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화· < 구대문파의 장문인들(4) >
무림맹 접객당에서 하룻밤을 보낸 나는 다음 날 아침 늦게서야 일어났다·
이어 몇 가지 일들을 처리 한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도화곡 제자들이 머무는 별원으로 갔다·
젊은 구대제자들은 어딜 갔는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이막하와 팔대제자 몇 명이 한가롭게 연못가를 산책 하다가 나를 맞았다·
“벌써 일어났느냐?”
“지금도 해가 중천인데요?”
“두 달 동안이나 길에서 노숙을 했을 텐데 오늘은 방에서 나오지 말고 푹 쉬도록 하질 그랬느냐?”
“저는 깨끗한 방에서 자는 것보다 풍찬노숙이 더 익숙하고 편합니다· 그나저나 사저들께선 지내는데 불편한 점이 없으셨는지요?”
“총군사께서 따로 처소를 마련해 주시는 바람에 방해받지 않고 모두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느니라· 네 덕분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무림맹의 접객당은 지금 중원 전역에서 몰려온 무림인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 바람에 이백여 명이나 되는 도화곡의 제자들이 한곳에서 다 같이 머무를 곳이 마땅치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사마옥이 특별히 맹 내의 사람들이 쓰던 별원 하나를 통째로 비워서 내어 주었다·
“제가 아니라 남궁유룡 장로님의 얼굴을 보아서 였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돌아가신 사부님과 남궁 장로님께서 막역한 사이셨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총군사께서 너를 매우 아끼고 고마워하고 계신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우리 모두 기쁘기 그지없더구나·”
“조심하십시오· 그게 다 도화곡을 무림맹에 입맹 시키시려는 총군사님의 치밀한 계략일 수도 있습니다·”
“계략이 아니라 대놓고 권유하시던걸·”
“벌써요?”
“무림맹에는 도화곡처럼 협기 넘치는 문파가 필요하고 도화곡은 든든한 배경이 필요하니 일간 시간을 내서 서로가 상생의 길을 의논해 보자고 하시더군·”
“그래서요?”
“도화곡은 성도로 이전을 하는 동안 무림맹의 여러 맹방으로부터 큰 빚을 졌다· 도움을 받았으면 나 또한 도움을 주는 것이 인지상정이지·”
“혹시 입맹을 하실 생각입니까?”
“지금은 성도에 뿌리를 튼튼하게 내리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이니 훗날 긍정적으로 고민을 해보겠노라고 말씀드렸다·”
“잘하셨습니다·”
“네가 무얼 염려하는지 잘 알고 있다· 돌다리도 두들겨 본다는 생각으로 항상 신중하게 걸음 할 테니 너무 걱정 말거라·”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사천에서 소제를 돕기 위해 팔백 마교도들을 상대로 결사항전을 선언하실 때는 신중한 모습과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그건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 백포산군을 상대로 사흘 동안이나 혼자서 외롭게 생사결을 벌인 네가 할 말이 아닐 텐데·”
“그땐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나도 어쩔 수 없었느니라·”
이막하의 뒤쪽에 있는 팔대제자들이 쿡쿡 하고 웃음보를 터뜨렸다·
아무리 같은 배분의 사저라고 해도 상대는 장문인 더는 따지고 들 수가 없어서 나도 그만 피식 웃어 버렸다·
이막하도 희고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함께 웃었다·
그때였다·
“사숙!”
익숙한 음성과 함께 멀리서 구대제자들 백수십 명이 우르르 몰려왔다·
하나같이 생기발랄한 것이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사숙 기침하셨습니까?”
무슨 특권이라도 되는지 도화곡의 제자들 중 나와 처음으로 친해졌던 그림쟁이 안여여가 먼저 꾸벅 인사를 해왔다·
그러자 함께 온 다른 구대제자들 전부가 웃으며 복창을 했다·
“사숙 기침하셨습니까?”
“사부님들을 두고 아침부터 다들 어딜 그렇게 바삐 다녀오는 거냐? 아침은 챙겨 먹고 돌아다니는 거냐?”
“무림맹 경내를 구경하다 왔습니다·”
“무림맹 경내를?”
“너무 재밌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명문대파의 후기지수들 여러 명과도 인사를 나누었고요· 풍운비룡의 사질들이라고 하자 다들 친절하게 대해주시더라고요·”
“멀리서였지만 맹주님께서 구대문파의 장문인들과 함께 지나가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마치 열 개의 태산이 움직이는 것 같았어요·”
안여여에 이어 예홍까지 잔뜩 흥분해서 말했다·
깜짝 놀란 나는 정색하고 말했다·
“무림맹 경내는 외부인들이 함부로 돌아다녀선 안되는 곳이다· 그러다 잡히면 죄다 집법당으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할 수도 있다고!”
“저희도 그래서 꿈도 안 꾸었는데 사숙의 친우분들께서 오셔서는 자신들과 함께 다니면 괜찮다시며 친절하게 안내까지 해 주셨어요·”
“무림맹에 내 친우들이 있다고?”
“여어 풍운비룡!”
또다시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도화곡 제자들의 뒤편으로부터 잘생긴 미공자 두 놈이 환하게 웃으며 걸어 나왔다·
무림맹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인 황보중악과 악도광이었다·
“선배님께서 여긴 어떻게····”
“자네를 만나러 왔다가 다들 무림맹 경내를 너무나 구경하고 싶어 하시길래 도광을 집법당주님께 보내 허락을 득했네· 그런 다음 우리도 잠시 시간을 내서 함께 둘러 보았지·”
“저는 접객당에서 표사들과 함께 잤는데요?”
“우리는 당연히 별원에서 도화곡의 사질들과 함께 묵은 줄 알았지· 자자 간만에 만났는데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디 가서 술이나 마시자고·”
“아침부터요?”
“술 마시는데 밤낮이 따로 있나· 반가우면 마시는 거지· 하하하·”
이 인간들이 어디서 약을 팔고·
딱 보니 섭부용과 예홍을 비롯해 눈이 번쩍 뜨이는 미녀들이 득시글대니 괜히 찾아와 친절을 베풀었으면서·
그래도 덕분에 구대제자들이 저렇게 좋아하니 이번엔 그냥 넘어간다·
미운 정이 더 무섭다더니 사실 나도 이 인간들이 조금 반갑기도 하고·
“한데 두소부 선배와 양조광은 왜 안 보입니까?”
“우리도 찾고 있다·”
“같이 계셨던 게 아니고요?”
“어디서 뭘 하고 돌아다니는 지 어젯밤부터 갑자기 안 보이더라고·”
“객원표사들과 함께 있을 겁니다·”
불쑥 끼어든 목소리는 내 뒤쪽에 있던 탁중로였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지난밤 서호삼절 선배님들과 호리독사가 무림맹은 답답해서 못 있겠다고 불평불만을 하던 차에 방금 말씀하신 두 분께서 접객당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다들 술이나 마시자며 의기투합해서는 밖으로 나가더니 아직까지 아무도 안 돌아오셨고요·”
두소부와 양조광은 각각 청성파와 점창파의 후기지수들로 서호삼견과는 지난날 항주에서부터 무림맹까지 백발노성을 함께 호송한 인연이 있었다·
흑도의 고수들과 명문대파의 제자들이라는 신분 때문에 처음엔 살벌할 정도로 으르렁거렸었다·
하지만 몇 차례 죽을 위기를 함께 넘기고 나서부터는 그만 서로를 인정하게 되어 버렸다·
그러다 무림맹에서 다시 만나자 좋다고 함께 술을 마시러 간 모양이었다·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걸 보면 밤새 푼 모양인데 지금쯤 어디에서 널브러져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나가서 찾아볼까요?”
“그냥 둬· 때가 되면 알아서들 오시겠지·”
“알겠습니다·”
또 그때였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남궁소소가 은하산장의 여자들 십여 명과 함께 걸어왔다·
도화곡의 제자들만큼은 아니었어도 함께 무림맹까지 온 은하산장의 여자들은 무려 백 명에 달했다·
오늘 아침 남궁소소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무슨 이유에선지 저들은 간밤에 맹으로 들어오지 않고 바깥의 여곽에 묵겠다며 고집을 피웠단다·
그 때문에 청성파에서 크고 깨끗하며 나란히 붙어 있는 여곽 세 곳을 수소문해 비용까지 모두 지불하며 잡아 주었다고도 했다·
대응왕을 죽여 달라는 의뢰는 사실상 무력화가 되어 버렸지만 명문대파 답게 끝까지 책임을 지려는 것이다·
도화곡의 제자 이백 명과 용봉지회의 후기지수 두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윽고 은하산장의 여자들이 내 앞에 도착했다·
남궁소소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지시하신 대로 맹의 협조를 구해 대응왕을 넘겨 드렸습니다· 한데 이분들께서 떠나기 전에 당주님을 꼭 뵙고 싶다고 하셔서요·”
대응왕을 죽여 달라며 청성파에 보은패를 보냈던 봉설란이 두어 걸음 앞으로 나왔다·
이어 나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지례를 취했다· 나도 함께 마주 포권지례를 했다·
“약속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믿고 기다려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만약 그때 표사님께서 동료들과 함께 나타나 은하산장을 눈사태로 밀어버리고 대응왕을 납치해 달아나지 않았다면 우린 우리의 복수를 위해 애꿎은 아미파의 스님들을 해쳐야 했을 거예요· 돌이켜 보면 그건 대응왕이 우리에게 했던 짓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저는 표사로서 표행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여협들께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금 신경을 썼다면 쓴 정도지요·”
“모든 표사들이 당주님처럼 표행을 하지는 않죠·”
“···?”
“그럼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봉설란을 비롯해 그녀의 뒤쪽에 있던 아마도 은하산장의 모든 여자들을 대표해 온 듯한 십여 명이 작별의 포권지례를 해왔다·
“무운을 빌겠습니다·”
나도 얼른 다시 마주 포권지례를 했다·
그리고 돌아서려는 봉설란과 그녀의 동료들을 이막하가 조용히 불러 세웠다·
“다들 갈 곳은 있나요?”
봉설란을 필두로 모두가 대여섯 걸음을 옮기다 말고 멈춰 서서 뒤돌아보았다·
이막하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은하산장이 이 몸의 사제가 일으킨 눈사태 때문에 사라졌다는 얘기를 들어서요· 혹시라도 불쾌했다면 사과할게요·”
“갈 곳이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과를 한 김에 한마디 더 할게요· 만약 갈 곳이 없다면 우리와 함께 도화곡으로 가지 않겠어요?”
“무슨··· 뜻인가요?”
“운 좋게도 성공적으로 정착을 한 덕에 도화곡은 일손이 많이 필요하답니다· 은하산장만큼은 아니겠지만 겨울을 제외하곤 주변에 꽃들이 만발해서 장원도 아름답고요· 아마 해가 갈수록 더 아름다워질 거예요·”
해가 갈수록 더 아름다워질 거라는 건 손님으로 오라는 게 아니라 함께 살자는 뜻이다·
곧 도화곡의 제자가 되라는 말이었다·
그것도 무려 백여 명 전부가·
나는 물론이거니와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황보중악 악도광 남궁소소 독고완 탁중로까지 모두 깜짝 놀랐다·
도화곡의 구대제자들도 놀랐는지 하나같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막하와 봉설란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중장년의 팔대제자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팔대제자들과는 사전에 의논을 한 모양이었다·
그 결과로 모두가 좋다고 의견을 모은 것이고·
하지만 가장 놀란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봉설란을 비롯해 십여 명의 은하산장 여자들은 그대로 석상이 되었다·
어떤 여자는 입술을 파르르 떨기까지 했다·
봉설란은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는가 싶더니 다시 냉정한 기색으로 돌아와 말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저희가 가면 도화곡의 제자들까지 전부 강호인들로부터 화냥(花始)이라고 손가락질 받을 거예요·”
“그럴 리도 없지만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기꺼이 나눠 받도록 하겠어요·”
“곡주님께선 잘 알지도 못하는 우리에게 왜 이렇게 잘 해주시는 건가요?”
“도화곡의 제자들도 처음엔 전부 모르는 사이였지요· 먼저 손부터 잡고 나중에 잘 아는 사이가 되어도 어울려 사는 데 아무 문제 없더라고요·”
봉설란의 뒤쪽에 있는 여자들 서너 명으로부터 기어이 ‘흑’ 하고 울음보가 터져 나왔다·
무림맹 밖 어딘가에 머물고 있을 백여 명을 대표해 올 정도면 제법 강단이 있는 여자들일 텐데도 그랬다·
아마도 대응왕에게 끌려 온 이후 처음 자신들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손 내밀어 주는 사람들을 만나서가 아닐까?
다시 봉설란이 말했다·
“사철 꽃이 피지 않아도 도화곡은 은하산장보다 몇 배나 아름다울 거예요· 하지만 갈 곳은 저희의 힘으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곡주님의 호의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언제라도 마음이 바뀌면 성도로 오세요· 기다리고 있겠어요·”
봉설란과 그의 동료들은 이막하를 향해서도 깊숙이 포권지례를 올렸다·
이막하도 마주 포권지례를 했다·
그리고 돌아서 가는 은하산장의 여자들을 향해 예홍이 대여섯 걸음 후다닥 달려갔다·
이어 꼭 기억하라는 듯 수탉처럼 목을 쭉 빼고 큰소리로 외쳤다·
“장강 어느 곳에서나 두 개의 뿔이 달린 범선을 찾아서 타도록 하세요! 그런 다음 풍운비룡이라는 별호를 대면 사천성 의빈까지는 돈이 없어도 안전하고 편하게 오실 수 있어요! 우리 사숙의 수하들께서 운행하는 범선이거든요!”
두 달여에 걸친 표행이 사실상 끝났다·
항주에서 출발해 해남도를 찍었다가 이곳 무림맹이 있는 개봉으로 오기까지 그야말로 대륙을 한 바퀴 돌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정도 표행이면 최소 보름은 쉬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 골병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천룡표국의 당(黨)을 너무 오래 비워 두었기 때문에 나도 형님들도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무림맹에 머문 지 사흘째 되는 날 아침 나는 형님들과 함께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그리고 해남파로 보내는 보은패 아홉 개의 의뢰를 받고 표단을 작성했다·
장문인들은 단 한 명도 우리를 그냥 보내주는 법이 없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가 차 한 잔씩을 청했다·
그 바람에 소림사 방장 공진대사를 마지막으로 찾아뵙고 나왔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기울었다·
접객당의 처소로 돌아오니 엽초풍이 양홍경을 비롯한 사형제들과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내는데 불편한 점은 없으십니까?”
“다들 장문인으로 깍듯이 대해주셔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사흘 후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님들께서 여는 주연에 초대도 받았고요·”
“초식은 돌려받고 계시고요?”
“어젯밤 점창파의 기천일검 우검학 장문인으로부터 첫 번째 초식을 돌려받았습니다· 초식을 전수해주신 이후에도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저에게 보법을 비롯해 이것저것 조언을 아끼지 않으셨지요·”
“고마운 분이시군요·”
“모두 당주님 덕분입니다·”
“다른 곳은 몰라도 점창파에 표물을 전해준 건 유성표 대협이셨습니다· 아시다시피 나머지도 그분의 표행을 이은 것에 불과하고요·”
“해남도로 돌아가면 조사전 한쪽에 유성표 대협의 위패를 모시고 돌아가신 날짜에 맞춰 해마다 제사를 지내드릴 것입니다·”
“조사전에요?”
“해남파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이시니까요· 먼 훗날 저승에서 사조님들을 뵈면 분명 잘했다고 하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이건 나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엽초풍의 말이 이어졌다·
“표사님들 말씀이 내일 항주로 돌아가신다고요?”
“그렇습니다·”
“혹 광동이나 뇌주반도로 표행을 오실 일 있으면 잠시 시간을 내어 해남파에도 들러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만약 절강성으로 가는 일이 있다면 천룡표국으로 당주님을 찾아가 뵈어도 될까요?”
“그야 물론이지요·”
엽초풍의 얼굴이 봄비 맞은 목련처럼 환해졌다·
아직은 사내다움보다 귀엽고 예쁜 구석이 더 많은 나이였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는 해남파를 반석 위에 올려놓으며 모두가 우러르고 두려워 하는 강철의 장문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보은패 하나는 지금 받았으면 합니다·”
“지금요?”
“안 되나요?”
“그럴 리가요· 천룡표국은 보관만 할 뿐 보은패를 받을 시기는 오롯이 장문인께서 스스로 정하시는 겁니다· 그건 누구도 관여할 수 없습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어느 문파의 것으로 드릴까요?”
“곤륜파의 것이 좋겠습니다·”
용처를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건 예의가 아니었다·
특히 보관을 하는 당사자인 나는 더더욱 그런 질문을 삼가야 한다·
나는 독고완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독고완이 비단 보에 정성스럽게 싼 곤륜파의 보은패를 엽초풍의 앞으로 가져다 놓았다·
보은패를 집어든 엽초풍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모습이 마치 부모로부터 용돈을 크게 받아 마침내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게 된 소년처럼 맑았다·
“유성표 대협께서 해남도로 오시면 사부님께선 항상 저자로 모시고 나가 해남도의 특산품인 문창계(文昌應)라는 닭요리와 해구대곡주(海口大曲酒)을 함께 사드셨지요·”
“나중에 해남도로 가면 저도 좀 사주십시오·”
“이를 말씀입니까· 몇 번이고 사드리겠습니다·”
엽초풍이 갑자기 양홍경을 비롯한 그의 사형제들을 전부 물렸다·
나도 독고완과 탁중로를 물렸다·
둘만 남게 되자 엽초풍이 내게 조용히 말했다·
“당주님 마지막으로 간단한 의뢰 하나만 받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오늘 밤 개봉에서 가장 비싼 주루로 절 데리고 가셔서 술을 좀 가르쳐 주십시오·”
“술을요?”
“제가 나이는 어려도 명색이 일파의 장문인인데 회동이 있거나 하면 다들 술을 마실 때 저만 차나 꿀물을 마시고 있는 게 너무 창피해서····”
“···!”
“해가 바뀌었으니 저도 이제 열네 살입니다· 자세히 보시면 코밑에 수염도 나기 시작했고요· 부탁드립니다· 대신 표비는 확실히 챙겨 드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