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 골육상쟁 (5) >
삼경이 가까웠을 무렵에야 나는 본래 머물고 있던 여곽으로 돌아왔다·
반점으로 쓰고 있는 일 층의 넓은 객실에는 새롭게 합류한 점창오검이 함께 자리했다·
단석조를 비롯한 점창오검은 해남파의 소년 장문인이 사형제들을 이끌고 직접 중원으로 왔다는 걸 매우 놀라워했다·
그리고 내가 이끄는 비룡당의 표사들 중에 남궁소소가 있다는 걸 알고 또 한 번 눈이 휘둥그레졌다·
점창오검에게는 남궁소소가 각별히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남궁세가와는 같은 무림맹의 맹방인데다 오라비인 남궁세옥과도 제법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남궁소소와 해남파의 제자들 그리고 비룡당의 표사들은 또 그들대로 소문으로만 듣던 점창오검과 동행한다는 사실에 매우 상기되어 있었다·
“제가 여강고성으로 오게 된 사정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이제 선배님들께서 추적 중이셨다는 흉수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본색을 빨리 드러내는군·”
“돌아갈 필요 있겠습니까?”
농담까지 하는 여유를 보인 단석조는 무슨 이유에선지 즉답을 피한 채 잠시 구석진 곳의 탁자로 시선을 주었다·
그곳엔 늙수그레한 얼굴들의 서호삼견이 호리독사와 함께 신나게 술을 푸고 있었다·
일급 표사를 오십 명씩이나 동원하고도 모자라 인근의 흑도들까지 고용한 두 형들과 달리 내가 이끌고 온 표사들은 두 명의 정규 표사와 다섯 명의 객원표사가 전부였다·
한데 전설적인 대도 공령신투의 제자에다 항주 서쌍교방의 흑도들이라고 소개받은 저들 네 명의 귀가 조금 찜찜한 모양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갑자기 자신들에게로 쏟아지자 네 사람을 술을 마시다 말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우리를 보았다·
저 양반들의 입은 솔직히 나도 장담할 수가 없기 때문에 단석조에게도 아무런 약속을 해줄 수가 없었다·
잠시 심부름이라도 보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단석조가 결심을 한 듯 말문을 열었다·
“오래전 점창산에는 바보 사형이라고 불린 제자가 하나 있었네· 비가 오면 경내의 개밋둑들을 전부 찾아서 연잎을 덮어줄 정도로 착했지·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네·”
착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 으레 그러하듯 그는 우직하고 충직했다·
사부를 봉양하고 경내를 돌보는 일 외에는 게으름 한번 피우는 법 없이 종일 무공만 수련했다·
한데 이상하리만치 무공이 늘지 않았다·
함께 입문한 사형제들이 삼단공을 수련할 때 그는 이단공의 끄트머리를 잡고 있었다·
격차는 점점 벌어져 다른 사형제들이 사일검법을 오성까지 성취했을 때 그는 고작 삼성의 벽을 두들기는 정도에 그쳤다·
그는 천하의 둔재였다·
본시 명문대파는 문파의 위상을 드높이고 무공을 끊임없이 발전시키기 위해 고르고 고른 기재들만을 제자로 들인다·
그러다 보니 우연한 기회에 점창의 제자가 된 그는 문일지십의 기재들 사이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천하에 좋은 사람이라는 뜻의 ‘바보 사형’은 어느 순간부터 점점 다른 의미로도 해석이 되었다·
나이가 들자 동년배의 다른 사형제들은 하나둘씩 제자들을 들이기 시작했다·
점창파 정도되면 부모의 손에 이끌리어 명망 있는 지방 무인들의 추천서를 들고 찾아오는 어린 기재들이 줄을 잇는다·
그런 아이들은 일정 기간동안 점창에 머무르게 하며 자세히 자질을 살피는데 그때 눈여겨 본 아이들과 어느 시점에 이르러 정식으로 사승의 인연을 맺는 것이다·
아이들 또한 기왕이면 명성이 높거나 보다 강한 고수의 눈에 들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
한 번 사승의 인연을 맺으면 평생을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뛰어난 사부라야 제자를 더욱 높은 경지로 이끌어 줄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자를 선택할 수가 없었다·
그의 제자가 되고 싶어 하는 아이들도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점창의 제자들은 그를 본인이 없는 곳에서조차 바보 사형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더는 옛날의 친근한 호칭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십 년 전 점창산이 온통 만산홍으로 뒤덮이던 어느 봄날 그는 모든 제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사지근맥을 잘린 채 파문당했다·
“사일검법을 익힌 지 이십 년이 넘도록 오성의 벽조차 뚫지 못하자 신변을 비관한 나머지 몰래 방문좌도에 손을 댔기 때문이네·”
이야기가 갑자기 파국으로 치닫자 사람들은 모두가 어리둥절해 했다·
특히 바보 사형이라는 사람의 감정에 동화된 남궁소소는 크게 충격을 받은 듯했다·
“한데 그분 이야기는 왜 하시는 겁니까?”
“나는 지금 우리가 추적 중이었던 흉수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네·”
“그 말씀은···”
“우리도 처음엔 몰랐네· 한데 이제는 부정을 할 수가 없게 됐네·”
“하면 유성표의 행낭에 남아 있던 검흔은?”
“진짜 사일검법의 검흔이지·”
“파문 당하기 전에 사지근맥을 잘렸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방문좌도의 세계에선 인간의 머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곤 하지· 아무래도 바보 사형께선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로 가신 듯하네·”
천하의 둔재였던 점창 제자가 방문좌도에 빠졌다가 사지근맥을 잘린 채 파문 당했다·
그리고 십 년 후 방문좌도를 더욱 깊게 익힌 그가 다시 강호에 나타나 절정고수인 유성표를 죽였다·
실로 믿기 힘든 일이었다·
덧붙여 유성표의 행낭에 남은 검흔을 사일검법의 검흔이라고 정확히 간파한 만박신안과 이갑룡도 놀라웠다·
결과적으로만 보면야 헛다리를 짚었지만 독안추귀 청면살 만박신안 등의 객원표사들을 앞세운 이갑룡의 추적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고 정확했다·
“한데 그는 왜 굳이 유성표를 죽이고 보은패들을 전부 가로챈 걸까요? 대체 무얼 하려고·”
“우선은 실력을 증명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요? 그런 다음엔 자신을 내친 사문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었고요·”
말을 한 사람은 남궁소소였다·
사람들은 공감한다는 듯 고개들을 끄덕거렸다·
한데 나는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문파에도 상황을 알리셨습니까?”
“유성표가 다녀가고 난 후 점창의 장문인께선 장로회의를 소집하시는 한편 과거의 기록들을 찾으셨네· 무려 이백 년 전의 일이다 보니 정확한 사실 확인부터 해야 했으니까·”
“당연히 그러셨겠죠·”
“한데 며칠 후 유성표의 부고가 전해졌지· 알다시피 유성표는 점창을 첫 번째로 다녀갔기 때문에 섣불리 알려졌다가는 의심을 받을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네· 해서 일단은 우리가 하산해 은밀히 조사를 하던 중이었고·”
“백칠십사 년 전입니다·”
불쑥 끼어든 사람은 아까부터 만두만 집어 먹으며 조용히 얘기를 듣던 엽초풍이었다·
모두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엽초풍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설명을 덧붙였다·
“본파의 철검무적 사조께서 처음 구대문파를 상대로 비무행을 나서셨던 때가 이백칠 년 전이고요·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오셨다가 아홉 초식을 선사하고 보은패를 받으셨던 장강지약(長江之約)의 해는 정확히 백칠십사 년 전입니다·”
이백 년 전이면 어떻고 백칠십 년 전이면 또 어떤가· 어차피 똑같이 까마득한 옛날인데·
엽초풍의 비상한 관찰력과 기억력을 알고 있던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단석조를 비롯한 점창오검은 조금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특히 ‘장강지약’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확 꽂힌 것 같았다·
말 그대로 장강에서의 약속이라는 뜻인데 이는 백칠십사 년 전이라는 정확한 시간과 맞물려 묘한 속박감을 느끼게 했다·
‘이거 쉽지 않겠는걸·’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눈치 빠른 남궁소소가 얼른 내게 질문을 하면서 화제를 다시 본론으로 돌려놓았다·
“다른 문파에 알렸는지는 왜 물으신 거죠?”
“유성표의 부고가 유품들과 함께 하오문을 통해 천룡표국에 전해진 게 어쩐지 우연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오·”
“천룡표국을 일부러 끌어들였다는 건가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소·”
“왜죠?”
“그는 유성표와 국주님의 사이를 알고 있었던 것 같소· 표왕이라면 조용히 넘어가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거지· 그의 계획대로 국주님께선 요란하게 출표식까지 치르면서 유성표의 표행을 잇겠다고 선언하셨고·”
“강호에 알려지길 원했군요·”
“자세히 보면 이 사건은 지금 안팎으로 두 개의 이야기가 동시에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소· 모두가 알 수 있는 밖의 이야기는 사대명표 중 한 명인 유성표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수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이오· 그리고 아직까지는 극소수만 아는 내부의 이야기는 구대문파로 향하던 보은패 여덟 개가 갑자기 증발해 버렸다는 것이고·”
“강호의 이목이 쏠리게 해놓고 정작 중요한 건 드러내지 않는다? 마치 사냥감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사방에다 불을 질러 놓고 천천히 옥죄는 듯한 느낌이에요·”
무림의 통상적인 관습에 따르면 보은패는 딱 한 번만 쓸 수 있는 대신 기한이 없다·
또한 대를 이어 물려주거나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도 있다·
‘장 아무개’가 보은패를 제삼자인 ‘이 아무개’에게 준다는 것은 그만큼 큰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 보은패를 준 ‘왕 아무개’는 목숨 걸고 ‘이 아무개’를 도와줌으로써 결국엔 ‘장 아무개’에게 입은 은혜를 갚는다는 개념이었다·
구대문파를 어떤 식으로든 한 번씩 써먹을 수 있는 보은패 여덟 개가 누구인지도 모를 자의 손에 들어갔다·
당사자들이 이 사실을 알면 크게 긴장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보은패가 백칠십여 년 전의 치욕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무얼 할 수도 없었다·
딱 남궁소소가 말한 상황인 것이다·
“열등감과 광기에 사로잡힌 파문제자가 옛 사문을 상대로 펼치는 복수행이라고 보기에는 판이 지나치게 크오·”
“점창의 장문인께서도 잘 모르시는 백칠십여 년 전 해남파와 구대문파 사이에 있었던 장강지약을 파문제자가 자세히 아는 것도 이상하고요·”
나는 다시 단석조에게 말했다·
“아무리 소극적으로 생각해도 이건 단 선배님께서 말씀하신 파문제자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면?”
“그는 누군가의 칼로 쓰였을 공산이 큽니다· 천룡표국으로 하여금 점창을 바라보게 만드는 칼·”
“배후가 있다는 건가?”
“아마도요·”
“자네의 추측이 맞는다면 결국 칼을 찾아야 칼자루 쥔 자를 알 수 있겠군· 더불어 칼끝이 최종적으로 향하는 곳도 알아내고 말이지·”
“칼을 쫓으면 이곳 여강고성에서 그랬던 것처럼 계속해서 뒤만 따라다니게 될 겁니다· 저들의 장단에 놀아나며 열심히 뒷북을 쳐주는 거죠·”
“하면?”
“보은패를 쫓아야 합니다·”
“그게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저들이 보은패를 가보로 소장할 게 아니라면 유성표가 가려던 길이 곧 여덟 개의 보은패가 가고 있는 길이 될 것입니다· 보은패를 쓰기 위해 저 멀리 북쪽 섬서성의 공동산까지 갔다가 다시 남하해서 청성산으로 가지는 않을 테니까요·”
여기까지 얘기하자 장내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해졌다·
비룡당의 표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해남파의 제자들과 점창오검까지· 전부가 내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한참 만에야 단석조가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강호에 떠도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항주의 천룡표국에서 잠룡 한 마리가 깨어나 표국업계를 온통 뒤흔들고 있다더니만·”
단석조는 강호를 떠도는 소문이라는 거창한 말로 시작해 놓고 정작 결론에 이르러서는 표국업계를 뒤흔든다고 다소 협소하게 표현했다·
사실 이거야말로 나에 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평가였다·
흔히 구주팔황과 사해오호라고 말하는 강호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건사고들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곳이었다·
내가 환생한 후 불가능해 보이는 여러 표행들을 기적적으로 성공 시켰다고는 하나 전 강호로 따지면 수많은 사건들 중 몇 가지에 불과했다·
“점창산 아래까지 마중을 나가 다음 행선지를 묻는 내게 유성표는 아미산을 거쳐 청성산으로 향할 거라고 했네· 거리상으로도 그게 맞고·”
“아미파는 지금 이상한 짓을 하고 있던데·”
걸걸한 목소리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니 서호삼견의 둘째인 이견이 탁주를 쭈욱 들이키는 중이었다·
이어 그는 빈 잔을 툭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마침 술이 떨어졌군·”
“원하는 만큼 드십시오·”
“안주도 동이 났고 말이지·”
“충분히 시켜드리겠습니다·”
“초저녁에 인근 주루에서 술을 마시던 중 우연히 여강의 흑도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네· 은하산장의 대응왕(大應王)이라는 자가 열흘 후 금분세수를 한다더라고·”
“그게 사실입니까?”
단석조가 깜짝 놀라며 물은 말이었다·
“말했다시피 나도 우연히 들은 얘기인지라·”
“비겁한 늙은이 같으니라고·”
“대응왕이 누구죠?”
이번엔 남궁소소가 단석조에게 물었다·
대륙이 워낙 넓다 보니 아무리 남궁소소라고 해도 천하 무림인들을 전부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수십 년간 사천성 일대에서 악명을 떨친 노마두일세· 살인은 밥 먹듯이 하는 수준이고 그 외에도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악행들을 수도 없이 저질렀지·”
이어지는 설명에 따르면 그의 목숨을 노리고 찾아간 협의지사들이 적지 않았단다·
하지만 무공이 워낙 고강한데다 신출귀몰하기까지 한 탓에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 그가 돌연 금분세수를 선언한 모양이었다·
금분세수란 본래 금 세숫대야에 손을 씻으며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는 뜻이다·
무림인이 금분세수를 한다고 함은 병기를 내려놓고 초야로 돌아가 남은 삶을 조용히 정리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림의 오랜 관습에 따르면 누구든 일단 공개적으로 금분세수를 하고 난 이후에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그를 죽일 수가 없다·
이는 거꾸로 누군가 만약 그에게 복수를 하고 싶다면 금분세수를 하기 전에 빨리 죽여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가 이견에게 물었다·
“한데 그게 아미파와 무슨 상관입니까?”
“누군가 복수를 하러 은하산장을 갔는데 놀랍게도 아미파의 고수들이 막아서는 바람에 그냥 돌아왔다고 하네· 대응왕이 금분세수를 무사히 마칠 때까지 호법을 서기로 했다나 어쨌다나· 복마(伏魔)를 기치로 하는 아미파가 사천성을 떨어 울린 노마두의 호법을 선다고 흑도놈들이 낄낄거리며 조롱하더라고·”
자기도 흑도이면서 더 나쁜 놈들에게는 본능적으로 놈 자를 붙이는 이견이었다·
장내의 공기가 발칵 뒤집혔다·
나와 단석조는 약속이나 한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두 번째 보은패가 나타난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한발 늦은 게 아닐까?”
“저들은 우리가 당분간은 힘을 합쳐 점창의 파문제자를 추적할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서둘러 가면 허를 찌를 수 있습니다·”
“배를 준비하겠네·”
다음 날 새벽 내가 이끄는 비룡당의 표사들과 엽초풍이 이끄는 해남파의 제자들 그리고 단석조가 이끄는 점창오검은 마침내 유성표가 넘지 못했던 금사강을 건너 북무림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