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 중원을 가로지르다(1) >
사천성은 거대한 분지여서 그동안의 여정에서처럼 산악이 험준하지는 않았다·
대신 크고 작은 강들이 끝도 없이 나타났다·
사천이라는 이름도 네 개의 큰 강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민강(民江)이었다·
저 멀리 민산산맥에서 발원해 사천성의 서쪽을 북남으로 가로지르다가 마침내 장강으로 흘러드는 민강은 나도 아주 잘 아는 강이었다·
“잠깐 들러보지 그러나· 강을 따라 하루 정도만 올라가면 될 터인데· 참고로 우리가 궁금해서 그런 건 절대 아닐세·”
나룻배를 타고 민강을 건너던 중 일견이 내게 한 말이었다·
그의 말처럼 민강을 따라 하루 정도만 북상하면 도화곡이 나온다·
장문인인 이막하를 비롯해 칠검향의 향주 섭부용 그림 그리는 안여여 장차 절세미녀가 될 것이 확실한 예홍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특히 작년 가을에 갔다가 새롭게 친해진 옥소군 은옥교 서동예 구숙정이 의빈 분타를 잘 관리하고 있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은 한가롭게 사질들을 만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민강을 따라 하루만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지만 무림맹으로 가는 전체 여정으로 따지면 이틀 정도 돌아가는 셈이었었다·
지금은 한나절도 아껴 써야 했다·
그 한나절의 차이로 작게는 우리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고 크게는 무림이 전란에 휩싸일 수도 있었다·
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하루의 거리를 두고 정든 도화곡을 스쳐 갔다·
그리고 다시 이틀이 더 지나 타강(花江)을 앞두고 남궁소소와 조우했다·
사람들이 이용하는 포구가 아니었던 탓에 인근에 있는 고기잡이배를 수소문한 후 열아홉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나눠타고 건넜다·
어선 두 척으로는 아슬아슬하게 작아서 세 척을 구했더니 공교롭게도(?) 한 척엔 어부와 나와 남궁소소만 타게 되었다·
“민강에서 도화곡을 그냥 지나쳤다면서요?”
“난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랬다더군·”
“예예랑 여홍이가 보고 싶지 않았어요?”
“잘들 지내겠지· 뭐·”
“여여랑 예홍이에요·”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아닌가? 예예랑 여홍인가?”
“그만하시오·”
“너무 표나게 무관심한 척 하니까 그렇죠·”
“덫이 뻔히 보이는데 빠질 순 없잖소·”
“뻔히 보고 싶었으면서 안 그런 척 하니까 그렇죠·”
“아직 보고 싶었다고 인정하지 않았소만·”
“사숙이 사질들을 보고 싶어 하는 게 뭐가 문제라고 그래요· 당당하게 보고 싶다고 말해도 돼요· 나 그 정도로 속 좁은 여자 아니에요· 자신도 있고요·”
“그런 거 아니라니까·”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곡주님과 제자들을 항주로 초대하는 거 어때요? 의빈에서 우리 범선만 두어 번 갈아 타고 오면 되니 얼마나 쉬워요· 물론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우리 범선?”
“내가 비룡당의 최대 투자자라는 사실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잊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요·”
“누가 들으면 절반이라도 투자한 줄 알겠소·”
“그러게요· 풍운비룡이 이렇게 표행을 잘 할 줄 알았으면 초반에 어떻게든 크게 한 발을 걸치는 건데· 그랬으면 지금쯤 돈방석에 올라 앉았을 텐데 말이죠·”
“내가 표사질은 좀 하지·”
“한데 이번 표행에서는 다 같이 고생을 하고도 정작 한몫을 챙기는 사람들은 따로 있는 듯한 느낌이 좀 있네요·”
그러면서 남궁소소는 조금 떨어진 배에 탄 서호삼견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이견은 황금대야의 구멍에 끼운 가죽끈을 좀 더 튼튼한 놈으로 교체하는 중이었다·
삼견은 사람 머리통만한 크기에 금전이 가득 든 포댓자루 두 개를 하나의 밧줄로 열심히 연결하는 중이었고·
그리고 선수에는 황금대야와 금전 자루의 원래 주인이었던 대응왕이 입으로는 재갈을 물고 양손은 쇠사슬에 묶인 채 초췌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다시 남궁소소가 말했다·
“하오문 분타주에게 들었는데 첫째 형님과 둘째 형님께서는 금사강을 건넌지 얼마 되지 않아 말머리를 항주로 돌리셨대요·”
“어째서?”
“외가들의 정보망으로 보은패 아홉 개가 구대문파에 전부 전해진 걸 아셨나 봐요· 그래서 회수했다가 다시 구대문파에 전달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신 것 같아요·”
“그랬었군·”
“구대문파가 보은패의 소명을 완수하지 않는 이상 아직은 끝난 게 아닌데· 평소 두 분 형님들의 집요한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이리 쉽게 포기하실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형님들에겐 해남파의 장문인이 없으니까·”
“다들 금사강으로 점창파로 갈 때 우리는 가장 먼 해남도로 갔던 게 신의 한수였던 것 같아요· 설마 이렇게 될 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건 아니죠?”
“그걸 예측하기엔 알다시피 변수가 너무 많았소·”
“웬일로 겸손할 줄도 아시고요·”
“다만 혹시 모르니까 최후의 한수로 생각한 거요·”
“그럼 그렇지·”
“점창으로 갔던 셋째 형님 소식은 못 들었소?”
“그게 좀 이상해요· 오십여 명이나 되는 표사들이 말을 타고 이동하는 데도 흔적을 조금도 남기지 않았다더라고요· 물론 하오문이 일부러 찾아다는 건 아니고요· 혹시 또 납치되신 거 아닐까요?”
“오십 명 전부?”
“셋째 형님만 납치하고 표사들은 전부 죽였을 수도 있죠·”
“사람을 너무 쉽게 죽이는 거 아니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흔적이 없을 수가 있나요? 유성표를 죽인 흉수를 찾아 보은패를 회수하는 게 무슨 비밀 작전도 아니고요·”
“병룡 형님이 어수룩해 보여도 실제로는 비상한 분이오· 옆에는 천룡표국의 노련한 표사 오십 명이 함께 있고· 천하의 어떤 세력도 천룡표국의 일급표사 오십을 그렇게 간단히 죽여 없앨 수는 없소·”
“정말 그래야 할 텐데요·”
천룡표국의 표사 오십 명이 한꺼번에 몰살당한다는 게 자존심 상해서 대충 둘러댔지만 솔직히 나야말로 그런 의심이 들었다·
‘이병룡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냐·’
나는 보퉁이에 싼 물건을 남궁소소의 앞으로 밀어 놓았다·
“이거 받으시오·”
“뭔데요?”
“용린신갑이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기회를 봐서 옷 속에 입어 두시오·”
“무림맹에 도착하면 다시 돌려주고요?”
“깨끗이 닦아서·”
“무공도 그렇게 세면서 이제 그냥 나 주면 안 돼요? 필요하면 가끔씩 내가 빌려줄게요· 물론 그때까지 만나는 사이면요·”
“강변 풍경이 고즈넉하군·”
“내가 하나 맞추고 만다·”
타강을 건너자 꼬박 한나절 만에 울창한 죽림이 나타났다·
죽림을 가로질러 가던 우리는 오래전 누군가 버리고 간 오두막 터에서 저녁을 맞았다·
부서진 오두막의 나무 토막들을 모아 모닥불을 피우고 타강에서 배를 구할 때 함께 얻은 쌀과 수통의 물로 대충 밥을 지었다·
“고기가 없으니 입맛도 없군·”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운 이견이 그릇과 젓가락을 던지듯 내려놓으며 한 말이었다·
솥과 밥그릇과 젓가락 모두 대나무를 잘라 만든 것이었다·
은하산장에서 갑자기 도망치느라 말(馬)은 물론이거니와 특제 솥단지며 각종 도구들까지 모조리 잃어버린 상태였다·
해서 이렇게 그때그때 대충 만들어 쓰면서 가는 중이었다·
“먹는 건 그렇다 치고서라도 말이 없으니 힘들긴 하군요· 속도도 느리고요· 인근 도시에라도 들러서 말부터 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비용은 저희가 대겠습니다·”
양홍경이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엽초풍 때문이다·
일신에 아무리 뛰어난 절기를 익혔어도 내공이 일천하다보니 그는 항상 오후만 되면 지쳤다·
지금도 제 딴에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쓰러진 통나무에 꼿꼿이 걸터 앉았지만 땅에 닿은 다리가 달달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엽초풍이 아무리 힘들어도 대응왕 만큼은 아닐 것이다·
턱뼈가 박살 나고 눈알이 부어터지고 양팔이 부러진 그는 쇠사슬에까지 묶여 끌려가는 중이었다·
게다가 탁중로는 번견들을 챙기고 호리독사와 독고완은 전방과 후방의 척후를 살피느라 주로 이견과 삼견이 번갈아 대응왕을 끌고 갔다·
한데 이 두 노인네에게는 자비심이라는 것이 없었다·
대응왕이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는 기미가 보이면 그대로 주먹을 얼굴에다 꽂았다·
허락도 없이 개울물에 머리를 박고 물이라도 한 모금 마시려고 하면 그대로 발로 차서 물속에 아예 처넣어 버렸다·
그러면서 빨리 기어 나오지 않는다며 자기들은 젖지 않으려고 물가에 서서 돌멩이를 던져 대응왕의 머리통을 맞추었다·
속으로 얼마나 분했는지 어젯밤에는 대응왕이 자다가 눈물까지 흘리는 걸 봤다고 호리독사가 말해 주었다·
이쯤 되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입에 재갈을 물려서 스스로 자결을 할 수도 죽여 달라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런 연유로 이 순간 누구보다 말(馬)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대응왕이었다·
끌고 가다가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최소한 자신에게도 한 필을 내줄 것이기 때문에·
“그건 곤란합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보셔서 아시겠지만 사천성은 대부분 평지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지형은 강도 많은 데다 그 강들이 대부분 크고 깊지요· 한데 강이 나타날 때마다 말을 실을 수 있을만큼 크고 갑판까지 평평한 배를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천성 사람들도 교통은 할 터· 그런 배들이 있을 법한 포구들을 거쳐서 길을 잡는 방법은 없겠습니까?”
“그러면 강호인들이 우리의 위치를 아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앞으로 거쳐 갈 곳까지 예측하게 될 겁니다· 그건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렇군요· 청성파와 아미파의 제자들이 우리를 추격 중이라는 걸 잠시 깜빡했습니다· 다들 너무 편안하게들 행동하셔서·”
“꼭 청성파와 아미파 때문만은 아닙니다·”
“예?”
그 순간 인기척과 함께 전후방의 척후를 살피러 갔던 독고완과 호리독사가 다급하게 나타났다·
한데 두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독고완이 먼저 보고했다·
“아무래도 함정에 빠진 것 같습니다·”
“자세히·”
“각종 병장기로 중무장한 무인들이 사방에 쫙 깔렸습니다· 하 표사님과 함께 잠깐 돌아봤는데도 그 숫자가 족히 일천 명은 될 것 같습니다·”
“거리는?”
“처음 포착했을 때는 삼백여 장 밖에서 천라지망을 펼친 채 빠른 속도로 포위망을 좁혀 오는 중이었습니다· 지금쯤이면 이백여 장 앞까지 도착했을 겁니다·”
“정체는?”
마지막 질문에 대한 보고는 호리독사가 이어서 했다·
“청성파와 아미파는 확실히 아닙니다· 은하산장에 모였던 일천 무림인들도 아니고요· 아무리 살펴봐도 현재로선 정체를 모르겠습니 다· 다만 하나같이 피 냄새를 철철 풍기는 것이 평범한 놈들이 아닙니다·”
숲은 나를 숨겨 주지만 동시에 적들도 쉽게 매복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중에서도 죽림은 숙영을 하는 쪽이나 매복을 하는 쪽 모두에게 최적의 장소였다·
일단 숙영을 하는 입장에서는 말을 탄 적들이 들이닥칠 수 없어서 좋다·
매복을 하고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함정에 빠진 적들이 창살처럼 빽빽하게 자란 대나무들 때문에 빨리 도망칠 수 없어서 좋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오늘은 독고완과 호리독사에게 평소보다 두 배나 먼 곳까지 척후를 살피도록 했다·
삼백여 장 밖이면 달아날 시간을 충분히 벌 수 있었다·
적들이 북쪽에서 오면 남쪽으로 도망치고 동쪽에서 오면 서쪽으로 도망치면 되니까·
문제는 예상치 못할 만큼 많은 적들의 숫자였다·
일천여 명이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전부 막아버리고 좁혀 오는 데야 무슨 수로 당하겠나·
독고완과 호리독사의 보고에 좌중의 공기가 얼음장처럼 식었다·
일견이 내게 말했다·
“어서 명령을 주시게·”
“병장기들만 챙기세요·”
“다들 모닥불에 붙어!”
일견이 벌떡 일어나며 외친 말이었다·
남궁소소가 재빨리 뒤로 빠지며 돌아섰다·
반면 독고완 탁중로 이견 삼견 호리독사는 모닥불 주위를 빙 둘러싸며 바지춤을 풀었다·
표행 중 주변에 물이 없는 상황에서 표사들이 모닥불을 다급히 끄고 도망칠 때 흔히 하는 방식이었다·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엽초풍과 해남파의 제자들이 가세했다·
순간 내가 사람들에게 서둘러 말했다·
“그냥 놔두십시오·”
“멀리서도 모닥불을 보고 달려올 걸세·”
“그러니까요·”
“···!”
나는 일행들과 함께 애초 가던 동쪽과 반대 방향인 서쪽으로 달렸다·
일천 명이 매복을 하고 기다렸다면 한 번도 부딪히지 않고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천라지망이 좁혀지기 전에 그래서 방어막이 더 촘촘해지기 전에 최대한 멀리까지 달아나야 한다·
문제는 단 세 걸음도 똑바로 달릴 수 없을만큼 빽빽하게 자란 대나무들이었다·
덕분에 경신공을 펼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보름달이 떠서 다행이었다·
보름달까지 없었다면 쉴새 없이 방향을 꺾어대는 통에 길을 잃어도 열두 번은 잃었을 것이다·
“놈들이 사라졌다!”
뒤늦게 모닥불 있던 자리에 도착한 적들이 우리가 사라진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중요한 건 다음에 이어지는 말들이었다·
“멀리 못 갔을 것이다!”
“일광탄(日光彈)을 쏴라!”
죽림 곳곳에서 폭죽이 이십여 장 높이로 솟구치다가 펑펑 터졌다·
그때마다 폭죽 아래의 숲이 한순간 대낮처럼 밝아졌다·
흡사 바로 머리 위에서 번개가 치는 것 같았다·
잠깐 사이에도 수십 발의 폭죽이 하늘로 솟구치고 터졌다·
그중 몇 개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솟구쳤다·
그때마다 잠시 질주를 멈추고 납작 엎드렸다가 다시 달려야 했다·
그 바람에 안 그래도 느렸던 속도가 더욱 느려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선두에서 방향을 잡으며 달리던 나는 그대로 뚝 멈추었다·
십여 장 앞에 족히 백여 명은 될법한 무인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도검을 뽑아 든 채 버티고 서 있었다·
공력을 잔뜩 끌어 올리고 보니 과연 호리독사가 말한 것처럼 피 냄새가 철철 나는 자들이었다·
채채채채채챙!
“이 새끼들 대체 뭐야!”
“이쪽으로 올 걸 알고 있었어!”
반사적으로 도검을 뽑자마자 이견과 삼견이 씹어 뱉듯 한 말이었다·
모두가 놀라서 나자빠질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나야말로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우두머리가 누구인지 몰라도 여정부터 시작해 내 방식과 행동을 정확히 예측하고 있었다·
저들이 누군지는 몰라도 무얼 노리는 지는 안다·
해남파의 장문인을 죽여서 무림맹에 가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엽초풍이 죽으면 구대문파에 전해진 보은패의 효력을 무력화시키는 게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덧붙여 이들이 금사강에서 유성표를 죽인 고수의 배후가 틀림없었다·
펑! 펑! 펑!
눈앞에 있는 적 무리의 누군가가 허공을 향해 세 발의 폭죽을 쏘아 올렸다·
지금도 사방에서 쏘아대고 있는 일광탄과 달리 세 발은 수십 장 높이까지 곧게 솟구쳤다가 터졌다·
그러자 일광탄이 뚝 그치면서 일천 무인들이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죽림 전체가 통째로 흔들리는 것 같았다·
“모두 장문인을 중심으로 검진을 펼친다!”
내가 일갈했다·
출신이 다르고 사문이 다르니 통일된 하나의 검진을 펼칠 수가 없다·
해서 엽초풍을 가운데 두고 칼끝을 바깥으로 향한 채 모두가 빙 둘러쌌다·
내게 아무리 삼백 년의 공력을 지녔다고 해도 혼자라면 모를까 일행들 전부를 데리고 일천 명을 상대로 싸워서 빠져나갈 수는 없다·
이제 남은 건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포로로 잡히는 대신 일행들의 안전을 보장받도록 협상하는 것이었다·
적 우두머리가 나를 안다면 내게서 엽초풍을 빼앗아 가기 위해 자신 역시 수백 명의 수하를 잃어야 한다는 걸 알 것이다·
그때였다·
두두두두두두두!
어디선가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소리가 난 쪽을 보니 저 멀리 어둠 속에서 한때의 인마가 수십 개의 횃불을 밝힌 채 무서운 속도로 죽림 속을 질주해 오고 있었다·
“저건 또 뭐지?”
“외곽에서 대기하던 수뇌부인 모양입니다·”
“썩을 놈들이 벌써부터 다 잡은 것처럼 굴고 지랄이야!”
일견과 이견과 삼견이 차례로 한 말이었다·
한데 공력을 끌어올려 살펴본 앞쪽 무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건 수뇌부를 기다리는 수하들의 태도나 기색이 아니었다·
순간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누군가 외쳤다·
“웬 놈들이냐!”
그리고 곧장 이어지는 비명들·
“으악!”
“아악!”
“크악!”
“적이다!”
“적이 나타났다!”
“기마인들을 막아서라!”
말발굽 소리 백인장들의 외침 칼 부딪히는 소리 죽어가는 자들의 비명이 한데 어우러지며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십여 기의 기마인들은 질주하는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았다·
“이거 같은 편들이 아닌 모양인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대체 누군데 사람도 달리기 힘든 죽림을 말까지 타고 어떻게 저리 빨리 달릴 수가 있는 거죠? 그것도 족히 오십 명은 될 것 같은데·”
일견 이견 삼견이 차례로 한 말이었다·
삼견의 마지막 말이 내 머릿속에 확 꽂혀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횃불을 든 기마인들은 일직선으로만 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질주를 하는 와중에도 뱀처럼 이쪽저쪽으로 조금씩 방향을 틀었다·
그 바람에 아직 포위망을 완전히 좁혀 오지 못한 적들은 기마인들의 방향을 가늠하지 못해 애를 먹는 눈치였다·
순간 온갖 살벌한 소음들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 하나가 날카롭게 죽림을 갈랐다·
“이정룡!”
이병룡?
“이정룡! 너라면 내가 어디를 달리고 있는지 알 거다· 선두에 빈말(馬) 열아홉 필을 준비했으니 빨리 와서 합류해라!”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를 돌아보았다·
모든 질문을 속으로 삼킨 채 나를 지켜보는 얼굴에서 간절함과 절박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뿌리가 서로 얽혀 들어가면서 자라는 대나무의 번식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죽림에서 그런 대나무가 자라지 않는 땅은 한 곳밖에 없다·
나는 우리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독고완에게 다급히 물었다·
“죽림에 시냇물이 있었나?”
“반 장 정도의 폭에 발목까지 오는 시냇물이 죽림을 관통하며 흐르고 있습니다· 위치도 정확히 알고요·”
“독고완이 선봉에 서고 내가 후미를 맡는다· 모두 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