어처구니없게도 호리독사였다·
“이건 또 뭐야!”
눈치를 보아하니 공주가 가져다준 즉묵노주를 훔쳐 먹으러 들어왔다가 연소교가 나타나자 먼저 침상 아래로 들어가 숨은 모양이었다·
이 인간이 술을 훔쳐 먹고 돌아다니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기에 놀랍지도 않았다·
다만 예상치 못한 순간에 갑자기 튀어나오니 나도 모르게 당황했을 뿐·
“한데 왜 기절을 한 거지?”
가만보니 호리독사의 상태가 좀 이상했다·
얼굴엔 핏기가 사라졌고 사지도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설마!”
황급히 목의 경동맥 자리에 손가락을 대보니 맥이 뛰질 않았다·
혹시나 해서 입에다 귀도 가져다 대보았다·
숨을 전혀 쉬지 않았다·
“죽었어!”
소름이 쫙 끼쳤다·
아무래도 내 생각이 틀린 것 같았다·
호리독사가 먼저 숨은 것이 아니라 연소교가 집무실에 침입했다가 술을 훔쳐 먹고 있던 호리독사에게 들키자 마공으로 그를 죽인 다음 침상 밑에 숨겨 놓은 모양이었다·
“찢어 죽일!”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나는 다시 침상 밑으로 손을 넣었다·
이어 아무데나 닿는 대로 틀어잡아 연소교를 끄집어냈다·
잡은 것이 하필 목 앞쪽의 옷깃이었다·
아직 부상으로 힘들어하는 그녀를 허공에 번쩍 들어 올린 다음 살기를 폭사하며 말했다·
“감히 내 표사를 죽여?”
“귀식대법이에요·”
“뭐?”
“죽은 게 아니라 귀식대법을 펼치고 있는 거라고요· 당신이 날 침상 밑으로 밀어 넣었을 때 그가 먼저 저런 모습을 한 채 누워 있었어요· 나야말로 놀라서 까무러치는 줄 알았어요·”
귀식대법은 호흡뿐만 아니라 심장박동까지 멈춤으로써 기척을 완전히 없애는 공부를 말한다·
그렇게 되면 몸이 굳고 체온이 떨어지면서 한동안은 정말 시체와 다름없는 몸이 된다·
시전자는 귀식대법을 펼칠 당시 머릿속에 새겨 둔 시간이 되어야만 비로소 혼자 힘으로 깨어날 수 있다·
그때까지 시전자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채로 무의식의 세계를 떠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귀식대법을 펼치는 동안에는 주변의 동정을 전혀 알 수가 없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연소교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일단 저런 몸으로 찾아왔으면 나를 암살 하러 온 건 아니다·
그렇다면 무언가 부탁을 하러 온 것일 텐데 부탁하러 와서 내 사람을 죽였을 리는 없지 않겠나·
호리독사는 술을 훔쳐 먹으러 들어왔다가 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당연히 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호흡을 멈추는 정도로는 언감생심 나를 속일 수 없음을 알고 황급히 침상 밑으로 들어가 귀식대법을 펼친 것이고·
나는 그제야 연소교를 놓아 주었다·
털썩 주저앉는 그녀를 뒤로 한 채 시체가 되어 누워 있는 호리독사를 냅다 걷어찼다·
퍽! 퍽! 퍽!
“이 망할 놈의 인간!”
“조금만 생각해 보면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을 텐데 천하의 풍운비룡 답지 않게 실수를 다 하시네요·”
“닥쳐!”
“내게 화가 많이 나셨군요· 하지만 귀하의 연인이 위험한 전쟁터로 끌려가는 게 꼭 우리 때문만은 아니에요·”
“각혈을 하더니 슬슬 살만한가 보군· 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하고 가시오· 천룡표국이 무림맹의 맹방은 아니나 마교와 친구가 아닌 것 또 한 분명하니까·”
“저 목함을 무림맹주께 전달해줘요·”
그러면서 연소교는 보퉁이에 싼 목함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남궁소소가 비린내의 진원지라고 지목한 바로 그 목함이었다·
“무림맹주께서 천룡표국의 이웃집에 사는 줄 아시오?”
“정식으로 표행을 의뢰하겠어요·”
“직접 무림맹으로 가져가서 전달하면 되지 않소·”
“표물을 맡길 일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 달라고 하지 않았나요? 자신은 표사라서 의뢰만 있다면 흑백은 물론이거니와 정사마도 따지지 않는다고·”
작년에 남만에서 그 난리를 치르고 난 후 연소교와 헤어질 때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표물을 맡길 일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와 주시오· 보아서 알겠지만 나는 의뢰만 있다면 흑백은 물론이거니와 정사마도 따지지 않소·”
“도무지 두려움을 모르는군요· 잘 알지 못하는 마인들과 함부로 거래를 했다가는 큰일 나는 수가 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잘 알지도 못하는 마인들 과는 함부로 거래하지 말라고 충고해주지 않았던가?”
“내가 아직도 모르는 사람인가요?”
“잘 알았다면 뒤통수를 맞지도 않았겠지·”
“사천에서의 일은 죄송하게 됐어요· 그래도 좀 도와줘요· 믿고 맡길만한 사람이 그쪽밖에 없어서 그래요·”
말을 하며 연소교가 한순간 얼굴을 찡그리며 어금니를 꼭 깨물었다·
부상을 당한 곳에 고통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이마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살짝 연민도 느껴졌다·
“목함 속에 든 물건이 대체 무엇인데 그러오?”
“정마대전의 발발을 멈추게 할 물건이요·”
“삼뇌의 머리라도 가져 온 거요?”
“···!”
“···?”
무심코 던져 본 말인데 연소교의 표정이 어딘지 이상했다·
머리끝이 쭈뼛하고 솟구친 나는 황급히 목함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중삼중으로 묶인 보퉁이를 푸는 잠깐의 시간 동안에도 등줄기가 축축하게 젖어 드는 것 같았다·
이윽고 보퉁이를 모두 풀고 사각의 큼지막한 목함 뚜껑까지 열었다·
그러자 백발의 머리카락에 피딱지가 덕지덕지 묻은 노인 하나가 머리통만 남은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런 미친!”
천마성교 마지막 군사인 삼뇌 뇌천자의 수급이 분명했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지금만큼 놀란 적은 맹세코 없었다·
정수리로 내리친 벼락이 온몸을 관통하고 지나간 것 같았다·
쾅!
목함의 뚜껑을 거칠게 닫은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연소교를 돌아보았다·
이어 벌렁대는 심장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물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요?”
“남만에서 함께 천마성교의 교도들에게 붙잡혔었던 것 기억하시나요? 천마성교 내에 잠입해 있던 우리 쪽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요·”
“누가 들으면 우리도 함께 데리고 탈출한 줄 알겠군· 자기들끼리만 몰래 빠져나갔으면서 말이지· 아무튼 그게 뭐 어쨌다는 거요?”
“그때 우리를 탈출시킨 후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사람들 중에 이미 삼뇌군사에게 포섭당한 변절자가 있었어요·”
“하면?”
“당신들과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천마성교의 교도들에게 사로잡혔고 마총에서 힘들게 손에 넣은 죽간도 빼앗겼어요· 나머지는 아마도 짐작하시는 대로일 거예요·”
삼뇌는 연소교에게 다시 한번 천마성교에 투신할 것을 회유했을 것이다·
말이 좋아 회유지 그녀 자신과 수하들의 목숨을 볼모로 한 협박이었을 게 분명했다·
나는 그제야 사천성에서 연소교가 삼뇌와 함께 나타난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녀가 천룡표국의 표사들에게 활을 쓸 때 급소를 피한 것도 설표가 엽초풍을 찾기 위해 동료들과 산 정상을 수색할 때 시늉만 하고 떠난 이유도·
“저 수급은 어떻게 된 거요?”
“삼뇌군사가 간자를 잠입시켜 우리를 잡았던 것처럼 그의 수족이 되어 때가 오기를 기다렸어요· 그리고 열흘 전 경계가 약한 틈을 타 거사를 치르는 데 성공했고요·”
“그 늙은 여우를 용케도 속였군·”
“천만에요·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믿지 않았어요· 잠잘 때조차 고수들로 하여금 호법을 서게 했죠· 그러고도 모자라 혈잠고까지 몸속에 주입했어요·”
“그건 또 뭐요?”
“매월 보름 해독제를 복용하지 않으면 고충이 발작하면서 목숨을 잃거나 통제 불능의 미치광이가 되어 버리는 절독이에요·”
고충 혹은 고독이라 불리는 독물은 남만의 묘강에서 누에 지네 독사 두꺼비 등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독충을 통칭하는 말이었다·
혈잠고는 그런 고독 중의 하나인 모양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말인즉슨 삼뇌는 연소교에게 고독을 먹여 감히 배신할 생각을 못 하도록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소교는 배신을 해버린 것이고·
“혹시 아직도?”
“이미 해독제를 손에 넣어 고독은 깨끗이 해결했어요· 다만 도주를 하는 과정에서 추적자들과 싸우다가 부상을 조금 당했을 뿐·”
“수하들은 어쩌고 혼자 다니는 거요?”
“모두 죽었어요·”
눈 위의 칼자국 설표 곱사등이 산노 말라깽이 우숙 거대 원숭이 야차곤의 모습이 빠르게 뇌리를 스쳐 갔다·
그 괴물들이 전부 죽었다고?
이렇게 갑자기?
연소교가 힘들게 나를 찾아온 이유를 알것 같았다·
더불어 그녀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맹주님께 전해 주세요· 왕이 죽었으니 맹방의 장문인들을 설득해 이쯤에서 전쟁 준비를 그만 멈춰 달라고요·”
“아무래도 이건 내가 중간에 끼어들 일이 아닌 것 같소· 지금 당장 자리를 만들어 줄 테니 무림맹 총군사님께 소저가 직접 전하도록 하시오·”
“총군사가 이웃에 사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알고 온 거 아니었소?”
“무얼요?”
“사마옥 총군사께선 지금 천룡표국에 계시오·”
“만박노군이 여기 있다고요?”
연소교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오히려 나를 더 놀라게 했다·
“천룡표국에 모종의 의뢰를 하기 위해 개봉에서부터 나와 함께 오셨소· 이건 비밀도 아니었는데 어째서 모르고 있는 거요?”
“거사를 치르고 난 후 천마성교의 고수들을 피해 계속 숨어만 다녔어요· 해서 무림맹주께서 동원령을 내렸다는 것 외엔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고요·”
무림에서 어떤 한 무리의 수장이 손발을 잘리면 이렇게 된다·
잘린 건 손발인데 눈과 귀도 함께 멀어지는 것이다·
“만나 보겠소?”
“좋아요·”
“단 조건이 있소· 이곳은 천룡표국이고 천룡표국 내에서 국주의 허락 없이 정마(正魔)의 수뇌부가 회동을 할 수 없소· 나는 나대로 천룡표국의 표사로서 당연히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고·”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었어요·”
시간은 어느새 자정을 넘겼다·
깊어가는 새벽 대황촉 하나만을 밝힌 비룡당의 내 집무실에 모인 사람은 이제 일곱 명으로 늘어났다·
나와 연소교를 비롯해 총군사 사마옥 묵혼귀갑대주 서문룡 천룡표국주 이종산 총표두 곽석산 그리고 아직 귀식대법에서 깨어나지 못한 변사체 호리독사였다·
목함에 든 삼뇌의 수급을 확인한 사람들은 예외없이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특히 사마옥은 충격으로 눈까지 허옇게 뒤집어 떴다·
이종산이 내게 물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
조금 전 있었던 일과 연소교에게 들었던 얘기들을 최대한 압축해서 들려주었다·
마지막은 ‘이에 그녀가 총군사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해서 모셨습니다’라는 말로 정리를 했다·
그러나 얘기를 끝냈을 때쯤 사마옥은 눈을 감은 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연소교가 그를 향해 조용히 그러나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정보를 입수하셨겠지만 삼뇌군사는 몇 달 전 칠마총 중 한 곳을 더 찾아냈어요· 그곳에서 또 다른 성보와 금은보화들을 손에 넣었고요·”
사마옥은 여전히 생각에 잠겨서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남만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마총이 하나 더 발견되었다는 게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새로 발견된 마총의 성보 또한 십중팔구 고대의 죽간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세상에 나온 죽간은 모두 세 개였다·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모르지만 무림맹에 하나가 있고 연소교에게 하나가 있었다가 삼뇌에게 빼앗겼고 삼뇌가 또 다른 마총에서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찾았고·
한데 미안하지만 무림맹이 가지고 있던 죽간의 진체와 영기는 현재 내가 완전히 흡수를 해버린 상태였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지만 내게는 처음부터 이 모든 죽간들의 왕이랄 수 있는 또 다른 죽간이 몸속에 새겨져 있었다·
“이후 삼뇌군사가 억만금의 재물과 함께 성보를 두 개나 손에 넣었다는 소문이 마인들 사이에 돌면서 천마성교도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어요·”
순간 사마옥이 눈을 번쩍 떴다·
“전면전이 벌어지면 무림맹도 피해가 클 것이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오?”
“아뇨· 승부를 장담하실 수 없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거예요· 그러니 이쯤에서 서로 물러나는 게 어떤가요? 삼뇌군사의 수급 정도면 명분도 있고 무림맹의 맹방들을 설득하기에도 충분할 것 같은데요·”
“천마성교의 교도들은 설득할 수 있겠소?”
“천마교주가 없는 지금 삼뇌군사는 교주의 대신이면서 동시에 모든 전략을 짜는 책사였어요· 교주와 책사가 한날한시에 없어졌으니 다들 화가 나더라도 달리 방법이 없을 거예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기를 둘 때도 왕이 죽으면 판이 끝나 버린다·
천마성교의 기둥이 무너졌으니 교도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될 거라는 연소교의 말은 매우 그럴듯해 보였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남궁소소도 위험한 전쟁터에 나갈 필요가 없다·
빨리 이 자리를 끝내고 동이 터 오르기 전에 다선초당으로 달려가 소식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한데 무슨 이유에선지 누구보다 기뻐해야 할 사마옥과 이종산의 표정은 오히려 더 어둡고 심각해졌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전쟁을 막자는데 이유가 필요한가요?”
“백골시마의 제자라고?”
“그렇습니다·”
“노사께서 이렇듯 훌륭한 재목을 찾아 놓고 가신 줄은 미처 몰랐군· 하지만 아무리 좋은 벽오동 나무라도 숲을 모두 볼 정도로 자라려면 오랜 시간이 세월이 필요한 법이지·”
“무슨 말씀이신가요?”
“소저의 바람과 달리 전쟁은 결국 벌어질 것이오· 오히려 더 격렬해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갈 것이오·”
“왕이 쓰러지면 전쟁도 끝나는 거 아닌가요?”
“그건 모두가 지칠대로 지친 전쟁의 막바지에서나 가능한 얘기지·”
“···?”
“그때에도 적장들을 모조리 죽일 지언정 왕은 살려 두어야 하는 법이오· 그래야 적국의 남은 병사와 백성들이 가슴에 복수심을 품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