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 중원을 가로지르다(4) >
산기슭에서부터 시작된 불은 실처럼 길게 띠를 이루며 바싹 마른 겨울 산을 빠르게 집어삼키고 있었다·
펑! 펑! 펑!
산 곳곳에서 나무 둥치 터지는 소리가 흡사 대포 소리처럼 울려댔다·
침엽수가 빽빽하게 모여 자라는 곳에서는 하늘을 향해 유독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
그때마다 폐부까지 서늘해지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불길도 커지면 굉음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불보다 빠른 연기가 온산을 뒤덮었다·
날벼락을 맞은 산짐승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와서는 화마를 피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 두건으로 코와 입을 가린 사람들은 산불을 피해 침착하게 계곡을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겨울이라 수량이 적어서 그렇지 계곡은 생각보다 넓었다·
다만 수천 년 동안 비와 물이 깎아 놓은 탓에 온통 울퉁불퉁한 바위지대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무공을 익힌 무인들에게는 전혀 장애가 되질 않았다·
하지만 백칠십여 필의 말에게는 그야말로 고역이 따로 없었다·
“조심해!”
쿵!
말 한 마리가 바위를 잘 못 디디는 바람에 미끄러져 계곡 속으로 처박혔다·
짐승은 넘어져도 그대로 누워 있는 법이 없다·
쓰러진 말이 벌떡 일어났지만 다리를 절뚝거리는 것이 아무래도 심각한 부상을 당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치료를 해주느라 지체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정상 쪽에서도 불길이 한창 치솟는 중이었다·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잘게 부서진 불똥과 연기가 피어오르는 풍경이 꼭 선경을 보는 것 같았다·
한 시진 전의 일이었다
산 정상 쪽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불빛이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 들판 너머의 적들은 내 작전을 눈치챘다·
해서 횃불을 든 백여 명이 산 아래까지 달려와 사방에다 열심히 불화살을 쏘아댔다·
밑에서 불길이 올라오는 동안 산 정상을 태운 후 그곳으로 피한다는 내 작전을 방해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에 불과했을 뿐 지금은 화살이 닿을만한 거리의 산 전체가 화마에 휩싸여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불길이 커지면서 연기도 연기지만 바람을 따라 산면을 타고 올라오는 열기가 큰 문제였다·
불길은 삼십 장 밖 아래에서 솟구치는데도 불구하고 열기에 살갗이 익어버릴 지경이었다·
한데 진짜 난관은 따로 있었다·
바람이 아무리 산 정상 쪽으로 분다고 해도 불길이 반대 방향으로는 전혀 번지지 않는 게 아니었다·
경사가 점점 가팔라진다 싶더니 마침내 장량기 일행이 지른 불의 장막이 보였다·
불길은 아래쪽으로도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는데 속도는 매우 느렸지만 허공으로 솟구치는 기세는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게 계곡엔 나무가 자라지 않았다·
계곡 양쪽의 우거진 나무들도 장량기와 오십 명의 표사들이 도검으로 열심히 잘라서 치우는 중이었다·
얼마나 사력을 다했는지 다들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장량기가 신형을 날려 다가왔다·
이어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내게 서둘러 보고했다·
“말씀하신 대로 정상 부근을 전부 태웠습니다· 아직 곳곳에 불씨와 열기가 남아 있지만 충분히 버틸만 할 겁니다·”
“앞장서십시오!”
“알겠습니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이병룡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병룡이 전 표사들을 향해 외쳤다·
“지금부터 계곡을 따라 올라가며 화막을 돌파한다· 계곡물로 옷을 최대한 적시고 말에게도 충분히 물을 끼얹어라!”
화막을 뚫고 올라간 정상은 후하게 주어도 일천여 평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백칠십여 명의 사람들이 같은 수의 말과 함께 화마를 피할 정도로는 충분히 넓었다·
재밌는 것은 화마를 피해 계곡으로 뛰어든 산짐승들까지 우리를 따라 산 정상으로 올라왔다는 사실이었다·
산짐승들은 좁은 와중에도 사람들을 피해 최대한 한쪽 구석으로 가서 모여 있었다·
호랑이나 늑대 같은 대형 맹수가 한 마리도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아는지 탁중로가 끌고 다니는 세 마리의 번견들도 이때만큼은 산짐승들을 보고 짖어대지 않았다·
주변은 장량기의 보고대로 곳곳에 불씨가 남아 있는 가운데 새까맣게 타버린 나무의 재들만 바람에 흩날렸다·
큰 나무들은 숯이 되어 마지막 몸을 시뻘겋게 불사르는 중이었다·
정상에서 부는 강풍 때문에 나무들이 생각보다 빨리 탄 것 같았다·
우리 입장에선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앗· 뜨거라!”
날카로운 외침에 돌아보니 삼견이 자신의 엉덩이를 열심히 문질러 대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암소가 웅크린 듯한 바위 하나가 누워 있었다·
이견이 말했다·
“그러게 왜 만져 보지도 않고 앉아?”
“바위가 이렇게 뜨거울 줄 알았나요·”
“불길이 올라오는 길목에 있으니까 그렇지· 바위가 펑퍼짐한 것이 계란이나 한판 깨뜨려 구워 먹으면 좋겠군·”
일전에 함께 표행을 하던 중 불에 달군 돌판에 계란을 깨트려 구워준 적이 있는데 그때 생각이 나는 모양이었다·
불씨가 대부분 사라졌다고 해도 화마가 휩쓸고 간 땅의 열기는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다행히 이병룡의 지시대로 계곡을 벗어나기 직전 옷을 잔뜩 적셨던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옷이 마를 때쯤이면 주변의 열기도 완전히 사라질 것 같았다·
하지만 무작정 안심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갑룡과 을룡과 병룡은 알아서 표사들을 닦달했다·
진법에 따라 적들이 올라올 만한 길목을 살펴 적절한 숫자의 병력을 배치하고 열심히 투석들을 쌓도록 한 것이다·
나는 가파른 경사의 가장자리에 서서 산 아래를 살폈다·
온 산을 집어삼키며 올라온 불은 장량기가 미리 질러 놓은 불의 경계선을 만나면서 더 태울 것이 없자 그대로 꺼져 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산비탈 전역에서는 아직 남아 있는 불길이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타올랐다·
저 불길이 모두 사라지고 열기마저 식으려면 앞으로도 한 시진은 걸릴 것 같다·
그때쯤이면 해가 떠오르고 일천 마교도들이 민둥산으로 변해버린 야산을 새까맣게 뒤덮으며 올라올 것이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어느 정도 전열이 갖추어지자 나는 산 중턱에서부터 꺾어 가져온 장대 끄트머리에 천룡표국의 표기를 매달았다·
그리고 산꼭대기 한가운데다 힘차게 꽂았다·
이렇게 표기를 꽂는 것은 전투가 벌어질 때 기준을 삼기 위해서였다·
이 표기를 기준으로 첫 번째는 열두 방위가 정해지고 두 번째는 진퇴의 중심과 수호해야 할 진영의 범위가 정해진다·
하지만 표사들이 표행 중에 표기로 기준점을 삼아야 할 만큼 큰 전투를 벌이는 건 평생을 가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천룡표국기의 등장에 표사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다시 한번 깨닫고 숙연해졌다·
영문을 모르는 서호삼견과 각 당의 객원표사들 그리고 해남파의 제자들만 어리둥절해 할 뿐이었다·
그때 남궁소소가 독고완에게 가더니 무언가를 달라고 해서 건네 받았다·
남궁소소는 그걸 손에 들고 내가 서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리고는 곱게 접혀 있는 천을 펼쳐 천룡표국기 아래 하고도 자신의 키 높이 정도에다 정성껏 매달았다·
그녀가 매단 삼각형의 작은 천은 휴대하기 좋도록 만든 비룡당의 표기였다·
“저들에게 누굴 상대로 싸움을 걸어오는 건지 알려 줘야죠·”
그러더니 손을 탈탈 털고는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내 이름을 앞세워 적들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고 싶었나 본데 당연히 약발도 안 먹힐 허세였다·
한데 재밌는 일이 벌어졌다·
이병룡이 표사를 시켜 묵룡당의 표기를 가져오게 한 것이다·
이어 그 역시 내게로 다가와서는 비룡당의 표기 바로 위에다 묵룡당의 표기를 매달았다·
이갑룡과 이을룡도 표두들을 시켜 각자의 표기를 가져와 매달게 했다·
잠시 후 맨 꼭대기의 천룡표국기를 시작으로 강룡당과 복룡당과 묵룡당과 비룡당의 표기가 차례로 매달렸다·
크기나 생김새는 제각각이었지만 모두가 하나의 깃대에 매달려 한 방향으로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모든 표사들은 또다시 숙연해졌다·
그러나 이번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는 데서 온 두려움이 아닌 끌어 오르는 투지를 품은 숙연함이었다·
남궁소소가 표사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 것이다·
“화살을 쏴라!”
“적들도 지쳤다!”
“강룡당 이조는 진방(辰方)으로 간다!”
“복룡당 삼조는 묘방(卵方)을 지원한다!”
“묵룡당 사조는 인방(黃方)을 사수한다!”
각 당의 표두들과 당주들이 쉬지 않고 고함을 질러댔다·
산 정상을 향해 돌진해 오는 적들의 함성과 위에서 화살을 쏟아붓는 표사들의 함성이 하나로 뒤섞여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그런가 하면 죽어가는 자들의 비명이 바람에 날리는 재와 함께 산 전체로 울려 퍼졌다·
비명은 일방적이라고 할 정도로 마교도들에게서만 터져 나왔다·
가파른 경사 너머의 정상을 향해 올려 쏘는 화살의 위력이 신통치가 않았기 때문이다·
평지라면 백 장은 너끈히 날았을 화살들이 위를 향해서는 오십 장도 오르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산정상에 도달할 때쯤에는 힘이 다한 나머지 표사들의 발밑으로 툭툭 떨어졌다·
그러면 표사들이 그 화살을 주워다 마교도들을 향해 다시 쏘아댔다·
여기에 덧붙여 표사들의 무공이 워낙 출중했다·
목판을 뚫는 화살도 쳐내는 고수들인데 하물며 힘 죽은 화살들쯤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들은 꾸역꾸역 올라왔다·
청성파와 아미파의 고수들이 도착하기 전에 어떻게든 끝내버리기 심산에서였다·
“강룡당의 화살이 동났습니다!”
“복룡당의 화살도 동났습니다!”
“묵룡당의 화살도 동났습니다!”
“투석을 던져라!”
산 정상엔 크고 작은 돌덩어리들이 천지였다·
일부러 찾아다닐 필요도 없었다·
나무와 낙엽들이 모조리 불타고 강풍에 재까지 날아가 버리자 바닥이 온통 돌밭이었다·
표사들은 그것들을 주워 다 아래를 향해 내공을 실어 던졌다·
마교도들도 일반인들은 아니어서 화살과 달리 상대적으로 크고 느린 돌덩어리들은 대부분 피했다·
하지만 산 정상을 향해 진격해 오는 속도를 늦추기에는 충분했다·
엄폐물로 쓸 나무가 단 한 그루도 없다 보니 적들은 더욱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렇게 치열한 격전이 펼쳐지길 한 시진 쓰러진 적들의 수는 이백여 명에 육박했다·
그에 반해 우리 쪽 진영은 십여 명 정도가 전부였다·
적진 속 정체불명의 고수가 쏜 화살에 팔이며 어깨 등을 맞은 탓이다·
간밤에 들판에서 내 등을 뚫으려고 했던 바로 그 궁수의 솜씨가 틀림없었다·
우리가 생각보다 격렬하게 저항하자 적들은 전선을 넓혀 사방에서 공격을 해오기 시작했다·
덧붙여 후방에서 대기 중인 병력들까지 전부 정상 부근으로 끌어들였다·
적진 속에는 일류급의 고수들도 많았다·
거리가 오십여 장 정도로 좁혀지자 몇몇 고수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투석들을 뚫고 단숨에 산 정상까지 올라왔다·
이갑룡과 을룡과 병룡과 표두들이 달려들어 그들을 상대했다·
맹렬한 쇳소리가 깡깡 울려 퍼지는 가운데 적 고수들은 계속해서 투석을 뚫고 정상으로 올라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을 상대하는 우리 쪽 고수들의 숫자도 늘어났다·
점점 사람들의 발목이 묶이고 있었다·
이러다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버리면 적들이 봇물 터진 것처럼 쏟아져 들어오며 성을 함락당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놔둘 수 없었다·
스캉!
싸악!
푹!
나는 귀영무의 보법을 펼치며 종횡무진 하는 한편 천무십검으로 전에 없던 살계를 열었다·
남궁소소와 싸우는 자의 등을 쪼개고 장량기와 싸우는 자의 옆구리를 베고 이병룡과 싸우는 자의 뒷목을 찔렀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공을 숨기지도 숨길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가장 경제적인 동작으로 전권을 파고들어서는 최대한 빠르고 잔인하게 적들을 베어 넘겼다·
그래서 산 정상으로 뛰어든 적 고수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반대로 혼전 중인 우리 쪽 진영의 표사들은 전의를 불태우도록 했다·
순식간에 혼자서 십여 명을 베어 넘기자 우리 쪽 고수들이 조금씩 여유를 되찾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적 고수들은 끊임없이 올라왔다· 한데 진짜 고수들은 따로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지쳤을 때를 기다려 산 정상으로 날아든 다음 단숨에 우리 쪽 고수들을 밀어붙이고 본진에 길을 열어 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까지 산 정상으로 날아들었던 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기도를 풍기는 자들이 슬슬 전면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숫자가 어림잡아도 수십 명은 될 것 같았다·
때마침 우리 쪽 고수들도 하나둘씩 지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저들은 저들대로 나는 나대로 때가 되었다·
“모두 멈추시오!”
나는 창공이 떵떵 울릴 정도의 천둥 같은 일성을 터뜨렸다·
상대적으로 내공이 약한 적 본진의 마교도들은 맹렬하게 공격해 오다 말고 귀를 붙잡으며 괴로워했다·
어떤 자들은 시뻘건 코피를 쏟아냈다·
이백 년의 공력을 담아 터뜨린 창룡후(蒼龍吼)를 감당하지 못한 탓이었다·
본래는 불가의 음공을 사자후라 부르고 도가의 음공을 창룡후라 부른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자 다른 가공할 음공을 말할 때도 흔히 쓰는 비유가 되었다·
덕분에 마교도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잠시나마 싸움을 멈추었다·
그때쯤 나는 작은 백기를 칼집에 묶어 아래를 향해 열심히 흔들어 대고 있었다·
“모두 멈춰라!”
마교도의 진영에서도 쩌렁쩌렁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건장한 가마꾼들이 멘 사인교 위로 백발에 쭈글쭈글한 얼굴을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삼뇌였다·
내가 서 있는 곳과 그와의 거리는 불과 이십여 장 가파른 경사만 아니라면 순식간에 서로가 돌파할 수 있는 거리였다·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
나는 말을 하다 말고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엄청난 미모를 지닌 여자가 걸어 나와 삼뇌의 옆에 섰기 때문이다·
하얀 피부에 흑백이 뚜렷한 눈동자가 단지 한번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빨려 들어갈 것처럼 매혹적이었다·
다시 그녀의 옆에는 칼이 눈동자까지 가르고 지나간 중년인 허리춤에 쇠사슬을 친친 감은 곱사등이 노인 허수아비에 옷을 입혀 놓은 것 같은 말라깽이 장년인 거대한 원숭이를 닮은 야차가 차례로 나타났다·
그들은 천살마녀 연소교를 비롯해 그녀의 수하들인 설표 산노 우숙 그리고 야차곤이었다·
특히 연소교는 한 손에 제 키만한 철궁을 들고 등에는 철전이 가득 든 전통을 멘 상태였다·
상상도 못 한 그림에 나도 모르게 입이 쩍 벌어졌다·
저들에게 납치되었다가 나중에는 동료가 되어 함께 탈출까지 했던 이병룡도 기가 막히는지 목구멍을 쥐어짰다·
“저자들이 왜 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