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 표행을 이어받다(1) >
예정에도 없던 범선 다섯 척의 등장으로 천룡표국의 전력이 총 동원되다시피 한 미곡 운송일은 예년에 비해 한 달이나 더 늘어났다·
하지만 그것도 거의 마무리 되고 있었다·
그 사이 천룡표국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고 비룡당은 더욱 체계화되었다·
가을을 지나 겨울로 접어드는 어느 날 저녁이었다·
종일토록 이어진 무공수련을 마친 나는 비룡당의 수뇌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집무실로 가는 중이었다·
지금은 객당으로 쓰고 있는 옛 집무실을 지날 때 반대 편에서 웬 젊고 낯선 여자 대여섯 명이 객당 마당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한 명은 사십 중반쯤 될 것 같고 나머지 다섯 명은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쯤 될 것 같았다·
젊은 여자들은 다들 한껏 차려 입은데다 엷게 화장까지 한 것이 봄꽃처럼 싱그러웠다·
누군지 말 안 해도 알 것 같았다·
일전에 매파들이 후원 우물가 그늘의 탁자에서 표사들을 만나고 돌아가는 걸 듣고 옛 집무실을 객당으로 쓰도록 허락한 바 있었다·
그러니까 저 중년의 여자는 매파이고 나머지 젊은 여자들은 표사들에게 맞선을 보여 주었거나 혹은 보여 주려는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매파는 비룡당을 찾은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닌지 젊은 여자들에게 주변에 보이는 여러 가지 경물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었다·
“저기 보이는 삼 층짜리 전각이 비룡당의 표사들이 머무는 곳이고· 그 옆에 있는 쌍둥이 전각은 쟁자수들이 머무는 곳이야·”
“전각들이 굉장히 크군요·”
“각각 오십 명과 백 명씩 머무는 곳이니까· 그리고 저기 말과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개활지가 바로 비룡당주님께서 지부대인으로부터 향시와 회시의 장원급제 교지를 받았던 장소이지·”
“그 유명한 대마장이 저곳이구나·”
“저기 저 대숲 사이로 보이는 작은 전각은 뭐죠?”
“거긴 비룡당주님의 거처이지·”
“지금도 저기 계실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
“저쪽으로도 가보면 안 되나요?”
“그건 안 돼!”
“아이 깜짝이야·”
“거듭 말하지만 우리에게 허락된 곳은 저 새끼줄이 처져 있는 곳까지야· 그 밖으로 나가면 안전을 장담할 수 없어· 천룡표국도 무림문파의 한 곳이라는 걸 다들 잊어선 안 돼·”
여자들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매파들이 표사들을 만나러 객당을 왔다 갔다 한다는 건 알았지만 맞선의 당사자들도 온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던 터라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 여자들이 뒤늦게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나를 발견하고 살짝 경직되었다·
나는 방해를 하지 않기 위해 매파에게만 살짝 묵례를 하고 조용히 지나가려 했다·
한데 매파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잠깐만요·”
“예?”
“혹시 비룡당의 표사님이신가요?”
“그렇습니다·”
“못 보던 표사님이신데····”
“피차일반입니다만·”
매파는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선 나를 아래위로 두어 차례 훑더니 말했다·
“비룡당에 이렇게 인물이 출중한 표사님이 계신 줄은 몰랐네· 신입이신가 보다· 요즘 천룡표국 비룡당의 표사 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하던데 실력이 대단하신가 봐요·”
“제가 표사질은 좀 합니다·”
“그래 장가는 가셨고요?”
“아직 못 갔습니다·”
“그래요?”
미혼이라는 말에 함께 온 젊은 여자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나를 힐끔거렸다·
매파가 다시 물었다·
“올해 몇인가요? 양친은 모두 생존해 계시고요? 부친께선 무슨 일을 하시나요? 학문은 어디까지 익히셨으려나· 혹시 우리가 알만한 무림문파나 무관의 제자이신가요?”
나는 그제야 매파가 나를 불러 세운 이유를 알았다·
덧붙여 그녀의 질문을 들으며 전생에서 내가 얼마나 악조건이었는지도 적나라하게 알 것 같았다·
만약 전생에서 내가 저런 질문을 받았다면 단 하나도 대답을 못 했을 것 같다·
그렇다고 지금이라고 해서 솔직히 말해 줄 수도 없었다·
그건 다른 표사와 쟁자수들에게 그야말로 반칙이 될테니까·
그때 삼각의 각주 왕삼표가 젊고 반반하게 생긴 쟁자수 다섯 명을 이끌고 여자들의 뒤쪽에서 나타났다·
그들 중에는 전생에서 나와 비슷하게 천룡표국으로 들어온 방자광과 일전에 벽안귀의 용모파기를 그려준 위소방도 있었다·
왕삼표는 먼저 매파와 여자들에게 아는 척을 하려 했다·
그러다 여자들에게 가려져 있던 나를 뒤늦게 발견하고는 반색하며 말했다·
“어 당····”
[아는 척하지 마!]
“···신은 누구세요?”
이런 답답한 인사를 봤나·
아는 척을 하지 말랬지 누가 모르는 사람인 척을 하라고 그랬나·
‘가만 그게 같은 말인가?’
아무튼 매파와 여자들은 어리둥절해 했고 왕삼표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눈알을 이쪽저쪽으로 열심히 굴려대며 눈치만 살폈다·
내가 매파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는 찰나·
“당주님 나오셨습니까?”
익숙한 음성과 함께 내 뒤쪽에서 나타난 사람은 가불염이었다·
가불염은 곁으로 오더니 매파와 잘 아는 사이인 듯 ‘자주 뵙는군요·’라고 했다·
이어 나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지례까지 올리며 다시 말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당주님·”
“가 표두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아무 일 없었지요·”
“예?”
매파와 다섯 명의 여자들은 소스라치게 놀라서는 그대로 석상이 되어 버렸다·
특히 조용히 지나가는 나를 불러세워 놓고 부친은 무슨 일을 하시냐는 둥 꼬치꼬치 캐물은 매파는 사색이 되어 어깨를 달달 떨고 있었다·
가불염에게 말했다·
“객당에 이렇게 많은 소저들께서 출입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매파들 말이 표사와 쟁자수들이 일하는 환경을 보고 싶어 하는 소저들이 많다고 합니다· 해서 접객당의 협조를 구해 한 달에 하루 정해 놓은 구간으로만 들어오고 나가는 조건으로 허락해 주었습니다·”
“쟁자수들요?”
“비룡당의 늙은 쟁자수 하나가 얼마 전에 평생 고생만 한 처(妻)에게 작은 포목점을 하나 차려 준 일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쟁자수에 대한 항주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당주를 잘만 만나면 몸은 고돼도 돈벌이는 꽤 쏠쏠하다고요·”
나는 그제야 왕삼표가 직접 쟁자수들을 다섯이나 이끌고 나타난 이유를 알았다·
“한데 사람들이 천룡표국의 장원이 어떻게 생겼는지 많이 궁금해 합니까?”
“우리야 늘 보는 풍경이지만 외부인들에게 천룡표국의 드넓은 장원과 수백 명의 표사와 쟁자수들이 일사불란하게 일하는 모습은 진귀한 구경거리지요· 심지어 천룡표국의 식당 밥이 항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별미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하면 가 표두께서 접객당으로 가서 앞으로 비룡당을 찾는 소저들은 표사나 쟁자수와 동행하는 한 표왕부를 제외한 천룡표국의 경내 어디든 돌아다니며 구경할 수 있도록 허락을 맡아 보세요· 식당 출입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내가 모두 책임지겠다고도 전하시고요·”
“알겠습니다·”
“오늘부터 당장 시행토록 하세요·”
“명을 따르겠습니다·”
가불염과의 대화를 끝낸 나는 아직도 떨고 있는 중년의 매파에게 정중히 포권지례를 하며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좀 전엔 소인이 그만 실수를·”
“천만에요· 오히려 인상적이었습니다·”
“예?”
“한 방면의 전문가라면 모름지기 자신이 하는 일에 그만한 배짱과 열의는 있어야지요· 든든하고 믿음직스럽습니다·”
“정말이십니까?”
“그럼 편안히 볼일 보고 돌아가십시오·”
“가 감사합니다· 당주님·”
***
“지난 넉 달간 천룡표국이 미곡운송으로 벌어들인 돈은 대략 금전 구만 냥에 달합니다· 그중 우리 비룡당의 몫으로 들어 온 건 삼만 냥이 조금 넘고요· 이 모든 게 범선 다섯 척 덕분입니다·”
“정확하게는 범선을 통한 장강 수로의 개척 때문일 겁니다· 강호의 격언에 장강을 지배하는 자가 천하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는데 과연 그 효용이 엄청나군요·”
“저는 그렇게 어려운 얘기들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 장궤께서 한 달에 한 번 수익 얘기를 하실 때마다 살이 떨려서 원· 허허허·”
장궤 전립성 표두 가불염 상자수 용소백이 차례로 한 말이었다·
내가 전립성에게 물었다·
“비룡당의 운영자금은 얼마나 책정하실 겁니까?”
“봄에 책정해둔 금액이 아직도 절반이나 남았습니다· 내년 여름까지는 따로 증액이 필요 없을 듯합니다·”
“하면 이천 냥을 따로 빼서 일천 냥은 쌍각오선단주에게 주시어 비룡표국의 새 식구가 된 선원들을 포상토록 하시고 일천 냥은 가 표두와 의논하시어 기존의 표사와 쟁자수들에게 공헌도를 따져 골고루 포상토록 하세요·”
“일천 냥씩이나요?”
“그렇습니다·”
“선원들이야 그렇다고 쳐도· 현재 비룡당의 인원은 표사와 쟁자수를 모두 합쳐 백오십 명 정도입니다· 단기간의 포상금으로 책정하기에는 너무나 큰 액수입니다· 더구나 미곡운송 일은 다른 표행들과 달리 크게 위험하지도 않았고요·”
“위험하지 않다고 해서 표사와 쟁자수들의 일이 줄어드는 건 아닙니다· 다만 좀 더 안전하고 마음이 편할 뿐이지요· 아까워하지 말고 나눠 주세요·”
“알겠습니다·”
나는 이어 가불염에게도 물었다·
“접객당에 간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당주님께서 협조를 부탁한 일이라고 했더니 마침 근처를 지나던 접객당주님께서 들으시고는 최대한 협조해 주라는 지시를 즉석에서 접객당 전체에 내리셨습니다·”
“잘 됐군요·”
“이 모든 게 비룡당과 당주님의 위세가 높아진 덕분입니다· 비룡당 덕분에 접객당으로 배정되는 예산도 크게 늘었고요·”
전립성이 슬쩍 끼어들면서 한 말이었다·
그러자 가불염이 다시 보탰다·
“장궤님 말씀이 맞습니다· 매파들 말이 선 볼 남자가 표사와 쟁자수들이라고 하면 소저들이 시큰둥하다가도 천룡표국의 비룡당 소속이라고 하면 금세 반응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당연히 좋은 쪽이겠지요?”
“물론이지요·”
“한데 왜 아직도 좋은 소식이 없는 겁니까?”
“그러잖아도 번견잡이 탁중로가 곧 장가를 갈 것 같습니다·”
“독고완이 아니고요?”
“중매라는 게 참 묘하더군요· 독고완을 마음에 들어 하는 소저들이 훨씬 많은데도 불구하고 정작 혼례는 맞선을 딱 두 번밖에 안 본 탁중로가 먼저 하게 생겼으니 말입니다·”
“노모께서 좋아하시겠군요·”
“이를 말씀입니까·”
“그래서 언제쯤 한답니까?”
“해가 가기 전에 새로 얻은 집에서 치를 생각인 것 같습니다· 다만 탁중로는 돈도 돈이지만 식구라곤 노모와 누이밖에 없어 조촐히 치루길 원하는 데 반해 처가 될 소저 쪽은 항주 토박이라 일가친척이 많다 보니 기왕이면 제대로 하길 원하는 모양입니다·”
“비룡당 소속의 표사가 혼인을 하는 건 처음인 것 같군요· 전문가를 불러다 격식을 갖춰 제대로 치르도록 도와 주세요· 혼례에 드는 비용은 얼마가 됐든 전액 비룡당에서 부담하고요· 그리고 비어 있는 친척 몫의 한 자리는 제가 채우겠습니다·”
전립성이 말했다·
“저도 한자리 채우겠습니다·”
용소백도 보탰다·
“혼례식에는 자고로 늙은이가 있어야 모양이 살지요· 저도 한자리 채우겠습니다·”
가불염이 웃으며 말했다·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당주님께서 참석하신다면 탁중로도 탁중로지만 그의 처 될 소저와 장인 될 노인이 아주 좋아할 겁니다· 많은 일가친척들 앞에서 크게 위신을 세울 수 있으니까요· 분부대로 빈틈없이 처리하겠습니다·”
“···?”
“왜 그러시는지요?”
“과묵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최근 들어 이상하게 말씀을 많이 하시는 것 같아서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제가 그랬습니까?”
가불염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며 뒤통수를 긁었다·
오히려 옆에 있는 전립성과 용소백은 짐작하는 바가 있는지 피식피식 실웃음을 흘렸다·
전립성이 말했다·
“천룡표국의 비룡당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은 데다 연봉도 동종업계 최고점을 압도적으로 찍어서 그런지 표사와 쟁자수들의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가 표두와 용 노야는 저와 달리 최일선에서 표사와 쟁자수들을 상대하다 보니 감회가 특별할 것입니다·”
옆에서 용소백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가불염도 과연 그런 측면이 있는 것 같다는 듯 따라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인기척과 함께 장삼이 들어왔다·
“표왕부에서 사람이 왔는데 국주님께서 장로회의를 소집하셨답니다· 지금 즉시 하던 일을 멈추고 전부 표왕부로 오시라고요·”
“이렇게 갑자기?”
“이건 소인이 접객당에서 키우고 있는 정보원에게서 들은 말인뎁쇼· 한 시진 전 자신을 하오문의 목리극이라고 밝힌 인물이 찾아와 국주님과의 독대를 신청했답니다· 국주님께서 기꺼이 시간을 내주시어 만나고 돌아갔는데 뜻밖에도 그 시간은 반 각이 채 안 되었고요·”
하오문 사람이 천룡표국을 찾아오는 것도 드문 일이지만 천 개의 눈과 귀를 가졌다고 하는 향주 목리극이 직접 오는 것은 더욱 드문 일이었다·
가장 드문 일은 그가 이종산과의 독대를 요청했다는 것과 그러고도 고작 반 각 만에 돌아갔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경우는 하나밖에 없다·
무언가 아주 중요한 말이나 물건을 전해주고 간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 모르지만 이종산이 서둘러 장로회의를 소집한 걸 보면 매우 심각한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