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화· < 전설의 표행(3) >
몇 번을 들여다보아도 천살마녀 연소교가 틀림없었다·
지금쯤 삼뇌와 함께 있어야 할 연소교가 왜 갑자기 항주에서 그것도 내 집무실에서 튀어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온 거지?”
천룡표국은 장사를 하는 곳인 만큼 표행을 의뢰하러 온 외부인들의 출입이 새벽까지도 이어지는 경우가 잦았다·
가령 소주에서 표물을 가지고 출발한 의뢰인이 자정 무렵 천룡표국에 도착했다고 치자·
한데 시간이 너무 늦어 인근 여곽에서 자고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찾아올까?
당연히 그럴 수는 없다·
멀리서 오는 의뢰인들을 위해 천룡표국의 문은 일 년 열두 달 열리지 않는 시간대가 없었다·
해서 표왕부와 혈족들이 기거하는 내원 그리고 표물들을 보관하는 표고(鏡庫) 등을 제외하면 경계가 상대적으로 느슨한 편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비룡당의 내 집무실까지 잠입해 들어온 건 대단한 일이었다·
황급히 손목을 짚어보니 맥박은 멀쩡하게 뛰고 있었다·
입으로 귀를 가져다 대어보니 거칠었지만 숨소리도 정상적으로 들려왔다·
한데 낯빛이 유난히 창백했다·
원래도 희고 투명했는데 지금은 거의 핏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피 냄새가 진동하는 걸 보니 어딘가 상처를 입긴 입은 모양이었다·
일단 옷은 찢어지거나 잘려나간 곳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검상을 입은 후에 적으로부터 도망치면서 시선을 끌지 않으려고 새옷을 훔쳐 갈아입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하지만 상대가 젊은 여자이다 보니 옷을 들치어 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몸을 더듬어 볼 수도 없었다·
“열이라도 재 보자·”
어딘가에 출혈이 있다면 체온도 함께 빠져나간다·
심장에서 가까울수록 반응도 빨리 온다·
서둘러 손바닥을 뺨에다 갖다 붙이는 순간 연소교가 눈을 번쩍 떴다·
“···!”
“···?”
“오해하지 마시오· 난 단지 체온을 보려고····”
“우욱!”
연소교가 갑자기 구역질을 하며 내 얼굴에 다 무언가를 토하려고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뺨을 홱 밀어서 그녀의 얼굴을 반대쪽에다 돌려놓았다·
촤아악!
순식간에 내실 바닥이 검붉은 피로 흥건해졌다·
‘내상?’
이미 상처를 입은 상태라면 각혈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검은 피와 함께 막혔던 기혈이 뚫리면서 흐릿하던 그녀의 눈빛도 점점 선명해 지고 있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물어보려고 하는 찰나 갑자기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마당을 가로질러 집무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 시간에 누구지?’
누군지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바깥에서 또 하나의 인물이 나타나 앞서 나타난 인물에게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아가씨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낮에 오라버니와 함께 왔다가 다선초당으로 돌아가려는 길에 잠시 들렀어요· 그러는 장 공자께서는 어쩐 일이세요?”
“낮에 당주님을 잠깐 어딘가로 모셔다드렸는데 밤늦도록 돌아오시질 않아서 나와 보는 길입니다· 집무실 불이 켜진 걸 보니 여기에 계신 모양이군요·”
“밤도 깊었는데 그만 들어가서 쉬도록 하세요· 당주님께는 제가 잘 말씀드릴게요· 표사님들에게 저는 안본 걸로 해주시면 고맙고요·”
“내가 미쳤나· 아무도 없는데 왜 혼잣말을 하고 있지? 험험·”
두 사람은 남궁소소와 장삼이었다·
묵혼귀갑대주 서문룡이 남궁세옥의 오랜 친구라고 하더니 그를 만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인 모양이었다·
‘잘 됐다· 남궁소소에게 연소교의 몸을 좀 살펴봐 달라고 해야겠다·’
반가운 마음에 문 쪽으로 달려가려는 내 손목을 연소교가 덥석 붙잡았다·
그리고 숨죽여 말했다·
“여기 온 걸 누구도 알면 안 돼요!”
“소저의 몸 상태가 심상치 않소· 일단 치료부터 합시다· 그녀는 의술이 뛰어나니 나보다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오·”
“부탁이에요!”
“···?”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애절한 눈빛을 마주하자 도저히 거절 할 수가 없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 나는 연소교를 번쩍 들어다가 침상 밑 빈 곳에다 깊숙이 쑤셔 넣었다·
밤늦게까지 일하다 쓰러져 잠드는 경우가 많아 하나 가져다 놓은 것이 이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이야·
“그녀는 고수여서 웬만한 인기척 정도는 쉽게 감지할 거요· 일단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할 테니 소저도 들키지 않으려거든 알아서 최대한 재주를 부려 보도록 하시오·”
그때쯤엔 남궁소소의 발걸음 소리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나는 피 냄새를 없애기 위해 창문을 전부 활짝 연 다음 그녀가 토해낸 바닥의 피도 재빨리 닦았다·
이윽고 남궁소소의 발걸음이 집무실 문 앞에서 뚝 멈추었다·
‘험험’ 하고 헛기침 소리에 이어 그녀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들려왔다·
“당주님 계신가요?”
“한겨울에 문은 왜 다 열어 놓았대요?”
“답답해서 찬 바람이나 좀 쐬려고· 그러는 소저는 이 시각에 어쩐 일이시오?”
“세옥 오라버니가 서문룡 선배를 만나러 간다길래 겸사겸사 따라왔다가 밤이 늦어 돌아가는 길이에요· 그런데 이게 무슨 냄새에요?”
“냄새라니?”
“아까부터 어디선가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은데·”
“무슨 그런 섬뜩한 소리를·”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코를 벌렁거리며 잠시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구석진 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말했다·
“여기서 나는 것 같은데요?”
처음 연소교가 서 있던 자리에 보퉁이로 싼 작은 목함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원래는 없던 것이었다·
고로 연소교가 가지고 온 물건이 틀림없었다·
나야말로 속으로 깜짝 놀랐다·
‘저건 또 뭐야?’
“이게 뭐예요?”
“나도 모르겠소·”
“주인도 모르는 물건이 집무실에 있다고요?”
“말만 내 집무실이지 빠른 의사결정을 위해 석 달 전부터는 전 장궤 가 표두 용 상자수가 함께 사용하고 있소· 셋 중에 누가 갖다 놓은 모양인데 내일 아침이면 알게 되겠지·”
집무실의 한쪽엔 정말로 세 사람이 쓸 수 있도록 의자와 책상이 반 장의 간격을 두고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나는 적극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진실을 말해주지도 않는 두루뭉술 작전으로 빠져나갔다·
어디까지나 남의 일인만큼 남궁소소는 깊게 캐묻지 않았다·
그리고 내게 따로 볼 일도 있었다·
그녀가 다시 탁자로 돌아와서는 자신이 가져온 보퉁이를 쓰윽 밀어 놓았다·
“잘 쓰고 돌려드려요·”
“이게 뭐요?”
정성껏 묶은 비단 보퉁이를 풀자 번쩍번쩍하는 용린신갑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표행 때 아무래도 큰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아 그녀에게 입으라고 주었는데 이제야 돌려주는 것이다·
“이렇게 번쩍이는 물건이었나?”
“깨끗하게 씻은 다음 양털기름을 구해 여러 번 닦았어요· 땀 때문에 생기는 녹을 방지하는 데는 양털기름이 최고거든요·”
“뭘 그렇게까지·”
“봐서 알겠지만 덕분에 또 목숨을 구했어요·”
“위험한 표행임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동참해 주어서 오히려 내가 고맙지· 덕분에 무사히 완수할 수 있었소·”
“칭찬하려거든 돈으로 줘요·”
“신갑의 대여비를 받지 않겠소·”
“당주님같은 구두쇠는 천하에 없을 거예요·”
“칭찬을 돈으로 해달라는 여자도 흔치는 않지·”
나도 남궁소소도 서로를 마주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오라버니와 함께 양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이번에 가면 한동안 항주에는 오지 못할 거예요· 그 말 하려고 오라버니를 따라 왔어요·”
“세가에 무슨 일이 있소?”
“무림맹의 맹방들은 한 곳도 빠지지 말고 모두 전쟁을 준비하라는 맹주령이 떨어졌어요· 남궁세가에서는 할아버지를 필두로 나와 세옥 오라버니가 삼백 명의 가내무사들을 이끌고 참전하기로 했고요·”
“그게 무슨 말이오?”
“곧 정마대전이 벌어질 것 같아요· 세옥 오라버니 말로는 초전에는 중원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선이 만들어질 거래요·”
정마대전이 곧 벌어질 거라는 건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총군사 사마옥이 그것 때문에 지원을 부탁하기 위해 왔다는 얘기도 총표두로부터 들었고· 한데 이렇게 빨리 징조가 시작될 줄이야·
“내 말은 왜 소저까지 참전을 해야 하느냐는 거요·”
“직계혈족이라는 이유로 참전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가내무사들에게 나가서 목숨 걸고 싸우라고 할 수 있겠어요·”
“세옥 형님이 계시잖소·”
“세옥 오라버니밖에 없잖아요·”
“나는 반대요!”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남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데 남궁소소는 싱글벙글 웃기까지 했다·
그 모습이 너무나 태평해 보여서 혹시 장난을 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하지만 이런 일로는 장난을 쳐서도 안 되고 장난을 칠 그녀도 아니었다·
남궁소소는 여전히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나뿐만 아니라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 전부가 참전하니까· 전쟁이 벌어지면 소위 말하는 명문대파 적전제자나 직계혈족들을 가장 먼저 최전선으로 달려 가야 해요· 그래야 맹주께서 맹도들에게 다른 모든 위험한 명령들을 당당하게 내릴 수 있으니까요· 표국들은 그렇지 않나요?”
표국도 그렇다·
싸움에 임해서는 쟁자수 보다는 표사가 앞서고 표사 보다는 표두가 앞선다·
만약 그 표행단에 직계혈족이 있다면 그 역시 수하들 뒤에 몸을 숨기는 비겁한 짓 따윈 해선 안 된다·
나는 대세를 거스를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언제 가는 거요?”
“내일 아침이오·”
“그렇게 빨리?”
“시절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으니까요·”
“다선초당은 어쩌고·”
“세옥 오라버니의 호위장이었던 동천 무사가 당분간 맡아서 운영할 거예요· 그래도 가끔씩 들여다 봐줘요· 당주님이 왔다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매소옥도 있잖아요·”
“매 소저는 비룡당의 삼각에서 이미 호위를 하고 있소·”
“그래도 당주님이 직접 들러줘요· 지금까지는 세옥 오라버니가 있어서 누구도 함부로 집적대지 못했는데 앞으로는 어떨지 몰라서 그래요· 소옥이도 말은 않지만 속으로 많이 불안해하는 눈치고요·”
“가면 언제 오는 거요?”
“전쟁이 끝나면요·”
“언제 끝나는데?”
“세옥 오라버니 말로는 최소 일 년은 걸릴 거래요· 전쟁에 특화된 삼뇌의 용병술이 워낙 신출귀몰해서 어쩌면 몇 년이 걸려도 끝나지 않을 수도 있고요·”
전생에서도 마교와 무림맹 간의 전쟁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축적된 힘이 어느 날 빵 하고 터진 게 아니라 소규모의 국지전 형식으로 오랜 세월 이어졌다·
마치 마교와 정도무림 간의 싸움은 무림의 일상인 것처럼·
어느 쪽이 나은 지는 모르겠지만 현생에서의 전쟁도 쉽게 끝나지 않을 것만은 분명했다·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남궁소소 역시 위험해진다·
조부인 남궁유룡이 호위를 위해 고수들을 몰래 붙여 놓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안전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건 그렇고· 지금쯤이면 우리 관계도 슬슬 정리해야 하지 않나요? 원래 한 달만 만나보기로 했는데 어쩌다 보니 몇 달이 훨씬 지났잖아요·”
“깜빡했네·”
“나도 그랬는데·”
“만나는 동안 내내 즐거웠소·”
남궁소소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얼른 신색을 감추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명랑하게 말했다·
“나도요·”
“다행이군·”
“기분 참 찝찝하고 좋네요· 귀하는 뭐든 쓸데없이 분명해서 좋아요· 쇠심줄 같은 고집에 제 멋대로인 성격도 멋지고요· 살아 있으면 언젠가 또 보기로 해요·”
그러면서 일어나려는 남궁소소의 앞으로 용린신갑을 쓱 밀어 놓았다·
“뭐예요?”
“가져가시오·”
“이제 그만 빌릴래요·”
“그럼 소저가 계속 갖고 있으시오·”
“가지라는 거예요? 빌려주겠다는 거예요? 확실히 해요· 자꾸 햇갈리잖아요·”
“우리가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텐데 누구의 것인지가 왜 중요하겠소· 필요하면 말을 할 테니 그때 소저가 내게 다시 빌려주시오·”
“방금은 만나서 즐거웠다면서요·”
“만나는 동안 내내 즐거웠다고 했지·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만날 거고· 싫었다면 모를까 좋았는데 왜 헤어지오?”
“누가 계속 만나 준대요?”
“나한테 소저가 직접 수결한 백지 계약서가 있다는 걸 잊지 마시오· 구속성으로만 따지면 보은패 보다도 더 무서운 물건이지·”
“그걸 내게 만나 달라고 협박하는 데 써먹겠다고요?”
“최후의 수단도 있다는 걸 알려주는 거요·”
“싸움만 잘하지 진짜 낭만적인 구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니까· 그걸 지금 고백이라고 하는 거예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굳었던 남궁소소의 얼굴이 다시 밝게 펴졌다·
그러면서 용린신갑을 보퉁이에 주섬주섬 담아서 묶은 다음 한 손에 들고 말했다·
“이건 한번만 더 쓰고 다시 깨끗하게 씻어서 돌려줄게요·”
“내일 새벽 다선초당에서 봅시다·”
“다선초당에선 왜요?”
“서호까지 배웅해주겠소·”
“소용없어요· 해뜰 무렵이면 나도 세옥 오라버니도 벌써 가고 없을테니까·”
“해뜨기 한 식경 전에 맞추어 도착하겠소·”
“하여튼 눈치는 빨라 가지고·”
“바보라도 알아들을 수 있게 말했잖소·”
“그럼 예쁘게 하고 와요· 내가 당신의 제일 멋진 모습을 눈에 담고 떠날 수 있게· 나도 예쁘게 차려입고 기다릴 테니까·”
“알았소·”
뒷일을 어떻게 감당할지 막막했다·
지금 침상 밑에서는 열여덟 살 아니 해가 바뀌었으니 이제 열아홉 살이 된 연소교가 전부 듣고 있을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남궁소소와의 관계를 들키는 건 상관없다·
다만 닭살 돋는 대화를 그녀가 전부 들었다고 생각하니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남궁소소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서 잠깐 걸음을 멈춘 그녀가 뒤돌아 보며 말했다·
“영원히 라는 말 듣기 좋았어요·”
“···?”
“하지만 그 말에 속박되지는 말아요· 사람의 앞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만약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자기가 한 말을 책임지려고 나를 만난다면 너무 슬플 것 같아요· 왠지 당신이라면 그럴 것 같아서·”
그러더니 뭐라고 대꾸할 사이도 없이 쏜살처럼 도망가 버렸다·
‘자신을 너무 모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