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 골육상쟁 (2) >
유령처럼 은밀하고 빠르게 전각의 지붕들을 건너뛴 나는 이을룡이 머물고 있는 방으로 침투했다·
불 꺼진 방안은 얼핏 보아도 삼십여 평은 될 것 같았다·
그 넓은 방이 화살과 창으로 가득했다·
방 한가운데는 화살과 창을 고슴도치처럼 빽빽하게 꽂은 탁자가 쓰러져 있었다·
바로 그 뒤편 어둠 속으로부터 한 쌍의 새파란 눈동자가 내가 들어오는 걸 조용히 지켜보는 중이었다·
“누구냐?”
“저승사자·”
남궁소소에게서 역용술을 배울 때 함께 익힌 방법으로 목소리를 변조해 대답했다·
복면을 뒤집어쓴 데다 칼도 새로 산 것이어서 이을룡은 내가 누군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 날 노리는 거지?”
“갈 때가 되었으니까?”
“누구에게 사주받았나?”
“염라대왕·”
“대화 보다는 잡아서 심문을 해야 할 놈이로구나!”
펑!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을룡이 내공을 실은 발로 탁자를 찼다·
굉음을 내며 달려드는 탁자를 붙잡아 세우는 순간 그 위로 시퍼렇게 날 선 검신이 벼락 치듯 날아들었다·
휘웅!
그러나 무려 삼백 년의 공력에 이능력까지 발동하고 있던 내 눈에는 너무나 느리게 보였다·
백포산군으로부터 백오십 년의 공력을 넘겨받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만약 백포산군이 일신에 지닌 공력을 한 줌도 남김없이 전부 내게 주고 갔다면 어느 정도였을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휘웅! 쓰앙! 훅!
이을룡의 장검이 방향을 바꿔가며 소나기처럼 쇄도해왔다·
하지만 애꿎은 허공만 열심히 베었을 뿐이었다·
나는 바람에 일렁이는 촛불처럼 부드럽게 나부끼며 그의 검을 모조리 피했다·
그렇다고 딱히 반격을 가해 서둘러 제압하지도 않았다·
오늘 내 목적은 그를 제압하는 데 있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이 기회를 빌려 이을룡의 진짜 실력이 어느 정도 인지도 보고 싶었다·
그가 펼치는 천무십검의 오묘함과 예리함은 확실히 내가 흉내 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특히 내 동작에 따라 검로를 바꾸며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변화무쌍함은 가히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다만 그런 걸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나의 기만적인 안력과 반사신경이 문제일 뿐·
물론 그 안력과 반사신경은 부적의 이능력과 무지막지한 공력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깡!
이을룡이 서른 번째 초식을 펼쳤을 때 새파란 불똥이 튀면서 첫 번째 격검이 일어났다·
등이 벽에 닿는 바람에 더는 피할 곳이 없어진 내가 칼을 반쯤 뽑아 일도양단의 기세로 떨어지는 이을룡의 검을 막아낸 것이다·
격검의 순간 이을룡과 내가 각자의 병기에 담아낸 공력도 함께 충돌했다·
흡사 쇳덩어리를 후려친 것처럼 짜르르한 통증이 손목 전체로 전해졌다·
‘이 정도였다고?’
이을룡은 이을룡대로 불에 덴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대여섯 걸음이나 떨어졌다·
이어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검을 꼬나 쥔 손목은 충격과 고통으로 달달 떨리고 있었다·
“대체 누구인가!”
“이미 말했을 텐데·”
“이름이라도 있을 게 아닌가!”
“망자가 저승사자의 이름은 알아서 무얼 하려고·”
스릉!
나는 칼을 마저 뽑아 이을룡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앞서 삼십여 차례의 기만적인 회피술과 가공할 내공을 견식한 이을룡은 자신의 상대가 아님을 깨닫고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와 불과 세 걸음을 남겨놓고 칼을 휘두르려는 찰나 문이 발칵 열렸다·
낯익은 자들이 검을 뽑아 든 채 쏟아져 들어왔다·
아래층으로 내려갔던 복룡당의 표두들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듣고 다시 올라온 것이다·
“웬 놈이냐!”
“그걸 알려 줄 것 같으면 복면을 왜 써!”
나는 앞에 있던 탁자를 발로 힘껏 찼다·
화살과 창이 잔뜩 꽂혀 있던 탁자가 팽글 돌며 세 사람을 덮쳐갔다·
내가 아무리 압도적인 내공을 지녔어도 탁자 하나 막지 못한다면 천룡표국의 표두들이라고 할 수 없다·
쩌저적!
표두들의 일검에 육중한 탁자가 비명을 지르며 세 갈래로 쪼개져 버렸다·
그러나 쪼개진 탁자도 탁자의 일부였다·
나는 왼손으로는 백포산군에게 전수받은 구천홍염장을 떨치고 곧이어 오른손의 칼로는 흔하디흔한 횡소천군의 초식으로 전면을 쓸어갔다·
결과는 엄청났다·
뻐엉!
까가강!
소소하게 백 년 공력만 담아낸 장력이 쪼개진 탁자들의 넓은 면에 작렬하면서 그대로 세 사람을 덮쳤다·
그와 동시에 내 칼은 방향을 잃고 흔들리는 세 자루의 검을 후려쳤다·
쪼개진 탁자는 얼굴을 때렸고 검은 철퇴라도 맞은 것처럼 튕겨 나갔다·
저들을 항거불능의 상태로 만들기 위해 재차 공격을 하려는 찰나 머리 위에서 서늘한 살기가 느껴졌다·
어느새 후방을 점한 이을룡이 다시 검으로 정수리를 쪼개 온 것이다·
나는 칼끝을 왼쪽 어깨 뒤 허공으로 찌름과 동시에 회오리바람처럼 감아서 쳐올렸다·
원을 반쯤 그리며 올라갔을 때 이을룡이 내려친 검신이 도신에 걸렸다·
막강한 내공을 감당하지 못한 이을룡의 검은 내 칼이 이끄는 방향을 따라 그대로 바닥까지 곤두박질쳤다·
텅!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나는 좌수를 힘차게 뻗으며 구천홍염장을 떨쳤다·
뻐엉!
가슴에 일장을 격중당한 이을룡은 등으로 창문을 부수며 나가떨어졌다·
서둘러 창틀에 한 발을 올리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체공 상태에서 몸을 질풍처럼 뒤집은 이을룡은 일장 아래의 지붕에 무사히 착지한 상태였다·
그리고 다시 마당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이을룡이 착지했다가 떠난 자리에서 붉은 핏자국이 보였다·
내상을 입은 것이다·
구천홍염장에 당했으니 지금쯤 내장이 지글지글 익는 듯한 고통이 느껴질 것이다·
그나마 내공을 삼십 년 정도로만 담아냈기에 이 정도였다·
작정하고 떨쳤다면 나는 지금 지붕에 대자로 뻗은 이을룡의 시체를 보고 있었어야 한다·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나는 창문을 훌쩍 뛰어넘었다·
이어 일 층 전각의 지붕을 밟은 다음 다시 이을룡이 사라진 마당으로 뛰어내렸다·
호위를 위해 대기 중이던 표사 십여 명이 이을룡을 에워싸고 있었다·
한데 갑자기 살벌한 용모와 건장한 체격을 지닌 칼잡이들이 속속 날아들었다·
이을룡에게 고용되어 인근의 다른 여곽에서 잠을 자고 있던 흑도들이 소란을 알아차리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잠시 후 그 숫자가 무려 서른여 명에 이르렀다·
남겨진 표사들까지 합하면 혼자서 사십여 명을 상대해야 한다·
작심하고 싸우면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러려면 나도 진짜 실력을 드러내야 한다·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한데 이을룡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성동격서다· 표사들을 전부 불러들여라!”
슈슈우욱 펑! 펑!
폭죽이 두 발이 각각 삼십여 장과 사십여 높이까지 숫구쳤다가 불꽃을 뿌리며 터졌다·
가까운 곳에서 작전 중인 표사들에게 귀환 명령이 떨어졌음을 알리는 폭죽이었다·
화살을 쏘고 창을 던진 후 도망친 흑도들을 추적하던 표사 사십여 명이 반 각도 안 되어 전부 귀환할 것이다·
천룡표국의 표사들은 어중이떠중이 흑도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특히 이을룡이 이번에 동원한 표사들은 죄다 일류급이었다·
혼자 어지간한 흑도 십여 명쯤은 가뿐히 상대하고도 남을 고수들이었다·
표사들이 전부 몰려온다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혼자서 전부 감당할 수 없었다·
이을룡이 어금니를 깨물며 내게 말했다·
“네 놈이 감히 누굴 건드렸는지 이제 알겠느냐?”
그때였다·
슈슈슉 펑! 펑! 펑!
내 뒤쪽으로부터 세 발의 폭죽이 차례로 숫구쳐 밤하늘을 수놓았다·
다만 앞선 두 발과 달리 마지막 한 발은 서쪽을 향해 비스듬히 솟구치다 터졌다·
앞선 두 발로 시선을 끌고 세 번째 폭죽으로 방향을 가리키는 천룡표국의 신호였다·
조금 전 복룡당의 표사가 쏘아 올린 두 발의 폭죽과 연결지어 해석할 수 있는 내용은 우리 모두 서쪽으로 가고 있으니 전부 그리로 올 것·
“이게 무슨!”
이을룡을 비롯해 표사들 모두 눈이 동그래졌다·
잠시 후 이웃한 전각의 지붕으로부터 검은 야행복에 복면을 뒤집어쓴 괴인들이 휙휙 날아와서는 내 주변으로 떨어졌다·
숫자는 모두 열다섯 명·
나는 저들이 누구인지 단숨에 알아차렸다·
독고완 탁중로 호리독사 남궁소소 서호삼견 그리고 양홍경을 비롯한 해남파의 제자들이었다·
머릿속으로 남궁소소의 전음이 들려왔다·
[밤중에 왜 갑자기 혼자 쳐들어와서 형님에게 칼을 겨누는지는 묻지 않겠어요· 하지만 우리가 당주님의 표사들이라는 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해남파의 제자들은?]
[장문인께서 당주님을 도와주라고 명하셨어요·]
[지금 어디에 계시오?]
[염려 마세요· 하오문 분타주와 함께 계시니까·]
[혹시 폭죽을 쓸 생각을 한 사람이?]
[장문인의 계획이었어요· 폭죽이 솟구치는 걸 보고 저게 무슨 신호냐고 독고완에게 묻더니 귀환 명령을 알리는 거라고 대답하자 바로 역공을 제안하더라고요·]
[···!]
한편 폭죽으로 자신들의 명령 전달 체계를 단번에 허물어뜨려버린 데 이어 복면을 쓴 지원군까지 열다섯이나 나타나자 이을룡은 매우 당혹스러워했다·
나는 조용히 뇌까렸다·
“시작하지·”
“전쟁이다!”
“눈알을 파주마!”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내 뒤쪽으로부터 세 개의 신형이 쏜살처럼 튀어 나갔다·
딱 봐도 서호삼견이었다·
우렁찬 일갈로 기선을 제압하려 한 두 사람은 이견과 삼견이었고·
호리독사를 비롯한 내 표사들과 해남파의 제자들도 뒤를 이었다·
이에 대응하여 여강의 흑도들과 복룡당의 표사들이 마주 달려오면서 한바탕 난전이 벌어졌다·
앞쪽에서 전선을 유지하고 있던 흑도들은 서호삼견이나 내 표사들 그리고 해남파 제자들의 상대가 애초부터 되질 않았다·
무엇보다 타성에서 온 임시 고용주를 위해 죽기 살기로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몇 번 칼을 부딪쳐 본 흑도들은 상대의 실력을 깨닫고는 몸을 사리기 바빴다·
내 쪽의 사람들 역시 저들의 손발을 묶기만 하면 그뿐 여곽을 피로 물들이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덕분에 어느 순간부턴 팽팽해 보이도록 하면서 접전만 이어질 뿐이었다·
하지만 한 사람은 예외였다·
성난 들소처럼 적진으로 뛰어든 나는 흑도 다섯을 단숨에 때려눕히고 전진했다·
그리고 마침내 육검진을 펼치며 이을룡을 호위하고 있는 복룡당의 표사들과 맞닥뜨렸다·
그때쯤엔 방안에서 내게 일격을 허용했던 표두들도 셋이나 내려와 가세한 상태였다·
깡! 까가강!
뻥! 뻐벙뻥!
퍽! 퍼퍼퍽!
검으로 검을 걷어내고 장법으로 대열 무너뜨리고 권법으로 표사들의 전신을 난타했다·
가공할 속도를 감당하지 못한 표사들은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여긴 저희에게 맡기고 옥룡객점으로 피하십시오!”
마지막까지 이을룡의 앞을 막아서며 외친 사람은 표두 장량기였다·
환생한 이후 처음 표행을 함께 했던 바로 그 표두·
옥룡객점은 큰 형인 이갑룡이 표사들과 함께 머물고 있는 객점으로 이곳에서 이십 리 정도 떨어진 서쪽에 있었다·
여강고성이라는 거대한 전각군을 가운데 두고 동쪽에는 이을룡이 서쪽에는 이갑룡이 표사들을 데리고 포진한 상태에서 누군가를 추적 중이었던 것이다·
“모두 각자도생해 옥룡객점으로 모인다!”
상황의 심각함을 깨달은 이을룡은 마지막 명령을 내린 후 뒤돌아 서쪽으로 신형을 쏘기 시작했다·
그래도 형제랍시고 이럴 때는 형을 찾으려는 모양이었다·
한데 거기까지 혼자 길을 잃지 않고 갈 수나 있으려나?
“너는 내가 상대해····”
뻑!
나는 장량기를 단숨에 때려눕힌 후 전각의 지붕 위로 솟구쳤다·
이어 천금풍의 경공술을 펼치며 전각들의 지붕 위를 바람처럼 달렸다·
이을룡은 내게 들키지 않기 위해 담장이나 전각의 외벽 그늘 속에 몸을 숨긴 채 달렸다·
자신의 무공이 언감생심 내 상대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임기응변의 수를 쓰는 것이다·
이건 확실히 효과가 있어서 놈의 위치를 찾는 데 애를 먹었다·
그럴 땐 질주를 멈추고 모든 공력을 끌어 올려 주변의 소리를 들었다·
그러면 어디선가 일정한 방향으로 달리는 발걸음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왔다·
평소의 이을룡이었다면 발걸음이나 숨소리 모두 완벽하게 숨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상을 입은 탓에 공력의 운용에 한계가 있었다· 나는 그걸 귀신같이 잡아낸 것이고·
미로와 같은 길을 이리저리 꺾으며 달리길 한참 마침내 왼쪽 골목길에서 한참 신형을 쏘고 있는 이을룡의 정수리가 내려다보였다·
나는 매가 사냥감을 낚아채듯 그를 향해 뚝 떨어져 내렸다·
그때였다·
이을룡이 달려가는 속도 그대로 신형을 벼락처럼 뒤집으며 허공의 나를 향해 일검을 휘둘렀다·
“갈!”
천무십검의 번호할룡(顯虎割龍)이라는 초식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떤 경지의 고수였던 이 불의의 역습에 가슴이 벌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이룡이 몸을 뒤집는 순간부터 그가 저 초식을 펼칠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나 또한 수천 번도 더 넘게 수련한 초식이었으니까·
휘웅!
이을룡의 검은 체공 상태에서 가볍게 비튼 내 가슴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갔을 뿐이었다·
땅바닥을 한 바퀴를 구른 이을룡은 번신상마(離身上馬)의 수법으로 날쌔게 솟구치며 운파방광(雲破放光)의 초식으로 바닥에 착지한 나를 빗살처럼 찔러왔다·
순간 검영이 다섯 개로 늘어났다·
흡사 다섯 줄기의 벼락이 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모두 천무십검의 절초였다·
“죽엇!‘
“네가 죽엇!”
깡!
이을룡이 펼치는 검초의 맥을 간단하게 끊어버린 나는 그가 미처 펼치지 못했던 천무십검의 다른 절초들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깡! 까가가강! 깡깡!
내가 이을룡의 검초를 훤히 꿰뚫고 있는 것처럼 이을룡도 나의 검초를 손금처럼 꿰고 있었다·
상대가 갑자기 자신의 검법으로 공격해 오자 대경실색한 이을룡은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모조리 막아냈다·
그러나 내 검의 속도와 위력은 점점 빠르고 강해졌다·
반면 검로를 따라잡지 못한 이을룡은 점점 중심이 무너져갔다·
“지옥에나 가라· 이을룡!”
급기야 내 칼이 그의 왼쪽 허벅지를 사선으로 찢고 배를 수평으로 그은 다음 가슴을 쩍 갈랐다·
마지막에 이르러 칼은 그의 목을 그야말로 벼락처럼 길게 베고 지나갔다·
“끄흐억!”
무자비한 칼질에 온몸을 난자당한 이을룡은 저도 모르게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단말마를 내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벽에 등을 부딪치고는 가까스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죽음의 공포는 무공의 고하를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평생을 군림하며 산 사람일수록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면서 덩달아 죽음에 대한 공포도 커진다·
넋이 나가 버린 이을룡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난자당한 자신의 몸을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몸 어디에서도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황급히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목을 더듬어 보았다·
역시 피는 나지 않았다·
그제야 내가 도신을 반대로 쥐었음을 깨달은 이을룡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버린 것이다·
“죽는 기분이 어때?”
“왜 한번에 죽이지 않은 거지?”
“그럼 방금 한 질문의 대답을 들을 수가 없잖아·”
“죽을 때 죽더라도 누구에게 죽는 지나 알고 죽자고· 대관절 누구이기에 천무십검의 초식들을 전부 알고 있는 건가?”
“왜 죽이려는 지를 더 궁금해 해야 하지 않나?”
“정체를 알면 이유도 자연히 알게 되겠지·”
“그것도 그렇군·”
나는 달빛 아래에서 쓰고 있던 복면을 천천히 벗었다·
순간 소스라치게 놀란 이을룡의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너는!”
“이제 이유를 알겠어?”
“네가 대체 왜!”
“보면 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을룡은 말도 못 하고 입술을 파르르 떨기만 했다·
지금의 상황이 도무지 이해도 안 되고 받아들여지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주저 앉은 이을룡의 가랑이 사이에다 나무로 만든 호패 하나를 툭 던졌다·
떨리는 손으로 호패를 집어 든 이을룡의 표정이 또다시 와락 일그러졌다·
“이름은 추대랑· 자강상단의 뇌주분타주· 자강상단주로부터 명령을 받고 해남도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전서구를 통해 너에게 보고한 자· 맞나?”
“이걸 왜 네가····”
“내 손으로 죽였으니까·”
“어째서?”
“뇌주반도의 흑도들에게 표사들을 모조리 죽이고 초옥을 불태워 버리라는 사주를 한 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더군· 사로잡아서 누구의 지시를 받았냐고 물었더니 자결을 시도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깨끗하게 숨통을 끊어줬지·”
“···!”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는 걸 보니 너도 짐작이 가는 내용인가 보지? 그럼 내가 널 죽이려는 이유도 설명할 필요가 없겠군·”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닥쳐!”
“···?”
“나를 건드리는 것까진 얼마든지 상대해 주었다· 하지만 내 주변 사람들까지 죽이려고 한 것은 용서할 수 없어· 특히 남궁소소는·”
“남궁소소도 알고 있나?”
“실패를 하고 보니 뒤늦게 너희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슬슬 감이 오는 모양이지?”
이을룡이 꽉 깨문 입술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비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불과 이년 전까지만 해도 안중에도 없었던 나에게 십초지적으로 패한 것도 모자라 제거를 하려다 들키기까지 했으니·
그가 갑자기 말문이 막힌 이유도 자신이 아니면 외가의 누군가라도 시켰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엄청난 일을 일개 분타주 따위가 독단적으로 처리했다고는 누구라도 믿기 어려웠다·
“불쌍한 척 말고 고개나 들어·”
“정말 날 죽일 셈이냐?”
쓰앙!
나는 두 번도 망설이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
이을룡의 전신이 한순간 통나무처럼 빳빳하게 경직되었다·
눈을 질끈 감고 어금니를 꽉 깨문 그의 모습에서 죽음의 공포가 생생하게 전해졌다·
하지만 목이 떨어지는 대신 상투가 툭 떨어지면서 머리카락이 산발로 흘러내렸다·
“지금 이 순간의 더러운 기분을 두개골 속에 깊숙이 새겨 두어라· 그리고 다시 한번 내 주변 사람들을 죽이려 했다간 지시한 자를 끝까지 찾아내 오장육부를 찢어 놓을 거야· 그게 너든 너의 외조부든 친모든 가리지 않고· 너도 내가 미친놈이라는 것 정도는 이제 알고 있겠지?”
할 말을 모두 끝낸 나는 묻지도 않은 피를 털어 낸 후 칼을 갈무리했다·
그리고 돌아서 걸으려는 찰나 이을룡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 일은····”
“남궁소소는 아직 모른다· 네가 떠들고 다니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이 알 일도 없겠지· 하지만 다시 바보같은 짓을 시도한다면 그땐 다 같이 죽는 거야·”
“아버지께 고하면 넌 나를 후계 경쟁에서 완전히 제거해 버릴 수 있다· 이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야·”
“난 너를 한 번도 경쟁자로 생각한 적이 없어·”
“···!”
이제야말로 볼일을 전부 끝낸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여강고성의 서쪽 하늘에서 난데없는 폭죽 한 발이 무려 오십여 장까지 솟구쳐 올랐다·
슈우우욱 펑!
나도 이을룡도 두 눈을 부릅떴다·
저건 천룡표국에서 목표로 하는 무언가를 찾았을 때 인근에 있는 모든 표사들에게 위치를 알리는 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