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 표행을 이어 받다(3) >
천룡표국을 나오자 마자 세 형님들은 대규모의 표행단을 이끌고 곧장 서쪽으로 말을 달렸다·
점창산은 운남성에 있었고 운남성은 대륙의 서쪽 끝에 위치했기 때문이었다·
유성표 한백경이 건너려다 죽임을 당했다는 금사강은 두말할 것도 없고·
그러니까 나중에는 각각의 목적지를 찾아 갈라질지언정 일단은 모두가 같은 방향이었던 것이다·
나는 동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이는 운남성과는 정반대 방향이었다·
독고완 탁중로 남궁소소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서호삼견은 내가 어느 방향으로 길을 잡는지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그저 호리독사를 붙잡고 남만에서 한몫을 잡았다는 게 사실이냐는 둥 그래서 인당 얼마씩 챙겼냐는 둥 돈 되는 표행에는 왜 꼭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냐는 둥의 소리들만 하고 있었다·
남궁소소가 물었다·
“우린 왜 동쪽으로 가요?”
“전단강 하구로 가서 배를 탈 거요·”
“혹시 바다를 통해 해남도로 갈 생각인가요?”
“그렇소·”
“왜요?”
“사건이 복잡할 때는 실마리를 찾아서 잡아당기며 따라가는 것이 느려 보여도 가장 빨리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니까·”
“그건 너무 거슬러 올라가는 거 아닌가요? 의도는 알겠지만 설령 해남도에서 실마리를 찾는다고 해도 사라진 표물의 행방을 쫓아 금사강까지 다시 북상하려면 최소 보름은 걸릴 거예요·”
“행방도 행방이지만 최종 목적지를 알아야 하오· 표물을 찾아 수취인에게 전달하는 것까지가 전위표의 완성이니까·”
“그동안 형님들께서 표물을 찾아 손에 넣기라도 하면요? 그럼 경쟁을 해볼 것도 없이 그냥 끝나버리는 거예요· 형님들에게서 표물을 훔치거나 빼앗을 게 아니라면·”
“상대는 유성표를 죽인 고수요· 형님들이 표물의 행방을 알아낼 수는 있어도 그리 쉽게 손에 넣을 수는 없을 것이오· 그랬다면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았겠지·”
결국 내가 원하는 건 표물은 무엇이며 누구에게 전달하려 했는가였다·
이 두 가지를 알면 자연스럽게 유성표를 죽이고 표물을 빼앗아간 자를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러려면 먼저 표주를 찾아야 한다· 그 표주는 지금 해남도에 있었고·
한참을 가다보니 눈앞에 바다와 맞닿은 드넓은 전당강 하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한 가운데서 여덟 개의 돛을 거느리고 두 개의 커다란 뿔이 달린 범선 한 척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저건 또 뭐야?”
“범선 같은데요·”
“무슨 범선이 저렇게 빨라· 모양은 또 왜 저렇고?”
“혹시 소문으로 한참 떠돌고 있는 그 범선이 아닐까요?”
“소문?”
“장강십팔탄을 거슬러 올랐다는 천룡표국의 범선들 말입니다·”
이견과 삼견의 대화였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서호삼견 전부가 나를 돌아보았다·
저 범선이 자신들이 짐작하는 그 범선이 맞는지 맞다면 범선을 타고 해남도로 갈 것인지 묻는 것이다·
대답은 남궁소소가 대신 했다·
“쌍각선 갑호군요”
***
닷새 전 표왕부에서의 회동이 있고 난 후 나는 급하게 무한 분타로 전서구를 날려 범선 한 척을 수배했다·
해남도까지 가장 빨리 가는 길은 항주에서 배를 타고 바닷길을 통하는 것이었고 대륙을 통틀어 가장 빠른 배 일곱 척을 내가 소유하고 있었으니까·
다행히 마지막 미곡 운송분을 잔뜩 싣고 항주로 출발한 범선이 한 척 있었다·
공교롭게도 가장 노련한 황해노경이 부리는 쌍각선 갑호였다·
미곡들을 내리기가 무섭게 범선은 서둘러 보급품들을 싣고 다시 바다로 나갔다·
남궁소소가 황해노경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최대한 서둘러 달라고 졸라댔기 때문이다·
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 황해노경은 바다로 나간 후에도 해남도가 있는 서쪽이 아니라 계속해서 동쪽으로만 항해했다·
아침에 출발해 해 질 무렵이 되자 아예 육지가 보이질 않았다·
이견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황해노경에게 물었다·
“혹시 목적지를 조선으로 알고 계신 건 아니시지요?”
“해남도라고 들었소이다만·”
“한데 어찌 한나절 내내 동쪽으로만 가시는 겁니까?”
이견의 말에 다시 한번 물을 살핀 황해노경이 이만하면 되었다는 듯 갑판장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갑판장이 선원들에게 고함을 지르며 명령을 전달했다·
수십 명의 선원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돛의 방향을 바꾸었다·
동시에 선미의 상갑판에서는 황해노경이 키를 천천히 꺾기 시작했다·
범선은 한참이 걸려서 해남도가 있는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자 돛이 부푼 정도는 큰 차이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범선의 속도가 갑자기 두 배 가까이 빨라졌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해류를 탔기 때문입니다·”
“해류라고요?”
“지금 남서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해류는 장강삼협의 물살 못지않게 빠릅니다· 다만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뿐이지요·”
“놀랍기 그지없군요·”
“계속 동쪽으로 항해를 한 것은 그게 해류를 타는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이 계절에 해류가 바뀌는 일은 거의 없으니 바람이 이 정도로만 불어준다면 열흘 후쯤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작 열흘 후면 해남도에 닿을 거라는 말에 서호삼견은 물론이거니와 남궁소소까지도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 형들이 외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중간중간 말을 갈아타면서 거의 쉬지 않고 달려도 운남성까지 이십 일은 족히 걸릴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내가 해남도를 거쳐서 다시 북상한다고 해도 남궁소소가 우려했던 것과 달리 오일 정도의 차이밖에 나지 않게 된다·
사람들은 쌍각선의 위력에 매우 고무된 듯했다·
이 모든 걸 계획하고 실행한 나는 괜스레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일견이 내게 말했다·
“이제 슬슬 돈 얘기를 시작해 볼거나?”
남궁소소도 얼른 숟가락을 얹었다·
“나도요·”
호리독사도 끼어들었다·
“저는 돈보다 조건을 하나 걸고 싶습니다·”
***
바다를 항해한 지 꼭 열흘이 되었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사흘 전부터 안개가 걷히질 않아 제대로 가고 있는지 여기가 어디쯤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황해노경은 밤낮으로 하늘과 바다와 바람을 살폈고 우리는 그런 황해노경의 입만 열심히 바라보았다·
오늘도 아침을 먹자마자 갑판으로 나와 보니 서호삼견이 난간에 기대어 서서 무슨 낌새가 없나 하고 상갑판에 있는 황해노경의 눈치를 살피는 중이었다·
나는 세 사람의 곁으로 다가가 나경으로 방향을 가늠한 다음 십리경을 뽑아 눈에 붙이고 가만히 안갯속을 살폈다·
이견이 말했다·
“헛수고일세·”
“그래도요·”
“젊은 친구가 인내심이 많군·”
“선배님들께선 많이 지루하십니까?”
“바다조차 사라지고 나니 꼭 뇌옥에 갇힌 것처럼 답답하군· 그나마 매일 은전 두 냥씩 일당이 쌓이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견디고 있다네·”
“한 냥입니다·”
“성공보수로 받을 금전 열 냥도 기대되고·”
“은전입니다·”
“일당은 그렇다 쳐도 성공보수로 은전 열 냥은 너무 하는 거 아닌가? 천하의 유성표가 죽은 걸 보면 우리도 목숨을 걸어야 할 판인데·”
“돈 얘기는 범선을 타기 전에 하셨어야죠·”
“그러면 안 데리고 갔겠지·”
“그건 그렇지만요·”
“예전엔 금전으로 잘도 챙겨주더니만·”
“그땐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요·”
“사람이 변했군·”
“상황이 변했죠·”
“남궁소소랑은 잘 사귀고 있나?”
깜짝 놀란 나는 황급히 눈에서 십리경을 떼고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근처에는 우리 넷 말고 아무도 없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어젯밤 호리독사한테 다 들었네· 남만 표행 중에는 등에 가랑잎을 잔뜩 묻히고 나란히 숲에서 나오는 것도 보았다던데·”
“그 정도까지는 아닙니다!”
나도 모르게 살짝 언성을 높였다·
순간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일견과 삼견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이견은 씨익 웃더니 두 사람을 향해 한 손을 척 내밀면서 말했다·
“거봐· 사귀는 게 맞다니까·”
일견과 삼견이 아까워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품속에서 은전 한 냥씩을 꺼내 이견에게 주었다·
천하십대고수인 백포산군까지 찜쪄먹은 나였지만 항주 뒷골목의 노련한 흑도 세 명이 펼쳐 놓은 함정에 어이없이 걸려들고 말았다·
이견이 은전 두 냥을 자신의 전낭에 챙겨 넣으면서 말했다·
“얼마나 됐나?”
“얼마 안 됐습니다·”
“고백은 누가 먼저 했고?”
“제가 먼저 했습니다·”
“남궁소소가 먼저 했군·”
“뭘 보시고요?”
“그냥 느낌일세·”
“그래서 손은 잡아 봤고?”
“아직요·”
“그건 예의가 아니지·”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니고요?”
“왕년에 유흥가에서 돈 좀 뿌렸다기에 화화공자인줄 알았더니만 이제 보니 순 맹탕일세· 만약 내가 그렇게 예쁜 여자에게서 고백을 받는다면 당장 입부터 맞췄을 걸세· 그런 다음 이름이랑 어디에 사는지도 물어보고· 남녀 사이의 어느 순간들에는 대화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는 법이거든·”
듣고 있던 삼견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예쁘고 안 예쁘고를 떠나 둘째 형님이 여자한테 고백을 받을 일은 없을 겁니다· 칼침을 받으면 또 모를까·”
“거기서 칼침이 왜 나와?”
“그만큼 말이 안 된다는 소리죠·”
“그래서 내가 만약이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그 만약이 말이 안 된다고요·”
은전 한 냥을 날로 빼앗겨서 그런지 삼견이 평소와 달리 오늘은 좀 끈질기게 이견을 물고 늘어졌다·
약이 바짝 오른 이견이 무언가 반격을 하려는 찰나 남궁소소가 갑판으로 쑥 올라왔다·
뒤에는 호리독사와 독고완과 탁중로가 차례로 따랐다·
탁중로는 번견 세 마리의 목줄을 잡고 있었다·
아무래도 갑판에서 산책을 시켜줄 모양이었다·
일견이 서둘러 화제를 돌리며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해남도에 내린 다음에는 어디로 갈 것인가? 설마하니 무작정 유성표에게 표행을 맡긴 사람을 수소문하고 다니진 않겠지?”
“단서를 근거로 실마리를 찾아야지요·”
“단서?”
때마침 옆으로 온 남궁소소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국주님께서 유성표의 유품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을 때 가장 마지막에 전낭을 선택했다던데 사실인가요?”
“그렇소·”
“뭔가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요·”
“전낭에는 표주가 지불한 의뢰비가 있을 테니까· 명표가 목숨 걸고 하는 표행은 일단 금전 일천 냥부터 시작하는 것이 관례고·”
“금전 일천 냥 때문에 전낭을 선택했다고요?”
“그렇소·”
남궁소소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탁중로와 독고완도 비슷한 생각인 것 같았다·
반면에 서호삼견은 깜짝 놀란 얼굴들을 했다·
“뭐라고?”
“금전 일천 냥?”
“표행 한 번에 그렇게나 많이 받나?”
호리독사가 그게 다 목숨값이라고 비명횡사한 유성표를 한번 보라고 인생은 가는 똥 누면서 길게 사는 게 최고라는 말을 열심히 설파했다·
남궁소소가 다시 말했다·
“형님들이라고 전낭에 돈이 있는 줄 왜 몰랐겠어요· 하지만 보다 더 큰 꿈을 위해 단서가 될만한 걸 선택한 거라고요· 갑룡 형님은 흉수를 추적하기 위해 검흔이 남아 있는 행낭을 을룡 형님은 목격자를 찾기 위해 독특한 모양의 부싯쇠를 병룡 형님은 유성표의 동선을 알아내기 위해 지도를·”
“형님들이 유성표의 흔적을 쫓을 때 나는 표주의 흔적을 쫓았을 뿐이오· 유성표의 유품에서 표주가 준 것이라곤 전낭 속에 든 돈이 유일했으니까·”
“무려 금전 일천 냥이고요·”
“금전 일천 냥이면 말 그대로 금덩어리가 천 개인데 그게 작은 전낭 안에 다 들어갈 리가 없소· 해서 전표가 있을 거라 생각했소· 그 전표를 발행한 전장으로 가서 전주를 찾는 것이 내 계획이었소· 전주가 곧 표주일 테니까·”
남궁소소 탁중로 독고완이 동시에 두 눈을 부릅떴다·
호리독사와 서호삼견도 잡담을 멈추고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남궁소소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흉수가 가져가지 않았을까요?”
“평범한 강도라면 유성표가 당했을 리 없고 무림의 고수라면 명성과 자긍심 때문에라도 전표에는 손을 대지 않았을 거라는 게 내 판단이오·”
“추적의 단서가 될까봐 없앴을 거라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요?”
“그랬다면 검흔이 남아 있는 행낭을 비롯해 안에 있는 물건들까지 전부 감추었겠지· 짐작하건대 그는 행낭을 건드리는 것 자체를 정당하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소·”
“혹시 다른 근거가 더 있나요?”
“목리극의 말에 따르면 누군가 거지 아이를 시켜 모처로 가보라는 연락을 하오문에 취해왔고 그 장소에 가보니 유성표의 주검이 짐승들에게 먹히지 않도록 높은 바위 위에 올려져 있었다고 하오·”
“죽이긴 했어도 그를 매우 존중했군요· 희한한 사람이네요·”
“확실히 일반적이진 않은 상황이지·”
“그래서 전장이 어디죠?”
“알 수가 없소·”
“왜요?”
“전표가 없었으니까·”
“그럼 뭐가 들어 있었는데요?”
“은전 아홉 개와 동전 한 뭉치·”
“예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전낭에다 전표를 넣어 다니는 사람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소· 보통은 품속에 넣고 다니지·”
“이야기가 왜 갑자기 그렇게 진행돼요?”
사람들은 맥이 탁 풀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남궁소소는 약이 바짝 올라서 얼굴이 빨개졌다·
“내 생각에 동전은 원래부터 있었고 은전 아홉 냥이 유성표가 받은 표행비의 전부인 것 같소· 다섯 냥도 아니고 열 냥도 아니고 딱 아홉 냥인 것은 표주가 전 재산을 싹싹 끌어모아서 의뢰를 했다는 뜻이고 유성표 역시 돈 때문에 표행을 한 게 아닐 확률이 높소· 그리고····”
풀어졌던 긴장감이 다시 팽팽하게 조여졌다·
“···그 은전은 내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소· 흔하지 않은 물건이니 생각보다 쉽게 주인을 찾을지도 모르오·”
그때였다·
주돛의 꼭대기에 올라 전방을 살피던 어린 선원 하나가 목구멍이 찢어지도록 고함을 질렀다·
”섬이다!“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앞쪽을 바라보았다·
과연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거대한 육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엔 약속이나 한 듯 모두가 상갑판에서 키를 잡고 있는 황해노경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아직은 무슨 섬인지 모른다·
황해노경이 해남도라고 해야 진짜 해남도가 되는 것이다·
이윽고 황해노경이 말했다·
”해남도가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